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전정국
w. 정국학개론
2013, 열아홉
" 야, 니네 결혼은 언제 할 거야? "
우리 학교는 수학여행을 따로 가지 않았다. 하루 정도 학교에서 모여서 하룻밤을 함께 보내는 걸로 대체하곤 했는데, 대체로 아이들은 그걸 더 좋아하는 듯 했다. 밤에 애들이 모였을 때 하는 거라곤 떠드는 게 전부였다. 한 학급이 다 모여봤자 30명이 채 되지 않는 인원이라 옹기종기 동그랗게 모여도 무리가 없었다. 이불을 깔아놓고 잠옷을 갈아입고는 중간에 등 하나를 두고 약 30명이 동그랗게 모여 앉았다.
화두를 던진 건 반장이었다. 불특정 다수에게 물었다. 결혼은 언제 할 거냐고. 나는 엎드려 누워서 곰곰히 생각했다. 이르면 24살 정도에 하지 않을까.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데, 세희가 대답했다.
" 야, 결혼은 미친 짓이야. 모르냐? 뭔 남자랑 여자랑 같이 살려고 해. "
" 환상도 없고 미래도 없는 년. 안 할 거면 조용히 해. "
" 야, 넌 못할걸. "
세희와 금선호는 투닥거리는 게 일상이다. 금선호는 시내 햄버거 가게 아들인데, 그래서 가끔 반에 햄버거를 돌리곤 한다. 유난히 세희한테 시비를 거는일이 잦았는데, 세희 말로는 걔가 본인을 좋아해서 그렇다고 한다. 내가 봐도 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세희과 금선호를 뒤를 하고 다들 이런저런 의견을 내밀었다. 세희처럼 결혼을 안 한다는 의견도 좀 있었고, 반장처럼.
" 난 절대 서른 넘어서. 야, 니네 알지. 여자는 일찍 결혼하면 독이야, 독. "
" 아는구나, 네가! "
" 아, 네 의견에 동의하는 건 아니고. 난 내 20대를 즐기고 결혼하고 싶다. 결혼을 할거야. 독신 아님. "
" 서른 돼 봐라. 또 서른을 즐기고 싶을걸? "
세희는 여러 번 결혼에 대한 설교를 늘어놓았다. 결혼은 안 할 거라며, 여자에게 결혼이 얼마나 잘못된 제도인지 열심히 늘어놓더라. 그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옆에 조용히 앉아있던 전정국이 내 머리를 콩 하고 쥐어박는다.
" 아, 왜 때려. "
" 정세희 말 듣고 수긍하지 마. 읎어 보인다. "
소근소근, 귀에 대고 말하는 전정국에게 찡그린 얼굴을 한번 보이고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는데, 마침 반장이 전정국에게 묻는다.
" 야, 전정국 넌 결혼 언제 할 건데? "
" 어? 나? "
반장의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한 전정국이 머쓱하게 웃어 보인다. 생각해본 적 없다며 둘러댈 줄 알았는데, 잠시 고민하던 전정국이 고개를 홱 돌려 나를 쳐다본다.
" 야, 김여주, 언제 하고 싶은데? "
*
2018, 스물넷
단톡방이 만들어졌다. 전정국이었다. 청첩장을 돌릴 만한 여유가 없어 모바일 청첩장으로 대신한단다. 시간적 여유가 없거나 당일에 일이 있는 사람들은 굳이 오지 않아도 된다고 당부했다. 왠지 나는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세희는 오후에 나를 찾아왔다. 늦게 일어나서 단톡방을 방금 봤다며 내 앞에서 노발대발하더라. 어떻게 나를 초대할 수 있냐며, 배려도 없는 거냐며 내 대신 화를 내더라.
전정국 입장도 이해가 갔다. 나를 빼고 만들 것인가, 나를 포함해서 만들 것인가 고민 많이 했겠지. 결론이 어떻든 전정국은 내게 선택지를 넘겼고, 선택은 내 몫이었다.
" 전정국이랑 만나봤어? "
" 응, 한 일주일 전쯤. "
" 뭐래? "
" 딱히… "
전정국과 만난 지 벌써 일주일이 흘러갔다. 주변의 시선을 견디기 힘들어 몸을 바쁘게 움직였던 14년도의 그때처럼 나는 이번에도 그랬다. 단톡방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전정국 생각을 할 여유도 없을 정도로 바쁘게 움직였다. 동네에서 농사를 짓는 이웃들의 일을 도왔고, 시내에 있는 금선호네 햄버거 가게에서 알바를 하기로 했다.
" 나 진짜 묻고 싶은 거 있었는데 물어도 돼? "
" 뭐든 물어봐. 나 이제 좀 여유 생겼어. "
" 너네 그때 왜 헤어진 거야? "
" …아, 음. "
" ……. "
" 만난 적도 없었으니까 헤어진 것도 아닌데. "
" 너네 사귀는 거 아니었어? "
" ……음, 응. "
" 어…… "
" 나도 잘 모르겠어. 그때 전정국이 왜 나를 멀리 했는지. "
" ……. "
" 만나서 물어봤는데… "
" ……. "
" 지난 일 말해서 뭐하냐고 하더라. "
" ……. "
세희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내 눈치를 보았다. 애써 밝은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그날, 그 시각, 아무 미련 없다는 것처럼 구는 전정국을 떠올리면 속에서 화가 치밀어올랐고, 가슴이 답답했고, 묘하게 아려왔다. 두 주먹을 꽉 쥐었다.
" 재수없어. "
" 재수없지. "
" 정 떨어져, 진짜. "
" 정 떨어지지. "
" 그래서 괜찮아. "
" …진짜? "
" 어, 지난 4년 간처럼 똑같이 지내면 되잖아. "
" ……. "
" 괜찮아, 나. "
" 지난 4년 동안은 괜찮았어? "
" ……. "
" 아니, 난 4년 동안 널 본 적이 없잖아. 네가 어떻게 지냈는지, 누굴 만났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네가 말할 성격도 아니고. 그래서 그냥 묻는 거야. 지난 4년 동안은 정말 괜찮았어? "
4년의 시간이 무색하게도 세희는 나를 너무도 잘 알았다. 세희의 물음에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한 건, 괜찮은 척을 하는 나를 직시했기 때문이다. 지난 4년 동안도, 지금도. 나는 전정국을 잊고 살았고, 아니, 잊고 산 척을 했고, 지난 4년 동안 잊지 못한 전정국을 하루만에 잊지 못할 걸 알면서도 잊을 수 있다고 최면을 걸고 있다. 전정국을 보지도, 만나지도 않은 동안 전정국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내가, 겨우 하루만에 벌어져버린 그 상처를 여전히 치유하지도 못하고 있는 내가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고, 괜찮을 리가 없었다.
받아들이자 울음이 터져나왔다. 두 주먹을 꽉 쥐고, 피가 나올 정도로 아랫입술을 콱 깨물어도 목구멍에서 탁 하고 무언가가 터져나왔을 때, 그제서야 눈물이 고였고, 맺혔고, 흘러내렸다.
세희는 늘 그랬듯이 내 손을 잡아주었다. 팔에 얼굴을 묻고 소매가 다 젖을 정도로 울음을 참아내는 동안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
2013, 열아홉
" 아, 돌았냐고, 진짜. "
" 이런 거 가지고 짜증이야, 왜. "
" 야, 나랑 바꾸면 안 돼? "
짝피구 시간이었다. 남녀 비율이 1.5:1로 되어있는 우리는 무조건 남자가 남자와 짝이 되는 경우가 생긴다. 그 경우가 지금 전정국의 경우였고, 나는 우리 반에서 체육을 가장 잘하는ㅡ전정국 말로는 자기 다음으로 잘하는ㅡ 정호석과 짝이 되었다. 전정국이 신경질을 부리는 이유는 하나였다. 나와 짝이 되지 못한 것. 체육 선생님은 본인이 정해준 룰을 어기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편이었다. 특히 학생들 마음대로 구는 것을 싫어하셨는데, 그래서인지 정호석은 바꿔달라는 전정국의 말에도 고개를 저었다. 대충 전정국을 달래고 정호석에게 붙는데, 전정국 눈에 가시가 있다.
전정국은 되도록이면 빠르게 우리를 탈락시키려는 것 같았다. 공을 잡자마자 정호석과 내 위치가 어디든 상관하지 않고 무조건 우리 쪽으로 공을 던졌다.
" 야, 꽉 잡아리. "
" 전정국 못됐어, 진짜. "
전정국 때문에 분주해졌다. 꽉 잡으라는 정호석의 말에 정호석 허리춤을 꽉 쥐고 있는데 공이 날라오는 순간 정호석과 타이밍이 맞지 않는 바람에 얼굴 정중앙에 맞아버렸다.
졸지에 모래바닥에 뒤로 넘어졌다. 이마에 정통을 맞는 바람에 머리가 띵하고, 이마가 화끈거렸다. 고통을 호소하는데, 전정국이 다급하게 뛰어오는 게 보인다. 옆에서 어쩔 줄 몰라하던 정호석을 밀고는 나를 등에 업고 거뜬하게 움직인다.
" 야, 진짜 미안. 괜찮아? "
" 진짜… 못된 거 알지, 너. "
" 아, 둘이 너무 잘 맞길래 조금 짜증 나가지고. "
" 사람 죽일 공이었어. "
" 정호석 죽일 공이었지. "
" 내가 죽었잖아. "
" 너 안 죽었잖아. "
전정국이 낮게 웃는 바람에 등이 울린다. 전정국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 재수없으니까 웃지 마. "
" 변태냐. 왜 자꾸 부비적대. "
" 너 자꾸…… "
전정국은 가끔 저렇게 얄미운 발언을 던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굵직한 팔뚝을 세게 때리곤 하는데, 지금은 때릴 힘도 없고 대충 어깨에 올린 손을 툭툭 치며 말을 이어가려는데.
" 사람 설레게. "
*
2016, 스물둘
지금까지는 대외활동이고 뭐고, 색다른 커리어에 집중하느라 가장 중요한 커리어를 잠시 잊고 있었다. 대학생이라면 무조건 올려놓는다던 토익이, 바로 그건데, 혼자 하려니 막막하고 문법도, 독해도 약한 탓에 한 문제로만 몇 분을 보내는 느낌이라 학원을 끊었다. 서울시 내에서 최고 강사라며 명성이 자자했는데 그 덕에 강의실도 굉장히 컸고 사람도 굉장히 많아서 늦게 가면 어중간한 자리에 앉아 집중력이 덜한 상태로 수업을 들어야 해서 아침 일찍, 아침 식사도 거르고 가곤 했다.
토익 학원 내에서는 강사님의 수업뿐만이 아니라 학생들 간의 스터디를 만들어주기도 했는데, 거기서 만난 게 석진이 오빠였다.
경기도권도 서울 남자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던 나는 과천 태생이라는 오빠의 말에 그래서 오빠가 그렇게 다정한 편이구나 수긍하곤 했다. 오빠는 동생처럼 나를 잘 대해줬다. 평일 내내 수업에, 근로에, 이런저런 일들로 지쳐있다면 주말엔 수업에, 스터디까지 있어도 오빠와 대화하면 마음이 금세 풀어졌다.
결론적으로 나는 오빠를 좋아했다. 이성적인 마음으로가 아니라 가족적 마음으로다가.
" 난 오빠 진짜 좋아. "
" 그래, 나도 너 진짜 좋아. "
" 그러니까 오늘 밥은 오빠가 쏘자. "
오빠는 당황한 표정을 곧잘 지었다. 그래서 놀리는 맛도 있었고. 가끔 어이없는 일로 놀리면 흥분할 때가 있는데, 그땐 금세 얼굴이 빨개지곤 했다.
오빠와 있는 시간이 편했다. 서울에 있는 내내 친한 동기들도 그 일로 인해 불편해졌는데, 그나마 있는 안식처 같았다. 오빠는 가끔 학교로 찾아와 점심을 함께 해 줬고, 가끔은 도서관에 가서 함께 공부를 했다.
사실 오빠에겐 이런저런 상담을 많이 했다. 토익 상담부터 시작해서 연애 상담까지. 지난 해 과 내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자 오빠는 함께 분노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3년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전정국과 얘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오빠는 내가 상처받지 않을 정도의 수준으로 적당히 그렇게 말해주었다.
" 네가 모르는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
" …그럴 만한 이유가 없을 것 같아. "
" 오랫동안 알았다며. 서로 좋아하는 사이이기 이전에 태어날 때부터 알아왔던 친군데, 어떤 이유에서든지 네가 갑자기 싫어졌을 리가 없어. "
" 그럼 나한테 그 이유를 말했어야지. 왜 내가 싫어졌다고 말했겠어. "
" 물어봐. "
" ……. "
" 그 친구한테 물어보라고. "
오빠는 꽤 단호하게 말했다. 전정국에게 물어보라고. 내게 가장 무서운 말을 하고 있다. 전정국에게 물어보면 달라진 결과가 나올까. 그냥 싫어진 거 말고 다른 이유가 나올 수 있을까. 오빠 말이 정답이라는 걸 알고있으면서도 문득문득 그때의 다정하지 않은 눈빛의 너를 다시 마주하는 게 두려워서 항상 피하고 있었다.
오빠에게 조언을 얻은 몇 달이 지난 후에서야 동창회가 열렸다. 연락처를 남기지 않은 나를 배려하는 것처럼 애들은 우리가 고등학교 시절 사용했던 네이버 학급 카페에 동창회 소식을 알렸다. 매년 보았다. 동창회 소식을. 그럼에도 갈 수 없었던 건 현실에 치여서였고, 변한 전정국의 모습을 보기가 무서워였고, 좋지 않은 결말을 마주했던 그곳에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석진이 오빠 말을 듣기로 했다. 올해 동창회는 반드시 참석하기로. 참석해서 전정국을 만나서 묻기로 했다. 그때의 너는 나에게 왜 그랬는지.
결심이 실패한 건 고향으로 내려가는 버스 티켓을 미리 예매한 후였다. 휴가를 나온 전 남자친구가 찾아왔다. 그러니까 내 자취방 앞으로. 친구로서의 애정도 전부 떠나버린 상태에서 그 애를 마주하는 건 별로 힘겹지 않았다. 그 애가 취한 모습도 안쓰럽지 않았다. 휴가를 나와서 누구와 술을 먹었는지, 왜 술을 먹었는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나를 찾아온 그 애가 나에게 한 말이 가슴에 깊이 박혀버렸다.
" 툭 까놓고 말해서 내가 잘못했냐? "
" …취했으면 집 가서… "
" 내가 그렇게 잘못한 일이냐고. "
" …야. "
" 네가 그랬잖아. "
" ……. "
" 존나, 아, 존나 빡쳐. 존나 지는 내뺄 거 다 내빼놓고 나만 쓰레기지? 아주 지 혼자 쏙 빠졌어, 그치? "
" …내가 잘못했다는 거야? "
" 좆같다, 진짜. "
" …야, 너… "
" 너 나 말고 제대로 연애해본 적 없지? 왜 그런 줄 알아? 너 존나 별로야. 너 싫다는 사람은 없었냐? 아, 생각하니까 존나 웃기네. 있었지? "
" ……. "
" 어, 표정 보니까 있네. 그거 존나 새겨들어라. 너 싫다는 거. "
" ……. "
" 곧 울겠다? 존나 또 나 쓰레기 만드네. "
그날 버스 티켓을 취소했다. 전정국이 내가 싫어졌다는 말은 진심일 거다. 아마 그럴 거다. 그 말을 전정국 입에서 듣고 싶지 않았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싫어진 거라면 내가 더 비참해질 것 같았다.
*
2018, 스물넷
" 거기선 잘 지내고? "
" 응, 오빠는 어때. "
" 나야 잘 지내지. "
오랜만에 오빠와 통화를 했다. 고향에 내려온 지 두달이 흘렀는데, 이제야 정리가 끝난 것처럼. 휴대폰을 사이에 두고서도 오빠는 묻고 싶은 게 많아 보였다. 나도 말해주고 싶은 게 참 많은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고향에 내려가길 추천한 건 오빠였다. 사실 취업도 되지 않은 상태라 그냥 내려가기가 많이 민망했는데, 가족 품만큼 좋은 게 없다더라. 거기다 아직 끝맺음이 서툰 내가 확실한 매듭을 지었으면 하는 바람도 추가했다.
" 오빠. "
" 응. "
" 걔 결혼한대. "
" ……. "
내 말에 오빠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숨소리만 들리더라. 할 말이 없겠지. 조금은 당황스러울 거고. 오빠가 당황스러울 때 나오는 특유의 표정이 떠올라 그냥 웃어버렸다.
" 동창회도 나갔고, 걔도 만났고, 얘기도 했어. "
" 잘했네. "
" 오빠 말대로 다 했는데. "
" 잘했어. "
" 마음은 되게 후련한데. "
" 응. "
" 아직 너무 힘들어. "
" 힘들어? "
" 나 그냥 다시 서울 갈까? "
" 오고 싶어? "
" 여기 있으니까 걔랑 갔던 곳밖에 없어. 걔가 없는 곳이 없어. "
" …오고 싶으면 와도 돼. 여기 나 있잖아. "
오빠는 그렇게 말해줬다. 늘 그랬던 것처럼. 내 마음의 안식처답게.
오빠와의 통화 후 마음이 조금 놓였다. 여기서 달아나도 갈 곳이 생기니까 편안해진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오빠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떨렸다. 본인이 제안한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에, 그 제안으로 인해 내가 깊게 상처를 받았을까 봐 걱정하는 게 뻔했다. 오빠를 조금이라도 배려하고 싶었는데, 나는 아직은 그게 서툴었다.
당시 전 남자친구가 찾아왔을 때 나를 달래준 것도 오빠였다. 그 애가 집 앞을 떠나고 들어가서 나는 쉴새없이 울었다. 다음날 늘 가던 도서관도 가지 못했고, 주말에 학원도 가지 못했다. 집에 먹을 게 없었지만 나가고 싶지 않았고, 울리는 전화도 받지 않았다. 날 찾아온 건 오빠였다. 이것저것 바리바리 싸들고 온 오빠를 집 밖으로 내보낼 수가 없었다. 내 몰골을 본 오빠는 웃음을 터뜨렸다. 왜 이런 몰골로 있느냐고. 그래서 그냥 마음이 편안했다. 이런 몰골로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편안했다.
*
2013, 열아홉
전정국은 내가 언제 기분이 좋은지, 언제 나쁜지 정확히 알았다. 내가 시험을 망친 날 아무리 환히 웃어 보여도 마음 어느 한 구석에 있는 짙은 우울감을 알아내는 건 늘 전정국이었고, 위로해주는 것도 역시 항상 그 애였다. 오늘도 그랬다. 얼마 전에 친 모의고사 성적표가 나오는 날이었다. 평소에 많이 약한 탓에 늘 신경썼던 영어가 한 등급이 내려가면서 우울감이 몰려왔다. 그럼에도 애써 내색하지 않고 꾸역꾸역 울음을 참아가며 집에 와서 가방을 푸는데 책을 꺼내면서 흘러내린 성적표를 본 엄마가 잔소리를 시작했다.
그게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겨우 모의고사 성적일 뿐이었지만 겨우였기 때문에, 고작 그거 하나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생각과 더불어 겨우 그것 때문에 내가 질타를 받는다는 생각에 많이 억울하고, 많이 속상했다. 잔소리를 듣는 내내 밀려오는 서러움에 말대답 몇 번을 툭툭 던지고는 무작정 집을 나왔다.
집을 나오고 나니 갈 곳이 없었다. 동네에 가로등이 드물어 해가 저물고 밤이 찾아오면 꽤 위험한 산길이 가득했다. 휴대폰을 가지고 나오지 않아 어느 누구에게도, 특히나 전정국에게도 연락할 방법이 없었고, 전정국의 집까지 가기 위해서는 무려 다리를 건너야만 했다. 교복 치마에 있는 천원으로 근처 슈퍼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들고 슈퍼 앞 평상에 앉아있었다.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달리 생각할 것도, 달리 볼 것도 없어 발끝으로 장난을 치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야, 너 여기서 뭐해. "
" 어… "
" 집 안 들어갔어? "
전정국이다.
물고있던 아이스크림을 떨어트렸다. 전정국이 아까운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을 주워 겉에 달라붙은 흙을 살살 털어냈다. 다시 입에 물려주지는 못하겠는지 근처 쓰레기통에 아이스크림을 골인시킨 전정국이 허리를 조금 숙여 시선을 맞추었다.
" 기분 안 좋아 보이네. "
" ……. "
" 무슨 일 있었어? "
전정국은 늘 그랬던 것처럼 아무도 모르던 내 기분을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꾹 눌러담고 있던 감정이 터져나왔다. 작은 마음에 가득 차 있던 울음이 새어나왔고, 다정하게 마주친 눈을 쳐다보다가 곧 고개를 숙여 흐느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꼭 다 아는 사람처럼 전정국은 내 얼굴을 제 배에 기대게 하고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한참을. 눈물이 조금씩 멈추어들면서도 서러움은 멈추지 않아 몸을 바들바들 떨 때까지 그렇게 한참을.
전정국이 내 옆을 차지한 건 눈물과 서러움 모두가 멈춘 그 다음이었다. 전정국은 궁금한 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는데, 이번에는 비교적 잘 참고 있더라. 그럼에도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게 부담스러워서 애써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전정국에게는 뭐든 가능했다. 뭐든 말할 수 있었다.
" 나 성적 떨어졌어. "
" 그럴 줄 알았다. "
" …니가 뭘 알아. "
" 울 일이 그것밖에 더 있어? "
전정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풀리지 않는 마음이 가득해서 괜히 심술을 부리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전정국은 개의치 않고 툭 내뱉으면서도 다정하게 내 등을 토닥여주었다. 퉁퉁 부은 눈으로 전정국을 쳐다봤더니 전정국이 애써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돌린다.
" 나 많이 못생겼어? "
" 아냐. 예뻐. "
그러면서도 대답에 웃음기가 가득하다.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건 당연지사고. 이미 작아진 눈을 더 작게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지만서도 가늘게 실눈을 뜨고는 전정국의 두 볼을 붙잡아 내 쪽으로 향하게 했다. 전정국이 토끼처럼 동그래진 눈으로 쳐다보더라. 그 모습이 웃겨서 웃음이 터져나왔는데, 이번엔 퉁퉁 부은 눈으로 웃는 내가 웃긴지 전정국이 이번에는 참지 않고 크게 웃어버린다.
" 야, 그만 웃어라. "
" …아, 진짜.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알지. "
" 변태냐? "
" 내가 엉덩이를 만졌어, 뭘 했어? 만졌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
" 와, 이거 진짜 변태 아니야? "
" 아, 억울해. "
전정국은 유난히 변태라는 말에 억울해했는데, 전정국이 억울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을 때마다 나는 늘 그 단어를 사용하곤 했다. 내 우는 모습을 보인 게 괜히 민망해서 전정국을 몰아세웠는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전정국은 얼굴까지 시뻘개져서는 뒷목을 잡더라. 평상에 조금 더 넓직하게 앉으며 고개를 틀어 열심히 해명하는 전정국을 쳐다보았다. 뒤로는 밤이 가득했고, 별이 반짝였다. 고요함 속에서 울려퍼지는 웃음소리가 좋았고, 어둑함 속에서도 잔잔히 퍼지는 전정국의 목소리가 좋았다.
전정국 뒤쪽으로 시선을 꺾고 있던 나를 알아차린 전정국이 내 앞으로 손을 흔들었다. 초점을 잃었던 시선이 잡히고, 곧 전정국의 얼굴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 내 말 듣고있어? "
" 어? 어… "
" 안 듣고있지. "
" ……. "
지금이다.
전정국에게 고백할 수 있는 타이밍이 딱 지금인데. 전정국과 눈을 맞췄다. 갑작스런 고요함에 전정국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전정국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전정국, 나… "
" ……. "
" ……. "
" ……. "
" …아니다. "
좋은 타이밍과 그 타이밍에 낼 수 있는 용기는 별개였다. 얌전히 내 다음 말을 기다리던 전정국은 맥이 빠진 것처럼 헛웃음을 짓는다. 후련한 한숨을 내쉬며 몸 뒤로 팔을 뻗어 몸을 지탱했다. 발을 쭉 뻗어 발장난을 치는데, 가만히 내가 하는 모양새를 쳐다만 보던 전정국이 알 수 없는 한마디를 뱉는다.
" 나도. "
" …어? "
전정국은 입꼬리를 올려 웃기만 했다. 꼭 내가 하려던 말을 아는 사람처럼 그렇게 소리 없이 웃기만 하더라. 좋은 밤이었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마음을 나누지 않아도.
//////////사담//////////
여러분! 컬링 너무 재미있지 않나염 저 컬링 보다가 급히 달려와서 올리는 중이에요 (ㅠㅠ)
분량 조절 실패해서 내용 좀 더 추가하고 전 진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멍청인가 봐요!
저 요새 글잡에 좋아하는 작품 두 개가 있는데 진짜 완전 너무 재미있어서 거기에 빠져 살아요...
특히 하나가 진짜 완전 레전든데 여러분도 아시는 그 작품일 것 같아서 막 작품 애기도 하고 싶고 같이 덕질도 하고 싶고 그릏네여...
여러분이 작가를 기다리는 마음을 제가 이해하게 되었답니다 (ㅠㅠ) 작가님 어서 다음 편 올려주세요!!!
↓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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