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양식 호그와트가 보고 싶어서 만든 세계관. 해리포터와 유사성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 카테고리 선택은 돌아가며 선택합니다.
* 노래 있습니다.
* 작가 피셜, 첫 화는 굉장히 재미 없습니다.
음양학당(陰陽學黨) ; 열여덟 어느, 한 달동네, 그곳은 평범하고 허름한 달동네다. 집들이 따닥따닥 붙어 있어 조금만 소리쳐도 옆집에게 적나라하게 들렸다. 그리고 집들은 굉장히 낡고 오래되어 보였다. 그중 가장 낡고 허름한, 10평 정도 될까 말까한 집이 있다. 그 집에선 살아온 세월을 보여주듯 머리가 하얗게 세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와 그녀의 손녀가 살고 있다. 손녀의 이름은 '김여주', 올해 열여덟 살이 되었다. 열여덟. 가장 예쁘고 빛난다고 다들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할 시기. 오죽하면 낭랑 십팔세라는 말이 괜히 생겨났을까. 대한민국의 보통의 열여덟들은 고등학교를 다닌다. 학교를 가고, 학원을 가고, 그와중 친구들도 사귀고, 공부도 하고, 연애도 하고.... 이게 모두가 생각하는 평범한 열여덟, 평범한 고등학생의 일상일 것이다. 하지만 열여덟 여주는 그런 평범한 고등학생의 일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고등학교를 다니지 않으며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는 커녕 친구조차도 없었다. 학업? 먹고 살아가기 바빠 죽겠는데 얼어 죽을 학업.... 연애? 누굴 놀리나. 가난한 집안 사정과 할머니의 병원비를 위해서 매일 매일 아르바이트를 하는 신세에 학교가 무슨 소용이고, 친구가 무슨 소용이냐. 여주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문에 할머니는 매일 미안하다는 소리를 달고 살아야했다. 여주는 그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뭐가 미안해. 가뜩이나 몸도 안 좋은 사람이 부모 없는 날 18년이나 돌봐줘서 오히려 고마워 눈물이 다 날 지경이지. 이 말을 전하지 못하는 게 참 아쉬웠다. 아침 일찍 일어나 아르바이트를 가고, 또 아르바이트를 가고, 그리고 하루의 끝을 아르바이트로 마무리하는 생활. 우리가 알고 있는 열여덟 살의 생활과는 먼 생활을 하고 있는 열여덟 살, 그게 여주다. 누군가가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했던가, 이 말을 했던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마주하면 여주는 결심했다. 무조건 주먹으로 한 대 쳐버리겠다고. "김여주" "김여주" 새벽 다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2월 달이라 아직 동이 틀려면 한참은 멀었다. 방 안은 자고 있는 할머니와 여주밖에 없는 여자뿐이었다. 그런 공간에 낯선 남자 목소리가 여주의 귓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아르바이트에 지쳐 곯아떨어질 시간인데 오늘은 이상하게 잠이 얕게 들었던 여주였다. 여주는 억지로 감았던 눈이 번득 떠졌다. 누워 있는 상태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편의점 점장 목소리로 환청을 들은 건가 싶어 '어휴, 점장 개새끼....'라고 욕을 짓걸이다 다시 눈을 감았다. 지금 자도 얼마 못 자는 시간이었지만 아르바이트 가서 피곤해 죽으려니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두는 게 나았다. 그리고 그때, 그 목소리는 다시 들려왔다. '김여주' 이번에는 제대로 들은 듯 여주는 자신의 몸을 벌떡 일으켜서 주위를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그러나 빛이 바랜 벽지, 최소한의 낡은 가구들, 최신형과는 거리가 먼 티비, 주위에 널부러진 약 봉지들, 옆에서 눈을 꼭 감고 자고 있는 할머니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혹여나 밖에서 자신을 부른 건가 싶어 문을 열어 바깥을 둘러 보지만 차디찬 새벽 공기만 여주를 맞이해 줄 뿐, 남자의 실루엣 조차 보이지 않았다. 여주는 슬슬 짜증이 났다. 부를 거면 크게 부르던가, 불렀으면 모습을 드러내던가. 새벽에 이 무슨.... 여주는 미간을 구기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누웠다. 또 부르기만 해봐라. 여주는 이를 부득 갈며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씌웠다. 여주는 눈을 꼭 감았지만 묘하게 계속 귓가를 맴도는 나즈막한 남자의 목소리에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목소리가 꽤 부드러웠지? 근데 말투는 부드럽기보다는 좀 딱딱했어. 그리고 어딘가가 소름이 돋는 면도 있었고.... 한참을 여주는 그 목소리에 대해 생각했다. "아!" 서서히 잠에 빠져들려든 순간, '파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와 함께 얼굴에 느껴지는 날카로운 무언가가 닿은 듯한 느낌에 여주는 이불을 홱 걷었다. 여주는 어릴 때부터 하고 다닌 목걸이가 있었는데 검은 끈에 파란 구슬이 매달려 있는 단순한 모양이었다. 언제부터 끼고 다녔는지도 몰랐고 이 목걸이에 대한 기억은 할머니가 절대 빼지 말라며 신신당부했던 그 기억만 남아있었다. 얼굴에서 느껴지는 따끔한 이 감각은 구슬이 깨지며 파편이 튀기면서 생긴 아픔이었다. 여주는 단전에서부터 빡침이란 게 올라왔다. 새벽에 별 꼴을 다 당하는 구나. 여주는 올라오는 화를 억누르려고 숨을 깊게 들이 마쉬고 내쉬었다. 십 년 넘게 잘 있던 구슬은 왜 또 깨지고 난리람. 일단은 치워야 하기에 여주는 얼굴을 잔뜩 구긴 채, 몸을 일으켰다. 구슬 파편이 하나라도 이불 위에 떨어트리지 않게 티셔츠를 살짝 잡고 흘러내리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서 휴지통으로 향했다. "오늘 무슨 날인가...." 여주는 툴툴거리며 휴지통을 열어 옷 위의 깨진 구슬을 슥슥 털었다. 조심성 없이 털다 왼손의 검지가 구슬 조각에 베였다. 단말마의 탄성이 터져나왔다. 아! 씁.... 검지에에서의 저릿한 느낌에 서둘로 구슬을 다 털고 검지를 보았다. 빨간 피들이 꽃망울처럼 맺혀 있었다. 내 인생이야 원래 기구했지만 오늘은 기구함의 끝판왕이구먼. 쯧쯧. 여주는 혀를 차면서 자조적으로 말했다. 응급처치를 위해 검지를 보던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눈에는 허름한 집 안과 맞지 않게 딱봐도 비싸보이는 족자 하나가 휴지통 위에 걸려져 있었다. 얼핏 보면 그냥 평범한 풍경화지만 자세히 보면 용이 한 마리 그러져있다. 어릴 때부터 걸려 있던 거라 별 관심은 없었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관심이 갔다. 어? 원래 여기에 용이 있었나. 그것도 용만 노란색으로 색칠 되어있고.... 여주는 자신도 모르게 손이 갔다. "어? .... 망했다" 용을 쓸려던 손이 하필 베인 왼손의 검지였고, 선명하게 여주의 피가 찍혀있었다. '망했다'라는 말이 절로 터져나왔다. 그런데 이미 찍혀버린 걸 어쩌겠는가. 종이라서 지우지도 못할텐데. 할머니의 평소 모습을 보니 그렇게 아끼던 족자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래, 아끼면 휴지통 위에 걸어두겠어? 이렇게 저렇게 합리화한 여주는 손가락에 흐르는 피부터 닦고 밴드를 붙였다. 그리고 할머니의 기색을 살피며 벽에 걸린 족자를 슬쩍 뺐다. 제발, 걸리지 않기를.... 여주는 몰래 족자를 숨겨놓았다. 좁아터진 집구석에 숨길 곳이 어디있겠나 싶었지만 장롱 속에 아무렇게나 쳐박혀진 족자의 모습에 만족하며 여주는 이부자리로 돌아왔다. 여주가 쳐박아둔 족자는 뚜렷이 여주의 핏자국이 찍혀 있었다. 정말 순간이었지만 풍경화 속에 있는 용이 살짝 꿈틀거렸다. 어떤 넓고 넓은 방 안, 그 안은 책들이 빽빽하였고 업무용 큰 책상과 의자 하나, 방 한 가운데에 사각 테이블과 그 주위에 배치된 소파들. 방 안은 단조롭고 단순했다. 하지만 그 안의 공기는 무거우면서도 따뜻하고, 따뜻하면서도 차가운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방 안의 창들의 크기는 어마어마했다. 방의 업무용 책상에선 할 일이 많다는 걸 보여주듯 잔뜩 쌓아올려진 서류들과 손이 분주한 한 남자가 있었다. 검은 수염과는 대비되게 머리가 하얗게 세어있었다. 책상 맨 앞쪽에 놓여져있는 명패 하나, 명패에 적혀져 있는 글은 '교장 이규원' 딱 다섯 글자 밖에 없었다. 오늘따라 큰 창을 통해서 바라보는 하늘에 떠 있는 달은 유독 선명했다. 달빛이 밝은 밤이었다. 그 덕에 방 안의 불은 하나도 켜있지 않아도 방 안은 밝았다. 방 안에 인위적으로 켜져있는 건 업무용 책상 위에 있는 스탠드뿐, 들어오는 빛들은 다 푸른 달빛이었다. 창가에 여자 한 명이 서 있었다. 용모가 꽤나 귀엽고 앳되 보여 기껏해봐야 스무살이 될까, 말까한 얼굴이었다. 그 여자는 달빛에 홀린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규원!" "네, 예원님" 창가에 있는 여자는 누가봐도 규원보다 훨씬 젊고 어려보였지만 머리가 하얗게 센 규원의 이름을 아무런 호칭 없이, 친숙하게 불렀다. 그에 규원은 자신이 쓰고 있던 돋보기를 내려놓은 채로 여자를 응시하며 깍듯한 존댓말로 응하였다. 어린 여자의 반말을 듣고 깍듯하게 존대하는 늙은 남자. 누가봐도 이상했다. 하지만 둘 뿐인 공간에서는 아무도 그들에게 뭐라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들도 이 상황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느껴져" "무엇이 말입니까?" "드디어 내 친구의...." "아! 혹시...." 여자는 뭐가 그렇게 행복한 것인지 정말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하늘에 높이 떠있는 달보다 환했다. 밝은 웃음에 달빛의 푸른 빛까지 더해지니 조화로운 그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가 보았더라면 질투를 했을지도 모르 정도로 말이다. "정말 오랜만이다." "오랜만에 보시겠네요. 그의 주인도 느껴지세요?" "주인.... 그 아이야" "네?" "그 아이라고. 사라진 그 아이" "...." "이게 무슨 얄궂은 인연일까?" 규원은 예원의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감이 교차한 표정이었다. 예원은 달을 다시 바라보았다. 넌 도대체 어디서 뭐하고 있길래. 이런 인연을 만들어 온 거니? 예원은 계속 달을 끝까지 지켜보며 말했다. "그 아이 주위에 있던 결계가 약해졌어, 곧 있으면 깨질 결계야. 알지? 이제 우리가 무얼 해야하는 지 알지?" "네, 압니다. 서둘러 준비하겠습니다." "결계가 깨지기 전에 우리 쪽으로 데려와야 돼. 빨리...." 여자는 제법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였고 규원도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규원은 여자의 말에 휴대폰을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아까보다 더욱 더 분주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여자는 언제 단호한 목소리를 냈냐는 듯이 그저 생긋 웃었다. 혹시 결계가 약해진 것도 너와 관련된 걸까? "오늘은 달이 진짜 밝구나." 너와 곧 만나게 되서 그런가봐. 얼른 와, 보고 싶어. 친구야"
"맞아! 드디어 내 친구가 느껴져!"
오후 일곱 시가 넘어가는 시간은 여주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모든 것이 평소와 별 다를 게 없었다. 할머니와의 약속 때문에 해야하는 검정고시를 위해 문제집들이 자리한 계산대도, 수고한다며 웃으며 나가는 전타임 남자 알바생도, 일곱 시만 되면 라면을 사러 우르르 몰려오는 중학생들도. 이 모든 것이 정말 지루하게도 같았다.
그러나, 그 지루함이 그리워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지극히 지루한 일상 속에 변수 하나가 들어옴으로써 모든 것이 틀어지게 되었다. 발단은 괴이한 새벽, 바로 구슬이 깨진 날부터였다. 신기하게 오지 않던 잠이 물 밀려오듯 밀려와 순식간에 잠에 빠진 여주는 결국 늦잠을 자버렸다. 급하게 집에서 나서는 순간에 누군가와 부딪히게 되었다. 부딪히면 반동으로 인해 몸이 튕겨나갈텐데 아무 느낌이 들지 않았다. 멍하니 자신과 부딪힌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또, 누군가가 자기 몸을 그대로 통과해서 지나갔다.
그런 일뿐만 있으면 다행이게... 자기가 보이냐며 귀찮게 따라오는 놈들이 허다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며칠 씩이나 반복 중이었다. 누군가의 설명이 없어선 안 되는 상황이었다. 아니, 누군가가 설명한다고 해도 받아들일수나 있으련지. 여주는 귀신이나 오컬트 적인 것들에 대해 믿지도 않고, 아니 아예 깊게 생각한 적도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고.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이 허구한 날 따라다니며 스트레스를 주니 여주는 이 존재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흔히 말하는 '귀신'이라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라고.
귀신은 아르바이트 중에 식당에 있는 티비에서 영화를 보여주는 채널에 나왔던 그런 모습의 귀신이 아니었다. 흰 소복을 입지 않았고, 얼굴이 그렇게나 창백한 것도 아니었으며 그저 그냥 평범한 사람처럼 생겼다. 다만, 아는 체를 한다거나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정말 보기 힘들정도로 안면이 일그러지거나 흉측하게 변하였다. 그 덕에 여주는 사람과 귀신을 구별하는 데 용을 써야했다.
"어서오세요"
".... 내가 보여?"
아차, 실수했다. 공부를 하던 여주는 정신이 팔려 귀신이 들어오는 걸 보지 못했을 뿐더러 문을 열었을 때 나는 종소리도 듣지 못할 정도로 문제집에 집중하고 있던 터라 눈 앞에 있는 사람 형체에 자동적으로 인사를 해버렸다. 그 모양새는 '나는 당신이 보여요'라고 광고하는 꼴이었다. 자신이 보인다는 걸 알자마자 안면이 점점 일그러져가는 여자 귀신이었다. 그 모습은 언제봐도 징그럽고, 무서운 상황에 겁이 났다. 여주는 무서움에 몸이 굳어진 채로 귀신을 마주했다. 여자귀신은 흉측하게 일그러지는 얼굴로 계속 말을 걸어왔다.
"내가 보이는거지?"
"...."
"왜 갑자기 모르는 척이야?"
"...."
"내가 보이면 내 부탁 좀....!"
딸랑-
".... 어서오세요!"
점점 흉측해져가는 얼굴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던 그때, 손님이 들어왔다. 멀끔한 차림의 남자 손님이었다. 여주는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아마,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제일 밝은 모습으로 손님을 맞았을 것이다. 인사를 하고 편의점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남자에게 집중하고 있을 때,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여주였다.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귀신을 쳐다보자 그 여자귀신의 상태가 이상했다. 일그러지던 얼굴이 갑자기 펴지더니 정말 영화에서 본 귀신처럼 창백해져서는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온몸을 떨고 있었다. 처음 보는 광경에 시선이 빼앗겨 여주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똑똑. 갑자기 들려오는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앞을 쳐다보니 남자손님이 계산대를 주먹으로 두 번 친 모양이었다.
"아! 죄송합니...."
'똑똑'의 의미를 계산의 의미로 받아들였던 여주는 계산을 하려 황급히 바코드 스캐너를 잡고 계산하려 했지만 계산대 위에 올려져있던 건 아무 것도 없었다. 혹시 담배를 사려나 싶어 남자손님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지만 남자손님도 뚫어져라 여주의 얼굴만 볼 뿐, 아무런 말도,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없이 서로 눈을 마주보고 있는 상황이 민망해져 고개를 돌리려고 할 때,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네? 아, 안녕하세요."
남자손님은 난데없이 인사를 건넸다. 갑작스런 인사에 여주도 얼떨떨한 채로 인사를 건넸다. 인사성이 밝은 사람인가. 동네에 시도 때도 없이 인사하는 한 남자 꼬맹이가 떠올랐고 이 남자도 그런 분류라고 넘긴 여주였다. 이제 담배 달라고 하려나 싶을 즈음에 남자는 담배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저는 황민현이라고 합니다"
"...."
"김여주양이 .... 맞으시죠?"
남자 손님은 담배 이름을 말하는 대신에 자신의 이름, '황민현'이라고 소개하였다. 자신을 소개하는 남자 손님의 모습에 여주는 더더욱 얼떨떨해졌고, 자신의 이름까지 말하는 남자에 미간까지 찌푸려졌다. 민현은 여주의 얼굴을 보며 푸핫하고 웃으며 그렇게 이상하게 볼 건 없다고 했다. 아니, 이 남자야. 생판 처음인 사람이 자신의 이름까지 말하며 인사하는 데 안 이상하고 배겨? 눈으로 말하는 여주에 민현은 예쁜 눈웃음을 보이주었다.
"혹시 시간 괜찮으세요?"
"네?"
"괜찮으시면 저랑 얘기 좀...."
여기저기 아르바이트하면서 추근덕대는 남자들이야 많았지만 이렇게 젠틀하게 들이대는 경우는 또 처음이라 당황한 여주는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민현은 생글생글하게 여주의 입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었고 그 웃음에 멍때리다 여주는 정신차려 추근덕대던 남자들에게 항상 했던대로 앙칼지게 말했다.
"무슨 얘기요? 저는 할 얘기 없고, 뭐 안 사실거면 나가...."
"이런 얘기요."
민현이라는 남자는 여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호주머니에 넣고 있던 한 손을 빼내더니 옆에서 벌벌 떨고 있던 귀신의 머리를 순식간에 한 대 쳤다. 뭐야. 저 남자? 저게 보여. 아니, 저게 만져져? 난데 없이 벌어지는 상황에 눈을 크게 뜨고 귀신을 바라보니 귀신의 머리에는 노란 종이 하나가 붙여져 있었다. 노란 종이 위에 붉은 글씨로 써진 한자로 봐서는 부적 같았다. 이마에 노란 종이를 붙이고서부터 소리를 꽥꽥 지르는 귀신이었다. 도망치려고까지 해봤지만 민현이 뭐라고 읊자마자 자리에서 꼼짝도 못했다.
당황스러운 상황 전개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여주는 입을 벌리고 모든 상황을 지켜보았다. 잡힌 귀신은 발버둥을 쳤지만 역시나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고 민현은 귀신을 향해 의미 모를 말을 짧게 중얼거리더니 그 여자 귀신은 곧 불에 타오르더니 없어져 버렸다. 불에 타오르면서 지르는 여자 귀신의 비명은 끔찍했다. 상황이 종료되었고 여주는 얼빠진 표정으로 민현을 쳐다봤다. 아직도 귀에선 여자 귀신의 비명이 들려오는 듯했다. 여주는 당황스럽고 심란하고 혼란스러워 죽겠는데 민현의 표정은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시간 돼요?"
민현의 부드러운 음성에 정신차린 여주는 '어, 어... 그러니까....' 밖에 되풀이 하지 않았다. 그러다 생각난 건 자신이 지금 알바 중이였다는 것이었다. 제가 지금 알바 중이라.... 점차적으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민현은 '음'하는 소리를 내며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펜 좀 빌릴게요'라는 말과 함께 계산대 위에 퍼질러져있던 문제집 위에 무언가를 써내려갔다. 민현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던 여주는 민현이 무얼 써내린 게 아니라 무얼 그리는 것이였다는 걸 알아챘다.
"그림 위에 머리카락 한 가닥만 올려주시겠어요?"
민현의 부탁에 여주는 이번에 무엇을 하려 그러는지 의심이 가지만 궁금하기도 해서 바로 자신의 머리카락 한 가닥을 뽑아 그림 위에 올려놨다. 그러자 민현은 또 무언가를 읊조렸다. 검은 펜으로 그려진 그림의 선은 붉은 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펑'하는 소리와 함께 가게 계산대 쪽은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났다. 연기때문에 눈을 뜨지 못하는 여주는 콜록콜록거렸다. 그 연기는 금방 사라졌고 눈을 뜰 수 있게된 여주는 기침이 멎어감과 동시에 살며시 눈을 떴다. 눈을 뜨니 여주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눈앞에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서있었다. 다름 점을 굳이 하나 꼽자면 눈이 공허했다.
"여주양의 기억이 담겨 있어서 오늘 평소와 다른 일이 있는 거 아니면 일상 루트 그대로 할 거예요."
"아...."
"알바는 이 친구한테 부탁하고 저희는 얘기하러 갈까요?
"...."
여주는 옷을 챙겨 민현을 따라나 설 수밖에 없었다.
어디로 갈 지 고민하다 결정한 건 카페였다. 민현이 '찻집에 가면 좋은데.... 제가 여기 지리를 잘 몰라서 그런데 혹시 아는 곳 있나요?'라고 말하는 덕에 결정한 카페였다. 제 또래처럼 보이는 민현이 '찻집'이라는 단어를 쓴 게 조금 거슬렸지만 일부러 말을 꺼내지 않았다. 태클 걸게 산더미인데 굳이 이런 말 하나하나에 태클 걸 기력은 없었거든. 여주와 민현은 시내 쪽으로 향했다. 자신도 카페란 곳에 발을 들이민 적은 없는 터라 눈에 보이는 프렌차이즈점 카페 아무 곳이나 들어갔다.
"주문하시겠어요?"
"음...."
문을 열고 들어가니 눈에 보이는 메뉴판의 가격에 흠칫한 여주였다. 아니, 무슨 커피 하나에 3000원이 넘어가? 500원짜리 자판기 커피랑 뭐 다를 게 있다고.... 여주는 에스프레소로 결정했다. 여기서 제일 쌌거든. 그래봤자 500원 짜리 자판기 커피 여섯 잔을 사먹을 수 있는 돈이었지만. 민현에게 뭐 시킬건지 물으려 민현을 쳐다보았다. 민현은 가게 이곳저곳 살펴보며 동공이 방황하고 있었다. 오히려 여주보다 더 어색해보이는 민현이었다. 생긴건 맨날 이런 곳에 들어와서 '아메리카노요. 샷 두 번 추가해주세요.'라고 말할 것처럼 생겨서는 여주와 점원을 왔다갔다 쳐다보며 어색해했다. 이 사람아, 메뉴판을 봐야지 뭘 보고 있는 거야....?
".... 여기에 당근 주스는 없겠죠?"
"...."
"...."
결국은 벽에 크게 걸려있는 메뉴판도 보지 않고서는 메뉴에도 없는 당근주스-평소 본인이 즐겨마신다.-를 찾았다. 여주는 황당하는 얼굴로 민현을 쳐다보았다. 여주는 민현을 콕 찔러선 위쪽을 가리켜 메뉴판이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하하, 아, 메뉴판이 있었네요! 음, 저는 율무차요."
눈이 마주친 민현은 바보같은 웃음 소리를 낸 후, 메뉴판을 확인한 후, 율무차라고 정정하였다. 저는 에스프레소요. 여주까지 주문을 완료하였고 각자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들었다. 역시, 부잣집 도련님이었어. 생긴 게 귀티가 철철 흘러내리더니.... 민현의 지갑을 보아하니 딱봐도 비싸보이는 가죽 지갑이었다.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지만 왠지 민현의 지갑을 보니 헐을 대로 헐은 지갑이 부끄러워져 급하게 돈을 꺼내고 지갑을 주머니에 쳐박으려 했다.
"여기요"
민현은 카드를 꺼내 여주의 것까지 모두 계산하였다. 어디서 얻어먹고 다니지는 말자는 신념이 있던 여주는 민현의 행동이 조금은 자존심 상했다. 내가 가난하다는 걸 눈치챘나. 하긴 지갑도 지갑이지만 옷도 많이 해졌으니 그렇게 보일 만도.... 그래도 자존심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건 열등감이었다. 가난해도 커피 마실 돈은 있다는 듯 민현에게 자신의 에스프레소 값을 주었다. 이게 뭐냐는 표정으로 여주를 바라보는 민현이었다. 저도 돈 있어요. 여주의 말에 멍청한 얼굴로 되물은 민현에 여주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저도 돈 있으니까 받으시라고요. 여주는 민현의 손을 덥썩 잡아 그 위에 돈을 올렸다. 하지만 민현은 다시 돌려주었다. 조금은 화가 날 것 같아 다시 주려던 참에 민현이 말하였다.
"시간을 내달라고 부탁한 쪽이 사는 게 맞는 거 잖아요?"
"...."
"저는 여주 양의 시간을 사는 거니까 너무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아요"
"...."
민현은 긴 다리로 구석진 곳에 걸어가 엉덩이를 붙였다. 처음 받아본 동정 없는 호의에 괜히 기분이 이상해지는 여주였다.
"근데 이건 뭐예요? 사은품 같은 건가요?"
진동벨을 들고 여주에게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보는 민현이었다. .... 조금 깬다. 여주는 민현의 앞에 앉았다. 시간이 지나고 기다리던 율무차와 커피가 나왔다. 민현은 진동벨을 신기해 하는 것을 그만 두고 본래 목적이었던 이야기하기 위해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리고 첫 운을 뗐다. 나이 얘기였다.
"여주양이 올해로 열여덟 살이죠?"
"네"
"저는 열아홉 살이거든요"
커피를 마시던 여주는 순간 뿜을 뻔 했다. 커피가 심각하게 써서 놀란 것도 있지만 민현이 아직 미성년자라는 사실에 놀란 듯했다. 자기 또래 같긴했지만 어딘가 성숙한 민현의 모습은 어른 같아 보였거든. 여주는 휴지로 입을 닦으며 민현을 쳐다 보았다. 민현은 다소 더러운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소를 유지하며 '그러니까 말 놔도 되죠? 여주양도 놓는다면 더 좋고'라고 말을 한다.
어떻게보면 뻔뻔스러운 모습에 여주는 민현을 쳐다만 보고 있으니 민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덧붙혔다. 우리 자주 만날 게 될 거니까 편하게 지내면 좋잖아? 혹시 불편해? .... 이미 말을 놨는데요? 오늘 처음 봤지만 다소 자연스러운 반말이었다. 여주는 허락도 안했는 데 말을 놓는 민현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나는 너랑 편한 사이가 되고 싶어."
다정함이 혹시 이 인간의 디폴트 값인가. 민현의 눈이라던가, 말투라던가 민현은 참 다정했다. '꿀 떨어지는 눈빛'이라는 게 무슨 말인지 정확히 잘 몰랐던 여주지만 민현을 보고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꿀을 의인화하면 민현일까라는 이상한 생각도 해보았다. 저렇게 말해오는 민현에게 어떻게 거부할 수 있으리. 누가 뭐래도 칼같던 여주였지만 희안하게 민현은 여주를 무르게 만들었다. 민현의 그 일명 '꿀 떨어지는 눈빛'에 백기를 든 여주는 말했다. 그래. 놓자.
이제 말도 놓았겠다. 슬슬 이곳으로 데리고 온 이유를 말해야할 것이다. 민현도 그걸 알기에 아까 편의점 때처럼 '음...'하며 고민했다. 어디서부터 얘기해야하나... 일단은 내가 왜 널 찾아왔는 지부터 설명해야겠지? 여주는 다시 쓰디 쓴 커피를 들이키며 민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우, 써. 저절로 찡그려지는 얼굴로 민현을 봤다. 민현의 입에서는 뜬금 없는 이야기가 나왔다.
"여주야, 학교 다니고 싶지 않아?"
자신이 온 목적을 설명하겠다고 해놓고선 맥락없는 질문을 던지는 민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학교를 다니지 않는 사실을 어떻게 안 거지. 그러고보니 내 이름도 먼저 알고 있었지. 민현은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수상했다. 당연히 여주가 그렇게 느낄만도 했다. 여주의 답을 기다리고 있는 민현에 먼저 답은 해줘야 할 것 같아 입꼬리만 슬쩍 올려 대답했다. 그닥?
"왜?"
여주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바로 돌아오는 질문이었다. 비행을 즐기지도 않고, 검정고시도 열심히 준비하는 여주였기에 긍적적인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의외이긴 하였다. 모두가 여주는 가난한 상황으로 인해 학교를 다니지 못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민현은 대충 예상했던 것인지, 놀라지 않은 척 하려는 것인지 평온한 표정으로 그 이유를 물었다. 여주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학교를 다닐 이유가 없"
"할머니 때문이지?"
여주의 말은 민현에 의해 멈추어졌다. 뭐야, 자기가 말할 거면 나한테 왜 물어본 거야. 그리고 내가 할머니랑 살고 있는 건 또 어떻게 알았데? 속으로 투덜댔지만 민현의 말이 맞는 말이기에 시원하게 '아니'라고 말하지 못 했다. 그렇다고 학교를 다닐 이유가 없다는 건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말 학교를 다닐 이유가 없기도 했다. 즉, 그 말은 여주는 학교를 가난 때문에 '못' 간게 아니라 '안' 간 것이었다.
여주는 학교 내에서 소위 말하는 '왕따'였다. 가난하고, 부모가 없다는 게 전혀 흠이라는 게 아닌데도 자신들과 가정환경이 다르다고 생각한 학생들이 저지른 어이없는 일이었다. 보통은 그런 상황에 주눅이 들 지 않는가? 하지만 여주는 가만히 당하고 있는 성격이 아니였다. 그대로 돌려주는 성격이 바로 김여주라는 사람의 성격이었다. 그렇다고 '왕따'때문에 학교를 안 다니는 것은 아니다. 이건 그냥 여주의 서사일 뿐이었고 정확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렇게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과 하도 주먹질을 해대서 처음엔 동정으로 감싸주던 선생들도 여주에게 질린 것인지 어느새 시선이 바뀌어 있었었다. 그렇지만 여주는 그게 나았다. 어디서 되도 않는 동정이야. 동정할거면 돈으로 주던가. 어디선가 들어본 말을 읊조렸던 여주였다. 중학생 때부터는 초등학교에서 잘 나왔던 성적도 안 나오기 시작했다. 머리가 나쁜 건 아니었지만 사교육에 돈을 때려 넣어 공부한 아이들을 어떻게 이기리. 설상가상 할머니까지 쓰러지는 일까지 생겨 공부는 아예 버려두게 되었다.
중학교에도 유치한 것들은 꼭 있는 모양인지 괴롭힘은 끝나지 않았다. 아까도 말했듯이 여주는 가만히 당하고 살 성격이 아니었다. 웃기게도 싸우는 데에 재능이 있는 건지 주먹 싸움은 남학생들보다 더 잘했다. 오죽하면 복싱으로 챔피언이 되어서 떼돈을 벌어볼까라는 생각도 잠시 한 여주였다. 이제 여주에게 학교는 감정 소모, 주먹 다짐하러 가는 곳,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해야 되자 마자 쓸데 없는 감정 소모를 할 바에는 차라리 그 시간에 생활비를 더 보태는 데 힘을 쓰자라고 결정한 여주였었다. 여주는 병원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에 뛰어 들었고 학교를 빠지는 일이 많아졌다. 마음같아선 학교도 때려치우고 싶은데 중학교는 의무 교육이라 어쩔 수 없었고 할머니도 초졸로 끝나는 제 학력을 바라지 않았다. 중학교는 아슬아슬하게 출석 일수를 채워 졸업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않았다. 물론, 할머니는 말렸지만 여주의 의지가 너무 확고해 검정고시로 타협하였다.
여주의 서사를 살펴보면 보이는 대로 가장 주된 이유는 민현이 정확히 짚었듯이 '할머니'가 이유였다. 까놓고 말해서 여주의 할머니는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입원도 마다하고 폐지를 줍고 다니니 여주가 소매 걷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여주의 엄마, 아빠는 어디 있냐고? 여주의 부모님은 여주가 태어나자마자 죽었다. 여주는 그렇게 알고 있다. 가족이라곤 할머니 하나인데 남들이 가진 건 거의 없는 여주가 욕심 내는 대상은 오직 할머니뿐이었다. 여주가 마음을 둘 곳은 오직 할머니. 할머니 밖에 없었다. 그런 할머니를 최대한 제 옆에 오래 있게 하는 게 여주의 목표였고 그 목표를 이루려면 돈이 필요했다. 하루가 다르게 건강이 악화되는 할머니를 옆에 오래 놔둘 수 있는 방법은 병원비뿐만 아니라 할머니가 이제껏 책임졌던 생활비까지도 자신이 버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어릴 때부터 지속되어온 가난은 어린 ##옂를 성숙하고 강한 어른으로 만들었다. 어디서 쉽게 볼 수있는 열여덟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긍정적이진 않았지만 비관적이지도 않았다. 여주의 멘탈은 단단했다. 주위 어른들은 '독하다'는 소리가 여주를 보며 절로 나왔다. 그런 여주의 강한 정신력은 다 할머니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여주의 할머니에 대한 의지 수준은 너무 높았다. 광적인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자칫 잘못하면 그 수준까지 갈 정도로. 만약 할머니가 여주 곁을 떠난다면 여주의 상황은 어떻게 될 지 감히 상상도 못한다. 위험해질 수도 있다. 여주도 그걸 알았고 그렇기에 할머니에게 집착하는 것이다.
여주가 만약 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할머니의 병원비 대신 자신의 학비로, 지금까지 여주가 하고 있는 일들을 할머니가 해야하는 상황이 생긴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에 여주는 학교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여주는 민현에게 할머니가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니 생계는 자신이 담당해야한다고, 그리고 그것에 대해 불만은 없다고 말하였다. 담담한 목소리로 간략하게 말하였지만 민현은 느낄 수 있었다. 할머니에게 의지하는 게 굉장히 크다는 걸.
그래, 열여덟인데. 그런 동아줄이 없으면 안 돼지. 너무 열여덟스럽지 않잖아. 민현은 호주머니를 뒤적거리다 아까 귀신을 없앨 때 썼던 노란 부적 세 장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또 여주가 알 수 없는 말을 읊조리자 부적은 흰 종이 세 장으로 변했다. 민현은 그 종이들 중 맨 왼쪽에 있는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게 뭔데?"
"쉽게 말하면 네가 국가 돈을 받을 자격이 된다는 증명서"
".... 내가 국가 돈을 받아?"
민현의 말에 당황한 여주는 잘못 들었다는 듯이 민현에게 되물었다. 민현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밝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이때까지 쭉 받고 있었어. 종이를 훑는 여주는 상상할 수 없는 액수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건 뭐지. 신종 사기인가. 할머니한테 이런 소리를 들은 적도 없고, 이런 돈을 본 적이 없었다. 할머니와 같이 가계 관리를 하는 여주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이 국가 돈을 받고 있는 내역을 본 적이 없었다. 아, 하나 있다. 기초생활수급자. 백 만원 채 안 되는 돈이었다. 그마저도 병원비와 생활비로 감당하려면 턱없이 부족했다. 여주는 종를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이런 거 받은 적 없는데"
"당연해."
"에?"
멍청한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나왔고 민현은 설명을 덧붙였다. 이 돈이 존재하는 세계에 대해 넌 모르니까. 그러니 지급 받는 건 고사하고 지급 받는 지 조차도 모르고 있던거지. 여주의 귀에 걸리는 말은 '세계'란 말이었다. 세계? 갑자기 웬 만화같은 전개야? 민현은 여주의 속도 모르고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아, 그 돈은 이쪽 돈으로 환전할 수 있으니까 걱정 안해도 돼. 내가 제대로 확인은 안 해봤지만 대충 계산해보면 할머니 병원비는 물론이고, 앞으로의 생활비로 나가도 안전할 돈이더라. 앞으로도 나올거니까 그 후 생활도 보장 되고."
민현의 말에 잠시 머릿속에 혼란이 온 여주였다. 국가가 자신한테 돈을 주고 있었다는 사실도 처음 듣는데, 다른 세계의 국가에서 준다고 한다. 도대체 그 돈이 존재하는 세계는 무엇이며, 무슨 세계의 국가길래 자신에게 그렇게 큰 돈을 지급한 것이고, 그 국가는 도대체 어디인가 등등 머릿속의 물음은 꼬리가 꼬리를 물어 점점 길어졌고 이 궁금증을 해결하려면 앞에 앉아서 또, 싱긋 웃고 있는 민현밖에 없었다. 이야기는 꽤나 길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어볼 게 너무 많은데"
"제일 묻고 싶은 건?"
"그 정도로 큰 돈을 내가 왜 받는거야?"
"너희 부모님이 정말 대단하신 분이었으니까. 한마디로 음, 국가유공자라고 하면 이해가려나?"
갑자기 나온 부모님 얘기에 눈썹이 꿈틀하는 여주였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어찌된 것인지 할머니는 자신의 부모님에 대해서 일절 언급이 없었다. 정말 어렸을 때, 물어보면 '엄마는 저기 높이 떠있는 태양이요, 아빠는 태양을 품고 있는 하늘이여라.' 이렇게 말하곤 했다. 영문 모를 대답에 여주는 할머니에게 물어보는 것을 관두었다. 또한, 부모가 약점이 되던 여주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했던 여주였다. 할머니 한 명으로 충분했었으니까. 여주에겐 미움도, 그리움도 없는, 아무 감정도 들지 않는 부모의 존재였다. 그런데 이렇게 부모 덕을 본다고 하니, 누군가 서먹하고 어색한 사람과 아무것도 없는 한 방에 가둬놓은 기분이었다.
"흠, 아직 부모님에 대해서 얘기들은 게 별로 없는건가"
"별로 없다기보다는 아예 없어"
민현은 여주의 말에 눈만 껌뻑거렸다. 이름도 알고, 개인 사정에 대해서도 아는 민현이 모르는 눈치에 조금은 놀랐다. 여주는 곧 심드렁한 표정으로 자신의 사정을 얘기해주었다. 자신의 부모가 자기가 태어난 지 얼마 안되서 죽었는 것만 알고, 왜 죽었는지, 그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할머니는 왜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으시는 건지, 어째서 단 한 장의 사진도 남지 않은 건지 이 많은 질문 중 그 어느 하나 알 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민현은 한동안 여주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엄마, 아빠의 얼굴과 이름도 모르는 불쌍한 아이를 보는 동정의 시선? 그건 아니었다. 자신이 살면서 받아온 동정의 시선은 많았지만 민현의 눈빛은 그것이 아니었다. 무언가 고민이 많아진 얼굴이었다. 민현은 조심스레 입을 뗐다.
"너희 부모님은"
"..."
"너무 대단한 분이셨어."
"...."
"자세히 말하자면 아버지도 대단했지만 어머니 쪽이 엄청 대단했지"
민현은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을 어떻게 말해야 그 대단함을 전할지 고민하는 것이었다. 그런 대단한 사람드의 딸인데 존재조차 모르고 있다는 게 너무 안타까운 민현이었다. 민현의 감정 실린 말에 여주는 어느 정도 식은 컵의 손잡이를 따라 엄지 손가락을 쓸었다. 시선은 컵에 고정한 채로 여주는 별 감흥 없는 말투로 민현에게 물어보았다. 그래서 그 돈의 이유는 다, 그 대단하신 우리 부모님 덕이라는 거지? 그렇기도 하고....
민현은 여주의 질문에 잠시 뜸을 들였다. 뒷말이 나와야 할 것 같았는데 끊어진 말에 여주의 시선은 서서히 올라갔다. 여주는 민현과 눈을 마주했다. 자연스레 서로의 눈이 맞춰졌다. 민현은 부드럽게 웃었다. 지금까지 착실하게, 별 탈 없이 잘 커온 보상인 것 같기도 해.
".... 뭔 소리래"
"너, 잘 컸다고"
여주는 민현의 말을 듣고 순간 가슴 속 한켠이 묵직해졌음을 느꼈다. 아무리 성숙하고, 강하게 커 온 여주였지만 아직은 열여덟 살 소녀였다. 어떻게보면 불우하다면 불우하다고 할 수 있는 환경에 자란 여주에게 동정이 아닌,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진짜 사실만을 말한다는 듯한 말투로 얘기한 민현의 말은 여주의 마음을 동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여주의 무의식이 이 생활이 힘들다고 말했던 건지 민현의 말은 나름의 위로가 되었다. 민현의 말로 인해 괜히 머쓱해진 여주는 애꿎은 창밖만 쳐다보았다. 민현은 같잖은 위로 같은 걸 꺼낸 게 아니었다. 여주의 사정을 다 알았지만 여주에게 전해들은 여주의 사정은 건너 들은 것과 다른 느낌을 주었다. 그러다 자기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여주는 그에 몹시 당황스러워하는 것 같지만. 민현은 화제를 돌리려 아까보다 톤이 높아진 목소리로 말하였다.
"대신, 그 보상을 받으려면 너의 그 결계부터 어떻게 해야겠지?"
".... 결계?"
아까 '세계'라는 말도 그렇지만 어디, 만화에서 들을 법한 단어에 여주는 의구심이 섞인 표정으로 민현을 쳐다보았다. 민현은 그런 여주의 시선을 상관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여주 목에 걸려있는 줄을 잡았다. 깨진 구슬이 걸려 있던 줄이었다. 깜빡하고 목에 계속 매달고 있었었다. 민현이 그 줄을 잡자마자 그 줄은 작게 '팟'하는 소리와 함께 끊어졌다. 그냥 잡기만 했는데 끊어지는 줄이었다.
자리에 일어나 책상을 짚고 여주에게 다가갔던 민현은 끊어진 줄을 가지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줄이 목에서 없어지니 제법 허전한 느낌에 여주는 괜히 목 근처를 더듬어 보았다. 어릴 때부터 해와서 그런가 싶었다. 민현은 가져온 줄을 태워버렸다. 민현의 손 위에 있던 끊어진 줄은 민현의 의미 모를 한 마디에 갑자기 불에 타오르더니 불이 꺼짐과 동시에 없어져버렸다. 또, 신기한 현상에 여주는 도저히 안 되겠는지 바로 민현에게 질문하였다. 근데, 너 그거 어떻게 하는 거야. .... '너'라고 칭하라고 까지는 말 안 했는데.... 아, 됐고 그거 어떻게 하는 거냐고. 호칭정리가 이상한 느낌에 민현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호칭이 뭐가 중요한가 싶어서 목을 가다듬고 여주에게 말하였다.
"내가 말한 모든 걸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어?"
"내가 요 며칠 간 귀신때문에 골머리 앓았던 사람이야."
"푸흡, 알겠어. 그럼 내 말은 하나도 빠짐 없이 기억해야 돼"
- 다음 편에 계속
* 여러 번의 수정이 이루어져있습니다. 초반부터 봐주신 분들에겐 당황스러우실수도... 근데 그냥 놔두기엔 너무 형편 없ㅇ...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