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복숭아20개
7교시에는 우산을 가져가
01. 윤호가 아니라 윤오야.
반 배정 종이가 붙었다.
교문 앞에 반 배정 종이가 붙었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다. 세기말도 아니고 자그마치 21세기에 교문 앞에 대문짝만한 크기로 붙었단다. 부모님께서 선생님인 내 친구의 친구가 알려준, 믿을 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학교 컴퓨터 전체가 오류가 나서, 학교 홈페이지에는 올려주지 못하고, 수작업으로 뽑았더라나 뭐라나, 아무튼 엑셀 파일로 정리된 백몇 개의 이름들이 교문에 붙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도 방금 말이다.
우리 집은 학교 앞.. 그니까, 학교 대문을 지나, 큰 이름 모를 나무 하나를 지나면 우리 집이 등장한다. 지나가다가 흔히 보이는 건조하고 딱딱한 회색빛의 콘크리트 외벽이 감싸고 있는 정말 평범한 아파트이다. 분명히 어제까지만 해도 별 가치라고는 없는 평범한 아파트였다. 근데 지금은 아니지, 지금 나는 누구보다 빠르게 반 배정을 확인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아파트에서 사는 것이다.
"헉...허ㅎ..헝헙흠... 아 반 배정 제발… … ."
해가 어느덧 뉘엿뉘엿 지고 하늘이 발갛게 물들어 가고 있을 때, 내 양 볼도 발갛게 상기되어 뛰고 있었다. 그놈의 고3이 뭐라고, 반 배정이 뭐라고, 어제 먹다 남은 귤 한 개를 달랑 들고는, 이름 모를 나무 하나를 단숨에 스쳐 갔다. 그리고 마침내 내 눈앞에는 웅장한 종이의 향연이 펼쳐졌다. 그리고 난, 3학년 1반 23번 김시민'
그리고 난 혼자였다.
다시 한 번 두 눈을 크게 뜨고 이리보고, 저리 봐도, 난 혼자였다. 분명히 친구들이 같은 김 씨라서 같이 붙어있어야 되는데.......(입틀막)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진짜 없다.
왜 익숙한 이름 대신, 다른 김 씨들만 주르륵 나열되어 있는건데.... 덕분에 나는 '망했다.' 라는 이 세 글자가 머리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못된 년들. 어떻게 나만 빼고 같이 붙는데? 나는 하염없이 종이만 쳐다보다가,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흐느적거리며 핸드폰을 들었다. '찰칵' 소리를 내며 멍한 얼굴로 카톡 창을 열었다. 고3 반 배정.jpg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 고 3되면 공부하라는 하늘의 뜻이겠지."
사실 긍정적으로 생각이 들진 않았지만, 어떻게든 이 최악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나는 아까 들고나온 귤을 마저 입에 넣으며,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주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교문 옆에 있던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서 말이다. 누가 보면 미친 X이라고 하는 거 아니야? 싶을 정도로 미친 듯이 귤을 씹어대며 최대한 긍정적으로, 긍정적으로 생각 중이었다. 그래, 어차피 미술학원 다니고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닐 텐데,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겠지. 그래그래 좋게 생각하자.
"그래, 어쩌면 나 1반인 것도, 내가 반 배치고사 1등(?) 해서 그런 거 일 수 있어, 오케이"
하- 단전에서 끓어오르는 한숨을 삼키고는 마지막 남은 귤 한 조각을 입에 넣고 벤치에 몸을 기댔다. 두 눈을 감으니 앞이 깜깜했다. 이거시 내 고3의 앞날인 건가, 하고 다시 한 번 한숨을 쉬는데 어디선가 묘하게 화음이 이루어지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내가 잘못 들었나 생각하고는 개의치 않고 다시 한숨을 폭하니 내뱉었다. 그러자 또다시 피식거리는 웃음소리가 내 귓가에 맴돌았다. 읭? 여기 나밖에 없는데 하면서 고개를 쳐든 순간, 누군가 있었다. 응? 내 눈앞에는 회색 후드티를 입고 재미난 장난감이라도 받아든 아이처럼 해맑게 웃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것도 엄청나게 예쁜 보조개를 반짝이며, 나를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그렇게 예쁜 보조개는 처음이었다.
“너 일등 아닐걸? 아마 내 친구일 거야.”
나는 빠르게 고개를 푹 숙이고는 지금 일어난 이 당황스러운 상황에 두 눈을 일렁이며 원인 모를 화음의 근원을 쳐다보았다. 얘는 누구기에, 그리고 언제부터 내 말을 듣고 있었는지, 끝없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나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예쁜 미소를 짓는 너에게 드디어 질문 한 개를 내던졌다.
-.....누구세요?
"나 몰라? 난 너 아는데."
모르니까 질문을 하지요.. 이 양반아... 나는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는 너의 대답을 되짚어봤지만, 아니 전혀, 모르겠다. 라는 문장에 도달할 뿐이었다. 나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고 너는 그런 나에게 실망이라도 한 듯, 아까보다는 덜 파인 보조개로 내 고갯짓에 말을 이어갔다. 입 모양으로 뻥긋 대며.
"정,윤,오."
-저엉..윤..호오?
"아니, 윤오, 오, 일이삼사오 할 때 오."
내가 말귀를 못 알아듣자, 이젠 손가락까지 동원해서 윤호가 아니라 윤오라고 알려주는 너를 보며, 나는 더더욱 얼굴이 타올랐다. 아니 지금 나 뭐 하는 거지, 얘는 언제 내 옆에 앉아서 내게 손짓 발짓을 하는 거지.
너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배시시-웃으며 내 옆에 앉아서 나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반 배정 보러 왔구나, 나도 1반인데." 라며 그 빨간 입술로 말문을 열었다.누구와는 다르게 태생적으로 낯을 가리고 히키코모리 아싸인 나는 급격히 말문이 줄어, 어, 그래. 라는 급격히 짧은 대화와 함께 벌떡 일어났다. 나는 제대로 옷매무새를 갖추고는 이 어색하고도 이상한 대화를 끝내고 싶었다.
"학교 근처 살아?"
-어.. 나는 학교랑 집이 좀 멀어.
"되게 부지런하네."
미안 윤오야, 처음부터 서로 집 소개는 좀 무리데스..☆★ 나는 에둘러 집 위치를 설명하고는, 급하게 정윤오를 등진 채 돌아섰다. 그러고는 아...안녕. 이라는 급 마무리 인사와 함께 재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냐, 이상한 애가 다 꼬이네, 내 고3 인생 대박 나려고 하나. 그나저나 진짜 쟤 누구지, 난 쟤를 본 적이 없는데. 괜히 이상한 사람 아닌가 싶어, 경보로 걷던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도 여전히 벤치에 앉아 나를 쳐다보고 손을 흔들어주는 정윤오가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뭐야, 쟤 진짜 이상한 애인가 봐- 윤호인지, 윤오인지.
02. 저기에 앉으면, 너가 안 보이잖아.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은 3월 2일이 찾아왔다. 내 친구들의 장문의 카톡과 위로 아닌 위로의 말에도 나는 전혀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집에서 누워서 잠시 생각해보니, 생각보다 1년은 길었다. 성격상 애들한테도 다가가지 못하는데, 진짜 이러다가 1년 내내 아싸 아니야. 갑자기 그 생각 하니까, 꾸역꾸역 아침으로 먹었던 토스트가 목에 꽉 막힌 기분이었다. 반 배정의 후유증이었을까, 누구보다 지각에 자신 있던 나는, 평소보다 좀 이르게 아직 2월의 한기가 가시지 않은 차가운 바람을 양 볼로 짓누르며 걸어 나섰다. 우리나라 봄은 삼한사온이라는데, 누가 그랬냐? 아닌 거 같은데.
삼 학년...삼 학년...일반, 여기. 삼 학년 교실을 찾은 나는 벌컥 유리창 문을 열었다. 몇 달째 사람의 흔적이 없던 교실은 고3 학생들로 인산인해가 된 지 오래였다. 어수선한 교실에서 친구 하나 없는 나는 일부러 3분단 4번째 줄에 자리 잡았다. 맨 앞은 이미 전교권에서 노는 애들이 앉을 게 뻔하고, 맨 뒷줄은 너무 공부 안 하는 티가 난단 말이지, 나는 중얼거리며 쇠붙이 의자를 끌어 가방을 걸었다. 그 와중에 누가 히터를 튼 건지, 먼지가 풀풀 나는 숨이 턱 막히는 뜨거운 공기가 내 숨을 허덕였다. 답답했다.
"어 윤오다! 윤오야!"
윤오, 정윤오? 내가 그때 만난 정윤오? 나는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차마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정윤오의 등장만으로 어수선한 교실은 흥분의 도가니가 되어버렸다. 쟤가 그렇게 유명한 애 인가, 왜 나는 몰랐지? 하긴 모를 만도 하지, 나는 평소에 학교보다 학원에 있는 시간이 더 많으니 말이다. 아니 그래도 저렇게 인싸중의 극 인싸를 모른다니 내가 너무 둔한 건가 싶기도 했다. 역시 관심 없는 것은 전혀 귀담아듣지 않는 나의 성격이 여기서도 발휘가 된 건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는 그대로 머리를 필통에 뉘어 엎드렸다. 저런 애는 누구랑 앉을까, 누구랑 친구일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건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기로 약속하면서, 어서 빨리 이 시끄러운 분위기가 잠잠해지기를 기도했다.
"윤오야! 너 자리 없으면 나랑 같이 앉자! 나 수학 좀 알려주고 그래라~ "
"경민아 미안, 나 같이 앉기로 한 애가 있어서, 그래도 수학은 알려줄게."
얼마나 수학을 잘하길래 다짜고짜 수학을 알려 달라는 부탁을 받지..? 어쩐지 지 친구가 일 등을 했니 뭐 그러더니, 친화력도 좋아 더구나 공부까지 잘하는 애 구나. 나는 점점 사기캐릭터로 진화해가는 저 정윤오라는 자식이 너무나 궁금해졌다. 엎드려 있는 와중에도 얼마나 고개를 들고 싶던지, 기계적으로 일어서려는 내 목에 힘을 주며 잔뜩 움츠렸다.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나 자신과의 싸움에 낑낑대고 있을 때쯤, 끼익-하고 의자 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정윤오가 앉았구나. 아 이제 일어나도 되는 건가. 나는 주춤주춤 허리를 펴며 고개를 들었다.
"시민아, 잘 잤어?"
-엄마앜!!!!
☆★근데 형이 왜 거기서 나와?.....☆★ 그렇다. 나사 빠진 로봇처럼 삐걱대고 일어나보니 정윤오는 내 옆에 앉아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너무나도 해맑게.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틀어막고는 최대한 정윤오 에게 멀어지면서 조그맣게 소리쳤다. 야 너 뭐해, 너가 거기 왜 앉아? 근데 저 자식은 태연하게 "여기 자리 없어서 앉았어, 괜찮지?" 라며 웃어 보인다. 아니 하나도 안 괜찮아, 나는 주섬주섬 의자를 끌어오며 외쳤다. 아니 같이 앉기로 한 애가 나야? 왜 나야? 나는 의아한 나머지 그의 팔을 잡고는 세차게 물어보았다. 경박하고 다급한 나와는 대조되게 너는 아주 여유롭고 능숙하게 긴 속눈썹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저기에 앉으면 너가 안 보이잖아."
03. 거짓말만 하지 마, 내 앞에서.
한바탕 소동이 있었던 후로 나의 왼쪽 몸은 마비된 기분이었다. 가뜩이나 창가 쪽 구석이라서 축축하고 좁아 죽겠는데, 왼쪽에는 떡 하니 정윤오가 자리 잡고 있어서 살짝만 움직여도 정윤오랑 삐걱대고 부딪히기 일쑤였다. 그런데도 정윤오는 알 듯 말 듯한 미소만 지으며 부딪힐 때마다 살짝 어깨를 뒤로 빼서 내게 한치의 공간을 내주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미안하고 불편해서 너를 쳐다보았는데, 그때 너는 기가 막힌 타이밍에 나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두 눈이 마주치고, 너의 눈 안에 내가 들어찬 것을 느끼면 난 그제야 두 눈을 내리깔고 다시 고개를 돌리며 앞을 보았다. 일종의 항복 표시였다. 무너져 내렸다는 뜻. 그러면 너는 나지막이 잔잔한 웃음을 머금고는 너의 그 타고난 여유로움을 뿜어내며 천천히 앞을 향했다. 이건 너가 이겼다는 뜻이겠고.
차라리 불편하다고 말을 하면 좋으련만. 너는 끝끝내 말을 하지 않고는 그렇게 몇 번 시선만 내리쬐는 게 다였다. 나는 그게 너무도 어려웠다. 무슨 의도인지 몰랐거든, 아무리 답을 찾으려고 해도 너는 찾기가 어려웠다. 너무나 어려워서 번번이 패배했다. 그렇게 너는 누구보다 다정한 얼굴로 천천히 나를 죽였다.
"자! 이 종이에 자기가 희망하는 대학교, 야자 신청 여부, 신상 써서 내세요. 나 퇴근 때까지만 받습니다~"
정적을 깨는 선생님의 말씀이었다. 종이들이 이 손 저 손에서 날아다니고, 드디어 정윤오에게 종이뭉치가 넘겨져 왔다. 정윤오는 나를 쓱 쳐다보더니, 자신의 것 한 장과, 내 것 한 장, 총 두 장의 종이만을 남기고는 종이뭉치를 넘겼다. 그러고는 내 책상에 종이 한 장을 넘겨주었다. 덕분에 난 종이 한 번 잡아보지 못하고 가만히 필통에서 볼펜을 꺼냈다. 그렇게 수동적으로 그가 준 설문지를 빠르게 훑어 보니, 자신이 희망하는 대학교, 정시 수시 계획, 야자 참여 여부, 가족 관계, 주소 등등 별의별 항목이 가득한 걸 알 수 있었다. 이제 진짜 고3 이긴 하나보다. 나는 한숨을 쉬고는 곁눈질로 슬쩍 정윤오를 쳐다보았다. 정윤오는 막힘이 없었다. 자기와 똑 닮은 검은색 볼펜을 들고는 진지한 얼굴로 설문지 중반부에 다다르고 있었다. 뭐야, 벌써 그만큼 써내려간 거야? 이왕 훔쳐본 거 뭐라고 썼나 헛기침을 하는 척하며 목을 살짝 빼보니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아 그만 보기로 하자, 나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인 건 확실하니까.
그와 다르게 나는 별것 없었다. 나는 치솟아 오르는 학원비를 감당하기 위해선 누구보다 간절히 수시에 최종합격이 되어야 하는 사람이었고, 그러기 위해선 남들보다 오래, 그리고 더 많이 그림을 그려야 했다. 당연히 그러면 야자는 못하는 상황. 사실 학원에서도 야자 하는 걸 그리 바라고 있지는 않은 상황이었다. 고3은 4타임(6:00~10:00)을 수업해야 하거든, 4타임을 하려면 나는 7교시에 이 학교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그렇다는 것은 담임에게 따로 찾아가야 한다는 뜻.
나는 빠르게 야자 불참가를 표시했다. 대학교도 어느 정도 학원에서 제시해준 대학교로 채웠다. 그렇게 점점 종이에 여백이 없어지고, 우리 집 주소를 마지막으로 나는 설문지를 끝마쳤다. 꽤 찝찝한 마음으로 종이를 달랑 들어 혹시라도 틀린 건 없나 검토하고 있을 찰나, "아, 내 정신 좀 봐, 우리 일단 한 달 동안 활동한 임시 실장 정할까?" 라는 담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하늘이 두 쪽 나도 그럴 일은 없지만, 그래도 담임이 최대한 이쪽을 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더욱더 설문지를 얼굴에 틀어박았다. 제발 한큐에 가자, 아무나 빨리 나오렴.
"제가 할게요."
"아, 용기 있는 친구 나왔네, 이름이…"
"윤오에요. 정윤오"
"그럼 윤오가 이거 설문지 걷어서 4시 30분까지 교무실로 내려와, 나 어디 있는지 알지?"
그래 너가 아무나 였구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며 너에게 설문지를 넘겼다. 정윤오는 내가 준 종이를 제일 앞에 두고 하나하나 정리하기 시작했다. 저렇게 귀찮은 걸 왜 굳이 사서 하지, 근데 내 착각일까, 아까와는 다르게 약간 굳은 얼굴을 하고 정리하는 정윤오였다.
*
*
*
어느새 7교시가 끝나고 나는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교무실로 달려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정윤오는 나머지 설문지를 정리하는지 자리에서 종이 뭉치를 탁탁 쳐내고 있었다. 이제 다 한 건가… 나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살짝 배에 힘을 주고, 벌어진 정윤오의 의자 틈새로 나가려고 하는데 정윤오가 자신의 틈새로 내 몸이 지나가기도 전에 끼익- 하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까 의자에 앉았을 때는 잘 몰랐는데 이렇게 일어나니까 새삼 참 키가 크구나.
"어디가?"
-아, 교무실에 잠깐 볼일이 있어서.
"같이 가자."
같이? 아 맞다. 얘도 교무실 가야 했지. 나는 어색하다 못해 뻣뻣한 얼굴로 그래. 라고 대답하며 정윤오와 함께 교무실로 향했다. 애들이 하교할 시간이라서 그런지 복도는 귀가 터질 정도로 시끄러웠다. 하지만 나와 정윤오는 달랐다. 무척이나 조용하고 또 조용했다. 난 어색하고도 불편한 이 상황이 너무나 끔찍했다. 워낙 오글거리고 어색한 상황을 싫어하는 나로서는 최악의 순간이다 싶었다. 그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윤오는 미소를 머금은 듯 만듯한 얼굴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내 옆에서 발을 맞추었다.
"시민아."
툭. 발걸음이 멈추었다. 나는 너를 쳐다보았다. 너도 나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시끌벅적했던 복도가 조용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순간의 너는 창밖의 햇빛을 받아, 안 그래도 하얀 너의 얼굴이 더 하얗게 빛이 났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들어 한참이나 높은 너의 시선을 향해 눈높이를 맞추었다.
"너 내가 불편해?"
-... 그럼 안 불편해?"
아 좀 돌려 말할 걸 그랬나. 잠시 후회가 들기도 했지만, 어쨌든 지금 나는 불편하니까. 불편하다고 이야기했다. 이렇게 말하면 인제 그만두겠지 싶었다. 그런데 내 예상과는 다르게 너는 입가에 미세하게 곡선을 그렸다. 어김없이 다정하게 피어나는 보조개. 나는 그게 싫었다. 무엇인가가 심기에 거슬렸다. 나는 이렇게 내 감정이 모두 다 드러나는데 너는 단 한 번도 요동치지 않고 잔잔하게 흘러갈 뿐이었다. 기분이 나빴다. 꼭대기에 앉아서 나를 시험하는 것도 아니고.
"그럼 계속 불편해해.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야."
'정윤오 화법' 시작이다. 당최 알 수 없는 말들만 늘어놓고는 나를 쳐다보는 그를 보면서 나는 그의 의도를 알아내려고 노력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저렇게 포커페이스를 하고 달려드는데 어떻게 알아내느냐고. 속이 타는 나는 인상을 쓰면서 말없이 쏘아보았다. 그런 나를 두고 정윤오는 고개를 돌려 교무실 문을 두드리며 내게 대꾸했다.
"근데 거짓말만 하지 마, 내 앞에선."
-내가 언제 거짓말을 했는데?
"그건 너가 더 잘 알잖아."
그러고 정윤오는 내게 시선을 거두고 교무실로 저벅저벅 들어가버렸다. 난 아직 궁금증이 해결되지도 않았는데 쌩하니 대화를 종료시켜버렸다. 아까 다정했던 정윤오는 어디가고,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거 같은 정윤오가 내게 등을 돌렸다. 나는 황당한 채, 종이뭉치를 들고 있는 너의 뒷모습과 함께 쾅- 하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그제야 나는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소름이 끼치기 시작했다. 맞다 주소, 내가 학교에서 먼 곳에 산다고 했지. 등에 땀 한줄기가 곡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그렇게 끝까지 정윤오는 불편했고 불편했고 불편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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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세요! 복숭아20개입니다. 반갑습니다. 몇 번을 고치고 고쳐서 결국엔 올리네요. 예전에 써두었던 글에서 윤오가 너무 불쌍해서 ㅠ^ㅠ 윤오를 주인공으로 넣어봤어요! 그리고 여러분들이 써주신 댓글 하나하나 다 읽어봤어요 고마워요. 감동 받아서 눈물 흘렸슴다. 저는 이제 몸이 많이 회복되었어요. 그래도 무리하면 안되니까 분량은 예전만큼 못갈꺼 같네요.포인트 주고 보시는 건데 제송함다ㅠㅠㅠㅠㅠㅠ(무릎꿇음) 그러니까 댓글 쓰시고 다시 포인트 받아가세요!!
연재는 일주일에 한 편 정도씩 올리게 될 것 같구요. 이 글은 제가 겪었던 일을 가지고 썼답니다. 한 10%정도는 각색했어요. 이제 휴학했다 복학하는 할미(?)라서 이게 요즘 고3이 맞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기억을 더듬어가며 써보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해요! 댓글도 하나하나 다 읽어보니까 걱정마시구 많이 다가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