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York weather sucks.' (뉴욕 날씨는 최악이야.)
아주 예전에 봤던 드라마에서 여배우가 새침하게 읊던 대사 한줄이 퍼뜩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장면이 떠오른 건 다른 이유가 아닌 정말 그 말이 맞았기 때문에.
난생 처음 밟은 외국 땅은 습하게도 회색빛 비가 내리고 있었고, JFK 공항은 수 많은 인파 덕에 좋지 못한 냄새와 함께 불쾌한 끈적임을 동반했다.
"우리 딸, 엄마 아빠 없이도 혼자 잘 생활 할 수 있지? 너도 이젠 마냥 어린애는 아니니까 이참에 좋은 경험 한다고 생각 해."
엄마가 저녁을 먹으며 마치 내일은 김치찌개를 해야겠어- 하는 단조롭고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꺼낸 미국 유학 행은 당사자인 나는 하나도 모르게, 철저히 내 의견은 반영되지 않은 채로 모든 준비가 끝나가던 참이었다.
나는 발 끝에서부터 밀려오는 황당함에 밥 먹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태연한 얼굴로 음식을 씹고 있는 내 앞의 두 사람을 바라봤다.
"나는 가겠다고 한 적이 없는데?"
"엄마랑 아빠가 앞으로 집에 자주 못들어오게 될 것 같아서 그래. 막내 이모가 너 보고싶어 하기도 하고."
"아니, 여행도 아니고 왠 유학이야. 이런건 애초에 내 의사를 제일 먼저 물어봐야 하는거 아니야? 난 한국에 있고 싶단 말이야."
"여주야. 잘 생각해. 이거 너한테 되게 좋은 기회야. 엄마 아빠도 없는 집에 혼자 있는 것도 외롭잖아. 요즘같은 시대에 외국에서 대학교 다녔다고 하면 좀 더 알아주기도 하고."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들어먹질 않을 사람들이라는 걸 잠시 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 애초에 이 집안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는 했는지.
반쯤 체념한 상태로 그냥 그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방으로 들어왔다. 그게,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반항이었다.
"여주야, 여기!"
엄마와 닮았지만 훨씬 더 순하고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막내 이모는 결혼 후 사촌 동생을 낳고 5년쯤 뒤 이모부를 따라 미국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얼굴을 보지 못한 지 시간이 꽤 지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내 머리 속에 남은 마지막 모습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잘 지내셨어요, 이모?"
"그럼. 이모는 잘 지냈지. 여주는 정말 예뻐졌다~"
이모의 집으로 향하는 길이 어색하지 않게 웃으며 끊임없이 말을 거는 그녀 덕에 긴장이나 어색함이 조금 풀린 나는 창 밖으로 보이는 회색 빌딩들을 멀거니 바라봤다.
솔직히 표지판이나 간판이 영어인 걸 빼곤 서울이랑 별로 많이 다르진 않아서 입이 떡 벌어진다거나 그렇진 않았는데 20분 쯤 달리니 내가 알던 그 뉴욕의 빌딩 숲이 나타나기 시작해서 그때부턴 잠시 울적함을 잊어버리곤 그 풍경을 정신없이 구경했다.
뉴욕에서도 한인들이 많이 산다는 퀸즈에 위치한 깔끔한 2층 집 앞에 차를 멈춘 이모가 다 왔다며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25 라는 숫자가 붙어있는 집을 열쇠로 따고 들어가니 이모 성격 답게 아기자기하게 꾸민 거실과 볕이 잘 드는 창문이 보였다.
"동혁이 이놈 자식은 뭐 하느라 안내려와. 이동혁!"
부르지 않아도 된다고 하고 싶었지만 이미 우렁차게 사촌 동생 동혁이의 이름을 부르짖는 이모를 말리지 못해서 난 어쩔 수 없이 거실에 어색하게 서서 동혁이가 내려오길 기다렸다.
나랑 한 살 터울의 동생이라 어렸을 땐 꽤 친하게 지냈었는데, 못 본지 거의 10년이 되었으니 참을 수 없는 어색함이 온 몸을 잠식했다.
"벌써 왔어?!"
"한 시간이 넘었는데 무슨 벌써야. 빨리 인사 안해?"
뭘 하다 내려 왔는지 밝게 갈색으로 물들인 머리를 마구 까치집을 해놓고 내려온 동혁은 스스럼 없이 내게 다가와 오랜만이라며 인사했다.
예전부터 친화력이 엄청난 애라고 생각 했지만 일말의 어색함도 보이질 않아서 지금껏 고민한 내가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안녕하세요, 아줌마."
그 뒤로 낯선 목소리가 들려서 고개만 슬쩍 움직여 계단을 바라보니 처음 보는 얼굴이 방실방실, 예쁘게도 웃고 있었다.
"어머. 재민이 왔구나."
"네. 동혁이랑 Chemistry 프로젝트 같이 하기로 했거든요."
이모에게 향해있던 선하게 휘어진 눈이 나를 향해 돌아왔다.
아니, 무슨 사람이 저렇게 생겼담.
요즘 인기 그룹의 모 멤버가 떠오를 정도로 마치 사슴 같이 생긴 이목구비에 혼자 속으로 감탄하고 있자 그 아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나재민 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친 그 찰나.
뭐랄까. 알 수 없는 기분이 내 뒷골을 당겼다.
그게, 나재민과 나의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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