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포선샤인 7. 태용 (과거)
계힉했던 여행이 무산되고 나서부터는 삶에 지쳐가기 시작했다. 가족들의 억압으로 중지된 여행만으로 충분히 분노가 차올랐는데 또 내 의지 하나 없이 회사 생활을 시작해야 한다니 이제는 한이 맺히기 시작했다. 새벽마다 찾아오는 악몽은 불면 속에 나를 더욱 가두었다. 철 없는 고등학생 때 집을 뛰쳐나가 서울로 상경한 이후로부터는 꿈을 꾸지 않은 적이 손가락에 꼽히는 것 같다. 우울증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겨울을 맞아 얼어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이제는 정신과 전문의도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됐다. 그 사람들은 단 한번도 나를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죽은 동태 같은 눈을 하고선 마음에도 없는 말들만 잔뜩 짓껄이고는 수면제와 감정억제제만 처방할 뿐이다. 병원으로 걸어가는 그 복도는 꼭 안락사하러 가는 길 같은 느낌이다. 소름 끼치고 오한이 들고... 아직은 추운 1월의 말에 있다. 2월은 금방 찾아오고 별것 아닌 내 생일이 겹쳐 있다. 그날 다시 일본으로 도주해야지. 8. 어느날 갑자기 웬 여자가 하나가 시선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고작 에스엔에스에서 만난 여자였을 뿐이다. 처음에는 관심 조차 없던 사람이었는데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속에 숨겨둔 무언가가 와닿았다. 그녀는 내가 쓴 일기장을 세 번씩 읽어보았다고 한다. 나의 우울을 가늠하려고 시도 보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넌지시 내던진 글을 쓴다는 말에 더욱 호기이 자극되었다. 그녀의 글을 읽어본 순간 가볍게 읽어내릴 문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여자도 속에 잴 수 없는 비명을 숨겨둔 것이었다. '보라색을 띠던 소녀가 왜 검은색을 띠게 되었는지'라는 구절에서 시선을 멈추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본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라는 생각보다는 그녀를 있는 힘껏 위로해 주고 싶었다. 나보다 더 여린 사람, 어쩌면 나보다 더 많은 혹한을 겪고 원한이 들끓는 사람. 닮은 점이 많을 여자. 이 여자라면 매일밤 추락하는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를 이해해 주지 않을까. 아름다운 협잡은 없고 오직 범죄만 남아있는 나의 밤을 보다듬어 줄 수 있지 않을까. 9. 생각보다 체구가 더 자고 여린 여자는 내 품에 안겨 잠들었다. 이제 막 겨우 오전 여덟 시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녀와의 성행위가 황홀이었다면 잔뜩 끌어안고 표피만을 나누고 있는 이 순간은 전부가 된 것만 같았다. 보드라운 머릿결을 쓸어내리며 이마에 입맞춤했다. 잠들기 전 심장이 고요했던 것은 얼마만이었나. 십 년이 지나서야 맛 보는 단순 수면에 대한 쾌감. 그녀는 신경안정제처럼 내게 녹아들어 진정을 안겨주었다. 10. 침대 위에 가만히 앉아 침대 헤드에 기대고 누운 여자를 바라봤다. 이불 위로 보이는 입맞춤의 흔적이 보라색을 띠었다. 그런 그녀를 한참이나 바라보다 이야기를 꺼냈다. 참 철없던 고등학교 시절에 이런 저런 사고도 많이 쳐서 법정도 가보고... 그러다가 부모님 얼굴을 못 뵙겠어서 집을 나갔었어요 집을 나가서 집 나온 친구들일이랑 아는 누나 형들이랑 지내다가 이대로 살면은 정말 인생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겠는 거야. 당장 굶어 죽을 것 같은 거야. 그런데 집은 못 들어가겠더라구요. 그래서 알고 지내던 미술 학원 원장님한테 연락 드렸죠. 자초지종 상황을 설명드리니까 원장님이 너 서울로 올라와라.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서울로 올라가서 그 학원에서 청소하고 애기들 그림 봐주면서 하루종일 그림만 그렸어요. 계속 주구장창... 대학은 안 갔어요. 대한민국 미대 입시에는 흥미 없었거든요. 그래서 그림만 그리다가 좋은 기회로 전시회도 열게 되고 돈도 좀 벌고 해서 일본으로 여행을 떠나려고 했어요. 머릿속에 가득 찬 것들이 너무 나를 옭아매서 이렇게 가다가는 정말 내가 죽어버릴 것만 같은 거야. 그그래서 힐링을 갖으려고 일본 여행을 계획했죠. 아, 일본에 가긴 했었다. 한 일주일쯤 있었나. 그런데 가족들한테 바로 붙잡혀서 한국에 들어왔어요. 그리고는 이렇게 회사 생활 중이고. 응, 나는 그래요. 여자는 손을 뻗어 내 손목을 그러쥐었다. 그리고는 손등을 쓸어내렸다. 그녀의 손길이 와닿고 지나간 피부마다 온도가 올라가는 것 같이 뜨거웠다. 그녀는 아무 말도 않고 조용히 나의 마음을 보다듬었다. 그녀는 한참을 말이 없다 곧이어 입을 열었다. 작년년까지는 참 많이 죽으려고 용을 썼어요. 칼을 쥐고 상처내기는 싫으니까 밤에 잘 때마다 목을 졸랐었어요. 그랬는데도 눈을 뜨면 아침이더라고. 그게 너무 힘들었어요. 새로운 해가 떠오르면 새로운 하루를 살아가는 게 아니라 나의 죄가 누적되어 자꾸만 나를 따라다녔어요. 나는 원래 낙태되었어야 할 운명이에요. 본체를 떠나지 못한 죽은 영혼이라서 늘 죽음과 씨름하면서 살아가요. 그런데 올해부터는 마인드를 조금 바꿔 보려구요. 어차피 나는 죽었을 사주 팔자니까 죽은 사람처럼 누구의 시선도 신경쓰지 않고 그 누구에게 신경쓰이지 않게 하고 나 원하는대로 살아가자고. 나는 그래서 이렇게 살아가요. 그러고 나니까 조금 괜찮아지긴 하더라구. 내 손으로 직접 목을 매는 일도 없어지고. 오빠도 그럴 수 있을 거예요. 나도 내 의사가 박탈 당하면서 허무함과 원망이 차오르더라구요. 그런데도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체념했어요. 그러니까 편해지긴 하더라고. 11. (현재)
참고 참다 퇴근 후 차에 올라 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차례의 신호 연결음이 울렸지만 끝내 그녀는 받지 않았다. 이랗게 안달나면 안 되는 건데 이러지 않기로 한 게 분명한데 자꾸만 이런다. 나는 그녀의 몸을 탐하는가, 마음을 탐하는가. 그 무엇도 나는 가질 수 없음이 분명하다만 욕심이 생긴다. '무음이라서 못 봤어요. 왜 전화했어요?' 진동과 함께 짧은 메세지가 도착했다. 그녀였다. '저녁이라도 먹을까 하고 연락했어. 지금 뭐 해?' '아 미안해요. 오늘은 저녁을 먼저 먹어서.' '아니야. 다음번에 먹으면 되지.' '퇴근할 시간이네요. 얼른 집 가서 저녁 챙겨 드세요.' 그래, 고작 외로움을 충족을 목적으로 나눈 성관계로 인해 우리의 관계가 달라졌을 리 없다. 12. "너무 즉흥적인 거 아니에요? 내가 시간 안 될 수도 있는데 바로 서울 상경한 거 보면." "네 얼굴 굳이 못 봐도 여행 온 셈 치면되니까 그랬지. 그동안 숨 막혀서 죽는 줄 알았어요. 다그치는 거 그만하고 나 좀 안아주면 안 돼요?" "말이나 못하면..." 나한테 연락 없이 서울을 상경한 남자를 보러 결국 버스를 탔다. 파란색이 잘 어울리던 남자. 아, 파란색이라기보다 조금 더 진한 남색을 띠는 남자다. 저번에 나누었던 섹스로 무언가의 교감이 있었던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 마디의 말도 없이 품에 안긴 이 남자의 비명이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을 리 없다. 지난 한 달 동안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혼자서는 이겨내지 못하는 고통에서 얼마나 허덕였을까. 안쓰러울뿐이다. ,, 이걸로 적어내리고 싶던 내 가치관들이 더 뒤죽박죽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