백도
변백현.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려 잔뜩 힘을 주어봤자 떨리는 걸 감출 순 없던 모양이다. 변백현이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 칼날이 되어 여린 살에 파고 들었다. 천천히 깊숙하게, 더욱 고통스럽게. 비웃음에 음푹 파인 살을 더욱 에듯 열어둔 창문으로 바람이 세차게 불어 들어왔다. 변백현이 속삭이기 시작했다. 경수야, 나랑 자자… 아기를 어르는 듯한 말투와 상반되는 내용의 문장들이 변백현의 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웅웅 울렸다.
안 그래도 큰 눈을 홉뜨고 노려보자 비웃음의 칼날 끝이 또 한 번 나를 향했다. 변백현이 유일하게 잘 하는 것이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노래고 하나는 나를 상처 입혀 절벽 저 아래,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일일 것이다. 그나마 나에게 유일한 위로가 될만한 건 아이들 앞에선 반의 ‘ 분위기 메이커 ’ 라는 별명 속에 자신을 숨기고 가면을 쓰는 변백현이 내 앞에선 그 가면을 철저히 부숴버린다는 것이다. 나에게만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이는 변백현을 생각하다 갑작스레 비식 웃음이 비져 나왔다.
“ 웃겨? ”
변백현의 목소리가 파랗다. 맑은 파란색보다는 찌들어서 탁해진 파란색에 가까운 변백현. 나는 미친 놈처럼 웃어댔다. 웃기냐고? 난 웃겨서 웃는 게 아니다. 변백현이 불쌍해서 웃는거다. 내 관심을 못 받아서 끙끙대며 발악을 하는 변백현이 불쌍해서.
생각해보니 아무리 변백현이 온갖 모진 말로써 나를 나락으로 떨어트린대도 우위를 선점하고 있는 건 나였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갈구하는 것처럼 나의 관심을 갈구하는 변백현이 우습다. 변백현이 나에게 관심을 얻어내고 싶어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날 사랑하니까. 하지만 난 변백현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게 우리의 관계를 이렇게까지 좆 같게 만든 이유였다.
뿌옇게 안개가 낀 것 마냥 우리의 관계는 더욱 흐려졌다. 안개가 낀 관계를 어떻게 헤쳐야 다시 맑아질 지를 고민하다가 금세 관두었다. 이 안개는 내가 변백현을 사랑하게 되거나 변백현이 나를 포기하기 전까진 걷히지 않을테니.
변백현의 사랑이 도를 넘어서고, 변백현에 대한 나의 사랑이 불충분 하여 낳게 된 이 관계의 끝에는 과연 뭐가 있을까. 변백현의 입술이 짐승이 사냥감을 집어 삼킬 때처럼 게걸스럽게 내 입술을 찾아들었다. 어째 오늘은 변백현의 혀에서도 푸른 맛이 나는 것 같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 너는 무엇에 그렇게 슬퍼하고 있는 것일까. 이 물음의 답을 나는 정말로 모르는 것일까.
“ 하아… 응! ”
“ 좋아? 더러운 년. ”
속절 없이 몸이 흔들렸다. 침대 헤드에 머리를 쿵쿵 박아댔지만 그런 것 따위 상관 없다는 듯 더욱 박차를 가하며 박아대는 변백현을 흐린 시야로 바라보다 결국 눈을 감았다. 백, 현아, 넌… 앗! 오늘 파, 란색, 같, 읏! 신음성이 짙게 베어있는 문장들이 뚫린 입으로 마구 마구 흘러 나왔다. 마치 눈물처럼. 듣기 싫다는 듯 푸른 맛의 혀가 다시 한 번 내 입 안을 찾아 들어왔다. 그 후로 살덩이끼리 부딪히는 퍽퍽 소리와 격한 숨소리들만이 방 안을 채웠다.
변백현이 두번째로 사정을 하고나서야 땀에 절은 내 등에 제 몸을 기대왔다. 미끌거리는 두 몸이 겹쳐져 힘겨운 숨만 내뱉었다. 변백현은 자신의 것을 삽입한 채로 나를 돌려 눕혔다. 다시 한 번 입술이 나를 찾아왔다. 여전히 푸른색이다. 변백현의 손 끝이 내 몸을 천천히 훑었다. 나를 자신의 손 끝에 인식시키는 것 마냥. 변백현의 검은 눈동자가 올곧게 나를 향했다. 이번에도 푸르렀다. 오늘의 변백현은 모든 것이 푸르다. 땀에 절은 살을 에듯 열어둔 창문으로 바람이 세차게 불어 들어왔다.
“ 사랑해, 도경수. ”
역시나 변백현은 오늘도 갈구한다. 내 사랑을. 하지만 오늘도 난 변백현을 사랑하지 않는다. 갑작스레 비식 웃음이 비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