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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 - 94 >
달라진 건 없었다. 자취방 한쪽에 검은 장미가 오늘부로 일곱 송이가 되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아침에 눈을 뜨면 장미가 하나씩 늘어나 있다. 그가 내 귓가에 가까이 대고 속삭일 때의 그 묘하고도 달아오르는 느낌이 선명하다. ‘당신은 영원히 나의 것.’ 그 말을 떠올리며 무심코 목 언저리를 매만졌다. 악마도 숨을 쉬긴 하는 모양이다. 그의 입이 토해낸 뜨거운 숨결이 내 온몸을 감싸는 듯했다.
그는 밤에 잠을 자지 않았다. 그것도 모르고 나름의 배려를 발휘해 원한다면 침대를 내어주겠다고 말한 내게 그는 악마에게 있어 수면은 의미 없는 행위라고 설명했다. 저번에 잠을 자겠다고 했던 건 정신 병원에 대한 짜증남 때문이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내가 잠이 드는 새벽이면 그는 밖으로 나갔다. 어딜 가냐고 물으면 일을 할 시간이라는 대답만 남겼다.
그렇게 사라진 그는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내 얼굴을 간지럽히며 깨웠다. 오늘은 턱을 간지럽혔고 어제는 볼, 그저께는 코였나. 내가 정말 피곤해서 일어나지 않으면 목을 살짝 깨물기도 했다. 그가 만드는 생경한 느낌에 기분이 이상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보는 것은 그의 얼굴이라는 점 역시 내 기분을 거들었다. 잠이 덜 깬 모습으로 맞이하는 그는 내가 홀리기에 충분했다. 여튼 그렇게 날 깨우고 나면 침대를 차지해 나를 관찰했다. 호기심 어린 얼굴로 내가 하는 행동 하나 하나를 지켜보았다. 오늘도 다를 바 없었다. 아침에 내가 하는 일은 다 똑같은데도 항상 재밌다는 표정이었다.
“항상 어디를 그렇게 가는 거지?”
로션을 바르는 내게 그가 물어왔다. 얼굴을 두드리던 걸 멈추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낮 동안 여기에 있는 게 따분해 미칠 지경이야.”
그가 옆으로 돌아 누워있던 자세를 고쳐 일어나 앉았다. 내가 학교를 가거나 병원으로 실습을 가는 낮 시간 동안 혼자 집에 있는 것에 대한 불만을 하나씩 풀어놓기 시작했다.
“집이 좁아터졌어. 대체 이런 곳은 어떻게 구한 거야? 부자가 되고 싶다고 할 때는 언제고.”
“내가?”
“이사부터 해. 여기는 살만한 데가 아니야.”
원룸이니 당연히 좁지. 나는 일개 대학생이고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한 지 한 달 밖에 지나지 않았다. 넓은 집은 당연히 꿈도 꿀 수 없다. 이 정도도 감사할 지경인데. 뭐, 두 명이 살기에 적합한 집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밖에 있을 때는 그가 집에 있고 내가 집에 들어올 때는 그는 집을 나가기 때문에 불편함을 느낄 수는 없었다. 그는 나와는 다른 모양이었다.
“인간들도 득실득실해서 짜증나. 여기가 닭장도 아니고 칸칸마다 인간들이 살잖아. 화나게.”
이웃 주민들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마주치지도 않으면서 불만만 한 가득이다.
“특히 옆집에 사는 놈. 거슬려.”
“옆집?”
“어떤 놈이 새로 들어왔어. 어제.”
어제 내가 병원에 있는 사이 옆집에 누군가 이사를 왔나보다. 그가 짜증나는 얼굴로 이불을 걷어찼다.
“그 놈 기운이 이상해.”
이사를 가자고 하는 이유가 좁은 것도 있지만 옆집 사람의 영향이 더 크다는 게 확실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괜히 호기심만 더 생겨났다. 놈이라는 걸 보니 남자일 텐데 좀 잘생겼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오빠였으면. 이사 왔는데 떡은 안 돌리나.
“그 놈이랑 친해질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
녀석이 또 내 생각을 읽었다. 이웃이랑 친하게 지내는 게 어때서.
“기운이 이상하다고 했잖아. 재수 없어.”
저 말에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답을 하지 않고 썬크림을 꺼내 발랐다.
“내 말이 안 들려?”
“뭐가?”
“이사해. 당장.”
“이사를 하고 싶다고 막 할 수 있는 줄 알어?”
“그럼?”
“돈도 있어야 하고 이 집을 살 사람도 있어야 하고. 하여튼 복잡해. 엄청!”
“구해줄게. 전부.”
놈은 별 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나는 현실적인 말을 꺼냈다.
“정국아."
“또 뭐가 문제야.”
“이사를 가면 우리 부모님께 말씀을 드려야 하잖아? 그럼 부모님이 물어보겠지. 돈은 어디서 난 거고 굳이 왜 이사를 하냐고. 그럼 네 얘기를 할 수 밖에 없어. 딸이 남자랑 같이 산다는 걸 동의하실까? 그것도 자기가 악마라고 주장하는 놈인데?”
“무슨 소리야. 남자랑 여자가 같이 사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데. 네 부모님도 같이 살잖아.”
“그건 가족이니까 괜찮은 거지.”
“그럼 우리도 가족해.”
어이없는 말을 쉽게 내뱉는 놈의 모습에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사람의 상식으로 이해시키기에는 어려운 상대였다.
“가족은 말만 한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냐.”
“알아. 나도 인간들이랑 계약하면서 본 건 있어.”
“어?”
“결혼해 우리.”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야...? 내가 당황한 사이에 녀석은 침대에서 내려오더니 선반에 있는 일곱 송이 장미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내 앞으로 와 장미를 내밀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검은색 수트를 입은 녀석과 흑장미가 오묘한 조화를 이뤘다.
“자.”
내가 그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이건 무슨 돌발 행동이지.
“눈물부터 흘려야지.”
“응?”
“꽃을 주면서 결혼하자고 하면 여자들은 다 울던데? 아니었어?”
그러니까 정황상 지금 나한테 프러포즈를 한 거다? 그것도 흑장미를 주면서. 지금 내 앞에서 얇은 웃음을 흘리고 있는 저 악마가 며칠 전에 무시무시한 꽃말을 알려주던 놈이 맞나.
“사랑하는 사람이 결혼을 하자고 했을 때나 감동을 받는 거야. 우린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잖아?”
내 말을 들은 녀석이 장미를 바닥에 가볍게 던지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는 녀석의 얼굴에는 웃음이 싹 지워졌다. 순식간에 변한 표정에 또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녀석이 정말 악마라고 느껴질 때 드는 특유의 느낌이 있었다.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서늘함과 소름이 끼치는 그 느낌. 엄습해오는 두려움에 화장대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 작은 공간에서 내가 내 몸을 안전하게 둘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녀석은 환기를 위해 열어둔 창문을 닫아버렸다. 녀석의 말대로 집이 좁았기 때문에 녀석이 창문에서 다시 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기 위해 떼는 발자국은 많지 않았다. 정장 재킷을 벗어던지며 그가 내 앞으로 가까이 왔다. 얼굴에 조그만 분노가 보였다. 그가 긴 숨을 뱉으며 검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니까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 게 화날 일이야?
“기억이 안 난다고 했으면서 그런 건 잘도 기억하는군.”
들리는 목소리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아주 많이 절제하고 있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그가 주먹을 쥔 손이 약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널 어떻게 찾았는데.”
그가 한걸음 다가오자 내가 한걸음 물러났다. 내가 서 있는 이곳이 점점 암흑으로 덮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또 다시 뒤로 발을 떼는 나를 본 그가 내 손목을 움켜잡았다. 손목에 느껴지는 힘은 그가 인간이 아니란 사실을 확인 시켰다. 아픔에 눈물이 고였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나는 정말로 맹세코 기억할 게 없다. 기억상실증이 걸린 적도 없고 사고가 나서 사경을 헤맨 적도 없다. 종종 혼수상태를 겪고 귀신이 보인다는 환자들 이야기가 나오는데 순탄한 내 인생에는 그러한 일말의 개연성도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나는 의사가 되고 싶은 사람이 아닌가. 죽음과 한끝 차이이긴 해도 나는 사람을 살리고 싶은 사람이다.
“이제는 안 놓쳐.”
내 모든 걸 집어삼키겠다는 듯한 그의 눈빛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영혼이 빨려가는 듯했다. 그가 내 손목을 더 꽉 잡으며 말했다.
“기대해.”
그의 입꼬리 한쪽이 치켜 올라갔다. 세상이 얼어붙을 듯이 차가운 미소였다. 그의 주변에서 냉기가 피어올랐다.
“네가 기억해내는 그 순간에”
힘이 풀려버린 다리를 지탱하기 위해 등을 벽에 기댔다. 그래도 역부족인지 무릎이 조금씩 내려갔다. 안 그래도 가까웠던 거리에서 더 가까이 다가오는 그를 피할 수가 없었다. 내 앞으로 완전히 밀착한 그가 자신의 다리로 힘이 풀린 내 다리를 지지해주었다. 녀석이 비릿한 미소를 다시 지었다.
“대가를 가져갈 테니까.”
보통 대가를 치른다는 말을 사용하지만 대가를 가져간다는 표현을 쓴 건 나름의 의미가 있어서 사용했어요!!
정성스러운 댓글 고맙습니다. 진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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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사프란(Spring Croc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