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回歸
평소보다 일찍 눈을 뜬 탓에 거의 새벽부터 전정국의 집으로 향했다. 이 시간에 가면 잔다고 문도 안 열어줄텐데. 담배나 한 대 피우면서 기다릴 생각으로 막 오피스텔 입구에 다다랐을 때, 순간 잘 못 본건가 싶어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이 시간에 저 여자가 왜 저기서 나와?
"아, 안녕하세요."
피곤한 얼굴을 하고 건물 입구에서 나오다가 날 발견하고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며칠 전 일을 기억하는지 먼저 아는 체를 한다. 딱히 반갑게 인사할 사이도 아닌 것 같아 멀뚱히 서있었더니 민망한지 뒷머리를 긁적인다. 이 시각에 어쩐 일이세요? 순진한 얼굴로 묻는데 나도 모르게 대놓고 헛웃음 쳤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요. 목까지 끌어오르는 화를 누르고 말 한마디 없이 옆을 지나쳤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13층 버튼을 누르는데 손이 덜덜 떨려왔다. 곧 네 얼굴을 보면 난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냄새 역겨워. 불 꺼."
"…너,"
희뿌연 연기가 공중에 떠다니다 곧 사라졌다. 식탁에 앉아 내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그의 시선이 등 뒤에서도 느껴졌다. 너, 그 여자랑 잤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팅, 팅 수저가 그릇들과 충돌하던 소리가 멈추더니 얼마 안 가 식탁 위로 내려놓아지는 반듯한 소리가 들렸다.
"어."
아무렇지 않다는 듯 태연한 그 말은 내 심장을 겨냥하는 활 시위와도 같았다. 언제 다가온건지 어느새 내 앞에 서있는 전정국이 내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 한개피를 뺏어 베란다 창틀에 지져끈다. 올려다본 그의 눈빛이 차갑다 못해 얼어있다. 조용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굳게 다문 입술을 연다.
"어쩔 수 없는 인생이라는 것도 있더라고."
"…."
"사는 게 뜻대로만 되는 건 아니니까."
"…."
"네가 내 허락 없이는 마음대로 죽지도 못 하는 것처럼."
누가 내 가슴을 후벼파는 것 처럼 그의 말들이 아프게 다가왔다. 그 여자를 안았다는 것에 분통이 나기 보다, 싸늘함이 서린 기운 뒤 체념한 것 같은 그 슬픈 눈이 나를 괴롭게 했다.
"그럼, 정윤서는?"
돌아선 등에 대고 나지막이 말했다. 안 봐도 그의 표정이 어땠을 지 뻔했다. 어린 아이가 눈물을 참듯, 꽤나 원통한 얼굴일테지. 평소엔 그 모습을 보며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몸 속 깊이 분노가 느껴졌는데, 오늘은 좀 다르다. 그냥, 마음이 아프다. 좀 많이.
"닥쳐."
"…."
"네 입에서 한 번만 더 그 이름 나오면,
"…."
"그 땐 내가 너 죽여버릴지도 모르니까."
고개를 내게로 꺾어 채 숨기지도 못한 부들거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더니 성큼성큼 겉옷을 챙겨들고 사라져버린다.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스르륵 주저앉아버렸다. 왜, 왜 그렇게 힘든 길을 스스로 택하는거야. 끝내 이루어지지 못할 한 사람을 가슴에 품고 사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아는데. 그래놓고 다른 사람의 품에서 살아가겠다니. 질투도, 원망도, 죄책감도 아니었다. 마음 한 켠 자리잡고 있는 이 감정은, 순수하게 그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진심어린 걱정이었다.
―
"교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참관 수업을 마친 후 담임선생님 시간이 남은 아이들을 두고 학부모들이 우르르 교내를 빠져나갔다. 나도 그 무리에 섞여 자가용이 여러 대 자리잡고 있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다시는 이렇게 드넓은 운동장, 볼 일 없을 줄 알았는데. 내게 학창시절이란 추억은 사치였다. 아니, 내 머릿속에 자리잡은 과거란 과거는 모두 다. 아무 생각없이 행복하기만 했던 날이 아주 잠깐이라도 있었으면 그 기억이라도 붙들고 아등바등 살 텐데, 그 마저도 내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교문 옆 담벼락에 기대어 습관처럼 담배갑을 꺼내들었다. 아영이 앞에선 되도록 자제하려고 하는데, 지금 옆에 없으니 한 개피정돈 괜찮겠지. 불을 붙이자 타들어가는 잿더미를 한 번 털어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기만 한 하늘색 도화지를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려다 문득 귀를 사로잡는 부산스러운 소리에 중단됐다.
"봐, 내가 얘 엄마 없댔지?"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엄마 아빠 없는거 애들도 다 알아."
낯익은 저 뒷태.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어린 아이들 무리가 한 눈에 들어왔다. 저를 손가락질하며 점점 다가오는 이들에 겁을 먹은것인지 주눅이 든 어린 여자아이의 어깨를 보자마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깔깔거리며 자기들끼리 자지러지기 바쁜 아이들을 보며 경악하다,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한참 지독한 향을 뿜어내고 있는 흰 막대를 꼭 쥐고 그 곳으로 다가갔다. 괜히 치맛자락만 꽉 쥐고 있던 자그마한 손을 낚아채 잡았더니 나를 올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언니이. 무식하게 웃어제끼던 어린 양들은 놀라 나를 쳐다본다.
"다시 말해봐. 뭐라고?"
"…."
"왜 말을 못해. 너 벙어리야?"
가장 목소리를 크게 내던 남자 아이 한 명을 담배를 끼운 손가락으로 가르키니 공포에 질린 눈빛이 드러났다. 입술을 옴짝달싹하며 우물거리더니 이내 뻣뻣한 고개를 쳐들고 소리친다. 저 잘못한 거 없는데요! 맞는 말만 했어요, 저. 말은 드세게 잘만 하면서 어째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 그 모습이 하도 귀여워서 또 내 신경을 긁었다.
"그러니까, 그 말이 뭔데. 내 앞에서 똑같이 해보라고."
"…김아영 너 엄마 아빠 없는 거 맞잖아! 그래놓고 가족 소개할때는 뻔뻔하게,"
말을 잇지 못하고 아이가 쓰러졌다. 길바닥으로 굴러떨어진 아이는 방금 발로 채인 제 어깨를 부여잡으며 울부짖었다. 함께 있던 아이들은 어찌할 줄 몰라 내게서 점점 멀어지고만 있었다. 내 소매를 꽉 붙든 아영이는 잠시 움찔하더니 아예 내 등 뒤로 숨어버린 듯 했다. 그리고 10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 아이를 걷어차버린 나는 담배연기를 한 모금 뿜어내며 그 앞으로 다가섰다.
"얘 너 되게 웃긴다."
"…흐으, 흐."
"그러는 넌 네 엄마한테 얼마나 잘 배워서 이따위로 지껄이고 다니는데?"
"…흑,끄윽…."
아무래도 초등학교 주변이다보니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가던 학부모들이 힐끔거리며 이 쪽을 쳐다보는게 느껴졌다. 거의 수명을 다 한 담뱃불을 밟아 끈 뒤 울먹이며 입술을 파르르 떠는 꼴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이것봐라, 칼은 지가 휘둘러놓고 왜 저가 찔린 것 마냥 눈물부터 보이는지. 어이없어 웃다가도 몸을 떨어대는게 안쓰러워 보여 일으켜줄 생각으로 한 발자국 다가섰을 때, 점점 가까워지던 구두굽소리가 밝아지며 누군가 쓰러진 아이를 잡아세웠다. 그리고,
"뭐하는 짓이야!"
살과 살이 부딪히는 마찰음과 함께 내 얼굴이 반쯤 돌아갔다. 점점 쓰라려오는 뺨을 한 손으로 감싸쥐며 중년의 여성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더니 눈을 부라리며 나를 째린다. 어디 못 배워먹은 년이 남의 자식 몸에 손을 대! 제 정신이야?! 삿대질을 하는 손가락이 내 눈 앞에 왔다갔다거렸다. 내 손에 붙잡힌 작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나 또한 여자에게 매서운 눈빛을 보냈다.
"뭘 잘 했다고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봐?!"
"…."
"안 되겠어. 경찰 불러. 경찰 불러, 당장!"
…꽤나 피곤해질 듯 하다.
"내 말 못 들었어요? 글쎄 이 여자가, 우리 아들한테 폭력을 썼다니까! 아직 10살도 안 된 어린앤데,"
아, 시끄러워. 옆에서 쨍쨍 울리며 버럭버럭 하는데 귀를 틀어막을 수도 없고, 참. 경찰은 난감한 표정으로 여자와 나를 번갈아보더니 후에 줄곧 내게로 시선을 던진다.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는 그런 의미겠지. 여자의 말은 다소 과장된 표현이 섞여있으나 폭력은 사실이니 딱히 할 말도 없고, 억울하지도 않아서 그냥저냥 앉아있기만 했다. 이제 겨우 울음을 그친 남자아이와 아영이는 옆에 나란히 앉아 요구르트를 쪽쪽 빨며 이 곳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어머니 말씀은 잘 알겠구요,"
"나 합의 절대 안 해!"
"아니, 어머니…."
경찰도 답답한지 제 머리를 헤집어보였다. 경찰서에 들어선 뒤로 한마디도 않는 내가 못마땅해 보였는지, 여자는 틈만 나면 나를 노려보고 싫은소리를 중얼거렸다. 이래서, 부모 없는 애들은 안 된다니까. 이 말이 그 여자 목구멍에서 뱉어지는 순간, 여태 귀담아 듣지도 않던 나는 속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말 한마디에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내 행동이 어떨지는 그 다음부터 뻔했다. 소리없이 저를 쳐다보는 내 시선을 느낀 여자는 뭘 쳐다보냐며 나를 다그쳤고, 나는 주먹부터 꽉 쥐었다. 핏줄이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꽉 쥐어진 주먹위로 난데없이 따뜻한 손길이 느껴지면서, 나는 잃어버린 이성을 되찾았다.
"…네가 여기 왜,"
"아,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때 아닌 웃음을 지으며 허리를 접어보이는 김태형을 황당하게 쳐다봤다. 번뜩한 생각에 뒤돌아 아영이를 쳐다보니 내 앞에 서있는 김태형을 발견하고 놀라 내 눈을 피해버린다. 그제서야 아영이 손에 들린 내 폴더폰이 눈에 들어왔고,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어리둥절해진 여자에게 연신 고개를 숙여대는 김태형만 쳐다볼 뿐이다.
"네가 사과를 왜 하냐고!"
"그 상황에서 사과 안 하고 버티는 게 더 웃기는 거 알아?"
"내가 먼저 시작한 거 아니거든? 걔가 먼저 개념없이 굴었다고! 내가 깡패도 아니고 멀쩡한 애를 왜 건드리겠어."
게슴츠레한 눈빛이 꼭 나를 의심하는 것 같아 억울해서 막 내뱉었더니 김태형은 시끄럽다는 듯 제 귀를 틀어막았다. 아아, 알겠어. 네 잘못 아니야. 그래 아니야. 나를 대충 달래주듯 그렇게 말하더니 무릎을 굽혀 아영이와 눈을 맞춘다. 오랜만에 오빠 만났는데, 오빠가 아이스크림 사줄까? 나와는 달리 꿀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다정한 눈으로, 두 손을 꼭 잡고 묻는다. 아영이가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히히, 웃으며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는다. 밥도 안 먹었는데 무슨 아이스크림이야. 안돼. 팔짱을 낀 채로 단 칼에 잘라버리듯 말하자 김태형이 굽히고 있던 몸을 슬며시 일으킨다. 죄인은 입을 다무시오. 장난이지만 진지한 어투로 말하길래 발끈한 얼굴로 녀석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를 마주보고 서서 헤벌레 웃던 녀석이 어쩐 일인지 차차 표정을 굳힌다. …왜?
"너 맞았어?"
일순간 심각해지더니 살짝 두었던 거리를 좁혀왔다. 잊고 있었다. 아픔을 느낄 새도 없었는지 맞았다는 사실이 자각되자 그제서야 통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제 와 보니 맞으면서 입 안이 터진건지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그냥, 좀…. 뚜렷하게 말하지 못하고 눈을 피했더니 녀석의 오른 팔이 들리며 이윽고 내 뺨에 닿는 큰 손이 느껴졌다. 어디 봐. 걱정스러운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고 본능적으로 그 손을 탁, 쳐냈다. …아이스크림 먹으러 간다며. 안 가? 벙쪄있는 김태형을 지나치고 아영이의 손을 잡아끌었다. 한동안 그자리에 서있던 김태형은 착잡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곧 내 뒤를 따랐다.
―
"너 진짜 그 결혼 할거야?"
지민이 물컵을 제 입에 가져다대며 물었다. 말 없이 음식을 씹어넘기고 있던 정국이 고개를 들어 지민을 쳐다보자 움찔한 지민은 말을 더듬는다. 아,아니… 그냥 네가 내키지 않아하는 것 같아서. 눈칫밥이라는게 바로 이런 걸까. 안 그래도 정국과 둘만 있으면 어두운 기운에 저까지 무기력해지는데 괜한 말을 꺼내 분위기만 더 삭막해졌다. 잠시 생각을 하던 정국이 물수건으로 입을 닦더니 그대로 식탁에 가볍게 던졌다. 그럼 결혼을 가짜로 할 수도 있나. 힘 없는 음성에 지민이 마시던 물컵을 내려놓았다.
"하기 싫으면 회장님께 잘 말씀드려봐. 그리고 내가 보기엔 너 아직… 윤서 못 잊은 것 같기도 하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 정국의 눈치를 본다. 깊은 늪에 빠진 것 같은 정국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잊어야지."
"…뭐?"
"잊으려고 노력해야지, 이제."
안 그러면 내가 진짜 이대로 못 살 것 같거든. 뒷말은 삼킨 채 정국이 뜨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지민은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다시 물만 벌컥벌컥 마셨다. 마주보고 있는 쓸쓸한 낯빛을 보기만 해도 목이 메이는 느낌이었다. 윤서의 생각을 어떻게든 접어보려 애쓰던 정국은 괜히 쓸데없는 잡생각들로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아침엔 뭘 했고, 회사에선 이런 일이 있었고 등등 가벼운 일들이 슬슬 자리잡고 있을 때 즈음, 뭔가 허전한 느낌에 정국이 벗어두었던 겉옷을 뒤적거렸다.
"누구 연락 기다려?"
아까부터 제 핸드폰 화면만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정국을 지민이 이상하게 보았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듯, 점점 날이 서는 눈썹이 불쾌함을 일러주고 있었다. 이 시간즈음 되면 연락이 와야하는데.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뜬 정국이 신경질적이게 핸드폰을 식탁위로 놓았다. 저녁시간이 되어 제 집에 다시 들어와 일하는 여주는 정국이 말 없이 집을 비울때면 전화를 꼭 먼저 걸어왔다. 가끔 집 앞에서 말없이 기다리기만 할 때도 있었는데, 그러다가도 8시가 넘어가면 기다렸다는 듯 연락이 왔었다. 그런데 지금은,
"…돈 받고 하는 일에 이젠 마음대로 펑크도 내고,"
"응?… 아, 너 설마 여주 말하는거야?"
척하면 척이었다. 정국 밑에서 돈받고 일하는 이 중 저만큼 심기를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여주밖에 없었다. 지민의 말에 섞인 이름에 정국이 지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 태형이랑 전화하니까 둘이 같이 있는 것 같던데."
"김태형?"
"우리가 아는 태형이가 걔 말고 또 있었냐?"
별다른 의도없이 아는 사실만 일러줬을 뿐인데 정국의 반응이 예상과는 좀 다르다. 태형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불편한 기색을 보이더니 어느새 날이 선 눈빛에 지민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둘이 같이 있다고? 왜? 그저 여주가 저에게 말 한마디 없이 자리를 비운 것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것이라고 지민이 취조하듯 묻는 정국의 말에 잠시 벙쪘다.
"그냥, 둘이 원래 같이 잘 다니잖아."
"…."
"고등학교 때부터 그랬는데, 뭘 새삼스럽게."
정국의 안색을 살피긴 한 건지 지민은 눈치없이 웃어보였다. 난 솔직히 김여주 좀 무섭던데. 그리고 한 번 열린 입은 닫힐 줄을 모르고 마음껏 발설해댔다. 걔 너무 변했어. 요즘 걔 보기만 해도 막 살기가 느껴진다니까?
"김태형 진짜 대단하지 않냐? 고등학교 때처럼 그냥 아무렇지 않게 대한다?"
"…."
"난 눈만 마주쳐도 무서워 죽겠던데."
여주와 태형이 각별한 사이인 건 정국도 알고 있었다. 둘은 고등학교 때부터 그랬으니. 아마 정국이 윤서와 교제를 시작하고 주변에 소홀해진 이후로 부쩍 더 붙어다닌다고는 눈치채고 있었다. 그리고 불미스러운 그 일이 발생한 후에, 정국이 여주를 멀리하던 그 쯔음 어쩐 일인지 태형은 더욱이 여주를 챙겼다.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분노에 휩싸인 정국쯤은 신경도 안 쓰인다는 듯 태형은 늘 여주의 곁에서 서성거렸다. 그 모습을 정국이 달갑게 생각할 리 없었다. 정국에게 여주는 저에게 감당하기 힘든 불행을 안겨준 이에 불과한 사람인데 그녀를 감싸고 도는 태형을 덩달아 못마땅히 여기는 것이 어쩌면 당연했다. 그 덕에 윤서의 죽음 이후로 정국과 태형의 관계는 자연스레 멀어졌고.
제 말에 맞장구 쳐주기만을 기다리던 지민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이내 의아하게 변했다. 핸드폰을 쥔 정국의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곧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먼저 간다. 그 말만 남기고 겉옷을 챙겨 나가는 정국의 뒷모습을 지민이 어이없게 쳐다봤다. 뭐야아…. 시무룩한 얼굴로 반 이상 남은 음식들을 쳐다보고만 있으면 수저통 밑에 깔린 계산서가 그제야 눈에 들어온다. 경악하며 계산서를 꼭 쥔 지민의 손이 달달 떨렸다. 젠장, 망했다.
―
태형이오빠는 언제 봐도 잘생겼어, 그치? 김태형이 사준 인형을 품에 안고 쫑알쫑알 잘도 말하길래 픽, 하고 바람빠지게 웃었다. 걔가 잘생기긴 무슨. 뭐, 고등학교 때에는 여자애들 여럿 울리긴 했지. 옆에 있는 날 시기하는 눈빛들이 어찌나 무섭던지. 오금이 저리는 싸한 시선들이 다시 떠올라 진저리쳤다. 인형이 썩 마음에 드는지 줄곧 김태형 얘기만 늘어놓는다. 똑똑한 놈… 아무래도 이번 뇌물공세 작전은 성공인 듯 하다.
가파른 언덕을 덤어 반지하방에 거의 다다랐을 때, 텅 빈 도로가에 이질적인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눈에 익은 고급 외제차를 보자마자 온 몸의 신경이 깨어난 느낌과 함께 발걸음을 멈추었다. 핸들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가 마침 고개를 든 전정국과 우연치않게 눈이 마주쳤다. 언니, 왜그래애? 차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으며 허리를 숙여 아영이의 두 어깨를 짚었다. 언니 잠깐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 먼저 들어가있어. 눈을 몇 번 깜빡이던 아영이는 알겠다며 밝게 대답하더니 반지하방 문을 열고 홀로 집 안에 들어선다.
"…어쩐 일이야. 말도 없이."
일부러 다른 곳을 쳐다보며 말했다. 뭔지는 몰라도 전정국이 나를 찾은 이유에 좋은 항목은 없으니까. 실소를 터뜨리던 그가 '어쩐 일이야?' 하고 어이없어하는 어조로 말했다.
"난 분명 우리집 비밀번호를 알려준 적도 없는데 연락이 없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서."
"…."
"하도 걱정돼서 말이야."
비꼬아대는 말투가 상당히 불편했다. '걱정'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게 꽤나 격양된 목소리다. 난 그냥, 박지민 만난다길래 저녁 먹고 오는 줄 알았지. 지금은 싸울 힘도, 싹싹 빌 힘도 없이 몸이 지친 상태라 상대할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귀찮아하며 툭툭 아무렇게나 내뱉어지는 대로 내뱉었다. 심기불편해할 그의 얼굴이 안 봐도 뻔하다.
"누가 그래?"
"뭐?"
"나 박지민 만난다고 누가 일러주디."
갑자기 그건 왜 묻나 싶어 눈알만 굴리고 있자 전정국의 그림자가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온다.
"야, 정신차려."
"…."
"네 고용주가 김태형이야? 지금 너 누구 말 듣고 움직이냐고."
하아. 옅은 한숨이 내 입에서 흘러나와 흩어졌다. 무슨 말을 더 해야하나. 미안하다는 말은 또 자존심 상하고, 또 감정싸움 일으키기엔 그럴 힘도, 할 말도 없고. 그저 이 상황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며 그렇게 서 있는데, 바로 위에 위치한 가로등불이 몇 번 깜빡이더니 어두운 밤하늘이 덮고 있던 길가가 환해졌다. 위를 한 번 쳐다보다가 그대로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리며 드디어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알겠으니까 그만 가. 늦었어. 순순히 내 말을 따르지 않을거라는 걸 알기에 곧 저 새초롬한 입술 틈으로 새어나올 험한 말들을 예상하고 있는데, 예상외로 잠잠하다. 잠깐 다른 곳에 두었던 시선을 옮겨 다시 놈에게 두었더니 전정국은 점점 나에게 얼굴을 가까이하고 있었다익숙치 않은 민망하리만큼 진득한 시선에 왜 이러냐며 그의 어깨를 살짝 밀쳐내기도 전이었다. 슬며시 뒷걸음질치던 나에게 몸을 밀착시키더니 내 두 볼을 부여잡아버린다. 차가운 손바닥이 뜨거운 뺨을 감쌌고, 그에 당황한 나는 어버버거리기만 했다.
"…너 여기 왜 이래."
"무슨,"
아, 또 잊고 있었다. 아직까지 가라앉지 못한 부어오른 내 뺨을 보고서 이러는 것 같다. 그냥… 어디 좀 부딪혔어. 나답지 않게 말도 안되는 거짓말로 덮어버렸다. 그렇다고 학교 앞에서 어린 애 부모님이랑 실랑이를 했다고 이실직고 할 순 없지 않은가. 그런 잡다한 얘기 털어놓을 만큼 편한 사이도 아니고. 택도 없는 내 변명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다. 꼼짝 못하고 그의 두 눈을 바라보고만 있게 된 내가 두 팔을 들어 그를 뿌리쳤다. 왜 이래. 짜증스러운 내 말투에 전정국은 떨궈진 제 손만 움찔거렸다. 유독 내 몸에 탈이 있을 때에 크게 반응하는 그였다. 절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는 건 말 안 해도 알지만.
한참 말이 없던 전정국은 곧 미련없이 뒤돌아 제 차에 몸을 실었다. 시동이 걸리고 텅 빈 길가를 빠져나갈 때 까지 애써 못 본 척 하다가 완전히 흔적을 감추었을 때 즈음 가로등에 기대어 몸을 지탱했다. 그렇게 한참 그 곳에 혼자 서있기만 했던 것 같다.
와 지난 화랑 비교해보니 글자수 거의 2배 차이에요...
이걸 바로 분량 조절 실패라고 하는군요..ㅋㅋ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지난화 댓글 달아주신분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