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음 #3
'No man's knowledge here can go beyond bis expereince.'
그냥 못 들은 걸로 하라고? 그날 재환은 별다른 사과의 말도 없었다. 사과할 일도 아니지, 그냥 내가 착각한 거니까. 진주가 알던 평소의 재환 모습이었고 오히려 바뀐 건 진주 쪽이었다.
무엇을 기대한 걸까? 애초에 진심이 아닐 거란 생각을 했었음에도, 괜스레 재환을 생각하면 미안함을 느꼈음에도 진주의 마음속에 있는 이상한 아쉬움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럼 그렇지.'
진주의 머릿속에 오랫동안 떠있던 말이었다. 내가 어디 잘난 부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23년 짧은 삶 누군가에게 고백을 받아본 적도 없이 차이기만 해봤더니 괜히 설렜나 봐.
진주가 며칠 동안 그 일로 골머리를 앓았고 그리고 깨달은 결론이 하나 있었다. 더 이상 재환을 친구로 마주할 수 없다는 점.
"진주, 술 먹으러 가자."
"싫어."
"왜?"
왜? 진주는 기가 막혔다만 딱히 할 말은 없었다. 그저 인상을 쓰고 재환만 바라볼 뿐이었다. 재환은 착잡한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빵실빵실 웃으며 말했다. 왜, 나 또 헛소리할까 봐?
"응."
생각보다 '헛소리'라는 말은 진주의 기분을 꽤나 상하게 했다. 진짜구나. 강진주, 이제 진짜 이런 장난도 대수롭게 못 넘겨.
가능한 일일까? 분명 재환을 보며 그런 핑크빛 감정을 느껴본 적도 없었고 고백을 받았을 때만 해도 그저 당황스럽기만 했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그 '헛소리'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들떠있었던 것은 자신이었다.
자신을 깊게 생각하지 않는 재환에 비해 친구 사이에 몰래 가졌을 사랑의 감정에 자책하고 과거의 자신이 원망스러운 진주는 앞으로 어떻게 재환을 봐야 할지 아직도 혼란스러웠다.
*
'어디야?'
재환의 문자였다. 진주는 대충 확인하고 다시 핸드폰을 주머니로 집어넣었다. 같이 가려고 한 문자겠지. 여전히 혼자 어색한 진주는 더 이상 재환과 함께하는 시간이 그닥 반갑지 않았다. 아직 재환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벌써부터 재환을 보면 작게 두근거리는 것도 은근히 눈을 피하게 되는 것도 그리고 재환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그 뒤로 웬만하면 재환과 따로 다니는 것을 원했고 그것은 오늘도 똑같았다. 하지만 진주가 마칠 시간에 맞춰 근처에 온 재환이 그 모습을 보았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우연히 재환을 만났다. 진주는 일부러 창밖에 시선을 고정했지만 재환은 태연하게 와서 말을 걸었다. 강진주. 진주는 그제서야 놀란 척 인사했다.
"집에 가는 거야?"
"어. 너도?"
"응. 문자 못 봤어?"
문자? 했었어? 진주는 능청스럽게 핸드폰을 확인하는 시늉을 하더니 아, 하며 재환에게 사과했다. 재환은 됐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주가 재환의 눈치를 보고 있을 쯤 재환이 벨을 눌렀다. 진주가 집에 가기 위해 내리는 정류장이었고 당황한 진주는 다급히 재환에게 말했다.
"너 여기서 내리게?"
"응, 같이 가자."
"우리 집에?"
재환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주가 다급히 말렸다. 나 친구랑 약속 있어. 재환의 표정이 굳었다.
"집에 간다며?"
잠깐 만나고 다시 갈 거야. 재환이 누구냐고 추궁하자 진주는 당황했지만 재환이 누른 정류장에 멈춘 버스의 문이 열리자 재환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버스에서 내렸다. 재환의 집과는 약간 먼 거리였음에도 그냥 내린 재환이 황당했지만 그는 진주의 지인을 모두 알고 있었으므로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진주와 재환은 중학교 때부터 친구였다. 두루두루 친하던 재환이 먼저 진주에게 말을 걸어왔고 생각보다 둘은 잘 맞았다. 무엇보다 가장 큰 접점이었던 것은 밴드부였다. 재환은 노래 부르기를 참 좋아했고 또 잘했다. 진주는 피아노에 재능이 있었기에 재환과 함께 밴드부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계기로 둘은 더 가까워졌다.
재환은 실용음악과로, 진주는 피아노 전공으로 진학하게 되었다. 악기를 다룬다는 참한 이미지로 주위에서 소개를 많이 받았으나 정반대의 성격에 오래 간 케이스는 별로 없었다. 그것도 고정관념이라며 화내던 진주에게 항상 맞장구를 쳐주며 옆에 있어주던 재환이었다.
알아온 시간도 있지만 진주에게 재환은 참 좋은 친구였다. 사춘기 시절 내적으로 힘들어하던 진주를 제대로 붙들어준 것도 재환이었고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도 재환이었다. 우울할 때마다 곁에 재환이 있어주었다. 그런 재환이 베푼 연민을 착각하고 좋아함으로써 그 예쁜 추억이 망가지는 게 진주는 싫었다.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를 마음을 고백한다면, '헛소리'라고 단정 짓던 재환에게 차임이 분명할 것이므로.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는 게 싫었다.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친구여야만 해.
우정이라고 굳게 믿었지만 남모르게 싹 피고 있던 감정이 이제서야 열매를 맺는다면 모두 당황스러울 것이다. 지금의 진주처럼. 차라리 그 '헛소리'하지 말지. 그럼 몰랐을 텐데. 진주는 간절히 생각했다.
*
오늘은 전화가 울렸다. 진주가 핸드폰 화면을 보고 한참을 고민하다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어디?]
"이제 끝났어."
[목소리에 왜 기운이 없어.]
뭔 일 있냐며 묻는 재환에게 없다고 왜 전화했냐고 묻는 진주. 재환이 뭐라고 말했지만 소란스러워 잘 듣지 못했다.
"뭐라고? 잘 안 들려."
[그냥 끝났을까봐 전화했어. 문자는 또 못 볼까봐.]
"아니, 너 어딘데? 왜 이렇게 시끄러워."
[아, 미안 미안. 나 지금 과 애들이랑 술 먹으러 왔어.]
재환은 술자리 분위기를 정말 좋아한다. 특히 여러 명이 즐기는 술자리는 급한 일이 있어도 거절을 못할 정도로 좋아한다. 진주가 한 번 재환의 친구들 술자리에 꼈을 때가 있었는데, 으 그때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진주였다.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젓고는 알겠다며 끊으려는 진주의 귀에 따갑도록 높은 목소리의 여성이 재환을 부르는 게 들렸다.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평소 재환을 많이 아끼던 선배였다. 진주의 미간이 좁혀졌다.
[어. 그럼 들어가- 문자하고.]
진주는 한숨을 내뱉었다. 자신이 한심했다. 뭣도 아니면서 왜 간섭해,라는 생각은 곧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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