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용 is 단짠단짠
w.문달
"부농아, 사귀지 마?" 딸기가 좋아. 잘만 이름 붙여놓고 아득한 저편으로 마음을 밀어버렸다. 어리석게도 나는 팬심인지 이성으로서인지 헷갈린다며 어려운 길을 고집했다. 생각보다 단순한 문제인데. 내 체면, 자존심, 열등감, 낮은 자존감에 둘러싸여 진심에게서 등을 돌린 상태에서 이태용을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 있었다. 다른 거 다 제쳐두고 이태용 하나만 보자고. 내가 어느 위치에 있든,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어쩌지, 어떡하지 하며 발만 동동 굴릴 게 아니라 복잡하다 자칫 여길 수 있는 껍질을 벗겨내야 한다. 그 껍질을 까내고 뽀얀 속을 드러낸 알맹이의 실체는, "용아, 내가 너를 많이 좋아해." ♡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벙찐 채로 이태용의 품에 안겨 있었다. 어색하게 허공에 멈춰 있던 팔은 천천히 그의 등으로 편한 자리를 찾아갔다. 온 힘을 다해 껴안고 흔드는 이태용 때문에 몸이 다 아팠지만 기뻤다. "그래서, 세진이랑 나 사겨, 사귀지 마?" "사귀지 마. 그럴거면 나랑 사겨. 너 나랑 사겨야 돼." "나 너가 하라는 대로 진짜 하려고 했어." "끔찍해. 난 세진 후배가 너한테 고백했다는 말도 충격적이었는데. 만약 둘이 사겼다면 졸업이고 뭐고 자퇴했을거야." "그건 좀 극단적인데? 나도 얼마 못 가 헤어졌을 걸. 아니야. 애초에 말만 그래놓고 사귀지도 않았을거야. 나는 부농이 좋아하니까." 여전히 품에 안긴 채로 웅얼거렸다. 나 진짜 나쁜 선배인거 아는데 너 못 보내 웅앵웅. 이태용은 무조건 그래 그래 하고 장단을 맞췄다. 누구에게 안겨본 게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원래 사람 체온이 이렇게 따뜻한건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람들 시선 받는거 부담스러워하는 주제에 어두운 밤을 믿고 거리 한복판에서 오래도록 껴안고 있었다. "제인아, 미안해." "뭐가 미안해?" "네 마음 알고도 모른 척 한 거." "맞아. 너 좀 미안해야 돼. 아무리 내가 친구 좋다 해도 우씨! 애초에 그딴 제안은 하는 게 예의가 아니다!" 눈이 아플 정도로 치켜 뜨고 노려보자 실실 웃으며 내 목 쪽으로 얼굴을 숙여 파묻는다. 숨결이 닿는 간지러운 그 느낌에 밀어내려 팔을 펴니까 그 틈도 내주지 않을 작정으로 더 당겨 안고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아 쫌! 그동안 이렇게 안고 싶어서 어떡했대?" 안간힘으로 밀쳐내니 그제서야 못 이기는 척 입을 들썩이며 느슨하게 풀어줬다. 그리고는 은근슬쩍 내 손을 가져가서 문지르고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죽는 줄 알았지. 네가 웅크려 앉아 있을 땐 그대로 안아들고 싶었고, 가만히 서 있을 땐 뒤에서 끌어안고 싶었고," "변태야? 사람을 두고 그런 생각을 해?" "..미안내."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눈동자의 크기에 새삼 놀라워하며 괜찮다고 했다. 그런데 저 큰 눈 안에 나만 담겨있다. 어두워도 잘 보였다, 이태용의 눈에 비친 나. 전처럼 공원 안에서 산책을 하며 많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좋아한다고 딱 낙인을 찍어버리니 난 이때 이랬고 저때 저랬다, 속상했다, 질투났다 이러쿵 저러쿵 마음껏 떠들어 댈 수 있었다. 이태용은 내가 말하는 동안 내내 고개를 못 들다가 두현씨 얘기가 나올 때 가슴을 펴고 당당해졌다. "너 내가 가마니 했으면 진짜 형이랑 사귈 작정이었어?" "솔직히 안 흔들렸다면 거짓말이야. 근데 네가 더 좋았어. 그래서 두현씨한텐 미안해." "나한테는 안 미안해? 나 그 날 이후로 한동안 우울해서 두현이 형이랑 말도 잘 안 섞고, 막." "너 근데 왜 나 좋아하면서 먼저 좋다고 안 했어?" "..그게. 내가 부농이를 진짜 좋아하는구나 하고 깨달은게 늦어서." 이태용이나 나나 똑같았다. 서로를 앞에 두고 있는데도 엉뚱한 곳을 기웃거렸다. 도긴개긴이니 그건 퉁 치는 걸로 하고. 나란히 걸으면서 손을 딱딱 부딪혔다. 경쾌하게도 떨어지는 소리에 더 신이 나서 콧노래까지 나왔다. 완벽한 밤이었다. "세진이한테는 내가 잘 말할게." 다 좋은데 딱 한 가지 걸렸던 거. 세진이를 언급하며 부딪히던 손에 깍지를 껴왔다. 앞,뒤로 흔들다 느려지는 걸음과 함께 멈췄다. 이태용이 말없이 옆에서 나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나는 그의 눈을 피하며 걱정들을 털어놓았다. 당장에 세진이가 받을 상처와 나에 대한 배신감은 어쩌고, 곧 졸업이라지만 그래도 한 학기는 더 만나야 하고 당장에 같은 소품팀인데 껄끄러워서 어떻게 얼굴을 보나 하고. 이태용은 정 걱정 되면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하자고 말했다. 나는 열 번도 더 세진에게 욕 들어 먹는 상상을 하며 그래도..하고 칭얼거렸다. "사실 내가 제인이를 좋아해. 많이 많이 좋아하는데 바보같이 시기를 놓쳤거든. 그래서 세진아, 용기 내줘서 정말 고마운데 받아주지는 못할 것 같아. 미안해." "라고 말 한다고?" "응. 이러면 좀 낫지 않을까?" "..너 말 되게 잘 한다." 진심으로 감탄하며 박수를 쳐 주니까 잠시 쑥스러워하더니 괜히 앙탈을 부리며 말을 돌렸다. 그리고 잠깐의 정적이 이어졌다. 솔바람이 불었다. 으슥한 산책로에 띄엄띄엄 늘어져 있던 가로등 불 하나가 파지직 끊기는 소릴 내며 나갔다.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여름에 팔을 긁적이며 아구 더워 하는 시원찮은 혼잣말을 해댔다. 이태용은 일일이 내 작은 행동에 반응 해줬다. 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이태용 앞에 가면 속마음도, 혼잣말도 대화가 되었다. "용아, 나 이제 졸려." "안 졸린 게 이상하다. 새벽 3시 다 되어가는데." "어어? 진짜? 우리 이러다 해 뜨는 거 보는 거 아니야?" 그 말에 이태용이 빙긋이 웃으며 다시 나를 껴안았다. "해 보고 집 들어갈까?" "우엥, 졸린데 나 눈 안 감게 할 자신 있어?" "응. 아싸! 밤새 부농이랑 같이 있는다." 뒤늦게 얼굴 걱정을 했다. 이렇게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다. 붙잡기만 하고 그 다음은 어떻게 내가 잘 하겠지 하고 나왔다. 나의 찜찜한 속사정을 전혀 모를 이태용은 좋다고 방방 뛰었다. 난 지 옆에서 화장이 때처럼 밀릴까, 기름이 올라올까 전전긍긍하는 중이건만. "어디 가야 제일 잘 보일까?" "한강? 사실 한강 좋아해서. 한강에서 야식 먹으면서 밤 새는거 로망이기도 해." "나 그래본 적 있어. 고딩 때 제일 친했던 친구 한 명이랑 둘이 자전거 타고 한강 돌다가 치킨, 피자,콜라, 막 시켜놓고 밤새 얘기하고." "그 친구 남자야,여자야?" "아이, 남자야. 부농이 벌써 과거에까지 질투를?" 입을 삐죽거리며 그런거 아니라 둘러대도 이태용은 끝까지 볼을 찌르며 놀려댔다. 나중 가서는 성질을 내며 후렴까진 가지 말자 을러대니 그제서야 얌전하게 내 어깨를 주물거렸다. 그 특유의 일부러 늘어지는 말투로 부노옹 미아내 하며 달랬다. 이태용이 가자는 대로 도착한 깊은 새벽의 한강은 산책로를 거니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을 먹은 강물이 작게 물결치는 걸 보다가 전단지를 주어와 깔고 앉은 이태용 옆에 털썩 앉았다. "용아, 빨리 나 즐겁게 해줘." "으아, 엉, 움, 어떻게 해야 부농이가 즐거울 수 있을까?" "노래 틀어놓고 프리댄스! 오! 완전 좋아!" "여, 여기서? 사방 다 뚫려있는데?" 손뼉을 치며 풀린 눈에 힘을 번뜩 주었다. 프 리 댄 스를 갈망하는 눈빛에 적잖이 당황한 표정을 한 이태용이 강아지처럼 낑낑 거리며 이리저리 둘러봤다. "뭐 어때? 새벽 여섯시면 몰라. 다 잠든 시간이라 우리 말고 아무도 없네." 무심하게 말을 던져놓고 이태용이 출만한 신나는 댄스곡을 찾고 있었다. 전주를 듣고 어떡해 하며 부끄럼을 타던 이태용은 곧 팔 다리를 흔들며 몸을 풀었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잠깐 실없이 터진 웃음을 싹 걷어내고 감탄이 나올만한 동작을 보여줬다. "아이구 잘 한다 내새끼! 아이구 아이구!" 흐믓하게 보면서 박자에 맞춰 박수를 쳐주니까 다시 부끄럼 많은 용이로 돌아왔다. 몸을 구겨 움츠리며 옆에 앉아 얼굴에서 열이 나느니 하며 치댔다. "그래도 시키면 잘 해~?" "잘 하지. 근데 부끄러워." "뭐가 부끄러워~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나만 보는데." "너가 나만 보니까 더 부끄럽지." 라고 말하며 아무렇게나 자세잡은 내 손바닥 위에 턱을 올려놓고 올려다본다. 우리 사이에 낑겨있는 손전등 켜진 핸드폰이 밀쳐져 아래로 떨어졌다. 하늘을 향해 뿜는 빛에 이태용의 얼굴 절반을 빛과 그림자가 차지했다. 공포 영화에서 귀신이 등장할 때의 조명 효과 같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생긴건 무시 못했다. 차마 손을 내리지도 못하겠고, 대신 자유로운 내 고개를 돌렸다. 시무룩한 목소리가 조곤조곤 내게 물어왔다. "네가 나 이렇게 쳐다보니까. 그러니까 부끄럽지." "으응. 그렇구나. 잘했어. 이, 이제 딴 거 또 하자." "부농, 왜 나랑 눈 안 마주쳐?" "그야 네 말대로! 지금 그렇게 나만 보니까 부담스럽지." "내가 너 보는 게 부담스러워?" 차라리 눈을 감았다. 동시에 아랫입술도 깨물었다. 입술이 군데군데 튿어진 상태에서 매트한 립을 발랐더니 작은 껍질이 깨문 앞니에 거슬렸다. 혀로 촉촉하게 축이며 다시 이태용을 마주봤다. 순둥하게 내려간 큰 눈망울에 자꾸 시선을 피하게 됐다. "너가 너무 잘생겼잖아.." "어? 나 진짜 못 들었어." "너 너무 잘생겨서! 그래서, 그래서.. 너랑 눈 오래 마주치는거 사실 힘든데 가까이 붙어있으려니까 더 부끄럽다구.." 이태용의 얼굴을 받치고 있던 손이 가벼워졌다. 사라진 무게감에 이태용 쪽을 똑바로 바라봤다. 손을 뻗어 굴러 떨어진 휴대폰를 가져 온 이태용이 다시 원래 자리에 놓고 말했다. "아, 부농아..너 왜 이렇게 귀여워." 이태용이 조심스럽게 뽀뽀해도 되겠냐 물었다. 내가 방금 뭘 들은 거냐고 씩씩 거리자 사과를 하며 뒤로 살짝 물러난다. 아까보다 어색해진 분위기에 허벅지만 슥슥 쓸어보다가 멍이나 때리고 있는 이태용을 툭툭 쳤다. "응?" "앞만 봐." "응?" "앞만 계속 보고 있어보라고." 이태용은 순순히 내가 하라는 대로 정면의 강만 쳐다봤다. 제대로 했는지 나조차도 아리송하게 그의 뺨으로 냅다 돌진했다. 소리는 와중에 제대로 나서 내가 쥐고 있던 부끄러움은 아까의 배가 됐다. 이태용이 조용히 어깨를 들썩이며 속웃음을 쳤다. "야.야아- 그만 웃어, 창피하니까아!" "아 미안해. 근데 너무 너무 너무다." "웃지 마. 웃지 마아? 우리 클레오파트라나 하자." 이태용은 웃느라 정신 못차리는 중에도 안녕 클레오파트라 하고 말을 넙죽 받았다. 둘이 반쯤 정신이 나가서 별 거 아닌 거에도 웃고 넘어갔다. 해가 희미하게 정체를 드러낼 때 즈음엔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에게 기대서 잤다. "용아..용아 나 기숙사.." "웅..? 가자 가자.." 몽롱한 상태에서 휘청거리며 일어났다. 셔틀을 타러 학교 정문까지 가서야 깨달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방학이라 셔틀 버스가 없고, 다른 하나는 방학동안 나는 윤영 언니네 집에 얹혀 산다는 거였다. 이십여분을 왜 버스가 안 오는지에 대해 갖가지 가설을 세우다가 내가 먼저 이마를 쳤다. "우리 좀 바보같애." "밤 새서 그런가 머리가 안 돌아가네. 부농아 편의점 들려서 마실 거 사갈래?" 그러자며 어깨동무를 한 채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사이좋게 각자 좋아하는 음료수를 사 들고 나와 윤영 언니네로 향했다. "잘 가-용아. 다음엔 내가 데려다 줄게! 잘 자고." "부농이도 잘 자." 문 앞에서 열심히 손을 흔드는데 인사만 계속 하곤 그 자리에 계속 서 있는 이태용이다. 내가 얼른 가보라고 해도 말만 벌써 자기 자취방이었다. 등을 돌려버리자 다급하게 붙잡는다. "부농아." "응?" 내가 인지하고 밀쳐내기 전에, 그보다 빨리 다가와 이마에 뽀뽀를 했다가 떨어진다. 뿌듯하게 웃기까지 하는데 화를 내기엔 졸려서 풀린 눈이 마냥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 같아 따라 웃어줬다. "제인아 나도 너 좋아, 많이 많이. 이따 오후 연습 때 만나!" 연습 전까지 자다 나오기는 글러먹었다. 일단 알겠다며 이태용을 보내고 집에 들어갔다. 윤영 언니는 아직까지 곤히 자고 있었다. 대충 옆으로 끼어들어가 누웠다. 잠깐 잠을 자고 일어난 이태용이 잠은 좀 잤냐며 카톡을 해오기 전까지 핸드폰을 꼭 붙잡고 기다렸다. ♡ 세진 후배에게는 나에게 했던 예행 연습 그대로 말을 했다고 한다. 다행히 좋게는 끝났지만 이태용은 우리 과 행사 공연의 남자 주인공이었고, 나는 소품 팀장이었고, 세진이는 소품팀 팀원이었다. 관계가 어떻든 간에 스트라이크 까지는 내내 붙어있는단 소리였다. 세진 후배는 변함없이 사근사근 굴었지만 어떻게든, 씌워진 편견이라도 있는지 뒤가 쎄했다. 선배님, 선배님 하며 열심히 제 몫의 일을 야무지게 해냈다. 그러나 그마저 나에겐 아니꼬왔다. 이런 마음을 갖고 있으려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남들 눈을 피해 이태용에게 기대서 난 정말 나쁜 선배라고 자책을 늘어놓았다. "얼굴 맞대고 있으면 계속 불편하고 미안하고 그래서 애가 뭐라고 나한테 말 걸어도 띠껍게 굴게 되고..진짜 이런 내가 너무 싫다." "그럴 수도 있지. 괜찮아. 네 잘못 아니야. 세진이한테 뭐라 말 하기 전에 한 번만 다시 생각해보고 말 꺼내면 띠껍다고 느껴지지 않을거야." "세진 후배는 상관 없이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는데 나 혼자 곤두세우고 이러는 거 약간..좀 많이 별로야. 나 왜 이럴까. 으 싫다." "어떻게 하면 그 마음이 풀릴 것 같애? 다른 거 생각하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면." "음..세진 후배한테..사실대로 말 하는 거.." "뭐가 사실인데?" "당시에도 너 좋아하고 있는 상태에서 세진 후배가 너 좋아한단 말 듣고 일부러 소개해준 거니까. 다 아는 상태에서.. 농락한 거나 다름 없잖아." "아니지 않아? 너 그때까지 확실하게 마음 안 섰다며. 갈팡질팡 하고 있었잖아." "으아아! 맞아! 아니야! 사실 세진 후배가 너 좋아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머리를 쥐어뜯으며 일어나 소리쳤다. 그리고 누가 들었을까 뒤늦게 입을 막고 두리번거렸다. 이태용은 이제 들어가야 의심을 안 사겠다며 내 등을 토닥였다. "난 화장실 들렸다 갈게. 그리고 부농아, 그 불안은 세진이가 아니라 나한테 더 따져야 맞겠다. 세진이가 나 좋아하든 말든 내가 널 좋아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게 내가 너한테 믿음을 못 줬다는 게 되니까." 이태용이 내 두 손을 품듯이 잡았다가 놓았다. 내가 아니라며 미안하다고 하자 환한 미소로 대신 답했다. 나는 그가 남자 화장실 쪽으로 향하는 걸 보다가 연습실 용도로 쓰고 있는 강의실로 되돌아갔다. "선배님." 아직까지 사람들이 다 각자의 쉬는 시간을 가지고 있는지 강의실 안에는 세진 후배 말곤 없었다. 충전기를 꼽고 앉아 폰을 만지던 세진 후배가 나를 보고 일어났다. "어어?" "저 신경 쓰지 마세요." "응?" "저 사실 한창 태용 오빠랑 연락할 때 다른 선배님한테 오빠랑 선배님 사이 얘기 들었어요. 듣고도 제가 일부러 무시하고 연락했었어요. 죄송해요."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린지. 기뻐해야 할 지 화를 내야 할 지 판단 내리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아니야 괜찮아 두 마디로 대충 덮었다. 살짝 처졌다가 괜찮다는 내 말을 듣고 다시 명랑해진 세진 후배가 눈이 감길 정도로 웃으며 말했다. "선배님이 자꾸 제 눈치 보시는 거 같아서 그게 너무 죄송했어요~!" 팔짱을 껴오는 세진 후배 뒤에 살랑거리는 꼬리라도 붙어 있을 것 같았다. "아..근데 어떤 선배한테 들은거야?" "연희 선배님이요." 나랑 이태용이 어떤 관계지 다 알고서도 썸을 타고 나에게 대화 내용 캡처까지 보내며 조언을 구했다니. 발칙하기로는 여태 아는 사람들 중 제일이었으나 겉으로 분노를 드러내진 않았다. 옳다구나, 이제 네 눈치 안 보고 앞에서 대놓고 꽁냥거려주마 하며 벼르고 있었다. 그런데 나의 담력은 막상 대담치 못했다. 공개 연애하자고 먼저 말해놓거 피하기는 내가 피했다. 내 소심한 행동에 쌓이고 쌓였던 이태용은 막공 날 사진 찍느라고 붐비는 극장 앞에서 지인들에게 나를 소개하고 다녔다. 덕분에 학교 바닥들이 이렇게 생겼구나, 를 알 수 있었다. 고개를 못 들고 바닥만 보고 다녔단 얘기다. 단체 사진을 찍은 후 다 같이 해체 작업을 할 때 도와주러 이태용네 극단 단원들이 와주셨다. 거기서 오랜만에 두현씨를 만나게 됐다. 두현씨는 나를 보자마자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단단히 잡은 두 손을 흔들며 그는 먼저 말을 꺼냈다. "태용이랑 사귄다면서요." "아. 네..죄송해요." "뭐가 죄송해요? 죄송할 거 하나도 없어요. 괜찮아요. 제인 에어 덕분에 오랜만에 짝사랑도 해보고 좋았습니다." 임부농 하고 나와 두현씨가 손을 잡고 인사를 하고 있는 걸 발견한 이태용이 걸어왔다. 두현씨가 손을 잡은 채 나를 앞으로 당겨 태용이가 얼마나 질투의 신인지 보자며 소곤거렸다. "둘이 가까이서 뭔 얘길 그렇게 해요?" "응, 뭐 없었어. 오랜만에 보니 좋다, 여전히 예쁘다, 보고싶었다 이런거?" "허걱." "그렇죠, 제인 에어?" 두현씨가 이태용은 보이지 않을 각도에서 내게 윙크를 했다. 나는 이태용을 슬쩍 보고는 마지못해 끄덕거리며 이태용 놀려먹기에 동참했다. "제인 에어. 참 나. 선배님. 제인이는 제인 에어가 아니고 부농이에요. 임부농 너 나 좀 봐." 내 손목을 채가는 통에 급하게 두현씨에게 인사를 하고는 이태용에게 끌려갔다. 다들 무대 위에서 해체를 돕느라 분장실과 복도는 텅 비어있었다. 이태용은 분장실 문을 닫고 삐딱하게 서서 나를 노려봤다. 안 그래도 존재감 강한 눈이 무대 화장을 지우지 않아 더 부리부리했다. "공개로 까고 연애하자 해놓고 내빼는 것도 모자라서 남자친구 앞에서 썸탔던 남자랑 붙어있기까지 하고. 너 나빠." "아, 용아아..그 내빼는 거는 그거는 내가..아 그리구 두현씨랑은 아까 그런 말 했던 거 절대 아니고," 이태용이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다가왔다. 그게 더 위압적이었다. 나는 눈만 빠르게 끔뻑이며 의자만 만져댔다. 이태용이 내 볼을 눌러잡는 바람에 붕어처럼 입술이 튀어나왔다. "..짜증나, 임제인. 요리조리 빠져나가고 피해다니기나 하고. 지금도 여전히 내 앞에서 가만히 잡혀 있는데 왜 나만 미칠 것 같아. 질투심 유발이나 하고. 아주 얄미워서 나도 토라지고 싶은데 못 그러게 만들어." "미어냉..내그 잘멋태떠.." 이태용이 손에 힘을 풀고 턱 부근으로 손을 내렸다. 그렇게 쳐다보면..잘생긴거 감당 안돼서 어쩔거냐고. 거미줄 같은 손이 턱과 목을 감싸고 돌아 숙이지도 못하겠고 눈알만 바쁘게 굴리니까 어허, 하며 혼을 냈다. "나 지금 너랑 키스하고 싶어." "..어?" 뭘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으니 또박또박 그 단어를 반복해줬다. 뽀뽀도 부끄러워 겨우 하는데 키스라니. 좌불안석인 나와는 다르게 이태용은 하겠다는 의지가 결연해보였다. 가까워오는 얼굴에 거친 심장을 주무르다 결국 목을 껴안고 안기기를 택했다. "아니야아 용아아.." "..싫어? 싫구나.. 알겠어." 저에게서 나를 떼어낸 이태용은 누가봐도 삐질 때로 삐진 애였다. 어떻게든 달래야 한다는 사명감에 어린 애 달랠 때 쓰는 말투로 할 수 있는 모든 달래기는 다 했다. "이씨, 나 모른단 말이야!" "뭐를?" "나, 나 태용이 네가 처음이라서.. 그래서 키스 어떻게 하는지 모른단 말이야.. 몰라. 진짜 나 몰라 쪽팔려서. 너 얼굴 가까이서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 터질 거 같은데! 뽀뽀도 그래서 겨우 하는데 키스를 어떻게 해 바보야!" 남은 힘을 모조리 소리치는 데 쓰고 주저앉았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싸고 있는데 이태용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어쭈, 지는 웃음이 나온다 이거지? "제인아, 고개 좀 들어봐." 이태용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내 팔을 흔들었다. 나는 반대편으로 세게 돌리며 내가 더 삐쳐있음을 티냈다. "싫어!" "제인아아- 용이 좀 봐봐아." "하지 마..나 한동안 너 안 보고 살거야." "진짜? 나 하루라도 안 보고 살 자신 있어?" "..아니. 사실 없어 이 나쁜 놈아." 고개를 처들자 기다렸다는 듯 이마를 맞대왔다. 내가 눈을 내리까니 코를 부대껴왔다. "..할거야?" 입술이 닿으려 할 때마다 눈을 감아버렸다. 기다렸다 못 참고 뜨면 얄밉게 날 관찰이나 하고 있었다. 그게 여러 번 반복되다 보니 지쳐서 잡생각이 다 났다. 물 마시고 싶다, 입냄새 나면 어떡하냐고, 나 화장 괜찮나, 모공 다 보일 거 같은데 등등. 이태용의 입술이 또 나를 낚으려 움직이기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 키스 못 해 어떻게 하는 지 모른다니까?" '못'에서부터 말캉거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기분이 이상해지려했다. 사라졌던 긴장이 귀신 같이 알고 다시 찾아와 미친듯이 심장을 두들겼다. 이번엔 진짜였다. 장난으로 닿을까 말까가 아니라 진짜. 나도 몰라. 근데 이런건 원래 직접 해보면서 배우는거야 자기야. FIN더보기 |
세상에..단짠단짠이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전 후기프사니까 후기로 찾아뵐게용♡ BGM. 굿나잇스탠드- Boyfri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