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오세요 ,
심야<心惹> 약국
written by. 참이슬
-마음을 이끄는 약국, 그 열세 번째 이야기-
어릴적 부터 나는, 묵묵히 부모님이 깔아놓은 아스팔트 길을 걸어왔다. 그 도로 위를 걷는 것이,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는 착한 아이로 불리우게 만들었다. 어느날 부턴가, 그것이 나의 인생에 걸리적 거리는 커다란 족쇄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을 벗어던져 버리기엔 너무나 멀리 와버렸고, 그 족쇄를 풀어 가벼워 지기엔, 용기가 없었다. 그 용기는 지금껏 받아온 사랑과 관심을 모조리 져버릴 용기였다. 공부만이 부모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나의 유일한 무기였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날 때 부터 타고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쩌다 형이 시험을 망쳐 집에 들어온 날이 있었다. 형은 고작 초등학생일 뿐이었다. 유치원생이었던 나는 방에서 빼꼼히 문을 열어 형이 엄마에게 혼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형은 혼이 난 후에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여전했다. 엄마는 결국 한 겨울에 내복만 입힌 형을 대문 밖으로 내쫓았다. 나는 혹여나 나도 이 추운날 창피하게 알몸으로 집에서 쫓겨날까하는 무서움에 서둘러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방으로 들어온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너는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될거라며, 어찌 이리 이쁜 짓만 골라서 할까,며 평소엔 이가 썪는다고 잘 주지 않았던 달콤한 초콜릿을 주기도 하셨다. 그 뒤로 딱히 나는 종아리를 회초리로 맞고 싶지 않았기에, 게임을 좋아하던 형과는 달리 수학문제를 풀거나, 하며 시간을 보냈고 그렇게 학창시절 내내 우등생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은 집에 형과 나 둘 뿐이었다. 고등학생인 형은 중학생인 나에게 오더니 대뜸 재수없는 놈이라고 말했다.
" 좋겠다. 넌 공부 잘해서. 아빠 사업은 너가 물려받겠네? "
" ........... "
" 근데 세상이 마냥 너가 원하는대로 굴러가진 않아. 공부 잘한다고 다 얻을 수 있는게 아니거든. "
" 그게 뭔데? "
" 글쎄, 쉽게 말해서, 공부 잘한다고 여자친구 생기는건 아니잖아. "
형 말이 얼추 맞는 듯 했다. 그 때의 나는 집-학교-학원-독서실-집 이 전부인 때였다. 형은 학교는 꾸준히 다녔지만 학교가 끝나면 당구장, 피시방을 다니며 놀기 바빴고 여자친구도 여럿 있었다. 헌데 부모님은 그런 형을 나무라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엄마에게 혼이 나기 싫은 마음이 이 아스팔트 도로위로 올라오게 된 이유다. 줄곧 1등만 해오던 내가 처음으로 2등을 하던 날, 엄마는 나를 크게 나무라셨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형처럼 놀기를 한 것도 아니고, 0점을 받아온 것도 아닌데, 왜 이리 화를 내시지? 2등을 한 것이 그렇게도 큰 잘못인가? 생각했다. 그 날의 엄마가 너무 싫었다. 엄마에게 혼이 나기 전에는 공부를 하는 것이 나름 즐겁다면 즐거운 일이었는데, 그 이후로 공부를 할 때마다 조마조마했고, 엄마의 화난 얼굴이 떠올라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점점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처절하게 매달리는 꼴이 되었다. 그럼에도 도중에 설 수가 없었다. 그러면 또 다시 나는 혼이나야 했기에, 그것이 너무 싫었기에,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뛰고 걸어야 했다. 최종 목표가 아빠의 사업을 물려받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의식중에 그 자린 내 자리가 될거라 당연시 하는 마음이 있었다. 꽤나 오랜만에 가족 네명이서 외식을 할 때에 아빠는 형에게 슬슬 회사 일을 배우는 것이 좋을 거라는 이야기를 했다. 나를 제외한 형과 엄마 아빠는 나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형은 당연하단 듯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무언가가 머리를 세게 친 듯이 멍해졌다. 나는 이토록 열심히 노력했는데, 뛰는 도중에 잠깐 발이 삐끗한 걸로도 매를 맞고 혼이 나면서도, 쉬지 않고 달려왔는데. 형은 내가 한 노력의 발톱만큼의 노력도 하지 않았으면서, 어떻게 엄마아빠의 애정어린 관심을 받는걸까. 부모님은 내겐 기말고사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허튼 곳에 관심갖지 말고 공부에만 집중하라는 말 뿐이었다. 정말이지. 이상했다.
" 너는 대신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 했잖아. "
" 그건 형이지. 나는 엄마아빠에겐 아무것도 아니였어. "
" 내가 아빠의 뒷자리를 물려받은게 열받아? "
" 아니. 형처럼 노력없이 대가를 받는 사람이 싫을 뿐이야. "
" ...야 정재현. "
부모님과 나 사이는 딱히 나쁘다고 말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수능이 끝나고 대학교 입학 결과가 나오자마자 집을 나왔다. 길고 긴 아스팔트의 끝자락에서 이제 그만 내려오기로 했다. 그 대가는 생각했던 것 만큼이었다. 불같이 화를 내는 아빠의 목소리를 수화기 넘어로 들을 때의 나는 꽤나 담담했다. 그리고 이런 내 반응에 놀랐는지, 아님 수긍을 해버린건지, 아니면 나를 더이상 아들로써 인정하지 않음을 선고하려던건지. 간간히 뭐하고 지내냐는 형의 안부문자 외에 나는 가족들과의 접촉을 끊고 살았다. 홀로 생활하는 것은 나름 괜찮았다. 지금껏 살아온 집안에서도 나는 그저 묵묵히 내 할 일만 할 뿐이었기에. 다만 내가 조금 덜 잘해도, 더 잘해도 무어라 하는 이가 없어서 좋았다. 하지만 여태껏 살아온 나날들은 고스란히 내 곳곳에 그 흔적을 남겼다. 나는 엄격한 부모님과는 다른 사람이라 생각해오면서 똑같이 남들을 대하고 있었음을. 나는 깨달을 수 없었다.
" 재현씨, 재현씨는 꼭 말을 그렇게 해야만 하나요? "
" ....... "
" 그 사람의 실력이 좋으면 어떻고 안좋으면 어떤가요. 재현씨는 항상 남을 평가하려는 습관이 있는 것 같아요. 재현씨의 말 한 마디가 그 사람에겐 비수가 된 다는 걸 모르나요? "
" 미안해요 여주씨. 제가 실수를 한 것 같네요. "
" 아뇨, 재현씨는 그렇게 여기지 않잖아요. "
여주씨에게 말고도 나는 살아오면서 무례하다는 말을 꽤나 들었다. 그 때마다 속으론 도대체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나보다 노력 안 한 사람을 높이 평가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남들은 나를 솔직한 사람이라 불렀다. 맞는 말이었다. 성과를 놓고 봤을 때, 성과를 내지 못 한 사람은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고. 좋은 성과를 낸 사람은 능력이 좋은 사람이다. 좋은 직장, 좋은 직업, 좋은 직책에 있는 사람들은 그만큼의 노력을 한 사람들이다. 그 노력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나오는지 모르는 사람들이야말로 불공평을 외치는 것이다. 세상은 이치에 맞게 잘 돌아가고 있는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여주씨 말이 맞았다. 나는 무얼 잘못했는지, 여주씨가 나에게 이리 화를 내는지 이유를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내 말이 무례했음을 얼추 인정해야 이 싸움이 끝날 것 같았기에. 빠르게 수긍했지만 여주씨는 아직도 무언가 풀리지 않은 것 같다. 나도 슬슬 답답해졌다.
" 난 여주씨가 왜이렇게 화가 났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
" 그러겠죠. 우린 지금까지 한평생을 다르게 살아왔으니까요. "
" ....네. 그래서 그런가봐요. "
" 저는 재현씨가 좋은 사람인걸 알겠지만,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싸우게 된다면 계속 재현씨를 만나기에 자신이 없어요. "
" 그렇게 느끼게 해서 미안해요. ...앞으로 조심하고 더 노력할게요 내가. "
평생을 공부 밖에 모르고 살아온 내게 여주씨는, 처음으로 갖고 싶고,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한 사람이었다. 무언가를 위해 노력을 해올 땐 언제나 남들보다 덜 자고, 더 공부하는 방법밖엔 몰랐던 나에게. 한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한 노력을 하게끔 만들어준. 소중한 사람이었다. 나 역시 여주씨와 어느 한 부분에 있어 잘 통하지 않음을 알고 있지만. 내가 더 잘하겠다는 말을 하면서까지 붙잡고 싶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 약사보다 더 많은 노력을 했고, 여주씨를 만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쉽게 끝이 날 사랑이었다면 애초에 여주씨에게 고백하지도 않았을거다. 내가 여주씨를 싫어하는 일이 아닌 이상. 내가 여주씨를 놓아주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 여주쌤. 재현쌤이랑 사겨? "
" ...네? "
" 하도 주위에서 그렇다는 얘기가 많아서 직접 확인하고 싶어가지고 그래. "
" 아... 네. 얼마 안됐어요.. "
" 으음- 잘 어울려, 보기 좋아. "
어서오세요 ,
심야<心惹> 약국
거짓말이다. 어쩌다 비상구에 위치한 엘레베이터 앞에서 핸드폰을 하며 들은 둘의 대화는 숨 막히기 그지 없었다. 그럼에도 여주씨는 애써 웃음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 눈에 생생했다. 그런데 말야. 마냥 좋다고 생각해선 안 될거야. 여주쌤도 알지? 한 번 이상한 소문 돌면 여주씨만 피해야 알지? 한 손에 든 아메리카노를 홀짝거렸다. 왜지. 왜일까. 연애를 하는 것은 나와 여주씨 둘이 함께인데. 왜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7층에 엘레베이터가 모두 느렸던 모양인지, 얼떨결에 얼토당토 않는 으름장을 여주씨에게 내놓던 선생님과 비상구에서 마주쳤다. 너무 대놓고 흠칫하는 그 모습이 가여웠다. 왜 당사자 앞에선 떳떳하지 못할까. 충고랍시고 늘어놓은 말들이 결국 눈꼴시린 남의 연애사를 눈 앞에서 보기가 싫어서였겠지.
" ㅇ... 안녕하세요. "
" 다들 뒤에서 관심이 많나봐요. 딱히 연애를 한다고 나타내고 다니지 않았는데, 선생님까지 아는걸 보아하니. "
" 하... 하하. 뭐.. 같은 식구니까 그런거죠..... 별다른 이유는 없구요. "
" 인사도 하지 않는 식구가 세상에 있나요. "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고 윤 선생은 올라타지 않았다. 다만 급히 계단을 내려갈 뿐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닫힘 버튼을 눌렀다. 남의 사적인 영역에 뭐가 그리도 관심이 많은지. 여주씨는 가끔가다 눈에 띄게 기분이 좋지 않을 때가 있는데. 오늘이 그 날일 것만 같다. 이런 날은 꽤 조심해야 한다. 여주씨의 모든 말투, 행동에 애정이 깃들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것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 나지만. 그럴 때마다 불안하고 무서운건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이런 날에는 다른 곳으로 관심을 유도해보려, 잘 해보지도 않던 맛집 검색을 해보고 여주씨가 좋아할지 속으로 노심초사한다. 오늘도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며 배 많이 고프죠, 라고 운을 띄우는데, 여주씨가 말을 가로챘다.
" 밥 먹기 전에, 얘기 좀 나눴으면 해요. "
" ....그럴까요? 카페라도 갈래요 그럼? "
" 아뇨.. 그냥. 그냥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이요. "
그 순간부터 나는 머릿 속이 하얘지며 시동을 거는 손을 잠시 허공에 허우적 거렸다. 혹여나 여주씨가 보았을까봐 급히 기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뿌얘진 시야를 씻어내려 애썼다. 운전을 하며 여주씨의 손을 잡을까 했지만. 두 손을 깊숙이 숨겨버린 그 모습을 보고 핸들을 꽉 쥘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와 여주씨는 근처 공원에 차를 세웠다. 여주씨, 괜찮아요? 내 물음에 창밖만 바라보던 여주씨가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 별이 박힌 듯 예쁘게 빛이 나던 그 눈동자는 깜깜한 밤이 내린 듯 했다. 그런 눈은 마주하기가 겁나는데 말이죠. 혼자서 꾹 삼켜냈다.
" 재현씨, 우리 이쯤에서 그만 만나요. "
" .......여주씨. "
" 저요.. 너무.... 너무 힘들어요. 재현씨와 만나면서 자꾸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보게 되고, 숨기게 되고, 내 자신이 작아지는 기분이 들어요. 저는.. 저는 그런 연애는 싫어요. 재현씨한테 자꾸 미안하든 말 듣기도 싫구요. 재현씨. 정말 미안해요.. "
" 그렇게 느끼게 해서 미안해요. 부서를 바꾸는 건 어떨까요 여주씨? 우리 둘 다- "
" 아뇨. 이렇게 회피하면서 까지 재현씨를 계속 만날 자신이 없어요. 재현씨를 만나고서부터 저는 항상 병원에 있을 때 고개를 숙이고 다녔어요. 그게 아마, 제가 모자라서 일거에요. 나같은 사람이.. 재현씨를 만나는 건 애초에 말이 안 되는거였는데, "
" 그런게 어딨어요 여주씨. "
" 재현씨는 모를거에요. 저는 또 다시 세상을 등지고 숨고 싶지 않아요. 재현씨가 싫어서가 아니라. 숨고 싶지 않아서에요. 재현씨를 만나면 만날 수록 나에 대해서 잃어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요.. 재현씨처럼 좋은 사람 옆에 있을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나는. "
차에서 내리는 여주씨를 황급히 따라갔다. 손을 잡아 멈춰세운 여주씨는 울고 있었다. 언제나 웃게 해주고 싶었던 사람이, 나 때문에 울며 이별을 고하고 있다. 행복하려 시작한 사랑이 결국 눈물로써 그 끝을 써내려가고 있다. 서럽게 우는 그 모습을 보니 더이상 여주씨의 손을 잡고 있을 용기가 없었다. 어서 빨리, 이 손을 놓아주어야만 이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스륵- 풀린 힘에 여주씨는 그대로 뒤를 돌아 앞으로 갔다. 멀리, 더 멀리. 나에게서 멀어지는 여주씨는 점이 되어 사라져갔다.
* * *
딸랑-
어서오세..
아직 독서실에서 공부 중인 동혁을 위해 조제실 뒷방에서 야식을 만들던 민형은 종소리에 빠르게 뛰어나오다 멈춰섰다. 찬 바람이 순식간에 민형을 스쳐지나갔다. 재현은 천천히 민형의 앞으로 걸어갔다. 추워서인지, 그의 하얀 코끝이 빨개져있다. 민형이 말을 걸기 전에 재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주씨, 여주씨가 이곳에 왔었나요. 자세히보니 추위에 코끝이 빨개진 것이 아니었다. 재현의 눈가도 빨개져 있었다. 민형은 고개를 저었다. 재현은 마른 세수를 했다. 얼굴을 감싸며 탄식을 하는 재현을 보며 민형이 물었다. 왜요, 여주씨한테 무슨 일 있나요? 민형은 재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재현이 고개를 떨구며 답했다.
" 여주씨가.. 없어졌어요. "
쿵, 하고 민형의 심장이 저 깊은 심연으로 내려앉았다.
-열세 번째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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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앙아아 여러붕.. 너무 추워요... 엉엉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