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음 #2
'무지도 죄다'
"야, 진짜 미안. 어제 니가 다 계산했어?"
[너 진짜 죽는다. 니가 불러내놓고 왜 돈도 안 가져와.]
월요일 아침, 진주가 다급히 재환에게 전화를 걸어 연신 사과했다.
"얼마 나왔어? 안주 많이 먹었는데."
[됐어, 나 곧 수업이야.]
"엥? 너 열한시 반부터잖아. 아직 아홉시,"
뚝-
화가 많이 났나. 어제 적어도 8만원은 나온 것 같은데. 진주는 꺼진 핸드폰만 바라보다 문자를 입력했다. 미안, 내가 다음에 밥 살게. 재환은 한동안 진주의 문자를 읽지 않았다.
*
다음 날 재환에게 연락이 왔다. 재환은 평소처럼 어디냐, 밥은 먹었냐 물었다. 화난 게 아니었구나. 진주는 안도했다.
진주가 그와 헤어진 이후로부터 재환은 진주 곁에 꼭 붙어 있어 외로울 틈이 없게 했다. 혹시나 혼자 있으면 전처럼 우울감에 빠져있을까 봐 재환은 한시도 진주를 혼자 두지 않으려 노력했다. 예를 들면, 수업 끝난 진주를 매일 데려다주고 우울할 때마다 달려와서 얘기를 들어줬다는 거? 덕분에 진주는 이별을 그럭저럭 잘 이겨낸 듯 보였다.
"밥 사줘."
"오늘?"
"응. 안돼?"
"안될 건 없는데..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급하게 고깃집으로 왔다. 삼겹살, 항정살, 갈매기살 있는 대로 때려 넣는 재환을 보고 진주는 겁이 났다. 뭐야.. 오늘 아주 뽕을 뽑으려는 건가..?
"술 시켜도 돼?"
"어.. 응, 시켜."
"이모 여기 소주 두 병이랑 맥주 한 병만 주세요."
이런 식으로 벌을 받나. 벙쪄 있는 진주에게 능숙하게 소맥을 건네는 재환. 얼떨결에 술잔을 받아들고 건배했다. 또 취할까 봐 적당히 멈춘 진주와 달리 재환은 평소보다 오버해서 술을 목으로 넘겼다. 진주는 재환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무슨 일 있니?
"..너 그거 진심이어써?"
"뭐, 뭐가..?"
"진심이었냐구."
늘어난 술병에 기대 재환이 눈을 감고 물었다. 이미 많이 취한 듯 발음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도 진지한 모습이다.
"너 진짜 나 안 봐도 상관없어?"
"뭔 소리야?"
"아. 진짜 짜증나게 하지마."
아.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 술김에 했던 얘기들이 언뜻 떠올랐다. 그걸 말하는 건가? 진주는 무서운 표정의 재환에게 대충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런 말 왜 해. 진짜 힘들어. 나는 완-전히 상관 있어.."
생각보다 나를 더 깊은 관계로 생각하고 있었구나. 진주가 내심 뿌듯해했고 재환은 말을 이어나갔다.
"나 그때 너무 화나서 진짜로 너 안 보려고 그랬는데.. 일부러 너한테 퉁명스럽게 하고.. 연락도 안 하려고 했는데.. 그거 잠깐도 너무 힘들었는데, 니가 그렇게 말해서 조금. 쪼끔 상처받아써.."
엄지와 검지로 '쪼끔'을 표현해가며 웅얼거리는 재환의 모습에 진주가 피식 웃었다. 답지 않게 저런 말을 잘하네. 진주는 귀여워서 그냥 턱을 괴고 듣고 있었다.
"뭘 봐."
"웃기잖아."
"웃겨, 너는? 난 진지해. 완전 진지해. 그래서 강진주. 걔야, 나야?"
"너야."
"진짜?"
"응."
"진짜루?"
"응."
"그럼 너도 나 좋아해?"
"응?"
좋아하냐는 말에 진주는 잠깐 멈칫했다. 재환은 거봐! 대답 안 하지! 하며 초록색 병을 입으로 갖다 대며 더 들이키는 시늉을 했다. 이미 다 마셔버려서 빈 병이었지만.
응이라는 거냐 아니라는 거냐 묻는 재환에게 진주는 좋아한다고 얼버무렸다.
"뻥."
"뭐야."
"뻥인 거 다 알아."
"뭐. 어쩌라고."
"뻥인데도 좋다. 맨날 나한테 좋아한다고 해줘."
진주는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그러니까 이게 지금 친구로서 좋냐는 말이야, 아니면 진심으로 이성으로서 좋냐는 말이야? 아마도 후자인 듯했으나 진주는 모르는 척했다.
대충 자리를 정리하고 재환을 집으로 데려갔다. 아니, 다 취해 몸도 못 가누는 성인 남자를 혼자 데려왔으니 끌고 왔다는 말이 더 맞겠다. 진주는 재환의 집 앞에 서서 재환을 문 쪽으로 들이밀었다.
"자자, 집에 다 왔다. 얼른 들어가라. 제발."
"우리 집이야?"
"너네 집이지, 그럼 우리 집이냐."
"데려다준 거야?"
"그래. 빨리 들어가, 부탁할게."
"고마우니까 내가 데려다줄게."
아 됐어, 됐어! 진주가 급히 재환을 문 앞에 버리고 도망 나왔다. 어두운 밤에 묻혀있던 진주의 얼굴이 가로등 빛에 붉게 비쳤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이의 고백은 참으로 기분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긍정적으로 통할지도 모르겠다.
*
누군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면 보통은 긍정적일까? 진주는 지금까지의 재환의 호의가 '사랑'임을 알아챘을 때 꽤나 죄책감을 느꼈다. 나를 좋아해 주는 건 기분이 좋았으나 되돌려주지 못할 거란 미안함 때문이었다. 한 번도 재환을 사랑의 대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므로 약간은 당황스럽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만약 진짜로 친구로서 좋다는 말이면? 워낙 자신이 무뚝뚝한 탓에 재환이 내심 서운했을 수도 있고 술김에 기분이 좋아서 홧김에 뱉은 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식으로 고백한 것도 아니고 아직은 너무 섣부른 생각이 아닐까?
혼자만의 부끄러운 생각으로 가득 찼던 진주는 그게 착각임을 깨달았다.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재환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뭐.. 맞으면 맞다, 틀리면 틀리다 말을 해줘야 할 거 아냐? 왜 연락이 없어?"
술을 마신 바로 다음 금요일, 진주는 괜히 재환이 자주 가는 과방 근처를 배회했지만 재환은 눈코 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뭐 다른 걸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고백한 거 아니었어?
재환은 깊게 생각하지 않는 그저 달밤의 술자리에서의 기억을 제 혼자만 특별하게 생각한 것 같아 진주는 또다시 얼굴이 새빨개졌다.
*
주말이 그냥 지나고 월요일이 다시 돌아왔다. 에라 모르겠다. 전화를 걸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면 받아도 무방할 것이고, 맞는다면 그에 대해 더 할 말이 있을 것이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걸은 전화였지만 막상 또 받지 않으니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주는 문자를 보냈다. 지금 OO로 나와. 거기서 기다릴게. 안절부절 핸드폰만 바라보던 재환은 그제서야 겉옷을 챙겨 부리나케 약속 장소로 향했다.
"너 뭐야?"
진주가 재환을 보자마자 꺼낸 말이었다. 재환은 진주의 앞에 앉아서 눈치 보기 바빴다. 진주는 말했다. 왜 나를 피하냐고. 맘대로 폭탄 던져놓고 왜 학교도 안 나오고 전화도 안 받냐고. 혹시 내가 착각할까 봐 그러는 거냐고. 조용히 진주의 말을 듣고 있던 재환은 푸훗 하고 웃었다. 진주가 눈썹을 꿈틀대며 물었다. 왜 웃어?
"와, 너 진짜 나한테 관심 없구나."
재환은 그제서야 긴장이 풀린 듯 마주 앉아 상체를 진주 쪽으로 당겨 앉았다. 가까워진 재환을 보고 당황한 진주는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재환은 턱을 괴고 말했다.
"나 금요일 공강이잖아."
"어?"
"오늘 월요일 공강은 너고. 진짜 웃겨, 그때 나 수업 중이었어."
진주는 민망해 눈알을 열심히 굴렸다. 재환은 귀엽다는 듯 입가에 퍼지는 웃음을 참았다.
"안 그래도 언제 수습할까 고민 중이었는데 고맙다, 야.
그거 그냥 못 들은 거로 해."
-
저는 유치하고 유쾌한 걸 좋아합니다. 줄여서 유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