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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 - 7 >
“내기는 무효야.”
“누구 마음대로.”
“반칙은 네가 했어.”
태형이 석진을 비스듬히 쳐다보았다. 박세나라도 만난 얼굴이군. 석진이 끝까지 속을 거란 기대는 안했지만 이렇게 들켜버리니 싱거웠다.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세나를 추궁해서 모든 일을 다 들은 석진에게 느껴진 감정은 짜증이었다. 얼마 만에 느끼는 감정인지. 무료한 나머지 생각 없이 태형과의 내기를 승낙한 저의 탓도 분명히 있겠지만 치밀어 오르는 짜증은 다스릴 수가 없었다. 정국이 세나를 사랑하는가 사랑하지 않는가, 석진은 사랑한다는 쪽이었고 태형은 아니라는 쪽이었다. 정국의 친구인 태형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동안 했던 짓이 헛된 일이라는 걸 안 순간 이들과의 관계를 빨리 청산해야겠다는 마음만이 석진을 지배했다. 석진이 알던 여주가 정국이 사랑한 여자가 아니었다니. 기가 막혔다. 정국과 여주가 서로 사랑의 감정을 틔우는 걸 보고 석진은 승리를 예감했다. 정여주가 그 정여주가 아닌줄 알았다면 오래 전부터 끝냈을 텐데. 김태형한테 제대로 속은데다 흥미가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재미없어.
“애초에 이기는 쪽이 존재할 수도 없는데 말이야.”
“눈치 하나는 더럽게 빠르다니까.”
“그 동안 속아준 걸 감사해.”
“나도 최근에야 알았으니까 고의는 아니었어. 착각을 했을 줄은.”
“그래도 기분이 더러운 건 똑같아.”
“알아. 꽤나 열정을 다했더라고. 옆집으로 이사도 하고.”
“흥미롭긴 했거든. 금기를 어긴 악마라니.”
태형의 얼굴이 굳었다. 정국이 금기를 어겼다고 확정짓는 석진의 말 때문이었다. 아직 시간이 남았다. 아무도 몰라.
“네가 괘씸해서 정여주에게 다 말해버리고 싶은 걸 참느라 힘들었어.”
“말했으면 가만 안 뒀어.”
정여주가 모든 걸 알게 된다면 그것도 문제였다. 절대 정여주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국을 위한 배려였다. 정여주에게 전부 말해버리려던 충동은 태형도 몇 번이나 참았다. 정국을 위해. 그 여자가 모든 걸 알게 된다면 정국이 힘들 테니까.
“뭐, 참으려고 참은 건 아니었고. 알아내지 못한 게 하나 있어서.”
“뭘.”
“박세나였지 그 인간. 그건 절대 알려주지 않더라. 생각으로도 못 읽어냈어.”
“......”
“박세나가 전정국에게 치른 대가.”
태형이 침을 삼켰다. 일개 인간에 불과한 세나가 석진의 위압감을 이길 수는 없겠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함구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국에게 치르기로 한 대가는 세나에게 있어 금기였으니까. 정국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흥미가 떨어지긴 했지만 그 부분은 아직 관심이 좀 있거든.”
“관심 꺼.”
“그러면 끌 수가 없지. 제안 하나 할게.”
“무슨 제안.”
“날 속인 것에 대해 그냥 넘어가는 조건으로.”
석진이 턱을 매만졌다. 사라졌던 흥미가 조금씩 다시 생겨나고 있었다. 이번에는 좀 더 재미있어야할 텐데.
“과연 전정국은 누굴 선택할까.”
“미친.”
“정여주? 박세나? 아니면 친한 친구 김태형?”
“안 해.”
“그럼 날 속인 죗값을 치러야지.”
태형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는 있었지만 석진에게서 받는 위압감은 대단했다. 저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살아온 석진의 기를 다 받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저딴 내기라니. 내기를 좋아하기는 해도 정국을 두고 더 이상 내기를 이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정여주.”
“......”
“옆에서 지켜봤는데 꽤나 절절하더라고. 인간 쪽도 악마 쪽도.”
“......”
“내가 둘의 사랑을 응원한다고 전에 말했었는데. 또 한 번 응원해야겠다.”
말을 마친 석진이 유유히 걸어갔다. 여유로운 발걸음을 본 태형이 욕설을 내뱉었다. 시발, 저 미친 천사새끼 때문에 일이 더 꼬였다. 태형의 욕을 들은 석진이 멈춰서며 다시 태형을 향했다.
“김태형, 재미있는 거 알려줄까?”
“좋은 말할 때 그냥 꺼져.”
“전정국 말이야.”
태형이 석진에게 주먹을 쥐고 돌진하려는 때였다.
“그림자 생겼어.”
태형의 손이 멈추었다. 석진은 태형의 위협에도 흔들림없이 여유롭게 입매를 올렸다. 진짜 좆같네. 태형이 주먹을 떨구었다. 그림자가 생긴다는 건 정국이 위험하다는 증거였다. 그림자가 온전한 형태를 이루는 것은 금기를 완전히 어겼다는 의미였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 아직 미약하긴 해.”
석진은 태형의 주먹을 잡아서 쫙 펴주었다. 웃음을 유지한 채로. 멍하니 있던 태형이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태풍이 치던 날에 갔던 그 곳으로 다시 가야했다. 배려 따위 할 여지가 없었다. 정여주를 떨궈 내야한다. 애초에 엮여서는 안 되는, 필요가 없는 여자였다. 빌어먹을 그 이름만 아니었다면.
***
전정국을 보지 못한 지 사흘이 지났다. 당분간 오지 못한다고 한 그는 정말 오지 않았다. 뭔지 알려주지도 않고 그냥 가버리다니. 오자마자 키스부터 퍼부어주겠다고 생각했다. 보고 싶어 죽겠네.
“여주야.”
김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고 있던 책에서 눈을 떼자 김선생님 뒤로 민세나, 아니 박세나가 보였다.
“너 찾아오셨대. 행정실장님 동생 분이라고.”
반갑지 않은 얼굴을 몇 년 만에 제대로 마주했다. 세나와 내 사이에 흐르는 기류는 여전히 복잡하고도 미묘했다. 물을 것이 있었으나 말이 잘 나오질 않았다. 갈증이 느껴져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쓴 커피를 마셨다.
“오랜만이네.”
“그러게.”
인사라고 할 수도 없는 인사를 나눈 우리는 또 입을 다물었다. 단 둘이 만날 이유도 없는 나를 찾아 온 이유가 뭘까. 세나가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생각하고 있던 얘기를 꺼낼까 싶기도 했다. 세나가 나를 찾아온 이유라면 전정국과 관련된 이야기 일 것 같아서. 그 날 레스토랑에서 정국이 세나의 손을 잡았던 일.
“전정국... 알지.”
결국 저 입에서 그 이름이 튀어나왔다. 이름이 나온 순간 내 모든 신경이 흥분하는 바람에 덤덤하게 있느라 무던히도 애를 써야했다.
“여주야,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무슨 말.”
“전정국이 찾는 사람, 네가 아니고 나야.”
“뭐?”
“나랑 사랑하는 사이였어. 예전부터. 네가 나랑 닮아서 정국이가 착각한 거야.”
저 입술에서 나오는 말이 사실이라면.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프다. 꿈은 아닌데. 왜 꿈같지. 요즘 들어 본 정국의 이상한 행동이 자꾸 떠올랐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그의 행동들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스멀스멀 위로 올라오는 생각들을 다시 구겨 넣었다. 나오지 마. 아닐 수도 있잖아. 착각한 건 정국이 아니라 세나일 수도 있다. 세나가 착각한 게 아닐까. 그 조그만 생각 하나만을 부여잡고 나는 발악했다.
“닮았다고 해도 이름이 다른데 착각을 해?”
“그건 미안해. 정국이 악마라는 게 무서워서 내 이름을 속였어.”
“뭐?”
“하필 그 때 떠오른 이름이 네 이름이었어.”
박세나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정작 울고 싶은 건 나인데 왜 네가 우니. 저 눈을 보고 있으니 내가 박세나의 자리를 빼앗기라도 한 것 같다. 이 오해를 빚어낸 당사자는 저 애인데 내 잘못인 것 같잖아. 운명을 갈라놓은 뭐 그런 나쁜 년.
“미안해.”
조그만 입술이 달싹였다. 저 말로 모든 걸 무마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너는. 창백한 얼굴로 조곤조곤 말하는 세나가 참 보기 싫었다. 저 애는 변한 게 없다.
“정국이가 그리워.”
“전정국은 알아?”
“날 보면 알게 될 거야.”
그래, 이제 알겠다. 화재가 났던 날 정국이 박세나의 손을 잡고 떠난 이유를. 일부러 묻지 않았는데 그냥 물을 걸 그랬다. 그랬다면 어렴풋이 눈치라도 채지 않았을까. 박세나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기분이 참 더럽다. 차라리 전정국에게 오해했다고 미안하다는 사과를 받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그랬다면 욕은 해도 분노가 차오르긴 해도 이렇게 슬프지는 않을 것 같다. 그냥 개새끼 정도로 남을 텐데. 박세나가 전정국을 나에게 있어 아픈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맘 편히 놓아줄 수도 없게.
“너 기억나는 거 없잖아.”
화가 나고 슬픈데 눈물이 나질 않는다. 애초에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기억을 못하는 게 아니라 할 수 없는 거라고. 정국에게 마음을 주면서 스스로 주문을 외웠다. 기억 좀 해보자고. 뭐든. 헛된 주문인지도 모른 채.
“기억해야할 사람이 네가 아니니까.”
정국이 떠올랐다. 그 숨결, 따뜻한 품, 보드라운 목소리, 믿음직스러운 손길까지.
“나야.”
그의 전부가 내 것인 줄 알았는데.
“여주야, 난 이제 다 기억해.”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8월 안에 끝내겠다고 했는데...ㅎㅎ
9월 안에는 끝내겠,..습니닼ㅋㅋ 죄숭해요ㅠㅠ
암호닉은 암호닉 글에 써주시면 바로 신청 되십니다!
완결 후 메일링할 때 한번에 정리할게요~
오늘도 감사합니다♥♥
W. 사프란(Spring Croc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