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per Tiger, Scissors Rabbit
w. 문달
원시 때부터 내려온 부족 사회가 현대에도 여전히 존재.
국제 결혼과 타국에서의 이주, 이민 등 조상들 때부터 오랜 세월에 걸친 이동으로 한반도 땅의 고유 종자가 아닌 부족들도 함께 생동하고 있음.
현대에 들어와서는 부족 간 전쟁은 사라졌으나 협회가 하늘 다음으로 상위에 있음.
과(科) 간, 하위 부족 간에 복잡하고 많은 평화조약들이 맺어진 상태.부족보다 큰 개념이 科 이며, 부족대표와 과대표가 따로 있음.
(ex.같은 고양잇과라도 그 안에 호랑이 부족과 고양이부족이 나뉘어 있기 때문에 싸울 가능성 충분.)
目 > 科 > 亞種 ≒ 族
같은 과 내 종(부족) 중 환경적·사회적 요인으로 완전 멸종되는 경우도 있다.
육식 >초식
다수 >소수
보통 소수 개체로 남은 ( = 멸종 위기 등급에 속함) 부족들이 약한 측에 속하나 소수 부족의 과와 목(目) 에 따라 강한 부족일 수도 있다.
( ex. 앙골라 사자 부족은 이 땅에 몇 남지 않은 소수에 속하나 식육목 고양잇과이다. 토끼목 토끼과인 토끼 부족은 종이 아주 많으나 고대 때부터 전쟁에 가장 많은 희생을 당해온 먹이 사슬의 하위 계층으로 현 부족의 파워가 약함.)
씨의 보전을 위해서 다른 부족 간의 혼인을 금지한다. 공동 협약으로 맺어진 조항 중 하나로 이를 위반 할 시 해당되는 부족에 핸디캡이 적용된다.
(어떤 중요한 회의에서 그 부족의 발언권이 적어질 수 있다든가)
타 부족 씨의 입양은 가능하나 입양 시까지 협회의 까다로운 승인 과정을 거쳐야 함.
부족마다 정체성을 나타내는 표식이 있는데 사람의 형태일 때는 드러나지 않음.
본인에게 위협이 가해질 때나 상대를 제압 또는 경고를 주거나 위협할 때 단계적으로 모습을 드러냄.
여기서 말하는 단계는 동물화 되는 과정을 의미함. 개인마다 차이가 있으나 동물화 조절 능력이 미숙하여 본인 의지와 다르게 저절로 풀리는 경우가 있음.
대체로 청소년기에는 나타나는 2차 성징으로 인하여 동물화가 시도때도 없이 일어나기도 함.
특유의 고유한 향을 종마다 가지고 있음. 개인마다 미묘하게 다르나 전체적인 종의 고유한 특성임. 이 점을 이용하여 상대의 신분을 알아낼 수 있음.
또 각자 가진 기(氣)가 있는데 서열이 높은 부족민 일수록 세기가 강함.
기를 통해서도 상대가 나보다 약한지 강한지 정도는 파악할 수 있음.
현재 가장 많은 부족은 고양잇과 묘(猫)족과 개과 견(犬)족임. 이 두 부족이 평균을 담당하고 있음.
수가 보통 많은 게 아니기 때문에 소수 강한 부족도 막 대하지는 못함.
인물 정보 (주요 인물들만 나열합니다.)
●식육목 고양잇과(EN) 백두산 호랑이 → 이동혁
●식육목 고양잇과(VU) 앙골라 사자 → 이태용
●식육목 고양잇과(VU) 설표 → 정재현
●식육목 고양잇과(VU) 치타 → 이민형
●식육목 곰과(VU) 북극곰 → 도화 동영 부모님
●식육목 개과(LC) 붉은 여우 → 윤리라
●식육목 개과 콜리 → 임경선
●토끼목 토끼과 롭이어 → 도화, 동영
↑↑↑↑↑↑ 세계관 간단 설명 ↑↑↑↑
*1
다양한 교육방침이 있지만 나는 방목을 좋아하지 않는다. 더 정확하게는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2학년이 되었고, 담임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원체 관심을 주지 않는 무뚝뚝한 분이셨다. 친한 애들과, 혹은 앉고 싶은 자리에 앉아 떠들던 애들을 다 일으켜 세우시더니 남자 한 줄,여자 한 줄을 세워서 차곡차곡 창가 자리부터 앉게 하셨다. 그런 다음에 무미 건조한 목소리로 한마디 던지고는 출석부를 들고 교실을 나가셨다.
"옆에 짝꿍이랑 인사해라. 1학기 내내 짝꿍이다."
여기저기서 탄식과 놀라움에서 나오는 아우성들로 난리였다. 그 어수선함 속에서 나는 담임 선생님과는 다른 종류로 무심한 눈빛의 옆자리 애와 눈이 마주쳤다.
앉은 키는 비슷한데 나른하게 아래를 향하는 시선 처리에 기가 죽는다.
그런데 왜 이렇게 몸이 떨리지? 내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이 알 수 없는 두려움은 무얼까. 손톱 아래 연한 살을 물어뜯으며 다리를 소심하게 떨다가 눈치를 보며 오므렸다.
"존나 졸리네."
약간 의외다 싶을 정도로 가녀린 미성에 괜히 어깨가 움찔거렸다.
내 쪽으로 정수리를 보이며 팔을 베고 엎드린 정수리에 동그랗게 회돌이치는 모양을 보니 팔에 오소소 닭살이 돋았다. 진짜 몸이 왜 이러니.
아침 0교시 자습시간이 끝나고 10분간의 쉬는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쏜살같이 김동영네 반으로 달려갔다.
내가 올 줄 알았다는듯 김동영은 자기네 반 벽에 삐딱하게 기대 있다가 머리 위로 손을 흔들었다.
"도영아도영아도영아아!"
"어우,쪽팔리게 호들갑이야. 뭐,뭐,왜,왜!"
양손 깍지를 끼고 방방 뛰다가 호흡을 가다듬고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이 없는듯 했지만 혹시라도 귀 밝은 어떤 것들이 듣기라도 하면 들킬 수도 있으니까.여전히 손을 맞잡은 채로 동영의 귀엣가로 가까이 다가가 소곤거렸다.
"나, 자꾸 벌벌 떨려.. 왜, 생존본능 있잖아. 위험하다, 살아야된다. 하는 그런거. 지금은 괜찮은데 교실 들어가기만 해도 약간 내가 눌리는 뭔가가 있어."
내 얘기를 자못 심각하게 듣고 있던 동영의 큰 눈이 우그러졌다. 짝꿍이 누구냐길래 눈을 위로 치켜뜨며, 그러니까 걔 이름이 뭐더라.
앞서 준비성 없이 부닥쳤던 시선교환에 출석을 부를 때 들렸던 세글자를 머릿속에 입력할 틈이 없었다. 가슴에 달린 명찰, 내가 봤던가. 규정상 탈부착식으로 되어있는 아크릴 명찰을 달고 있어야 했지만 꼭 이름 불리는게 싫다고 안 보이게 다는 애들이 있긴 했다. 걔도 그랬나. 물결치는 기억을 붙잡고 어떻게든 선명하게 살려보겠다고 끙끙대자 대뜸 동영이 내 엉덩이를 찰지게 쳤다.
"꼬리,꼬리! "
"세상에. 실화야? 말만 했는데도 꼬리가 튀어나오고. 미쳤다."
"가뜩이나 쉬는 시간도 짧아 죽겠구만, 그냥 니네 반으로 가서 보자. 이 정도면 좀 유명한 애 같은데."
내 손목을 고쳐 잡고 앞장 서 걷던 동영은 이내 멈춰서 뒤돌아 나를 보았다.
그런데 너 몇 반이라고 했냐.
나는 혀를 끌끌 차며 얼빠진 김동영을 뒤로 제쳐두고 따라오라 손짓했다.
우리 반에 다다라서 눈까지만 내민 채로 가운데 분단 앞에서 네번째 줄을 가리켰고,아직까지 짝꿍은 엎드려 누워있었다.
"헐."
손을 입으로 가져다대며 안그래도 큰 눈을 평소보다 더 크게 뜬 김동영의 튀어나올듯한 동공을 보며 왜그러냐며 팔뚝을 주먹으로 쳐대니까 아프다며 신경질을 냈다.
"이동혁이랑 작년에 같은반이어서 알거든?"
그러니까, 패기롭던 갓중졸 김동영이 반 아이들 모두와 친한 분위기 메이커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의 야심은 축 접혀 기운 없는 귀마냥 죽어버렸다.
김동영은 반에서 유일한 토끼였고 나머지는 당연하다는 듯 견족, 묘족이 채우고 있었다. 그중 동영처럼 반에서 귀한 종족이 있었는데 한 명은 치타였고, 다른 한 명은
호랑이었다고.
"쟤가 그 호랑이야."
1년간 토끼는 열심히 호랑이 비위를 맞추느라 진땀을 한바가지로 흘렸었다고.
*2
김동영은 그저 힘내라는 영혼 없는 말만 쉬는시간 종이 칠 때까지 하다가 돌아갔다. 홀로 남겨진 나는 애석하게도 아무렇지 않게 이동혁 옆에 앉을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그 기에 눌려 커다란 귀가 위로 보란듯이 솟아오를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척 해야했다.
그래, 위기를 기회로 삼자. 나는 적의 정체를 알지만 적은 나를 완전히 모른다고! 그렇지만 발은 여전히 쉽사리 움직여주질 않았다.
1교시 문학 선생님은 상당히 히스테릭컬한 성격을 가지신 분이셨다.
칼같이 수업시간을 지켜 오시고는 아직 사물함 쪽에서 어슬렁 거리고 있는 나를 향해 날카로운 소리를 내셨다. 나는 불같은 호령에 놀라 몸을 들썩이며 교과서를 품에 소중히 넣고 자리로 후다닥 들어가 앉았다.
아- 앉자마자 느껴지는 노골적인 시선!
슬그머니 구른 눈동자에 내쪽으로 아예 몸을 틀어 턱을 괴고 있는 이동혁이 담겼다. 눈이 마주친 이상 피할 수 없었다.
"아.."
말을 다 뱉기도 전에 손에서 계속 놀리던 마카의 뚜껑을 따고 내 책상의 아주 일부분까지 차지한 수직선을 직- 그어버리더니 대뜸 포고한다.
"넘어오지마."
이동혁은 앞의 선생님을 (노려) 보면서 책장을 건성건성 넘겼고, 상황 파악은 목차를 쭉 훑고 1단원의 장을 막 폈을 때야 끝났다.
"저기,이건 내 책상인데..."
"근데?"
"네 공간 방해하는게 싫으면 그냥 책상 자체를 떼면 되..되잖아."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자려던 이동혁의 팔자락을 소심하게 구겨 당기니까 미간을 찌푸렸다. 손가락 끝이 잘게 떨렸다. 질풍노도의 시기는 이래서 위험하다니까. 자제 잘 하는 애가 없어요.
그리고,또다.
또 말없이 나를 뚫어져라 대놓고 쳐다본다.
눈 마주치길 어려워하는 나에겐 아주 고역이었다.
그 따가운 눈빛에 자동 반사적으로 눈꺼풀이 반쯤 내려가 이동혁의 크고 다부진 손, 주인 닮아 든거 없어보이는 흑갈빛의 필통, 풀어헤쳐진 윗 단추 두어개,그리고..
"야."
"..어?"
얼마나 숙여졌는지 날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든 목이 U자로 휘어졌다.
다시금 시선이 얽혔다. 나를,내 혼을 옴짝달싹 못하게 옭아매는 그 낯은 이내 돌아선다.
뭐지 나 갖고 노는건가.
내가 자기보다 약한 애라는 거 들킨건 아니겠지?
혹시라도 내게서 꼬순내라도 날까봐 얼마나 코를 들썩였는지 모르겠다.
*3
꼴에 그래도 의젓한 오빠 노릇 하겠다고 김동영은 매 쉬는 시간마다 우리 반을 찾아왔다. 처음엔 뭐야~ 하며 반겼지만 머리를 조금만 굴려보면, 이동혁이 김동영이 토끼라는 걸 알고 있다면 나 역시 토끼라는 것쯤은 쉽게 알아채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두 가지. 이동혁이 계속 엎드려 자거나 김동영이 나를 아는 척 하지 않거나.
후자가 좀 더 안전할 거 같아 김동영이 가자마자 조금은 격양된 타이핑 질로 다닥다닥 문자를 보냈다. 난..데이터 거지니까..카톡은 안돼...
너 이제 우리 반 오지마라 ㅠㅠ 이동혁한테 들키면 어떡해ㅠㅠ
빌어먹을 김동영은 내 문자를 잘도 씹어삼키고는 점심 시간에 치타 친구와 어깨동무를 하며 왔다.
이민형은 치타였지만 우리와 곧잘 어울렸다. 애가 엄청 순하고 착해서 김동영이 마음놓고 깝치는것도 이민형은 인자하게 웃으며 다 받아준다. 가끔씩 어쩔 수 없어 흥이 날 때면 같이 뿜어대는 기에 정신이 혼미해지긴 하지만. -시도때도 없이 혼자 춤을 추며 알 수 없는 추임새를 넣는다. 오죽하면 김동영이 이민형더러 흥의 민족이라고 빈정대기도 한다.-그래서 평소엔 이민형이 우리보다 먹이 사슬 위에 있다는걸 까마득하게 잊고 산다.
"듣자하니 김도화 짝꿍이 이동혁이라며? 우뜨카냐~"
"이민형 깝싸는거 김동영한테 배웠니? 둘이 절교도 좀 하고 그래라. 누구는 심각해 죽겠는데!"
아직까지 반에서 밥먹을 정도로 친하게 지내는 애들은 없어 이민형,김동영과 함께 급식실로 내려가며 내가 오전 수업 시간 내내 얼마나 노심초사 했고, 이동혁이 나에게 어떤 어처구니 없는 짓을 했는지 다 꼰질러주니 좀 풀렸다. 그런다고 목소리가 좀 커지긴 했지만 급식실은 나보다 더 큰 데시벨로 떠드는 애들이 많으니 누가 우리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듣겠어, 하는 심정으로 마음 놓고 떠들었다.
"그런데 도화, 넌 좀 나은 편이야. 우리 반에는 이태용이 있어."
이태용이라면 알만한 애들은 다 알았다. 1학년 때부터 아주 유명했다. 무려 사자라고. 아버지는 유명한 중공업 CEO시고 어머니는 부족장이시란다. 홈스쿨링이나 아주 귀한 집 자제들만 들어간다던 건너건너 학교에 가지 않고, 그냥 평범한 인문계에 입학했다. 그의 입에서 직접 나오기도 전에 누군가 입을 놀리고 다녀 입학식 날부터 꽤 난처했던 것으로 안다. 묘족, 견족이 압도적으로 많은 세상에, 이 학교에, 사자의 존재란.. 그런데, 사자랑 호랑이랑 싸우면 누가 이기지?
내가 책상을 떼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을 때 보였던 이동혁의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근데 이태용은 착하다며."
"응 맞아. 내 뒷자리긴 한데 나 앉자마자 나한테 토끼냐고 물었다고.. 넌 그게 알마나 호러인지 알아? 나 너랑 다르게 컨트롤 잘 하는 거 알지? "
"너랑 다르게 아..예. "
내 반응이 너무 남의 일 보듯 했는지 나를 타박하며 끔찍한 가정 하나를 세워주는데 정말 현실에 있을법한 예시라 눈알이 다 뻐근했다.
"만약에 이동혁이 너가 앉자마자 야 너 토끼냐? 라고 물었다고 생각해봐. "
"미친...나 전학갈래.."
도리질을 격하게 하다가 식판를 떨굴 뻔 한 걸 내 옆을 지나가던 키 큰 남자애가 받쳐주었다. 놀라운 반응 속도에 나는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어버버 거리며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정재현
그 이름을 똑똑히 보았다.
어딘가 낯설지 않았다.
*4
옆 학교에 다니는 친구 말만 들어도 사방 천지가 개라서 굳이 걔네가 냄새를 숨기지 않아 괴롭더라고 하는데 우리 학교는 명문고도 아닌 주제에 흔하지 않은 종들이 은근히 보였다. 당장 내 옆만 보아도 호랑이가 이렇게 잘 쳐자고 있는데!! 내 쌍둥이 오빠는 무려 뒷자리에 사자가 있다는데!! 그리고 우리의 친구는 무려 치타라고!!
내 앞에선 아무렇지 않아 하며 힘내라고 말하던 김동영도 자기네 반에 가면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니 굳이 쉬는시간마다 꼬박꼬박 찾아오는 게 사자를 피하러 오는것 같다는 느낌이 팍 들었다. 불쌍해라. 그러나 우리는 서로 내 코가 석 자였다. 아무리 치고박고 투닥거려도 같은 종족인 김동영과 나는 서로의 영원한 편일 수 밖에 없나보다. 아련해지는 김동영과 수업시간에 몰래 문자를 주고 받다가 책상 위에 딱 눈이 가릴만큼 교과서를 쌓아놓은 이동혁의 책상에 시선을 강탈 당했다.
나는 아슬한 순간을 즐기는 법을 모른다. 그러고 싶지도 않다.
등교 커트라인까지 20분을 남기고 있는데 버스는 아직 10정거장이 남은거,오엠알 다 썼는데 알고보니 한 칸 띄우고 밀려쓴거,
팔에 근육은 없고 살만 붙은 약골이라 식판이 후들거리는데 국그릇을 내가 직접 식판에 올려 받아가야 하는거, 김동영이 토끼라는걸 뒷자리 사자에게 들키기 2초전,
이동혁이 책상에 쌓아 놓은 교과서들이 못생기게 밀려 올려져 아래로 와르르 쏟아지기 몇초전, 교과서 모서리에 꾸벅거리는 이동혁의 이마가 닿을락말락할 때.
나는 아찔한 순간이 너무 싫다. 그걸 피치못하게 견뎌야 하는 상황도 고되다.
그러나 신경은 무지하게 쓰인다.
나는 칠판 정중앙에 자 습 이라 써 놓고 웹서핑을 하시는 듯 열심히 책상 아래 컴퓨터로 시선을 내리꽂은 한문 선생님을 의식하며, 왼손으로 쓰러질 거 같은 책들을 받치고, 오른손으로는 이동혁의 이마를 금방이라도 찧을 것 같은 교과서의 모서리를 감쌌다. 타이밍은 기똥차게 맞아 떨어졌다.
이동혁은 내가 모서리를 둥글게 말아 감싸기 무섭게 손등에 이마를 닿아왔고 나는 그 짧은 접촉에 소름이 끼쳤다.
이동혁이 반쯤 풀린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마치 뭐하냐는 눈치였다.
나는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끼긱 거리며 분필로 자습 이라고 쓴 뒤에 공부 안하고 자거나 떠들면 혼난다고 했던 선생님의 경고가 떠올라 칠판 쪽을 한번 보고는 입을 꾹 다물고 두 손을 합장하듯이 모아 한쪽 턱에 괴어 눈을 감았다 뜨곤 집게 손가락을 교차해서 엑스 자를 쳤다.
자면, 안돼
왜
나는 코로 크게 숨을 내쉬고는 칠판쪽을 한번 가리키고 아까처럼 자는 시늉을 한 다음 손허리를 했다.
선생님이,자면, 혼낸대.
혼나든 말든
나는 답답해서 주먹으로 가슴 부근을 콩콩 때리곤 다시 이동혁을 노려봤다.
너가, 자면, 나도, 같이 혼나! 안 깨웠다고.
짜증나게
참으로 웃긴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어느새 내 몸은 이동혁 쪽으로 완벽하게 틀어져 있었다. 한 명은 열심히 몸으로 말하고 있고 다른 한 명은 그걸 못마땅하게 보면서 입모양으로 대답하고 앉았다. 이동혁은 짜증난다며 다시 엎드리려 했고 나는 밀린 교과서들을 바로 정리해주며 엎드려서 도드라진 어깨뼈를 살살 흔들었다.
이동혁이 다시 일어나 나를 제대로 째려보았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급하게 공책의 한 귀퉁이를 찢어서 글씨를 휘갈겨 들었다.
야, 자지마아!
오지랖은.
아 진짜... 참 말 더럽게 안듣는다고 생각하며 찢은 종이의 반대편에 휙휙 갈겼다.
자면 안된다니까?
"거기 필담하는 둘 앞으로 나와라."
시발.
이동혁이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읊조렸다.
망했다.
나는 이동혁을 원망하며 자리에서 삐거덕 거리며 일어나 주춤주춤 앞으로 나갔다. 아래에만 처박고 있던 애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와 이동혁에게로 꽂혔다. 나는 내 삼선 슬리퍼 위로 꿈틀거리는 발가락들에만 주시하며 선생님의 짧은 잔소리를 들었다.
"무릎 꿇고 손들고 있어라."
선생님이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당구채로 앞문 쪽을 가리켰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는 이동혁의 뒷통수를 따라가 그 옆에 거리를 살짝 두고 무릎을 꿇어 앉았다. 게시판 철판의 차가운 모서리가 머리에 자꾸 닿아서 어기적거리며 살살 앞으로 전진했다.
짧고 타이트한 교복 상의가 많이 들려서 안에 입은 티셔츠와 셔츠 등이 보기 안좋게 튀어나올까봐 어정쩡하게 손을 들고 있으니까 선생님이 당구채로 내 팔꿈치를 친히 들어올리시며 똑바로 들라고 지적하셨다.
선생님의 호령에 어쩔 수 없이 일 자로 들자 상의가 펑퍼짐하게 올라왔다.
딱 턱 근처 부분만 굴곡 지며 파여서는 우스꽝스러웠다. 수치스럽고 불편했다.
교복 디자인 이렇게 한 새끼 엎드려 뻗치라 그래.
치마는 무릎 꿇어 앉는다고 허벅지 이분의 일까지 올라와 나는 꿇어앉은 다리 사이를 열심히 좁혔다. 점점 쥐가 오려했다.
선생님은 아직까지 손을 내리라는 아무런 말씀이 없이 야속하게 마우스만 딸깍 거리셨고, 나는 이 시간이 끝나려면 아직 25분이나 더 남았다는 사실에 시계만 바라봤다. 사각거리는 소리, 종이 한장이 날카롭게 넘어가는 소리만 교실을 메웠다.
지구의 중력을 받아 버거워지는 팔이 점점 내려가고 있는 때에 바람을 가르고 남자 와이셔츠 하나가 무릎 위에 던져졌다.
부드러운 재질 아래 허벅지에 뾰족하게 닿는 명찰에는 보지 않아도 이 이름 석자가 쓰여져 있을 것이다.
이동혁
고개를 틀어 바라본 이동혁은 흰 반팔 차림으로 손을 대충 들고 있었고 무릎에는 허물같이 벗어놓은 교복 조끼가 올려져 있었다.
선생님의 눈을 피해 꼬물거리며 옷을 벗었을 이동혁의 모습을 상상하니 조금 귀엽기도 했다.
숨막히는 수업은 다 끝났다. 아직 새학기라 정해진 방과후 수업은 없어서 임시로 짜여진 청소 구역으로 가서 청소하고 종례 후 마치는 걸로 오늘 일정은 끝이었다.
김도화 같이가야된다!
김동영으로부터 온 문자를 확인만 하고 게시판 앞에 우르르 모여 각자 청소 구역을 확인하는 애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어휴 나 그렇게 작은 키 아닌데 왜 다들 나보다 크지. 어쩌다보니 가운데 딱 버티고 서서 내 앞에서 자기들 운명을 확인한 애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양 옆으로 갈라지는 경험을 한 후에야 나는 가까이 다가가 내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와 정말..."
번호순이라든지 아니면 가나다 순이라든지 그런 일정한 순서조차 없이 말 그대로 랜덤한 기준에 기함하며 실로 자유분방한 담임을 만났구나 다시 한번 깨달았다.
중앙복도 김도화 이동혁 정재현
"응?"
"아, 중앙복도네. 이동혁~ 너랑 나랑 중앙복도래."
뒤에 있던 누군가의 팔이 불쑥 들어와 내 눈 옆 시야를 가로막고 게시판을 짚더니 이내 떨어져 나갔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곱게 손등까지 뻗어나가는 선명한 힘줄을 보며 자동적으로 침이 모아졌다가 꿀꺽 삼켜졌다.
중앙복도 김도화 이동혁 정재현
붙어있는 이름들은 심오한 인상을 남겼다.
뒤에서 담임이 마음에 안든다고 짜증을 부리는 이동혁의 목소리가 야성 가득한 포효로 변질되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