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동거
내가 아무리 집순이라지만, 핸드폰도 없고, 노트북도 없고. 유일하게 있는 티비는 다시보기 서비스 같은 것도 되지 않았다. 봤던 예능을 또 보고, 드라마를 또 보고 하다보니 이것도 이제 지겹다. 쇼파에 축 늘어져 지루함을 온 몸으로 표현하다, 자켓을 걸치며 현관으로 향하는 박지민에게 다가갔다.
"어디 가세요?"
"마트 갑니다."
"저도 가면 안 돼요?"
"안 됩니다."
무작정 질러 본 것이다. 한달의 반이 지나갈 정도로 바깥 공기 한번 쐬지 못해서, 답답하기도 했고. 이렇게 단호히 대답할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금지하는 게 외출인데, 그 외출을 하겠다고 하니 박지민의 표정이 좋지 않다.
"한 번만요.. 진짜 답답해서 그래요."
"안 된다고 했,"
"도망 안 갈게요!"
"..."
"진짜 옆에 꼭 붙어 있을게요. 뭐 손이라도 잡고 다닐까요?"
밖으로 나가기 위해 이렇게 노력했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열심히 매달렸다. 물론, 말로. 말까지 끊어가며 조르는 내 태도에 박지민은 골치가 아파오는 듯 인상을 살짝 쓰며 손으로 이마를 짚는다. 손이라도 잡고 다닐까요? 하는 말에 눈썹 사이의 인상이 더 깊어지며 딱 잘라 말한다.
"싫습니다."
"..나도 뭐 내키지는 않거든요?"
누군 좋아서 그러는 줄 아나. 그 뒤로 아무 말 없는 박지민에게 한 번만요 제발요 하는 말들을 계속해서 이어붙였다. 한동안 뭔가를 생각하던 박지민이 드디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외투 챙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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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의 차를 타고 마트로 가는 동안, 귀에 딱지가 앉도록 주의사항을 들었다. 카트를 꼭 잡고 손을 떼지 않을 것, 소리 지르거나 돌발행동을 하면 즉시 집에 돌아올 것, 등등. 납치범과의 장보기라니. 당장 차 문을 열고 도망갈 의지도 없는 나 자신이 신기했다. 다른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쳐 나갔을텐데.
"근데요,"
"..."
"여기 어디에요? 지역이?"
"알 것 없습니다."
박지민은 집에서의 얼굴과 묘하게 달랐다. 무엇인가를 경계하는 듯 신경에 날이 서 있었고, 예민함이 한껏 뿜어져 나왔다. 낮인데 무슨 일이라도 생기려나 싶어 마음을 놓고 있는 나와는 정 반대였다. 나온 김에 혹시 내가 아는 지역인가 싶어 물어봤지만 앞만 보며 대답하는 박지민의 모습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마트에 도착해 주차까지 끝낸 박지민은, 벨트를 풀고 나를 바라보며 가만히 있어요. 한다. 먼저 문을 열고 내리는 박지민의 모습을 멀뚱히 보조석에서 쳐다보고 있으니, 내 쪽으로 와 문을 열고선 내 앞으로 몸을 숙인다. 금세 가까워진 박지민의 얼굴에 나는 차 시트에 몸을 붙였다.
"도망 갈 생각 버려요."
"..."
"얼마 안 가서 나한테 잡힐거니까."
살벌한 눈빛으로 낮게 말하는 박지민의 모습에 순간 등골이 서늘했다. 이 사람이 나를 납치했다는 사실이 여실히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전에도 느꼈던 그 압도감에 침을 꿀꺽 삼키곤 고개를 끄덕였다. 내 끄덕거림을 본 박지민은 내 안전벨트를 달칵, 하고 풀어주었다. 문을 닫고 박지민 옆에 서니, 뒤로 한 걸음 물러선다.
"..?"
"무조건 내 앞에서 움직여요."
"..네."
"가죠."
무서워라.. 집에서 본 약간은 소심한 모습과 전혀 딴판이었다. 뭐가 진짜 성격이지.. 마트만 오면 즐거웠는데, 오늘은 두려움을 담은 약간의 떨림이 느껴졌다. 곧 박지민이 카트를 뽑고, 나는 그 카트를 손으로 꼭 잡았다. 마트를 천천히 돌며, 나는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지역 이름 하나는 당연히 쓰여있지 않을까 싶어서.
"다 샀어요?"
"네."
용인. 박지민 몰래 열심히 눈을 굴린 결과, 이곳이 경기도 용인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고 주차장까지 얌전히 내려갔다. 원래 집이 있던 서울까지는 가는 길도 몰랐고, 핸드폰도 지갑도 없었기에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어떻게 하지, 하고 있는 나 스스로가 갑자기 낯설었다. 집 안에 있을 때에는 집으로 돌아갈 의지도 없었는데, 밖에 나오니 저절로 집을 떠올리게 되었다.
"타요."
박지민은 짐 때문인지, 아까와는 달리 알아서 차에 타라는 신호를 주었다. 그가 뒷좌석에 봉투를 집어 넣는 사이, 별 생각 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트인 공간이 없어 조명이 그다지 밝지 않은 주차장에 차들이 가득 차 있었다. 시선을 옮기다 문득,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ㅃ,"
미처 아빠라고 다 말하기도 전에, 소리도 없이 다가온 박지민이 내 입을 막고 차에 태웠다. 벨트를 채울 때까지 내 입을 막은 손을 떼지 않은 박지민은, 아까보다 훨씬 더 굳은 표정이었다. 분명 아빠가 맞는데, 나를 바라보는 박지민의 눈빛이 너무나도 나를 두렵게 만들어 손이 떨려왔다. 박지민이 나에게 손을 댄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
"다시는,"
"..."
"밖에 못 나올겁니다."
이렇게 날 선 눈빛도.
아까부터 자꾸 차오르는 눈물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진정되질 않았다. 그런 나를 신경쓰지도 않고 차를 몰던 박지민은 머리를 한번 쓸어넘기더니 덤덤하게 말해왔다.
"이사 가야겠네요."
"..."
"아까 봤죠, 용인이라는 거."
확실히, 박지민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이사 가야겠다는 말이 농담은 아니었는지, 박지민은 자고 일어난 나를 태우곤 새로운 집으로 데려왔다. 물론 안대를 쓴 상태로. 벗으면 정말 무슨 짓이라도 할 것만 같은 느낌에 얌전히 있을 뿐이었다.
"밥 먹어요."
"..네."
확실히 집에서는 훨씬 유한 모습이다. 어제 마트에서 본 느낌과는 전혀 다른. 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의 박지민이 익숙하지 않아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면서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전과는 달리 밥을 깨작이는 날 알아채고는 맛 없어요? 하고 묻는다.
"아뇨, 뭐.."
"..이따 잠깐 나가야 합니다."
"..."
"늦어질 것 같으니까 먼저 자고 있어요."
그 말을 끝으로, 박지민은 물을 마시곤 어두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일 낮에만 나가던 박지민이 무슨 일인지 이렇게 해가 지고 있는 시간에 나가야 한단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망설임 없이 방으로 들어가는 박지민의 모습과 어제의 모습이 겹쳐저 입을 꾹 다물었다.
티비를 보다가 쇼파에서 잠깐 잠에 들었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와, 터덜터덜 걷는 소리가 들려 천천히 눈을 뜨니, 박지민이 들어오고 있었다. 온전치 못한 모습으로. 입술 옆은 피가 터져 있고,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으며 흰 셔츠에는 붉은 혈흔이 묻어 있었다. 잠결에 본 모습이지만 잠이 확 달아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에요?"
"..."
잔뜩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는 나를 신경도 쓰지 않고,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는 박지민이다. 힘겨워하는 모습이 묘하게 아빠와 닮아,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피를 닦을 생각도 없는 것인지 힘없이 침대로 풀썩 쓰러진 박지민은 나는 안중에도 없는 듯 눈을 감았다. 그런 박지민을 쳐다보다, 얼른 구급상자를 들고 방으로 다시 들어왔다. 다쳐서 피를 흘리는 사람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어서, 얼굴이라도 소독하려 하는데 그런 내 손을 탁 하고 조금은 거칠게 쳐낸다.
"됐습니다."
"..아니 이거,"
"자고 있으라고 했을텐데."
"..."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박지민이 한숨을 내쉬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입가의 상처 때문에, 입을 열 때마다 고통이 느껴지는 듯 했다. 박지민에게 내쳐진 손이 살짝 아려왔다. 내가 말없이 쳐다보고 있으니, 아예 팔을 들어 자신의 눈을 가린다. 그에 나도 조용히 방을 나왔다.
한 번의 외출 이후로, 묘한 긴장감이 집 안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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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민이의 냉한 모먼트에 새삼 치여서 끄적여 보았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