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 800년, 그 끝 무렵에 시작된 일이었다. 평화롭던 조선의 땅에선 피의 전쟁이 서막을 열었고 나는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나의 피덩어리 자식과 사랑하는 아내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이런 전쟁 속에서 참혹하게 죽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나의 복부를 관통한 화살이 어찌나 깊이 찌른 것인지 뜨겁고 끈적한 것이 밖으로 세어나왔다. 고통이 느껴질 겨를도 없이 흐릿한 시야가 눈앞에 펼쳐졌고 그 앞엔 그토록 보고팠던 나의 자식과 나의 아내가 울부짖으며 적군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어째서 너희가 거기 있는 것이냐.
그 손을
차마 ‘그 손을 놓아라’라고 다 외치지 못한 채 나의 자식과 나의 아내는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니, 내가 먼저 힘을 다 짜내어 든 손을 툭 떨어트린 채 숨을 거뒀다. 그렇게 나의 인생이 막을 내렸다. 비참한 생이었다. 나도, 나의 자식도, 그 자식의 어미도 이승에 남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남지 못했다. 나의 어머니도, 아버지도 만나뵈지 못한 채 그렇게 우린 모두 이승을 떠나 저승길에 오르게 됐다.
예종 800년, 저승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사후세계 : 무지개 아래 핀 꽃
W. 霓下蘭
고희든 - 사월연가(四月戀歌)
이봐, 2931번. 이제 그만 일어나라. 누군가 나를 툭툭 건드렸다. 힘겹게 눈을 떴다. 어둠이 나를 감싸안고 있었다. 여긴 어디지.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분명 아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2931번, 정신이 드나보지”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엔 검은 양복을 차려입은 한 남자가 서있었다. 2931번. 그가 말했다. 2931번? 나를 말하는 것인가. 주변을 두리번 거렸지만 아무도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가락으로 나를 가르키면 조용히 고개를 두 번 끄덕거리는 남자였다. 내가 2931번이라고?
“이봐요, 사람은 번호로 부르는 게 무슨 예의에요? 저도 이름이 있다고요!”
“그래? 이름이 뭐지, 2931번”
“제 이름은”
대답할 수 없었다. 내 이름이 뭐였지.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2931번. 나를 부르는 남자를 말없이 쳐다봤다. 한참을 마주보다 한숨을 토해내는 남자로 인해 정적이 깨졌다. 자신이 들고있던 노트를 찬찬히 살핀다. 그리고 무언가를 써내려간다.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내 시선이 느껴졌는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하찮다는 듯한 눈빛을 보내고는 노트를 탁 덮어버린다.
“그건 뭐죠?”
“네가 상관할 바 아닌 물건이야”
“여긴 어디죠? 당신은 누구에요? 난 왜 여기에 있는 거예요?”
“머리 아프니까 하나씩 질문해”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왔다. 이상하게도 남자가 발은 댄 곳곳마다 불이 켜지면서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 신기한게냐. 그 광경에 놀란 나머지 내 코앞에 다가온 남자를 미쳐 발견하지 못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남자를 쳐다보면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입을 연다.
“바쁘니까 서두르지”
“잠시만!”
“시간이 없어서 그런거니까 오해하지마. 나도 네가 늦게 깨어나서 무척 곤란하다고”
“네? 무슨 말...”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한 채 나는 남자의 품에 안겨있을 수 밖에 없었다. 꽤나 빠른 속도로 뛰면서 우리가 있던 곳에서 벗어나던 남자는 절벽 밑으로 그대로 뛰어내렸기 때문이다. 이대로 죽는구나 싶은 마음에 눈을 꾹 감은 채 남자에게 매달렸다. 이봐. 그 남자의 음성이 낮게 깔렸다. 눈을 떠보니 남자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너무 놀라서 남자를 밀치면 나를 놓칠 뻔하다가 다시 세게 끌어안는 남자였다. 물론 얼굴이 험악해졌지만.
“여기서 떨어지면 또 죽는 거라고, 2931번”
“하지만 그쪽 얼굴이 가까워서 깜짝 놀란 거라고요”
“미안하지만 그쪽이 하도 세게 끌어당겨서 그런 거라고. 나라고 안 곤란했는 줄 알아?”
“아저씨가 먼저 절벽에서 떨어졌잖아요!”
“야, 누가 아저씨야?”
나 아직 청년이거든? 안 그래도 나를 떨어트릴 뻔한 것 때문에 험악해진 얼굴이 더 무서워졌다. 청년이라는 말에 자세히 보니 그 말이 사실인 것 같았다. 나보다 끽해야 5살 정도 많지 않을까 싶었다. 괜히 민망한 마음에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그리고 눈 앞에 보여지는 풍경에 또 다시 나는 남자의 목에 둘렀던 팔을 놓을 뻔했다. 붉은 노을빛이 온 마을을 감싸 안고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늘 위를 날고있었다. 말도 안돼.
“이게 뭐야”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지”
“당연하죠.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이승에서의 기억도 없는 녀석이 인간이 하늘을 나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란 건 잘도 알고 있군”
“네? 무슨 소리에요”
갑자기 비행을 멈춘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 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는 다시 그에게 물었다. 이승에서의 기억이 없다뇨. 네가 들은 그대로야. 너는 이미 죽은 몸이라는 거지. 바람이 우리를 감싸안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내가 죽었다니. 멍한 눈을 한 채 남자를 바라보면 아까처럼 깊은 한숨을 토해내고는 천천히 다시 비행을 하는 남자였다.
“2931번, 너는 내가 만든 사후세계, ‘예하란(霓下蘭)’에 2931번째 주민으로써 나는 너를 책임지고 보호할 의무가 있다. 너는 이승에서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게 되었으면 100일간 저승에서의 시험을 치른 후, 모든 관문을 완벽하게 수행하였기에 염라대왕께서 이를 높게 평가하여 너를 사후세계에서 생활하게 할 것을 명하였다.”
“이봐요”
“또한”
이미 죽은 영혼은 이승에서 생활한 기억들과 저승에서 치른 관문에 대한 기억들을 모두 잊은 채 사후세계에 살아가는 것이 조건이며 이를 어길 경우, 해당 귀인은 환생의 기회는 물론 사후세계에서의 생활조차 잃고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받으며 죽지못한 채 살아갈 것임을 명심해야한다.
“다행인 줄 알거라 네가 귀인이었기에 저승에서의 시험도 치를 수 있었으며 이렇게 예하란에서의 생활도 가능한 것이니”
“내가 죽었다는 게 말도 안되잖아요. 저 이렇게 그쪽이랑 대화도 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말해보거라.”
또 다시 멈춘 남자는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의 이름은 무엇이더냐.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승에서의 직업은 무엇이었으며, 네 녀석의 부모는 어떠한 사람이었느냐. 대답하려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남자를 만나기 전 모든 일들은 가위로 깔끔하게 자른 마냥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어디서 무얼하며 지냈고, 나는 누군지도 알지 못했다.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제 알겠지. 넌 이미 사인(死人)이다”
“난 어떤 사람이죠”
“저승법 제 1조 1항, 사인(死人)은 모두 이승에서의 기억을 지워야하며 이승에 대해 기억하거나 혹은 기억하려할 시 사자(死子)는 바로 그에 대한 기억을 삭제한다.”
“이봐요, 이름도 모르고 어떻게 살아요”
“저승법 제 1조 2항, 사인(死人) 중 귀인(貴人)만이 저승시험에 임할 수 있으며 관문을 성실히 수행한 이들은 각 사자에게 이름과 관직을 얻은 후, 사후세계에 머물며 환생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저승법이며 너 뿐만 아니라도 나도 이 법을 거스를 수 없다. 그리곤 나를 땅 위에 안착시켜주는 남자였다. 옆을 쳐다봤을 때엔 잔인하다고 생각할만큼 아름다운 석양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2931번.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알 수 없는 울컥함에 입술에 힘을 주고는 남자를 쳐다봤다. 무표정한 얼굴을 한 그는 천천히 내게 말했다. 오늘부로 네 녀석의 이름은 김탄소다. 그렇게 말하고는 말하고는 연하게 웃어보이는 남자였다. 왜인지 그 얼굴을 보니 나 자신의 죽음이 와닿아 눈물이 났다. 차마 울음을 시원스레 내뱉지 못한 채 고개를 떨어트렸다. 아무 기억도 없는 상태로 나는 이 넓디 넓은 땅을 살아가야한다. 이것이 귀인이 저승시험을 통과한 상이었다. 머리 위로 묵직한 무언가가 내려 앉았다.
"예하란에 온 것을 환영한다, 김탄소"
그렇게 주황빛 하늘이 검게 물들기 시작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