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피곤했다. 이제 겨우 정오일 뿐인데도 지쳤다. 육체적으로가 아닌, 정신적으로 말이다. 어쩐지 뻐근한 어깨를 돌리며 지호는 신기한지 주변을 둘러보기 바쁜 경을 응시했다.
“바닥이 되게 반질반질해요. 얼굴까지 비쳐. 거울로 만든 거예요?”
“대리석이다.”
“대리석이요?”
“석회암이 열변성으로 변한… 아니 됐고, 돌 종류다.”
돌도 종류가 있구나. 새로운 사실을 알았는지 경의 얼굴이 학구적으로 빛난다. 평범한 아이라면 화강암, 변성암 정도는 초등학교 6학년 과학시간ㅡ정확히는 1학기 4단원 : 여러 가지 암석ㅡ 때 뗐을 것이다. 적응기만 끝나면 바로 공부를 시켜야겠다고 지호는 다시금 다짐했다. 1년이 되든, 5년이 되든, 10년이 되든 꼭 검정고시만큼은 합격하게 해줄 거다, 라고
“마음에 드는 옷 있으면 말해.”
남성용 의류로 자리를 옮긴 지호가 경에게 말했다. 아주 어린애였다면 하나하나 직접 옷을 골라줬겠지만 그러기에 경의 나이는 반 성인이다. 경은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 수백 벌의 옷에 다소 주눅 든 것 같았지만 곧 호기심 때문인지 옷걸이에 걸린 옷 천을 만지작거렸다.
“꺼내 봐도 되는 거죠?”
“입어도 돼.”
그 말에 경의 얼굴이 환해졌다.
지호는 경이 편안한 마음으로 쇼핑할 수 있게 멀찍이 비켜섰다. 청바지만 무더기로 쌓여있는 매장에서 지호는 시간을 버리는 대신 경의 옷을 고르기로 했다. 치수는 아무래도 28인치… 아니, 경이라면 26인치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보기 안쓰러울 만큼 앙상하게 말랐으니 말이다.
평소에도 지호는 쇼핑을 좋아하는 터라 경에게 어울릴만한 맵시 있는 바지를 찾는 것에 푹 빠져있는데 저쪽에서 여자들이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웬만하면 지호는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는 성미지만 내용이 차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정도였다.
“어머, 어머 저 남자 미쳤나봐!”
“여기가 지 안방이래니? 옷을 홀라당 벗게.”
바바리 맨 같은 건가. 치안이 이렇게 좋은 나라에 요즘에도 그런 변태가 대낮에 당당히 돌아다니나 싶어 지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지호는 손에 들고 있던 바지를 내려놓고 웅성거리는 여자들에게 다가갔다.
“누구…?”
“어디 있습니까?”
“네?”
“당신들이 방금 전까지 말한 그 변태 말입니다.”
코앞에 바짝 얼굴을 들이민 지호가 으르렁 댔다. 맹수 같은 기세에 눌린 여자가 시선을 내리 깔며 뒤쪽으로 손가락질했다. 그 제스처에 지호는 여타의 말도 없이 훽 여자들을 지나쳐 갔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같은 남자로서 넘치는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해결하는, 짐승 같은 놈들이 부끄럽고 역겨웠다. 자신이 한 행동으로 다른 누군가가 어떤 피해를 입고 고통을 받는지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어떻게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할 수 있을까. 지호는 하얗게 질리도록 주먹을 쥐었다. 더구나 여기는 그 피해자 중 하나인 박경이 있었다. 절대로 곱게 넘어가지 않을 거라며 지호는 눈을 형형하게 빛냈다.
“박경?”
그런 지호에게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참 아이러니한 것이었다. 그 변태가 다름 아닌 박경이였던 것이다. 지호는 눈에 힘을 줬다. 잠깐, 경이라고?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지호가 황급히 다가와 경을 벽 쪽으로 밀착시키며 경의 나체를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저의 몸으로 가렸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한가한 덕분에 방금 경이 한 일을 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일이 커지지 않은 건 다행인데 너무나 당혹스럽다.
“뭐가요?”
전혀 모르겠다는 순진한 대꾸에 지호는 삐져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왜 옷을 벗은 거냐.”
“…옷 갈아 입으려구요.”
그제야 경의 손에 들린 새 옷이 눈에 들어왔다. 옷을 갈아입으려면 탈의실에 들어가야……. 왜 그러냐는 듯 의아해하는 경의 눈동자에 지호는 당황스러움을 삭혔다.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 제 잘못이었다. 경은 몸만 큰 어린아이라는 것을. 지호는 어쩌면 지금이라도 알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옷은 탈의실에서 벗어야 해. 사람들이 보는 공공장소에서는 알몸을 보여줘서는 안 되거든.”
“왜요?”
크게 뜬 경의 눈동자에는 정말이지 순수한 궁금증만 있어서 지호는 쉽사리 말문을 뗄 수가 없었다. 법으로 정해져있기 때문에 과다 노출을 할 경우 벌금을 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답변은 왜 길거리에서 알몸 차림이 잘못된 행동인지는 알려주지 않을 것이었다.
“우리의 몸은 소중해서 아무에게나 보여주면 안 돼. 믿을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내 전부를 보이는 거다.”
뜬구름 잡는 말일까 싶어 걱정했지만 경은 잘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씩씩한 경의 대답에 지호는 한숨 돌렸다.
옷을 사는 건 잠시 뒤로 미루고 지호는 경과 함께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로다리아로 왔다. 불고기버거 두개와 콜라 두 잔, 감자튀김 하나를 주문하고 오는데 지호의 눈에 익숙한 뒤통수가 들어왔다.
“표지훈?”
이름을 부르니 상대가 돌아선다. 모델 같이 훤칠한 키에 우윳빛 피부, 약간은 장난스러운 눈동자가 틀림없는 표지훈이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지호는 반가운 낯으로 지훈에게 걸어갔다.
“어, 지호 형?”
여기서 마주칠 줄은 몰랐다는 듯 지훈의 눈동자가 커졌다.
“형 여기서 뭐해? 오늘 학교 개교기념일이라도 된 거야?”
“나 일 년 휴직 냈잖아.”
“맞다맞다 그랬지 참. 내 정신 봐. 사진 공모전 때문에 너무 바빠서 요즘 내 정신이 내 정신이 아냐.”
자세히 보니 지훈의 눈 아래로 다크서클이 그늘처럼 늘어져있다. 제때 면도를 못했는지 까슬까슬하게 올라온 수염을 보며 지호는 지훈이 바쁘다는 말을 실감했다.
“혹시 형 지금 그 애랑 같이 있는 거야?”
‘그 애’가 누구인지 단번에 감 잡았다. 지호는 테이블에 다소곳이 앉아 저를 기다리는 박경을 향해 턱짓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안다더니 경이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려 지호와 그 옆에 있는 지훈을 보았다. 눈도 마주쳤는데 이대로 넘어가기도 뭐해 지호는 지훈을 끌고 와 경의 맞은편에 앉혔다.
“박경. 이쪽은 내 친한 친구이자 동생인 표지훈.”
“많이 들었어. 안녕?”
경은 저의 앞으로 내밀어진 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는 시선에 지호가 경의 손을 잡고 지훈의 손에 가져다 대었다. 지훈은 알겠다는 듯이 씩 웃고 손을 꽉 쥐어줬다.
“악수라는 거야. 친교의 의미로 사람들끼리 하는 인사다.”
“악수…….”
경은 지훈의 손에 잡힌 제 손을 신기하게 보았다. 사람들은 이렇게 인사하는구나.
“저거 빛나요.”
테이블 위에서 울리는 진동벨을 보며 경이 읊조렸다. 지호는 의자에서 일어나며 진동벨을 잡았다. 우리가 주문했던 게 나왔다는 뜻이다. 지호는 간략하게 설명하고 판매대로 몸을 틀었다. 지훈은 멀어지는 지호의 등짝을 뚫어져라 보는 경을 관찰했다. 티브이에서 몇 번 보긴 했는데 역시 실물이 낫구나. 그리고 보기보다 훨씬 더 말랐고.
“지호 형, 그러니까 네 아빠 어때? 잘 해줘?”
“…….”
지호가 사라진 틈을 타 지훈이 경에게 물었다. 경은 예의 그 커다란 눈만 깜빡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무시당한 느낌에 기분이 상했겠지만 지훈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씩 웃었다. 잠깐 뒤를 보니 어느새 지호가 돌아오고 있었다. 그 전에 빨리 해결해야겠다 싶어 지훈은 경에게 상체를 바짝 당기고 소곤소곤 말했다.
“만약에 아빠가 너 괴롭히면 손으로 옆구리를 이렇게 쓸어내려. 거기가 지호 형 약점이거든.”
뭐, 구태여 그곳이 지호의 성감대란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지훈이 장난스럽게 윙크를 하는 것과 동시에 지호가 도착했다. 무슨 꿍꿍이인지 싱글벙글한 지훈의 얼굴에 지호가 인상을 그었다.
“나 없을 때 박경 데리고 장난 쳤냐?”
“아니? 그냥 인사했는데.”
근데 표정이 왜 저래. 지호는 음흉하게 웃는 지훈을 뒤로 두고 경의 몫을 덜어줬다. 포장지를 까서 버거를 경의 손에 쥐어주고 지호는 콜라를 한 모금 마셨다.
“너 바쁘다더니 쇼핑할 시간은 있나봐?”
“전혀. 지금도 생일 선물 사러 쥐어짜서 나온 거야. 곧 지희 생일이잖아.”
“지희 생일?”
지훈은 전혀 몰랐다는 듯 미간을 모으는 지호를 보며 허어, 탄식했다.
“내 생일보다 더 잘 챙겨 주는 형이 웬일이야? 박경 돌보느라 다른 곳에는 신경도 안 쓰나보네. 우리 지희 서운해 하겠다.”
“너, 아직도 집에 안 들어갔지.”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지훈의 몸이 멈칫했다. 살짝 굳었던 얼굴을 펴고 지훈은 딴청부리듯 혓바닥을 내밀었다.
“안 들어간 게 아니라 못 들어간 거야. 생각해보면 나, 지희 없었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어.”
“지희라도 너희 아버지 로펌 물려받아서 다행이지.”
“형, 우리 부모님이라서 내가 더 잘 아는데 아빠는 내가 진짜 죽는다고 해도 이해해주지 않을 거야. 단 하나밖에 없는 풍경을, 오직 그 장소와 시간대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광경을 사진에 담는 게 얼마나 아름답고 거룩한 일인지 아빠는 몰라. 알려고 하지도 않아. 무조건 대학은 법학과, 로스쿨…….”
초조함과 짜증, 실망이 섞인 지훈의 얼굴을 보자 지호의 가슴도 답답해졌다. 진학문제로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가 틀어지는 것이 안타까웠다. 지훈이네 아버지께서 한 발 물러주셨으면 좋겠지만…… 워낙 고집이 있으셔서 쉽진 않을 것 같다. 지호는 경이 훗날 어떤 직업을 선택하든 존중해줄 거라 맹세했다.
“형이랑 나랑만 이야기하니까 경이 심심한가봐.”
지훈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더 이상 민감한 주제로 이야기하는 건 지호도 거북해서 순순히 지훈의 의도에 응했다. 경은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지호와 지훈을 보고 있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기념인데, 뭐 형한테 궁금한 거 없어?”
지훈이 웃으며 엄지손으로 저를 가리켰다. 경은 쪼르륵 콜라를 마시더니 입술을 열었다.
“두 분 서로 알몸 보여줬어요?”
엉? 무슨 말인지 도저히 모르겠어서 지훈이 답을 달라는 얼굴로 지호를 보자, 지호는 손으로 미간을 지그시 눌렀다. 둘의 반응에 뭔가 잘못 말했다는 걸 깨달은 경이 당황스럽다는 듯 덧붙였다.
“서로에게 전부를 보여줄 정도로 사랑하는 줄 알았어요.”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라는 걸, 경만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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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화는 5.5 화입니다! (쉬어가기 비슷한 화..) ①새우깡
항상 덧글 기쁘게 받고 있어요^ㅇ^ 덧글은 작가의 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