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이웃
w.문달
얼굴도 목소리도 뭐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고 이름 석자만 알고서 근 십육년 정도를 자격지심에 빠져 지냈다. 지금은 어느정도 단련되었다만 한때는 강력한 나의 자존감 도둑이었다. 나는 서영호의 바짓단을 주시했다. 내가 튀긴게 분명한 커피의 자국이 동그랗게 남아 있는게 보였다. 1층에서 나와 부딪치고도 매너 있던 남자는 서영호였다. 소음 문제로 괜히 오해 받았던 1209호 남자도 서영호였다. 지하철 2호선에서 치한에게 수모를 겪고 있던 남자도 서영호였다. 열 살 때부터 꾸준하게 나를 짓이기던 사람도 다른 누구도 아닌 서영호였다. 이제는 직장 상사마저 서영호가 됐다. 젠장 맞을 서영호. 지긋지긋한 서영호는 이제 이름뿐이 아닌 실재적인 인격체로 지금처럼 마주보게 됐다. "인턴십 프로세스는 어떻게 돌아가는 지 다들 설명 들으셔서 아실 거라고 믿습니다. 여기 여러분과 마주보고 서 계신 선배님들이 사수가 되어 많은 부분에서 여러분을 도와주실 겁니다. 자, 그러면 서로 인사 나누시고요." 도무지 믿기지 않는 현실에 다들 어색하게나마 다가가 인사를 나누는 중에도 목석처럼 서서는 서영호만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골백번도 만나자마자 그 잘난 상판을 갈겨주겠다고 다짐을 했는데 막상 마주하니 이거야 원 말 한 마디 제대로 붙이면 지푸라기 하나 잡는 거다. 키도 우뚝하니 커서 싸대기 후려치는 건 무슨 점프해도 안 닿겠다. 멘탈이 터져서 별의 별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속으로 뇌까리고 있는데 눈 앞에 손 하나가 왔다갔다 했다. "야." 밑도 끝도 없이 던져진 반말에 냉수마찰을 받은 것처럼 정신이 확 깼다. 아무래도 나는 서영호를 피하지도, 좋은 사수를 만나지도 못한 것 같다. 예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내 사수라는 사람은 서른 중반은 되어보이는, 양 쪽 입꼬리가 확 내려간게 상당히 불만이 많아 보이는 인상파였다. "몸이 되게 뻣뻣하네, 길우린씨?" "아아, 안녕하세요! 길우린 이라고 합니다. " "김미영 대리입니다. 잘 따라와줬으면 좋겠네요." 따라가기 전에 잘 이끌지부터가 의문이었다. 역시 퇴사하고 싶다. 저절로 숙이게 되는 허리가 마음에 안 들었다. 엄마 영호 만나도 인사 못 해. 나 존나 쩌리야. 김미영 대리는 나를 당장에 탕비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서 하는 소리가 참으로 개탄스러웠다. "탕비실을 우린씨의 주 활동지라고 여기고 친숙하게 붙어 있어요. 그 다음으로는 복합기. 복합기 사용은 할 줄 알아요?" "네, 조금.." "우린씨는 다른 것보다 팀원들 당 충전 하게 도와주는거에 신경 써 줘요. 그게 제일 친해지기도 쉽고, 힘 안 들이고 여우같이 일 하며 돈 버는 거니까." 엄마 다음으로 골빈 소리만 골라 하는 사람은 또 간만이었다. 나는 여기 일을 하러 왔는데 왜 남의 피로 덜어주는데 일조하는 헛짓거리나 해야 돼? 말마따나 여우같이 일하는게 그녀 딴에는 좋은 거라 가르친다면 나는 김미영 대리를 절대 사수로 둘 수 없을 것 같았다. 혼란과 충격에 대꾸도 못하고 있는 와중에 김미영 대리와 연령대가 엇비슷해보이는 사원 한 분이 얼굴만 빼꼼 내밀고 말했다. "믹스커피 한 잔만 타줘요~" 이 씨발. 대리씩이나 돼서 김미영 대리는 아직까지 동료 사원의 커피를 간간히 타줬던 것이다. 그 일을 내게 떠넘기려 하는게 그 의도가 뻔히 보였다. 요즘 같은 세상에 아직도 남녀의 일이 균등하지 못하고 여사원이 다방 직원처럼 허드렛일을 하겠어, 드라마도 아니고. 라고 생각했던 나는 직면한 상황이 나의 현실임을 실감하며 울상지었다. "오, 새로 들어온 인턴? 되게 똑부러지게 생겼네." "네. 감사합니다." 아까 믹스 커피를 타달라던 사원에게 김미영 대리 대신 내가 가니 보자마자 처음 꺼낸다는 소리가 그랬다. 아무 생각 없이 감사하다고 말했다가 돌아서서 반말과 외모 평가를 받았다는 것에 기분이 상했다. 똘똘하게 생겼다는 말을 주변 어른들로부터 어릴 때부터 줄곧 듣긴 했지만 다 커서 나이 차도 별로 안 날 것 같은 사람에게 들으니 그다지 칭찬처럼 안 느껴졌다. 김미영 대리를 만나고 나서부터 내 심기가 쭉 뒤틀려 있어 그런 걸지도 모른다. "팁 하나 주자면 우린씨는 같이 들어온 동기들보다 십분은 더 일찍 나와요. 나와서 사내 정돈하는 모습 보이면 상사분들도 좋게 생각하실 거예요." 저는 여기 오래 있을 생각이 없거든요. 딱 8주간의 인턴십만 마치려고 하는데 내가 일주일도 잘 넘길 수 있을련지가 미지수였다. 너무 썩어서. 그저 첫 날이니 무조건 수그리자는 식으로 억지 미소를 지어가며 네~네~ 거리기만 하는 대답봇이 되어 김미영 대리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인턴 일지를 써야하는데 김미영 대리 같은 사수 밑에서 뭘 배우고 느꼈다고 써야할 지 막막했다. 고삼때 쓰던 자소설도 지금보단 훨씬 꾸며내기 좋았겠다. "저는 사수 잘못 만난거 같아요.." 딱히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점심 시간을 같이하게 된 건 나와 같이 들어왔던 남자 동기였다. 이름은 우동환인데 알고보니 나보다 두 살 어렸다. "아, 그 김미영..대리님? 맞죠? 하~ 그 분 인상 되게 강퍅해보이시던데." "보이는게 아니라 그래요. 일지에 뭐라 써야 할 지..동환씨 사수는 좋아요?" "네, 엄청 좋으신 분 같아요,흐흐." 으응, 엄청 좋겠다. 좋으신 분 같다며 눈이 사라지게 웃는데 누구 놀리는 것도 아니고 눈치가 없는 편이겠거니 하며 넘어갔다. 원래는 여자 성비가 더 높은데 이번엔 나와 다른 세 명을 제외하면 죄다 남자였다. 개 중에 흡연자 비율은 더 높았다. 옥상에 따로 흡연 부스가 마련되어 있긴 하지만 얼마나 피워들 대는지 비흡연자 구역에 있는 우리까지 매캐한 담배 냄새를 맡으며 있었다. 저절로 얼굴이 구겨졌다. "그나저나 부서장님 진짜 멋지시지 않아요? 전 처음에 무슨 모델인 줄 알았어요. 키도 커가지고. 근데 유학파 엘리트에 젊은 나이에 승진도 쾌속이고, 일도 잘 하고, 성격도 좋대요. 인기도 많아 보이던데 부럽다." "동환씨 그런 얘기는 어디서 다 듣고 와요? 나랑 오늘 같이 여기 처음 들어왔으면서." "헤헤, 그야 뭐..제가 호기심이 많아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듣는게 많거든요. 그래서 저 별명도 생생 정보통이었어요!" "엄..TMI 담당이구나 하하." "그게 뭐예요? 신기술 같은거예요?" 나보다 젊은 사람이 TMI를 모른다니 그럴 수도 있지, 나는 그게 그거라며 어리둥절해 하는 동환씨의 등을 두들겨주었다. 점심 시간이 거의 끝나기 전 화장실을 들린다고 동환씨를 먼저 보냈다. 볼 일을 보러 다급하게 뛰듯이 걷는데 뒤에서 우린씨- 하며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안녕하세요." "원더우먼 이름을 드디어 알게 되네." "하하..네." "김미영 대리는어때요? 남자 사수는 불편할 것 같아서 일부러 그렇게 붙였는데. 우린씨한테 잘 해주죠?" "그..뭐, 네!" 그가 말하는 동시에 내게서 시선은 떼지 않으려 하면서 자판기에서 코코아를 뽑아 건넸다. 나는 그에게서 컵을 받아들며 살짝 허리를 숙여 고맙다고 말했다. "우린씨 이름 약간,뭐라고 하죠? 말장난? 그거 하고 싶게 만드는데 아직 안 친하니까 참아야겠죠." "제 이름이요? 발음하기 어렵긴한데 말장난 할 게 없는데." 슬슬 몸이 꼬이기 시작한다. 대만 비행기부터 시작해서 은근히 서영호는 내 발을 묶어놓기를 잘 하는 재주가 있었다. 모를 땐 넘어갔는데 이 남자가 서영호라는걸 알고 나니 일부러 이러는건가 하는 꼬인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지금 제일 꼬이고 있는건 내 방광이고. "알고보니 우린씨 어머님이 저희 어머니랑 아는 사이시더라구요. 되게 신기했어요. " "후..저, 서영..부서장님.." 오줌보 터질 것 같아 죽겠는데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서영호는 이번에도 역시 느긋하게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서영호라면 진절 머리가 나는 사람이니 고의든 아니든 내게 이러는 이유는 지능적 괴롭힘이라고는 생각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 우리 엄마랑 니네 엄마랑 아는 사이다. 다 알고서 이러는거지, 하며. 참다 참다 못해 저절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앉으려 했다. 엉겹결에 서영호의 팔을 지지대처럼 잡으니 그가 팔에 힘을 줘 아래로 같이 내려가지 않게 버티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디 아파요, 우린씨? 무슨 일이에요? 안색이 안 좋은데." 걱정스런 눈길로 살피는 그가 너무 가까워 잡았던 팔을 떼고 뒤로 주춤하자 그가 내 양 팔뚝을 붙잡아왔다. 나는 제대로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당황해서는 휘청거렸다. "어지러운거예요? 뭐,어디가 어떻게 아파요?" "그게 아니구우..저, 화장실 좀 갔다오겠습니다!" "아아. 네네! 여기서 기다릴게요. 갔다와요." "아우그 안 기다려두으아." 도중에 혀가 꼬여서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고 일단 급한 불을 끄러 화장실로 뛰쳐갔다. 얼마나 참았는지 변기에 주저앉자마자 주변이 무릉도원이었다. 아까보다 훨씬 가벼워진 배를 통통 두들기며 손을 씻고 나오는데 여전히 아까의 자리에서 서영호가 폰을 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살짝 물기가 남아있는 손을 바지에 대충 닦고 종종걸음으로 서영호에게 갔다. "안 기다리셔도 됐는데." "아니에요. 기분 좋아보인다, 시원해요?" "히히 네...네?" 코를 찡긋거리며 웃다가 도로 날아가려는 정신을 낚아챘다. 내 대답에 그가 작게 웃었다. "되게 시원했나보네요. 헤벌쭉 웃는거 보니까." "..그..가,가시죠!" "아, 맞아요. 우리 빨리 걸어야 할 것 같아요. 오후 업무 시작된지 좀 됐거든요." 그가 손목에 찬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보폭을 크게 해 걷기 시작했다. 그보다 한참은 작은 나는 거의 뛰듯이 지면에서 발을 짧게 굴리며 걸었다. 나 약간 숨차는 거 같은데. 서영호가 나를 힐끔힐끔 보더니 슬며시 속도를 늦추었다. 그제야 둘이 발이 좀 맞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그는 벽에 기대 핸드폰을 보기도 하고, 위를 쳐다보기도 하고, 그러다 나와 눈도 마주쳤다. 열심히 딴짓을 하다가 서영호와 시선이 맞으면 심장이 급정거한 버스마냥 덜컹거렸다. 차라리 바닥의 고급진 패턴을 보는게 낫겠다. 아무래도 백화점과 면세점이 같이 있다보니 층층마다 사람들이 몰렸다. 서영호는 급한 나머지 직원용 엘리베이터가 아닌 일반 엘리베이터를 탄 것 같다며 머쓱하게 웃었다. 나도 따라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14층에 가까워갈수록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숨통이 트이려 하니까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14층 문이 열렸다. 14층 부터는 또 복도를 걸어서 안쪽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 나는 벌써 20분이나 시간이 지체됐음을 보고 내 사수가 얼마나 화가 나 있을 지 생각하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복도에서 코너만 돌면 바로 마케팅 부서인데 갑자기 서영호가 우뚝 멈춰 섰다. 나는 뭐하는가 싶어 조금 앞서 걷다가 뒤를 돌아봤다. "나 여기서 50까지 세고 있을게요. 나랑 같이 들어가면 우린씨 사수한테 미운털 박혀요. 먼저 가요." 잊고 있었다. 서영호는 나보다 한참은 상사였다. 부서장과 인턴이 나란히 늦게 들어간다면 혼나는건 인턴이다. 나는 허릴 꾸벅 숙여 말없이 인사하고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정신 차리자,정신 차리자, 길우린 니가 그토록 때려주고 싶던 서영호가 저 사람이다. " 서영호는 귀에서 피가 날 정도로 들었던 얘기 그대로 인물도 훤하고, 성격도 좋고, 좋은 직장, 직위를 가지고 있었다. 치사하게 사실 그대로라 인간미가 없었다. 하나라도 빠지는 면이 있어야 비웃기도 하고 욕도 실컷 할 텐데. 서영호는 별로였다. 완벽해서 재수가 없었다. 그 중 쓸데없이 다정한 목소리가 제일 별로였다. "우린씨 정신이 있는 사람이야,없는 사람이야? 오늘 처음 왔으면서 농땡이 치는게 몇년 다닌 사람 같네?" "죄송합니다." 서영호랑 같이 들어왔으면 배로 혼났을 게 분명하다. 어디 부서장님이랑 나란히 들어오냐고 간이 배 밖으로 나왔냐며. 영양가 없는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흘리며, 두 손을 배 위에 올리고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하는 중인데 문이 열리고 서영호가 들어왔다. 그러자 모두들 일제히 일을 하다 말고 가볍게 목례를 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바로 회의 들어갈게요." 서영호의 말에 김미영 대리가 옆구리에 짚고 있던 손을 내리고 내게 종이뭉치를 안겨주었다. "따라와요." 도도한 척 또각거리며 앞서 걷는 뒷통수가 얄미웠다. 궁시렁 거리며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김미영 팀장이 턱짓으로 긴 원형 테이블을 가리키길래 눈치껏 자리마다 한부씩 셋팅 하고는 뒤로 빠져 벽에 바짝 붙어 서 있는 동기들 옆에 가 섰다. 회의가 시작되고 프로젝터를 켠다고 불을 꺼 놓아 반사된 빛을 받고 있는 서영호의 날렵한 옆선이 반짝였다. 뚜렷하게 곡선이 져서 똑 떨어지는 입술과 하관 라인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타사 면세점 이용객 수 대비 자사 면세점 이용객 수 라든가, 비수기 성수기 시기 차에 따른 이용객 분포라든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잘생기긴 오지게 잘생겼다.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서영호지만 미모만큼은 인정한다. 한참 서영호를 뜯어보고 있는데 옆에 같이 서 있던 동환씨가 팔꿈치로 나를 툭툭 쳤다. 슬쩍 돌아보자 들고 있던 이면지를 내 쪽으로 기울였다. ‘김미영 대리님이 우린씨 엄청 째려보고 있어요ㅠ’ 첫날부터 김미영 대리와 나는 티가 나게 삐걱거렸다. 초침이 정확하게 12를 넘김과 동시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수고하셨습니다를 외치며 가방을 챙겨들었다. 직장인이든 학생이든 집 가는 시간이 제일 어수선하고 즐겁다. 나도 따라서 열심히 인사를 하고는 일지 쓰는 걸 서둘러 마무리 짓고 있었다. "기다려줄까요, 우린씨?" "아녜요! 먼저 가세요. 내일 봐요." "그까짓 거 대충 써도 돼요. 내일 봐요~" 짐을 챙겨 나가던 동환씨가 내 팔뚝을 가볍게 치고는 경쾌하게 인사하며 나갔다. 좋겠다, 좋은 사수 만나서.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일지는 다 쓴 모양인지 우루루 가는 중이었다. 나머지 반도 아니고 나만 앉아 이러고 있는 건가 싶어 의자를 뒤로 끌며 일어났는데 저만치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김미영 대리와 서영호가 보였다. 포장이 된 무언갈 서영호에게 건네주며 수줍게 웃는 김미영 대리를 보니 콧방귀가 절로 나왔다. 여우같이 일하라는 게 저건가. 곧 죽어도 서영호 앞에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지않을테다. 볼을 부푼 채로 김미영 팀장을 조용히 노려보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튼 서영호와 눈이 딱 맞아버렸다. 황급히 시선을 피했지만 서영호는 이미 내게로 걸어오는 중이었다. 나는 태연하게 손을 놀렸다. 대충 쓰자. 인생 뭐 있냐, 어차피 인턴십만 하고 때려칠 회사. 서영호가 바로 앞에 다가왔다. 그가 테이블 위를 주먹으로 똑똑 두들기며 말했다. "아직 끝내려면 멀었어요?" "아니요! 거의 다 썼습니다." "집에 같이 갈래요?" 예상치 못한 물음표에 말문이 막혔다. 잘못 들었나 싶어 네? 하며 반문을 하니 그가 반복해서 말했다. "어차피 옆집인데 괜찮으면 내 차 타고 갈래요, 우린씨?" "앗, 저어..는 괜찮습니다! 저는, 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걸 좋아해서! 그니까.. 저는 자전거 타고 가겠습니다." 어디 가서 버벅대고 그런 사람 아닌데 말도 더듬고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도 스스로가 이해가 안됐다. 내 대답에 그가 알겠다고 말하며 자기 자리로 가 앉았다. 나는 서둘러 가방을 싸고 나서 나가려다 서영호에게 집 안 가시냐 물었다. "처리할 게 좀 남았네요. 먼저 가요. 수고했어요 우린씨. 조심히 가요." 아까는 같이 가자더니, 내가 덥석 받았으면 남은 업무는 어쩌려고 했을까. 자기 일 자기가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말았다. "그럼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오늘 허릴 팍 숙여 인사하는 것만 몇 번을 했는지 모르겠다. 인사를 하자마자 홱 돌아 걸어 나갔다. 블라인드를 올린 유리창을 등지고 앉아있는 서영호가 도심의 화려한 야경을 뒷배경으로 교묘하게 잘 어우러져 있었다. 계속 보다간 아까 회의 때처럼 정신 못 차리고 몇 분이고 서서 서영호를 바라만 보고 있을 것 같았다. 서영호 진짜 싫어. 걔 얘기 그만해. 열일곱 그때의 길우린처럼 귀를 막고 걸으며 속으로 중얼댔다. 서영호 진짜 싫어 서영호 진짜 진짜 싫어 나는 무슨 죄를 지었길래 지독하게도 서영호라는 인간과 뗄레야 떨어질 수가 없게 됐을까. 지겹게 붙어있던 내 집이 이토록 한없이 사랑스럽게 보일 수가 없었다. 하룻동안의 피로가 확 몰려와 옷도 안 갈이입고 침대 위로 쓰러졌다. 푹 들어가는 폭신함에 몸이 노곤해졌다. "..내일 회사가기 존.나 싫다." 첫날부터 이러면 어떡하지. 그렇지만 만사가 다 귀찮았다. 집이 이렇게나 안락한데 어떻게 매일 밖에 나가지.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겨우 일어나 화장을 지우고 뜨끈한 물에 몸을 녹였다. 씻고 홈웨어로 갈아입으니 졸음이 마구 쏟아졌다. 침대에 엎드려 누워 폰으로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는데 한창 재밌던 중에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하여간 타이밍 정말. 엄마 라는 두 글자만 원망스레 보고 있다가 전화를 받으니 안부고 뭐고 다 잘라먹고 본론부터 들이민다. "오늘 회사 가서 영호 만났어?" 만났다고 해,말아. 고민하며 입술 껍질을 뜯다가 결국 못 봤다고 거짓말을 했다. "왜 못 봐? 눈은 뜨고 다녔어?" "눈 감고 어떻게 다녀? 아 못봤다고오! 봤어도 몰라서 지나쳤을 걸." "그 잘생김을 지나칠 수가 없는데.." 엄마의 말에 가슴 한 구석이 뜨끔 거렸다. 괜히 헛기침을 하며 서영호 못 봤고 건질 거 없으니 이만 끊으라고 말하는데 밖에서 일정한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오고 핸드폰 너머로는 여보세요, 전화 끊었냐 하는 엄마 목소리가 나왔다. 나는 통화 볼륨을 서서히 줄이고 눈을 감았다. 발 소리가 그치더니 지문인식으로 들어가는 도어락의 발랄한 잠금 해제 소리가 크게 들렸다. 문고리를 가볍게 잡아 당긴 그가 들어가고 문이 닫힌다. 눈을 뜨고 시간을 확인하면 벌써 밤 9시가 다 되어가고 있다. 나쁜년 진짜 전화 끊은거야 뭐야 엄마의 꿍얼거림에 이제 답해 줄 때가 됐다. 다시 핸드폰을 귀에 댔다. "맞아. 서영호 만났어." 1209호에 나의 원수가 산다.김미영 대리는 사소하고 성가신 잡일을 내게 떠넘기다시피 했다. 나는 그녀에게서 그녀가 그간 회사를 다니며 쌓은 노하우와 일을 배우고 싶은 건데 첫날 김미영 대리의 말대로 탕비실에 자주 들락거리고, 복사기 앞에서 50부 100부 복사만 하고 있다간 4주차 막 날에 볼 부서장 평가는 완전 초를 칠 게 분명해 보였다. "우린씨 피피티 잘 만들어?" "네? 네! " "이따 오후에 있을 회의에 내가 피티 하는데 자료 넘겨 줄 테니까 피피티 좀 만들어 줘." "네." 전날 준비 안하고 당장 오후에 쓸 피피티를 지금 만들다니. 몇 번을 생각해도 난 사수를 잘못 만났다. 점심시간이 코앞이었지만 자리에서 엉덩이를 뗄 수 없었다. 동환씨가 밥 먹으러 가자며 나를 불렀지만 미안하다는 말로 먼저 보내야했다. 이제야 뭘 좀 하는 기분이 들어 좋긴 했지만 배고픔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서둘러 끝내고 빵집이라도 들려야겠다 생각하며 키보드를 두들겼다. "나한테 1분만 시간 내줘요 우린씨." "으익 깜짝이야! 아, 안녕하세요 부서장님." 컴퓨터 화면에만 시선을 때려 박고 있다가 위에서 나는 소리에 고개를 쳐들었다가 놀랬다. 언제 왔는지 서영호가 내 앞에서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아침에 인사해놓고 뭘 또 하고 그래요. 밥 못 먹었죠?" 그렇게 말하며 그가 내 쪽으로 샌드위치와 커피를 내밀었다. "열심히 하는건 좋은데 굶지는 마요." "..감사합니다.“ 바깥이 시끄러운 걸 보니 밥을 먹고 사람들이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서영호가 문 쪽을 한번 보더니 일어나 자기 자리로 가 앉았다. 나는 그가 준 샌드위치 포장 겉면을 만지작 거리기만 하다가 마우스 근처에 내려놓았다. "우린씨! 결국 밥 못 먹었, 어? 샌드위치는 언제 사왔대?" "아..헤헤. " 동환씨가 손에 빵집 상표가 적혀 있는 종이봉투를 들고 왔다. 나는 차마 부서장님이 주셨다고는 말 못하고 대신 서영호 쪽을 흘깃 보았다. 서영호는 무언가를 열심히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어딜 쳐다보냐며 내가 보는 쪽으로 얼굴이 돌아가는 동환씨에 대뜸 구름이 예뻐서 라는 헛소리를 해댔다. "블라인드 쳐놨는데 구름이 보여요?" "아. 그건 그렇고 우와, 저 생각해서 사온 거예요? 약간 감동이다~" 일부러 오버를 하며 화제를 돌렸다. 동환씨에게서 봉투를 뺏듯이 가져가 안에 있는 빵들을 꺼내는데 동환씨가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내 귀 가까이로 다가와 속삭였다. "부서장님한테 관심있죠?" "엥. 전혀, 아니,절대 그럴리가요,싫어하는데요." 저장된 입력어들을 줄줄이 내뱉는 나에게 동환씨가 대신 울상지으며 말했다. "제가 부서장님이었다면 상처받았을거예요." "그, 그러니까 누가 그런 소리 하래요?" "왜요, 회의할 때도 부서장님만 계속 쳐다봤던 거 내가 다 아는데~" "..그렇게 안 봤는데 동환씨 관찰력이 좋으시네요. 아님 저 좋아하세요? 왜 저 관찰하세요?" "무슨 소리예요! 절대 아니거든요?저 2년 사귄 여자친구도 있다구요!" "이렇게까지 화낼 일이에요? 나 상처받아요." 간신히 전세 역전에 성공했다. 마지막엔 천연덕스럽게 샐쭉거리는 걸로 마무리했다. 아마 꿀밤이라도 한 대 쥐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살짝 유치해진 우리의 대화는 김미영 대리의 우린씨 할 일은 다 하고 노닥거리는 거야? 라는 앙칼진 물음으로 절단됐다. 피티는 무사히 마쳤다. 단지 내가 그녀에게 피피티 완성했습니다. 라고 했을 때 수고했어요, 이 한 마디가 내게 돌아온 전부였다. "김대리님 깔끔하게 잘 정리하셨네요." 서영호가 김미영 대리에게 건넨 칭찬까지는 내게 돌아오지 않았다. 편안하게 일기 쓰듯 정직하게 느낀 바를 서술하면 된다해서 처음보다 부담을 한 시름 덜어놓고 쓰는 인턴일지는 어느샌가부터 감정을 담가놓는 일기로 전락하고 있는 중이었다. 얼마나 정직하게 쓰는지 생각없이 김미영 대리 욕을 쓰다가 일지는 사수가 확인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지우개로 자국도 알아볼 수 없게 벅벅 지웠다. "오늘도 남아서 해요?" "아뇨. 딱히 안 그래도 되는데. 엄, 그냥 일지는 혼자 남아서 쓰는게 뭔가 좋더라구요..곧 갈겁니다!" 자고로 일기는 혼자 비밀스럽게 쓰는 게 제일 몰입도가 높은 법이라 자연스럽게 퇴근 시간을 오버해서 쓰고 가는 경우가 많아졌다. 서영호는 늘 남아 일 처리를 하다가 일지를 쓰고 있는 내게 말을 걸었다. "우린씨." "네?" "오늘은 나랑 집에 같이 가면 안돼요? 나 오늘은 일 별로 없는데." 내가 금방 대답을 못하고 있자 그가 덧붙여 말했다. "물론 우린씨가 좋아하는 대중교통으로요.“ 어쩐지 매우 불편한 동행이 될 것만 같다. 사람들이 거의 빠져나가 나름 한적한 지하보도를 걸으며 서영호와 아무런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같이 걷긴 걷는데 누가 봐도 안 친한 사이. 서영호의 눈치를 간간히 보며 걷는 길이 내게는 거의 가시밭길이었다. "저녁도 못 먹고,배고파서 어떡해요." "괜찮습니다! 점심을 많이 먹어서 그다지 고프지도 않습니다." 갑작스레 말을 걸어오는 통에 놀래서 군기가 잡혔다. 딱딱한 다나까에 조금 오버했나 싶어 뱉어놓고 후회했다.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런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서영호가 말투를 똑같이 따라했다. 같은 어투인데도 그의 목소리가 가진 특유의 다정한 톤 때문에 저보다 어린 나를 어르는 느낌을 받았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전철이 도착하고 많은 자리 중에 먼저 들어간 서영호는 임산부 좌석을 비워놓고 그 옆 자리에 앉았다. 짜식, 개념은 있네. 생각하다 나는 어디에 앉을지 고민했다. 멀찍이 떨어져 앉으면 어차피 이웃집이라 아파트까지 같이 갈 텐데 어색한 티를 낼까봐 마지못해 그의 바로 옆자리에 엉덩이를 깔았다. 그러자 서영호가 약간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나를 잠깐 쳐다보았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집 근처 역까지 가려면 다섯 정거장 정도 걸린다. 꽤나 가까운 거리라 자전거를 이용해서 출퇴근을 하는데, 세상에 그러고 보니 서영호와 같이 퇴근한다는 거에 정신이 팔려 회사에 자전거를 두고 왔다. 내일은 어쩔 수 없이 지하철 행이었다. 아무튼 서영호는 도움이 안된다. 악연이 말만 악연이 아닌지 꼭 시간을 빼앗기거나 정신을 빠트리게 한다. 아주 고도의 물먹임이다. 나만 기다리고 있을 자전거 생각만 하고 있는 중에 어깨에 서영호의 머리가 닿을락 말락 했다. 몇 정거장 된다고 앞으로 두 번만 더 문이 열리면 내려야하는데 그새 졸고 있었다. 괘씸한 서영호. 기회다 싶어서 대놓고 잠든 그의 얼굴을 째려보는데 입술로 시선이 갔다. 무슨 입술 라인이 저렇게 예쁘지. 짜증나는 서영호. 꾸벅꾸벅 기우는 머리에 내가 다 목이 아팠다. 인생에 도움이라곤 전혀 안 되는 서영호, 지겨운 서영호.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나보다 앉은키가 큰 서영호와 높이를 비슷하게 맞췄다. 그제서야 서영호의 머리가 내 어깨에 딱 맞게 떨구어졌다. 무겁게 실리는 무게에 숨이 제대로 안 쉬어졌다. 옛날부터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내 몸에 기대면 그때부터 내 심장소리, 숨소리가 상대에게 어떤 식으로 전달이 될지 신경을 엄청나게 썼었다. 상대는 그러거나 말거나 편하게 기대 있었지만. 들숨 날숨의 순서가 꼬여서 수동으로 내쉰다고 홀로 고군분투 중인데 서영호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안쪽으로 더 파고들어왔다. 기관사님 열일해주세요, 죽겠어요. 마침내 내려야 할 역이 뜨고 나는 반갑게 서영호를 깨웠다. "으음..어디예요.." "네오컬쳐단지역이요. 일어나세요." 풀린 눈의 그가 찌뿌둥한 목을 돌리며 일어났다. 가볍게 내리는 그의 뒤에서 자리에 고이 놔둔 가방을 발견한 내가 바로 낚아채서는 뒷짐을 지고 서둘러 내렸다. "영ㅎ, 부서장님!" 하도 서영호서영호 거리다보니 입에 서영호가 붙어 실수를 할 뻔 했다. 내 목소리에 그가 뒤를 돌아보더니 내가 가까이 올 때까지 그 자리에 멈춰서 기다렸다. "뭐 두고 내린거 없으세요?" "우린씨 뒤에 제 가방이요, 고마워요." 숨긴다고 숨겼는데 물 흐르듯한 유연한 흐름으로 서영호가 대답하며 내 등 뒤로 손을 뻗어 건네받았다. "우린씨, 귀여운면도 있네요. 귀여웠어요." "네? 저요? 전혀요." 부서장님 좋아하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와 똑같이 미간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서영호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아까 저한테 달려올 때요, 강아지 같았다구요. 엥? 아니에요.. 도대체 내가 뛰면 어떻게 뛰었다고. 서영호의 시각을 존중해 줄 수 없었다. --- 약간 분량 조절을 못하고 있습니다..사실 더 이어야 하는데 그러면 너무 길어져서 도짜밈들 토하실 거 같아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