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열아홉
정확히 말하자면 전정국과 나는 불알친구였다. 소꿉친구. 사실 우리 학교에서 불알친구가 아닌 애들은 없었다. 같은 곳에서 나서 같은 곳에서 자라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내 짝꿍도 그랬고, 내 앞자리에 앉은 애도 그랬고, 반장도 그랬고, 전정국도 그랬다. 예외가 있다면 세희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서울에서 전학을 왔다. 아무튼 대부분 우리는 똘똘 뭉쳐서 자랐다.
전정국에게 연애감정을 느낀 건 열여덟 말이었다. 전정국은 매일 아침 삶은 계란 두어개가 담긴 봉지를 들고 대문 앞에 서 있었다. 도착하면 우리 집 초록색 대문을 두드리곤 했는데, 그 덕에 아직도 우리 집 대문에는 전정국이 두드린 모양으로 페인트칠이 벗겨져 있다. 전정국은 자전거를 잘 탔다. 그래서 열여덟 말까지는 자전거로 등하교를 하곤 했는데, 나와 등하교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자전거를 들고 오지 않았다. 본인 말로는 자전거가 고장이 났다는데, 그냥 핑계 같다.
열아홉이 되면서 전정국은 내 옆자리를 차지했다. 공부에 별 흥미가 없어 보이던 그 애는 열아홉 초에 내 희망 진학서를 보더니 그 다음날 시내에서 문제집 여러 권을 사오더라. 야자가 없는 우리 학교 덕에 마땅히 공부할 곳을 잃은 우리는 늘 전정국 집과 우리 집을 번갈아가며 공부했다. 전정국은 나와 같은 대학을 갈 거라고 했다.
" 너 이것도 못 풀면서 나랑 같은 대학은 어떻게 가려고? "
" 이거 지금 내가 못 푸는 거 같지. "
" 같은 게 아니라 못 푸는 건데? "
" 아니야, 그런 거. "
" 아님 뭔데? "
" 아, 아무튼 아니야. 쓰읍 야, 너 조용히 하고 공부나 해. 그렇게 공부해서 나랑 같은 대학은 어떻게 가려고. "
" 뻔뻔해. "
항상 같은 패턴으로 대화는 끝이 났다. 전정국은 늘 밉지 않은 시선으로 나를 흘기며 꼭 마지막엔 검지 손가락으로 내 볼을 톡 하고 건드렸다.
전정국과 사귄 건 아니었다. 어느 누구도 직접적인 고백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좋아한다는 말도, 사귀자는 말도. 그냥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난 얘를, 얘는 나를. 우린 서로를 같은 감정과 같은 마음으로 생각하는구나.
수업이 끝나고는 대부분 우리 집에서 열한 시 정도까지 공부하는데, 전정국은 늘 자기 집까지 데려다달라며 나를 보챘다. 우리 집에서 전정국 집까지는 큰 길로 20분, 지름길로 10분 정도가 걸렸다. 커다란 다리를 하나 건너야 하는데, 우리 집이 그 다리에서 꽤 가까운 편이었다. 사실 조금 웃긴 게, 늘 그렇게 보챈 전정국을 집까지 데려다주면 전정국은 다시 나를 우리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 개수작인 거지. "
" 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또… "
" 개수작이야, 아주. 영화를 너무 많이 봤어. "
세희는 그렇게 말했다. 개수작이라고. 전학을 온 이후로 세희와 나는 내내 같은 반이었다. 마찬가지로 전정국도. 세희와 나, 전정국과 세희는 안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3년의 시간 동안 우리는 굉장히 많은 추억을 만들었다. 세희는 열여덟 말에 내가 전정국에게 느끼는 감정을 나보다도, 전정국보다도 먼저 알았다. 눈치가 빠른 것도 있었지만 그런 쪽에는 애가 꽤 눈이 밝았다.
세희는 전정국을 좋아하는 만큼 전정국을 싫어했다. 남자가 하는 말은 믿을 말이 하나 없다고, 늘 나를 자리에 앉히고 설교 아닌 설교를 늘어놓는데, 그냥 웃으며 들었다.
우리는 원만했다. 세희와 나와 전정국은.
*
2018, 스물넷
폭탄선언이었다.
" 야, 뭔 결혼이야. "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건 그동안 조용하던 김남준이었다. 그 애의 떨떠름한 표정은 아마 그 애의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 표정도 그럴 거고, 세희의 표정도 그랬다. 아니, 호프집에 앉아있는 모두의 표정이 그랬다. 마침 화장실을 다녀온 박지민이 미묘한 분위기에 얼굴을 찡그렸다. 곧 전정국의 표정을 확인하더니 한마디 툭 던진다.
" 아, 말했냐? "
박지민은 알고있었구나. 결혼한다는 거.
전정국을 보지 못했던 시간 동안 그 애에 대한 그리움이나 그 애에 대한 애틋함 따위는 없었던 게 맞는데, 눈 앞이 캄캄해졌다.
" 여주는? "
화두를 던진 건 세희였다. 세희의 눈에 배신감이 담겨있었다. 일렁이는 눈동자 속에 잠시 전정국이 담겼다. 두리번거리지 않아도 내가 어디 있는지쯤은 아는 것처럼 세희의 물음에 곧바로 나를 쳐다보는 전정국이 한참을 망설였다.
모두가 우리 관계를 알고있었다. 과거였지만 과거가 아닌 우리를. 세희는 화난 표정으로 화장실로 자리를 피했다. 나는 앞에 놓인 소주잔 끝만 매만졌다. 정호석의 주도 하에 분위기가 곧 풀렸다. 결혼 축하한다는 말이 오가고, 전정국의 어색한 웃음이 보였다.
뒷말은 모두 나에게 했다. 전정국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네고 온 몇 여자애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내 맞은편에 앉아 안주를 집어먹었다.
" 작년까지 너 보고 싶다고 매번 오던 앤데, 웬 결혼? 좀 이상하지 않냐? "
" 여친이 임신했나 보지. "
" 헐, 미친. 임신? "
기분이 묘하다. 임신, 결혼. 여전히 나와는 다 먼 것들인데, 전정국은 벌써 거기까지 가 있었다. 내가 모르는 누군가와 달콤한 연애를 했고, 곧 그 사람과 가족을 꾸리게 된다. 내가 전정국을 잊고 있는 동안, 다들 전정국은 나를 기다렸다고 하지만 전정국은 그 1년을 참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한다. 내가 잘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괜히 야속한 마음에 술을 들이켰다. 전정국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그 시작이 너무 어렵다.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1년마다 동창회를 줄기차게 했다면서 아직 나열할 추억이 많은가 보다. 조금씩 오르는 취기에 뜨거워진 양볼을 잡으며 밖으로 나왔다. 호프집 바로 옆에서 쪼그려앉아 있는데 골목길 사이에서 전정국 목소리가 들린다.
" 곧 들어갈 거야. 응. 아직 여덟 시야, 지혜야. 여자 옆에 안 앉았어. 응. 그래. 들어갈 때 연락할게. "
" ……. "
" ……나도. "
" ……. "
" …사랑해. "
그 사람과 통화하는 듯 조용한 목소리로 조근하게 대답하던 전정국의 말투에서 짜증이 섞여 있었다. 벽에 기대 있다가 몸을 돌리는 바람에 나와 눈이 마주친 전정국은 잠시 놀란 듯 눈이 커졌다가 곧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그 사람에게 사랑을 속삭인다. 몸을 돌려 제자리로 돌아왔다. 다시 쪼그려 앉아 여전히 뜨거운 양볼을 잡았다.
나쁜놈. 진짜 나쁜놈.
아스팔트에 눈물이 툭 떨어졌다. 곧 시야에 전정국 운동화가 가득 찼다. 한참을 내 앞에 서 있던 전정국이 한숨을 한번 쉬더니 내 옆에 앉는다.
" 술도 못하는 게 뭘 그렇게 많이 마셨어. "
" 시끄러. 내가 술 못하는지 니가 어떻게 알아. "
" …그냥. 그럴 것 같아서. "
" …사랑해? "
" 어?"
" 나 보고 싶었다며. "
" ……. "
" 나는 너 하나도 안 보고 싶었어. 4년 동안 니 생각 한 적 한 번도 없어. 진짜야. "
" 그런 것 같더라. "
" 진짜로. 나 과씨씨도 했어. 헤어졌지만… "
" 그래. "
" 그리고 나… 나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어. "
" 그랬어? "
" 학원 다니다 만난 사람인데 잘생겼어. 서울 남자라서 되게 다정해. "
" 그래. "
" ……. "
" ……. "
" 그래도 나는 결혼은 안 했어. "
" ……. "
주절주절,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무작정 내뱉기만 했다. 전정국이 상처받았으면 좋겠다. 전정국이 나 때문에 많이 아팠으면 좋겠다. 전정국은 조곤하게 대답하며 내 말을 들어주었다. 너 상처받으라고 하는 말인데 왜 그렇게 다정하게 받아줘.
전정국의 시선이 닿았다. 손가락으로 닳은 신발코를 매만지며 애써 시선을 피했다.
" …나한테 할 말 없어? "
" ……. "
" ……. "
" 없냐고. "
" ……. "
한참을 그렇게 보면서도 전정국은 말이 없었다. 참지 못한 내가 고개를 돌렸다. 잔뜩 상처받은 눈이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데, 그 눈을 피할 수가 없었다. 너무 미안해서. 너에게 상처를 준 내가 미안해서. 지난 4년 동안 너에게 연락하지 않은 내가 미안해서. 너를 찾지 않은 내가 미안해서. 너를 잊고 살았던 내가 미안해서.
전정국은 끝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할 말이 많을 텐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보고만 있다가 전정국은 내게 입을 맞췄다.
*
2013, 열아홉
" 아, 나랑 좀 놀자. "
" 일주일 뒤가 시험인 건 알지? "
" 너 머리 좋아서 하루 공부 안 한다고 그게 막 사라지진 않아. 괜찮아. "
" 난 머리 좋아서 그런데, 넌 안 그래. "
" 아, 재수없네? "
중간고사가 성큼 다가왔는데, 전정국은 이번 첫 시험도 말아먹을 모양인지 나를 보챈다. 앞으로 다가올 우리의 무서운 현실에 대해 일러주는데, 전정국은 어리숙한 방법으로 날 꼬드기려고 작정했나 보다. 괘씸한 마음에 팩트로 전정국을 두들겨줬다.
" 언젠 예쁘다매. "
누가 들어도 재수없을 말을 덧붙이며 손으로 꽃받침을 만들어 얼굴에 가져다댔다. 작년이었다면 토할 것 같은 시늉을 했을 전정국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만 터뜨리며 두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밀어낸다.
" 꼬시지 마, 기집애야. "
" 병신이야? "
" 병신 아니고 남신. "
" 아, 징그러워. "
" 여주 말이 좀 심하네? "
" 예뻐서 그래. "
전정국은 큰 손으로 입을 가리며 애써 웃음을 참더라. 어이없다는 듯 나를 보면서도 다정이 묻어나오는 그 눈빛에 봄바람이 불어왔다. 아, 봄이었다. 그래서 전정국이 나를 그렇게 보챘다. 학교 주변에 벚꽃이 다 떨어지기 전에 봐야 한다며 재촉하는데, 사실 마음이 동하긴 했다. 매년 전정국과 보던 벚꽃이라도 새로운 감정으로 전정국과 보는 벚꽃은 조금 다를 것 같아서.
전정국은 기어이 내 손목을 끌고 나왔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겨우 5분 거리였는데, 천천히 걸으면 8분, 아니 10분까지도 가능하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전정국 말대로 학교 주변 벚꽃길이 화사했다. 확실히 달랐다. 매년 봄놀이를 위해 오는 곳인데 올해는 달랐다. 긴장된 마음으로 보는 벚꽃은 처음이었다.
" 사진 찍어줘? "
전정국의 물음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벚꽃 나무에 딱 달라붙었다. 쉴새없이 다양한 포즈를 요구하던 전정국이 여러 장을 반복해서 찍더니 근처 돌멩이에 휴대폰을 반듯하게 세워두고 달려온다. 5초만에 달려온 전정국이 나무를 붙잡고 있는 내 어깨를 끌어당기며 5초를 세고는 환하게 웃는다.
" 뭐야. 찍은 거야? "
전정국은 대답 없이 휴대폰 쪽으로 달려간다. 곧 사진을 확인한 듯한 전정국이 개구진 웃음을 지으며 달려와서 사진을 보여준다. 환하게 웃는 전정국과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나. 전정국이 갑자기 끌어당기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찡그린 게 분명하다.
" 아, 뭐야. 다시 찍어. "
" 이제 끝. "
" 그런 게 어디 있어? 다시 찍어! "
" 여기 있어. 이제 끝. "
" 야! "
" 야, 나 공부하러 가야 돼. 성적 떨어지겠다. "
전정국이 다시 내 손목을 잡아 이끈다. 이랬다 저랬다, 자기 마음대로인 모습이 밉지는 않아 짜증을 부리면서도 입가에 웃음이 가득했다. 아는지 모르는지 전정국은 언제 꺾었는지 벚꽃이 세 개 정도 달린 벚꽃가지를 내 귀에 꽂아준다.
" 야, 꽃은 꺾으면 안…되는데… "
웃으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전정국의 눈빛이 너무 다정해서 하려던 말을 얼버무렸다. 봄바람은 불고, 가슴은 두근거리고, 전정국은 나를 쳐다보고. 괜히 민망해져서 인상을 찡그리며 잔소리를 하려던 참인데 전정국이 선수를 친다.
" 예쁘네. "
/////////사담/////////
늦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11시에 지하철이었어요 힝 집 오자마자 올리는 거예요 사랑합니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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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학개론] (할 말 주저리주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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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이 시간적 여유 없이 급하게 올라가는 바람에 암호닉을 담지 못했습니다 이번 글에 부탁드립니다 ♡
피드백 1
A. 제가 아직 완결까지 완벽하게 써둔 게 아니라 확실하게 답변을 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ㅠㅠ) 메모장에 미리 써둔 내용을 복사해서 글을 올리는 거라 분량이 어느 정도 나올지 저도 예측을 못하는 상태라 만약 분량이 적절하게 나오지 못할 경우 수정해야 할 부분도 몇 있겠고, 또 제가 거의 다 쓴 내용에 완결까지 미리 구상한 후라도 생각을 글을 옮기는 데에는 꽤 시간이 걸리는 편이고 요새 개인적인 학습으로 컴퓨터를 들어올 수 있는 시간도 매우 적어서 기간을 일주일 한 번에서 일주일 두 번 혹은 일주일 세 번으로 늘리게 된다면 독자님들께서 제 연재를 많이 기다려줘야 하실 수도 있어요. (ㅠㅠ) 사실 지금 일주일에 한 번 연재하면서도 제가 기간 내에 완결까지 쓸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워낙 변덕이 심해 또 더 새로운 작품을 시작하고 싶다는 욕심이 종종 들곤 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완결까지 완벽하게 쓴다면! 그땐! 연재 기간을 줄여서 일주일에 두 번, 세 번 상관없이 팍팍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글을 마무리했을 때에만 해당됩니다!) 제 글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해용!
피드백 2(?)
저랑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계신 것 같아요. 제가 딱 이 마음을 가지고 쓴 건데 그걸 어떻게 딱 알아주셨네요. (♡)
전 주로 조금 차이가 있더라도 제 경험에 바탕을 두고 일상에서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일을 위주로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려고 합니다! 가끔 제가 스스로 보기에 유치할 때가 많고, 쓸 땐 감상에 젖어서 막 썼다가도 막상 읽으려 하면 두 눈 제대로 뜨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도 그 장면을 생각하면서 당시에 제가 만들어냈던, 스스로 느꼈던 감정을 풀어내는 거라 여러분들께 충분히 제 감정이 꼭! 전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신 분이 계셔서 놀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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