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동거
시간이 약이라던가. 마트 사건 이후에 조금은 어색해졌던 집안의 분위기가 차츰 풀려갔다. 나도 새로운 집에 적응해 가고 있었고, 박지민은 예전처럼 다쳐서 들어오는 일이 없었다. 예전보다 더 밖을 안 나가는 것 같기도 하고. 새로운 집에서도 핸드폰은 쓸 수 없었으며, 노트북도 물론 없었고, TV도 전과 똑같았다.
지루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려 방 창문을 열고 밖을 쳐다보았다. 찬 공기와 맞닿은 숨이 하얗게 번져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여기도 역시 주택가라, 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고 사방을 둘러봐도 다 주택들 뿐이었다. 이런 풍경에 하얀 철창이라니. 다시 갑갑해지려다, 붉게 노을이 지는 모습에 시선을 뺏겼다.가만히 바라보니 어느새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아직 잠들기엔 이른 시간이지만,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침대에 풀썩 누워 잠을 청했다.
아, 더워..
꿈을 꾸고 있진 않은데, 몸이 너무 뜨겁고 식은땀이 계속해서 났다. 이불을 걷어차도 뜨거움이 사라지질 않는다. 자꾸만 오르는 열에 숨이 턱턱 막혀왔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침대를 굴러다니는데, 차가운 손이 내 이마를 짚는다. 그 손이 구세주라도 된 듯 덥썩 잡고 뜨거운 얼굴 여기저기에 갖다 댔다. 그러자 조금씩 정신이 들어 천천히 눈을 뜨니, 나에게 한쪽 손이 잡혀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는 박지민이 보인다.
"..문을 왜 열어놓고 잤어요."
"..."
대답할 기운도 없었다. 어제 잠깐 창 밖을 본다고 열어놨던 게, 밤새 열려 있었나 보다. 뜨거운 숨만 쌕쌕 내뱉으니, 박지민은 내 이마와 목 등에 손을 대며 열을 재는 듯 했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더니, 이불을 다시 잘 덮어준다.
"그대로 있어요."
방 밖으로 나간 박지민은, 곧 여러개의 약과 물 한잔을 가지고 들어온다. 화장대 의자를 가져와 침대 옆에 앉더니 바스락거리며 약을 꺼낸다. 손바닥에 알약 두 개를 놓더니, 나를 한번 쳐다본다. 잠깐 몸 일으킬 수 있냐는 말에 꾸역꾸역 상체를 세웠다. 여전히 정신없는 상태로 박지민이 주는 약과 물을 받아 삼켰다.
"있잖아요.."
"..."
"밖에선 그렇게 차갑게 굴고.. 집에선 잘해주고.. 뭐가 진짜에요?"
다시 침대에 누웠고, 이불을 덮어주는 박지민에게 물었다. 제 정신도 아닌데, 물어보기나 하자는 마음이었다. 내 말에도 아무런 표정변화 없이 나를 바라본다. 점점 잠이 오는데도 박지민은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인다. 느리게 깜빡이던 눈이 감겨가고, 잠에 들기 전 마지막으로 들은 말은,
"미안합니다."
뭐가 미안하다는 걸까.
박지민의 간호 덕분인지, 내 감기는 하루만에 싹 사라졌다. 그리고 잠들기 전 박지민의 생활에는 한 가지 단계가 추가되었다.
"아, 문 닫았어요!"
"..."
매일 밤 잠들기 전, 내 방의 창문이 열렸는지 닫혔는지 확인하는 것. 처음엔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겼지만 며칠이 지나도 계속되는 확인에 침대에 누워있던 내가 장난 반 진심 반으로 소리친 적도 있다. 박지민은 내가 그러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았지만.
이 집에서 지내며 가장 고역인 것은, 심심함이었다.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는데 놀 게 너무 없어서 하루종일 지루해 심심해를 입에 달고 살았다. 당연히 함께 지내는 박지민도 내가 심심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늘도 봤던 방송을 보며 거실에 앉아 스트레칭을 하는데, 바깥의 찬 공기를 몰고 들어온 박지민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내밀었다. 저번에 티비에서 보았던 게임기였다.
"이거 저 주는 거에요?"
"네."
"제가 심심하다고 그래서?"
"..아닙니다."
오, 좀 감동인데. 아무렴 어떤가. 신상 게임기를 받고 기분이 좋아진 내가 참 오랜만에 생글생글 웃었다. 박지민은 내 웃는 얼굴이 낯선지 나를 힐끗 보고선 눈썹을 한번 들어올렸다. 간호도 해주고, 게임기도 사다주고, 박지민은 요즘 나에게 잘해주는 것 투성이었다. 나도 뭘 해줘야 하나.. 방으로 들어가 외투를 벗고 나온 박지민에게 제가 밥 해드릴까요? 하고 물었다.
"..갑자기?"
"아니 뭐, 게임기 보답?"
갑자기 밝아진 내가 적응되지 않는지 미심쩍은 표정을 짓던 박지민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20분 후, 나는 멋지게 오므라이스를 만들어 박지민 앞에 내려놓았다. 꽤 많은 양에 마시던 물을 내려놓은 박지민이 나를 바라보았다.
"이걸 다 먹습니까?"
"네!"
"..."
"힘 쓰는 일 하는데 이정도야 뭐.."
평소 아빠가 먹던 양처럼 했는데, 박지민은 그렇게 많이 먹는 편은 아닌건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내 입에서 나온 힘 쓰는 일 이라는 말에 박지민이 힘 쓰는 일? 하고 되묻는다.
"..어..주먹을 쓴다던가..뭐 그런?"
"..뭐, 틀린 건 아닌데. 어떻게 알았어요?"
"..."
"..?"
정말 몰라서 묻는건가 싶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박지민을 쳐다봤다. 내 시선을 받은 박지민은 왜 그러냐는 듯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운다.
"옷."
"..."
"정장. 새까만거."
"아."
"팔에 피, 얼굴에 피, 옷에 피."
"..."
박지민은 그제서야 자기가 얼마나 바보같은 질문을 했는지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밥을 먹는다.
"그리고, 저번에 마트 갔을 때도.."
"..."
유한 표정이던 박지민의 얼굴이 마트 이야기를 꺼내자 금세 차가워졌다. 그 표정을 알아채곤 말을 멈추었다. 외출 이야기만 꺼내면 순식간에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 등에 소름이 돋는 느낌에 부르르 떨곤, 화제를 돌렸다.
"근데, 몇살이에요?"
"..그게 왜 궁금합니까."
"아니, 더이상 외출도 안 될거고. 이렇게 계속 살 것 같은데 같이 사는 사람 나이는 알아야죠.."
"알 것 없습니다."
거 진짜 쩨쩨하게 구네.. 단호한 박지민의 대답에 혼자 중얼거리자,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던 박지민이 고개를 들곤 기가 막히다는 듯 짧게 숨을 뱉는다. 살짝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가 보였다. 그러고선 갑자기 왜 이렇게 말이 많아요? 한다.
"그럼 이것만! 저보다 나이 많아요, 적어요?"
"설마 적겠습니까?"
"아니 그니까, 말을 해주면 되잖아요. 나이 알아서 내가 뭐 어떻게 하는 것도 아니고.."
"스물 일곱."
"...진짜요?"
나이 알려주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자꾸만 숨기는지. 투덜대는 내 말을 끊고 들려온 대답은 조금 놀라웠다. 많아봤자 스물 다섯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밥을 다 먹은 박지민이 물을 마시곤 자리에서 일어난다. 많다고 그러더니 다 먹었네. 나도 얼마 남지 않은 밥을 깨끗이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쫌만 쫌만 쫌만!"
다급한 내 목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뭐랄까. 박지민이 간호를 해 준 이후로 뭔가 약간은 날이 서 있던 경계심이 많이 무너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TV 앞에 나란히 앉은 나와 박지민이 양 손에 게임기를 쥐고 있으니. 이런 그림을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엎치락뒤치락 하는 게임 상황에 나처럼 소리칠 만도 한데, 박지민은 약간의 웃음을 머금고 어떤 소리도 내질 않았다. 대단한 사람..
"아.."
결국 내가 졌다. 무슨 이런 거 하나도 안 해본 사람 같이 생겨서 이렇게 잘 하는지. 게임기를 손에서 놓지 않고 절규하고 있으니 옆에서 게임기를 슬쩍 내려놓은 박지민이 후, 하고 짧게 숨을 내쉰다. 결국 설거지 당번은 내가 되었다. 게임 시작 전에 지는 사람 설거지하기! 하고 패기넘치게 외쳤던 입이 방정이다.
"진짜 왜 이렇게 잘해요?"
"그쪽이 못 하는 겁니다."
"우리 그거 합시다. 호칭 정리."
뜬금없는 내 제안에 박지민은 그런 걸 왜 해야 하냐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런 박지민의 시선에 잠시 말문이 막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여러가지 이유들을 애써 뽑아냈다.
"어..뭐.."
"..."
"그래도 같이 사는 사이고, 며칠만 사는 것도 아닌데.."
"우리가 이름 부를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빡빡하기도 하셔라."
아무리 우리가 정상적인 관계는 아니라 해도, 그렇게까지 선 긋고 단절되어 사는 것도 아니니 그쪽 저쪽 하는 것 보다야 다른 호칭이 더 낫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었다. 박지민은 내 예상처럼, 아무래도 상관 없는지 그냥 저기요라고 부르란다.
"뭐라고 부르지?"
"그냥 저기요라고 불러요."
"지민씨..는 좀 아닌 것 같고."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옆에서 박지민이 뭐라고 하든 말든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래도 적당한 호칭이 쉽게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저기요라고 부를게요 그럼."
"네."
"근데 그쪽이라고 부르진 마요. 별로 듣기 안 좋아요."
톡 쏘아붙이니 박지민이 대답 대신 어깨를 한 번 들썩인다. 그 이후로 게임을 몇 번 하다가 지쳐 달그락거리며 게임기를 정리했다. 설거지를 할 생각에 괜히 기운이 빠지는데, 자리에서 일어나던 박지민이 무심하게 툭 내뱉는다.
"그쪽 설거지 하는 거 알죠?"
"아 그쪽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요!"
"..아."
내 버럭에 박지민은 아무 반응도 없더니 잠시 까먹었다는 듯 아, 하고 짧게 소리를 낸다. 원래 잘 욱하는 성질도 아닌데, 어째 박지민과 살면서 몰랐던 내 성격까지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주방으로 가 고무장갑을 끼는 내 모습을 새삼 자연스럽다고 느끼며, 나는 이 수상한 동거에 점점 적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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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