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CallMeCat - My Sea
* 오메가버스 세계관을 차용했습니다.
"여기서 뭐해."
온 신경을 자극하는 달콤한 페르몬을 따라가보면 그 끝엔 욕조에 널브러져있는 여주가 보인다. 가까이 다가갈 수록 자욱한 수증기에 가려져 흐릿하게 보이는 실루엣이 드러났다.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줄기가 그대로 여주의 얼굴을 타고 흐른다. 물음에 대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이 느릿하게 움직일뿐.
"기다리고 있을게. 준비하고 나와."
"안 가."
서로의 시선이 맞물렸다. 여주가 내 뱉은 말에 힘이 실렸다.
"약, 왜 안 먹었어."
"내가 알아서 해."
이를 들어내고 으르렁대는 꼴이 겁을 주려는 새끼 고양이가 따로 없다. 그런 여주의 반응이 익숙한듯 윤기는 천천히 여주에게 다가갔다.
"이러다 감기 걸려."
"당신, 내 친오빠인척 유난떠는거 하지마."
"......"
"역겨우니까."
점점 풀리는 눈, 붉게 달아오르는 볼, 불규칙하게 내 뱉는 달뜬 숨, 평소보다 배로 뿜어져 나오는 페로몬. 히트사이클의 시작이다. 약으로 제어하지 않으면 분명 머지않아 본능이 온 몸을 지배할 것이다.
"나는 네가 이래서 싫어. 아무런 반응이 없는 너를 죽이고 싶을 만큼 싫어."
"약혼식 때까지만 조심해."
"민윤기."
"... 약 먹자."
여주를 안아서 들어올리니 물에 젖은 옷이 축 늘어진다. 아무런 저항없이 품에 안긴 여주가 뱉은 뜨거운 숨결이 윤기의 목덜미에 닿았다. 그럼에도 전혀 미동 없는 무심한 윤기의 말투에 여주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어째서 한번을 안 봐주는거야.
"민윤기."
"......"
"윤기야."
"......"
"...오빠아."
본능이 온 몸을 집어삼킨다. 겉 잡을 수 없이 무서운 속도로.
"나 약혼, 하기 싫어."
"... 신여주."
"응?"
목소리가 가늘게 떨린다. 여주가 윤기의 옷깃을 애타게 붙잡았다. 대답을 갈구하는 진득한 시선이 숨통을 옭아맨다. 여주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에 윤기는 눈을 질끈 감았다. 깊은 한숨을 내쉰 뒤 뱉은 그의 대답은
"약혼해."
지독하리만큼 단호했다. 저를 향한 무심한 눈빛을 마주한 순간 서서히 눈이 감겼다. 심장이 무너져 내렸다.
B A D
THINGS
1, 2
알파와 오메가의 등장으로 인류는 세 가지로 나뉘었다. 피라미드로 따지면 꼭대기는 부와 권력을 가진 알파, 중간은 평범한 인간으로 불리었던 베타, 그리고 바닥은 가장 천하고 천대받는 오메가. 대대로 이어진 우성 알파 가문에서 우성 오메가의 탄생이란, 길을 걷다가 벼락을 맞을 만큼의 희박한 확률이다. 그 확률을 뚫고 태어난 오메가는 과연 축복 받을까? 모두에게 축복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존재 자체를 꺼려하는 것이 보통의 반응이다. 그러나 예외는 늘 존재한다. 우성 오메가이지만 우성 알파 가문인 S그룹의 막내 딸, 신여주의 삶은 달랐다.
여주는 철저한 보호 아래 남 부럽지 않게 자랐다. 사랑 받는 딸이자, 여동생이었다. 여주가 우성 오메가일지라도 그녀를 뒷받침하는 이들이 최상류층이니 함부로 건드는 이는 없었다. S그룹.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한민국 대기업 중 하나로 한 나라의 경제를 쥐고 흔들만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부와 권력. 이것이 그녀의 무기였다.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없는 절대적인 무기. 그렇지만 발이 닿는 모든 곳엔 알파가 존재하는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여주는 늘 억제제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 페로몬을 억제하고, 만나는 사람을 최소화 했다.
꽤 순탄한 삶이었다. 원하는 것이면 뭐든 가질 수 있는,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는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던 그녀의 앞에 민윤기가 나타나기 전까지.
"여주야. 오빠 친구야."
"안녕?"
"......"
"이름이 뭐야?"
"... 신, 여주."
"여주? 이름 예쁘다. 여주야, 나는 윤기야. 민윤기."
늘 가족에게 둘러싸여 있어 만나는 사람이 한정적이었던 어린 여주가 처음으로 제 피와 섞이지 않은 우성 알파와 대면하는 순간이었다. 오빠 뒤에 숨어서 옷 끝자락을 질끈 잡곤 호기심 가득한 두 눈으로 쳐다보는 윤기의 저를 향한 표정이, 바라보는 눈빛이, 흩날리는 잔머리를 뒤로 넘겨주는 손길이 다정해서 홀리듯 이름을 알려주었다. 열어 둔 창문을 통해 살랑이는 봄 바람이 불어왔다. 땀을 식혀줄 정도의 적당히 선선한 바람. 그 바람이 심장을 간질였다. 7살의 신여주는 몰랐다. 처음 느껴보는 생소한 이 감정이 사랑이었음을.
잔잔한 수면 위로 파장이 일었다. 가문의 희망이었던 우성 알파인 친오빠가 사고로 갑작스럽게 죽었다. 17살의 여주는 자신을 사랑해주고 지켜주던 혈육을 잃었다. 하루 반나절동안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 울음을 쏟아냈다. 그 옆에서 여주의 등을 토탁여준 이는 윤기였다. 되돌릴 수 없을 만큼 그를 향한 마음이 깊어질 때 쯤, 집 안 사람들은 머리를 맞대고 S그룹의 후계자를 찾기 시작했다. 여주는 우성 오메가이고, 알파들 가득한 곳에 발을 들이기엔 그녀는 너무 작고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S그룹의 선망받는 인물이었던 윤기가 자연스럽게 그 빈 자리를 채웠다. 후계자로서 윤기는 늘 모두를 만족시켰다. 단, 여주를 제외하고. 둘의 관계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여주가 저를 바라볼 때의 눈빛에 담긴 짙은 애정을 느낀 뒤부터 그의 다정한 표정, 눈빛, 손길을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여주에게 더이상 조금의 틈조차 허락하지않았다. 여주는 자신을 대하는 윤기의 태도가 왜 변했는지 안다. 변해버린 그에 대한 삐뚤어져버린 애정. 둘은 절대 한 쪽이 원하는 관계가 될 수 없다.
"아저씨, 나 어때?"
여주의 두 눈이 반짝였다.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자 드레스가 붕 떠올랐다가 가라앉는다. 어깨가 다 드러나는 붉은색 드레스는 여주의 하얀 피부를 더 돋보이게 했다.
"예뻐."
"정말?"
"응. 오늘 정말 예쁘다."
호석은 손을 뻗어 여주의 볼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말하자 살포시 웃는다. 드러난 장미빛으로 옅게 물든 볼이 사랑스럽다.
"약 먹었지?"
"민윤기가 확인하라고 했어?"
날이 선 말투. 순식간에 여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민윤기. 이름 석 자에 대한 여주의 반응은 무섭도록 싸늘했다. 아까 아침에 있었던 일이 떠올라 이를 바득 갈았다. 민윤기. 나쁜새끼. 늘 이런 식이었다. 악순환의 반복. 끝까지 저를 밀어내는 윤기를 여주는 아직도 놓지 못 하고 있다. 머리가 지끈 아파온다. 여주가 호석을 지나쳐 문 쪽으로 걸어가자 뒤에서 다급한 호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내가 걱정되서 그래. 자리가 자리인 만큼 조심해서 나쁠거 없잖아."
"나도 알아. 약 먹었어."
"......."
"확인시켜줘?"
여주가 몸을 뒤로 홱 돌며 말했다. 둘의 시선이 맞물린다. 찰나의 정적. 그 정적을 깨고 먼저 말한 사람은 여주였다.
"아저씨."
"응?"
"빨리가자. 이러다 늦겠다."
여주가 호석에게 다가가 몸을 붙이며 팔짱을 껴온다. 고개를 들어 씨익, 웃어보이자 호석은 여주의 앞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래. 가자."
매끄럽게 올라간 호석의 입꼬리. 호석은 이번에도 여주에게 졌다. 애초에 호석은 여주를 이길 마음이 없다.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늘 그래왔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짙은 단내. 오메가의 페로몬. 이 황홀한 냄새는 반드시 폭풍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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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그룹의 자선파티. 약 300명에 이르는 측근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엔 몇몇의 KJ그룹 경영인들과 잔뼈가 굵직한 정치인들, 법조인들 말고도 그 밖의 티비에서 얼굴을 자주 비추는 연예인들 등 명사들이 많이 보인다.
문을 열고 들어가마자 코 끝을 찌르는 알파들의 냄새에 여주는 미간을 지푸렸다. 여주를 향해 쏟아지는 시선들, 호기심 가득한 눈빛들. 소문으로만 듣던 S그룹의 막내 딸, 신여주에 대한 관심이 이정도이다. 우성오메가임에도 지 아비를 닮아 여주에게서 감히 함부러 다가갈 수 없는 오묘한 분위기가 풍겨왔다. 역시 피는 못 속이네. 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알파는 물론, 베타도 홀릴 만큼 매력적인 그녀에게서 시선이 떨어지지 않는다. 신경쓰일 법한데도 여주는 전혀 그렇지 않은지 그저 빠르게 눈을 굴리며 걸을 뿐이다. 한껏 뒤에서 들려오는 저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여주가 고개를 돌리자
"여주야,"
"박지민!"
"나 왔어."
석 달만에 귀국한 지민이 보였다.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여주는 한 걸음에 달려가 품에 폭싹 안겼다.
"이러면 나 좀 힘든데."
"... 아,"
능글 맞은 말에 여주는 지민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몸을 떼어냈다. 알파에게서 나는 특유의 향이 코끝을 스친다. 맞다, 박지민 알파였지. 여주의 중얼거림을 듣고 지민은 푸흐흐 웃으며 까먹을걸 까먹어야지. 라고 타박했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반가운 마음이 앞서 무작정 안겨버렸다.
"잘 지냈어?"
지민은 여주의 얼굴을 천천히 두 눈에 담으며 물었다. 석 달만에 본 여주는 어째 살이 더 빠져보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여주는 지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시무룩한 표정을 짓곤 고개를 저었다. 잘 지내긴. 돌아온 대답에 역시. 하고 지민은 생각했다.
"약혼 준비는 잘 되어가? 그, KJ그룹 김태형이 약혼자라며."
"누구한테 들었어."
"아까 윤기형 만나서 안부 주고받다가 형이 말해주던데?"
"......"
"축하해, 여주야."
"안 할거야. 약혼."
"뭐?"
"안 할거라고."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지민은 여주의 굳은 표정을 보곤 입술을 달싹였다. 왜?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도로 집어삼켰다. 구태여 묻지 않아도 여주를 오래 봐온 지민은 그 이유를 알거같기 때문이다.
"내가 결혼하자고 했던거 기억나?"
"응. 그건 갑자기 왜? 코흘리개 적 얘기잖아."
지민과 여주가 처음 만났을 때가 아마 초등학교 2학년. 입학하고 막 적응할 때 쯤이었을거다. 둘은 최상류층의 자제들만 다닌다는 사립 학교를 다녔다. 우성 오메가인 여주에게 다가오는 아이들은 없었다. 다들 먼발치에서 동물원의 원숭이를 보듯 여주를 훑을뿐. 홀로 있는 여주에게 먼저 다가간 유일한 사람이 바로 지민이었다. 지민은 뭣도 모르고 여주에게 덤비는 알파들에게서 여주를 지켜주었다. 왜 그러는지 지민 저 자신도 모른다. 그냥 여주를 처음 본 순간부터 지켜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둘은 늘 함께 다녔다. 여주는 어렴풋이 지민이가 자신을 좋아한다는걸 알았다. 어렸음에도 제게 결혼하자고 말하던 지민의 눈빛이 사뭇 진지했기 때문에. 다 알면서도 여주는 친구라는 이름의 선을 그었다. 그렇게 14년동안 둘은 친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 말. 아직도 유효해."
지민의 짙은 고동색 눈동자에 당황으로 물든 여주의 얼굴이 비추어졌다. 14년 전과 다를게 없는 눈빛. 유효하다. 1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손에 땀이 차올라 드레스에 벅벅 문질렀다. 박지민. 나는......, 여주의 눈동자가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린다. 여주가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지민이 말허리를 툭 잘라냈다.
"농담이 너무 진지했나."
"......"
"속았나보네. 바보."
"... 뭐야."
"윤기형이 너 보면 단상 근처로 오라고 전해달라고 했어. 얼른 가봐."
"안 가도 돼. 가기 싫어. 우리 만난지 10분도 안 지났잖아."
지민은 칭얼거리는 여주의 어깨를 잡고 몸을 돌렸다. 한 동안 출국 안 하니까 또 볼 수 있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는 여주를 향해 해사하게 웃으며 지민이 말했다. 어깨에 올린 두 손을 떼어냈다. 연락할게. 지민의 말에 여주는 고개를 끄덕이곤 윤기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왔어?"
"반가워요. KJ그룹 대표이사 김석진이라고 합니다."
윤기가 있다는 곳으로 가보니 처음보는 두 명의 남자와 대화를 나누며 함께 서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윤기가 먼저 여주에게 말을 건냈고, 뒤이어 석진은 악수를 청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석진에게선 페로몬이 느껴지지 않지만, 알파나 오메가 만큼이나 뛰어난 지능과 신체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무언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분위기가 석진에게서 느껴졌다. 석진의 입에서 KJ그룹이라는 말이 나옴과 동시에 모든 것이 이해되기도 하고, 한편으론 이 자리가 약혼에 관련된 자리임을 눈치 챈 여주는 드레스를 질끈 쥐곤 티가 나지 않게 윤기를 노려보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신여주예요."
입꼬리를 최대한 끌어당겨 웃은 뒤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내민 손을 잡았다. 속으로 오만 욕을 하며 윤기를 씹고있는지 아무도 모를만큼 환한 웃음이었다.
"저는 KJ그룹 전무이사 김남준 입니다. 편하게 여주씨라고 불러도 되나요?"
"네. 그럼요."
여주의 대답을 들은 남주의 볼에 살포시 보조개가 드러났다. 페로몬만큼이나 참 매력적인 보조개다. 소문대로 KJ그룹의 장남과 차남은 베타였다. 그렇지만 여주의 약혼자는 우성 알파라고 했다. 여주가 아는건 오로지 이것 뿐. 여주는 약혼자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얼굴도, 이름도.
S그룹은 지난 수 십년간 절대 무너질 수 없는 견고한 기반을 다져왔는데 KJ그룹과 협력하기로 결정을 내렸다는건 누구도 닿을 수 없는 위치로 더 높이 올라가려는 윤기의 욕심이 틀림없다. 이해관계가 확실한 윤기가 선택한 KJ그룹은 요즘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기업으로, 전문가들 사이에서 몇 년 후엔 KJ그룹 주식이 몇 십배는 뛰어오를 거라는 말이 돌아다니고 있다. S그룹과 KJ그룹. 이 두 그룹은 대한민국을 집어삼키기 위해 손을 맞잡았다.
여주의 예상대로 석진과 윤기, 남준은 약혼식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작 당사자인 여주는 약혼할 마음이 없고, 여주의 약혼자라는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정략결혼. 어쩌면 이것이 태어날 때부터 여주의 바꿀 수 없는 운명일 수도 있겠지만, 여주는 순수히 운명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 여주는 이 자리가 불편했다.
"김태형도 이 자리에 있어야되는데 통 보이질 않네요.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앞으로 볼 일 많을텐데요."
"괜찮아요. 어차피 약혼, 안 할거거든요."
여주의 말에 세 개의 시선이 모아진다. 제 발언이 폭탄임을 모르는 사람처럼 해맑게 웃었다. 신여주. 자신의 이름을 낮게 읊조린 윤기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말했잖아. 안 하겠다고. 여주의 눈빛이 그리 말하고 있다. 둘 사이에 작은 스파크가 일었다. 누구 하나 져 줄 생각이 없다. 둘 사이의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낀 석진과 남준은 입술을 달싹인채 그들을 지켜보고만 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세요. 전 이만 먼저 가볼게요."
고개를 숙이고 흘러내린 옆머리를 넘기며 눈웃음을 지어보이던 여주는 그대로 뒤를 돌았다. 그러자
"......"
한 쪽 눈썹을 일그러트린 남자가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바라보고있다. 스치는 찰나의 순간에 둘의 시선이 맞물렸다. 짙은 우성 알파의 냄새. 저를 잡아먹을듯 번뜩이는 눈빛을 무시하고 여주는 그대로 남자를 지나쳐갔다. 남자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린다. 흥미를 느낀 표정. 맹수가 먹잇감을 발견한듯한 표정을 한 남자는 점점 멀어져가는 여주를 붙잡지 않았다. 제 약혼자가 약혼을 안 하겠다고 폭탄발언을 했음에도.
엘레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여주의 손 끝이 불안정하다. 지하에서부터 올라오는 엘레베이터. b2층, b1층 ...... 점점 시야가 흐릿해진 탓에 여주는 눈을 감았다 뜨며 초점을 맞추려 애썼다. 1층에 도착한 엘레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이미 타고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애써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엘레베이터에 올라탄 여주는 그대로 한 쪽 모퉁이에 몸을 기댔다. 어디를 가려고 엘레베이터를 탔는지. 버튼을 누르지 않고 있는 여주를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남자는 그제서야 눈에 들어 온 여주의 손에 쥐어진 반쯤 빈 와인 병을 보고 그녀가 취했음을 눈치챘다.
밀폐된 공간에 알파의 페로몬과 오메가의 페로몬, 그리고 옅은 술냄새가 뒤엉켰다. 남자는 여주가 우성 오메가인걸 알아챘다. 17층을 향해 엘레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남자가 넌지시 말을 건냈다.
"어디로 가요."
"......"
"어디,"
"나 좀, 어디든... 데리고 가줘요."
"......"
"부탁이에요."
오메가가 목을 훤히 드러내고 알파에게 어디든 데리고 가달라라. 비웃음 비슷한 웃음이 남자의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줄곧 앞을 향해있던 남자의 시선이 여주 쪽으로 옮겨졌다. 분명 비틀거리는 몸 만큼이나 정신도 온전하지 않을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남자의 생각과는 다르게 마주 본 여주의 정신은 아주 멀쩡했다. 너무 멀쩡해서 지금 이 순간에도 윤기를 떠올리는 자신이 싫을 정도로.
"나 그렇게 좋은 사람 아니에요."
"괜찮아요."
"내 이름 전정국이에요."
남자는 괜찮다는 말에 입가에 미소를 띄우곤 성큼 다가가 자신을 소개했다. 전정국. 차기 대선후보로 거론되는 전태국 국회의원의 하나뿐인 아들. 어느새 숨결이 닿는 거리가 되자 여주가 등을 벽에 바짝 기댔다. 그걸 본 정국은 티가 나지 않게 살포시 웃었다. 괜찮다고 당돌하게 말하더니. 긴장했나보네.
"저는 신여,"
정국은 여주의 말과 함께 입술을 집어삼켰다. 아랫 입술을 살작 깨물기에 여주는 입술을 열어 정국의 혀를 받아들였고, 정국은 여주의 허리를 감쌌다. 뜨거운 숨결과 서로의 타액이 오가는 꽤나 농도 짙은 키스에 정신이 아찔해진다. 부드럽게, 그리고 집요하게 여주를 탐하는 혀 움직임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정국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달아."
흥분에 갈라진 정국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정국의 말에 대답대신 여주는 팔을 들어 목에 감싸곤 한껏 풀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꽂히는 시선이 끈적하게 흘러내려 다시금 입술에 머문다. 누가 먼저랄거 없이 입술을 부딪혔다.
"기껏 찾으러 다녔더니 이렇게 엿을 먹이네."
머리 넘어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여주와 정국을 입술을 뗐다.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열린 문 앞에 혀를 입안에서 굴리며 어이없다는듯 웃는 남자가 보인다. 낯이 많이 익다. 누구지. 여주는 기억을 더듬어 생각해냈다. 아까 본 남자였다.
"누구?"
"이 여자 약혼자."
정국의 물음에 남자가 대신 대답했다. 남자의 말에 정국 뿐만 아니라 여주도 놀랐다. 남자는 여주의 약혼자. 바로 김태형이었다.
"재미 봤으면 그만 가자."
"......"
"마저 약혼식 얘기해야지."
여주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태형을 멍하니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 아까 들으셨을진 모르겠지만 저는 약혼 할 생각이 없습니다."
"......"
"의사는 충분히 비췄는데 혹시 모르니 한번 더 잘 말씀해주세요."
"싫다면?"
"......"
정적이 흘렀다. 태형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여주는 입술을 달싹였다. 싫다는건 또 무슨 말인가. 분명 저도 원해서 하는 약혼이 아닐터인데.
"말씀이고 나발이고. 내가 약혼 깰 마음이 없다고."
여주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폭풍전야. 아찔한 관계의 서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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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단한 인물 소개 》
김석진 : KJ그룹 대표이사, 베타 김남준 : KJ그룹 전무, 베타 김태형 : KJ그룹 막내, 여주의 약혼자, 우성 알파 박지민 : 여주의 소꿉친구, 알파 전정국 : 차기 대선후보로 거론되는 전태국 국회의원의 외동아들, 우성 알파 민윤기 : 총애받는 S그룹 사람, 죽은 여주오빠의 친구, 우성 알파 정호석 : 신여주의 비서, 베타 신여주 : S그룹 막내 딸, 우성 오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