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집 토끼놈 01 대학교 캠퍼스 안에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외제차가 멈춰 섰다. 정국은 몇몇 학생들의 시선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한 표정으로 운전석에 앉아있는 호석이 내민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차에서 내렸다. 몸을 비스듬히 차에 기댄 채로 캠퍼스를 둘러보던 정국이 곧 자신을 따라 내린 호석에게 말을 걸었다. “진짜 대학생 된 것 같고 좋네. 형, 형은 어때?” “나는 네가 사고 치고 다닐 거 수습할 생각에 벌써부터 힘이 빠지는 기분이야.” 잔뜩 들뜬 정국과 대비되는 호석이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한 채로 대답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호석은 정국의 수행비서이자 경호원으로서 이미 수년간 정국의 뒷바라지를 맡고 있었다. 정국이 망나니처럼은 아니어도 망아지만큼 여기저기에 온갖 일을 벌이고 다니던 탓에 그 뒷수습은 항상 호석의 몫이었다. 항상 군말 없이 그 어떤 일이든 척척 해결할 뿐만 아니라 매번 수행비서가 스스로 사직하게 만들던 정국도 호석을 꽤나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에 벌써 6년째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평범한 대학생처럼 한 번 살아보고 싶다는 정국의 말에 호석은 대학을 졸업한 지 6년 만에 다시 대학교 캠퍼스를 밟아야 했다. . . . . . “할아버지. 나 대학생 해보고 싶어.” 어릴 때부터 학교라면 진절머리나게 싫어하던 정국의 입에서 학교라는 것이 나오자 정국의 할아버지인 J그룹의 전회장이 반색하며 말했다. “정국아, 네가 드디어 공부라는 것을 해보고 싶은 것이구나! 내가 정비서에게 말을 해놓을 테니 가고 싶은 학교만 고르렴. 할아비 생각에는 예일이나 브라운이 괜찮을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떠냐?” 정국의 한마디 말에 다섯 마디, 여섯 마디의 말로 화답하는 모습에서 손자라면 두 팔 벌려 반기는 전회장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났다. 그의 결심을 다소 요란하게 반기는 전회장과는 달리 정국은 이런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이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미국? 에이, 할아버지. 한국에 있는 대학교 가야지.” “그래. 우리 손자 가고 싶은 학교로 말만 하면 다 알아서 처리해주마.” 그리고 다음 날 바로 호석에게 B대학교에 두 사람이 편입할 것이니 필요한 절차를 밟으라는 업무가 전달되었다. 아, 물론 해당 서류에 기입된 전정국이라는 글자 옆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한 호석은 실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 . . . . 캠퍼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정국과 호석은 학교 안의 작은 카페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다. 다리를 꼬고 앉은 정국이 호석에게 자신의 메뉴를 말하려다 말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니야. 형, 주문은 내가 할래. 카페라떼 마실거지?” “너 또 무슨 생각해. 이상한 짓 절대 하지 마, 생각도 하지 마” 항상 정국이 무슨 일을 일으키기 전에 짓는 표정을 발견한 호석이 신신당부를 해보지만 정국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일 뿐 별다른 대답 없이 성큼성큼 계산대로 향했다. 카운터에는 주문받을 직원 하나 없이 텅 비어있었고 그 뒤에서는 여주 혼자 다양한 음료를 정신없이 만들고 있었다. 정국은 카운터 앞에서 그런 여주의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만들던 음료를 모두 완성한 여주가 카운터에 홀로 서있는 정국을 발견하곤 재빨리 다가와 정국을 빤히 바라보았다. 홀로 주문도 받고 음료도 만드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을 여주가 ‘주문하시겠어요?’라고 물어야 하는 매뉴얼을 잊어버린 게 틀림없다. 반쯤 혼이 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주를 보며 정국은 자기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렸다. “아. 주, 주, 주문하시겠어요?” 정국의 실소에 정신이 번쩍 든 여주가 놀란 토끼 눈을 하며 말을 더듬었다. 정국은 눈을 동그랗게 뜬 여주를 바라보며 입가에서 새어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이스 카페라떼 하나랑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요.” “더 필요한 건 없으세요?” “그쪽 전화번호?” 같이 일하는 알바가 제멋대로 출근을 안 해서 혼자 모든 일을 해내야 했기 때문에 오늘 여주는 굉장히 짜증이 난 상태였다. 그래서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옷에 비싸 보이는 시계까지 걸치고 자신의 앞에서 개수작을 부리는 토끼같이 생긴 놈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 예상이 맞는다면 이놈은 필시 자기가 잘생겼다는 것을 알고 이 여자 저 여자에게 이런 식으로 매번 들이댔을 것이다. 문득 이런식으로 자신을 꼬신 망할 전 남친이 떠올라 정색을 하고 진동벨과 카드를 챙겨 눈앞의 토끼놈에게 내밀었다. “전 전화기가 없어서요. 음료 완성되면 진동벨 울려드리겠습니다.” 눈을 찡긋거리는 정국의 모습을 본 보통의 여자들이라면 홀린 듯이 번호를 주고도 남았을 상황이었다. 그리고 항상 그래왔기 때문에 평소와는 너무나도 다른 반응에 정국은 적잖게 당황하며 얌전히 여주가 내미는 진동벨과 카드, 영수증을 받아서 자리로 돌아왔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호석이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곁에 있던 6년 동안 정국은 수많은 여자들에게 저런 식으로 작업을 걸었고 그 작업은 실패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거절이라는 쓴맛을 본 정국의 표정은 전혀 상심한 표정이 아니었다. 묘하게 빛나는 그의 눈빛을 발견한 호석의 입에서 천천히 웃음기가 사라졌다. 불안한 표정으로 정국의 팔을 잡은 호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야 정국아, 너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거 아니지?” “뭔데” “설마 너, 나에게 이런 반응을 보인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널 가져야겠어. 이런 거 아니지? 그런 삼류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생각하는 거 아니지?” 불안함이 가득한 호석의 물음에 정국은 대답 대신 작게 웃으며 때마침 울리는 진동벨을 손에 들고 몸을 일으켰다. 카운터로 향하기 직전의 개구진 정국의 눈빛을 발견한 호석이 한숨을 쉬었다. 호석은 정국이 저 여자를 꼬시기 위해서 무슨 짓을 할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분명히 자신이 절대 예상하지 못 할 일을 벌일 정국을 잘 알기에 파란만장해질 대학 생활을 미리 걱정하며 한 손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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