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실 01
모든 인연은 하나의 실로 이어져있다.
그 운명의 실의 색깔과 길이로 모든 인연이 정의되고 예측된다.
길이가 길수록 본래 인연에 다가가기 오랜 시간이 필요하며, 그 실은 어느 순간 끊겨 앞으로의 일을 예상할 수 조차없다.
그리고 색으로 결정되는 상대와 얽힌 인연,
노란 우정
옥색 믿음
핏빛 증오
검은 악연
붉은 사랑
보다 더 다양한 색으로 나타나는 운명들이 무색의 세상을 오색으로 물들인다.
*
손을 들어 머리를 감싸고 눈을 감았다.
젠장, 한상혁이랑 같은 반이라니.
눈 앞에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불쑥 솟아났다. 눈물도 찔끔 났다. 종이를 흔들어도 보고, 눈을 꼭 감았다 떠보기도 하고, 밝은 햇살에 하얀 종이를 비춰보기도 했지만 애석한 숫자는 그대로였다. 분한 마음에 손마저 떨려오고, 떨어지는 눈물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고등학교 2학년의 반배치 결과가 나오는 날이였다. 피할 사람이 있는 나로써는 반드시 그 사람과 가장 거리가 먼 반이 되리라 다짐하며 며칠 전부터 안절부절하며 기다린 날이다.
그렇게 맞이한 오늘인데
결과는 우스웠다.
가장 먼 반은 커녕 같은 반, 바로 옆 반도 아닌 같은 반.
아직 반배정만 나온 것 뿐인데 내 앞으로의 일 년 생활이 모두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손 안의 종이를 꽉 쥐어 꾸겼다.
내 사정을 알고 한상혁의 반을 알아온 친구는 내 반응에 새삼스레 놀라 날 달래기에 바빴지만 머릿속이 복잡해진 나는 차마 괜찮다고 말해주지 못했다. 안 괜찮은게 사실이기도 하지만.
빛나는 새끼손가락의 노란 실을 뒤로하고 한상혁의 눈에 띌세라 재빨리 강당을 빠져나왔다.
*
우울한 기분에 갑작스러운 생리까지,정말 최악의 날이다. 줄곧 옆에서 걱정해오는 친구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약국에 들러 약 한 갑을 산 뒤 집으로 돌아왔다.
적막 가득한 집에 들어와 곧장 욕실로 향했다. 서늘한 공기를 따뜻한 물로 적시고 가만히 내려오는 물을 맞으며 생각에 빠졌다.
한상혁, 한상혁, 한상혁,
같은 반.
입 안에서 감돌던 한숨이 한상혁이란 세 글자에 기다린 듯이 새어나왔다. 짜증나는 이름이네. 눈을 감고 생각했다. 혹시, 혹시라도 지금 이 상황이 꿈이라면, 어젯밤 눈 감은 그 때 라면, 다시 눈을 뜨니 아침이라면?
작은 기 생긴 마음에, 용기를 내어 슬며시 뜬 눈에 비춘 건 차가운 이슬맺힌 욕실타일 뿐이었다.
"..."
당연한 일 인데, 있을 수 없는 일에 기대를 품고있는 내 자신이 한심했다.
복잡한 머리 속을 비워보려 평소보다 열심히 머리를 털어냈다. 내 머릿속을 지배한 걱정, 생각들이 모두 흐르는 물들과 함께 떠내려가기를 빌었다.
대충 말린 머리, 대충 입은 옷가지보다 더 흐트러진 마음으로 내 방 침대에 누웠다. 아까 먹은 약 기운 때문인지 졸음이 닥쳐오기 시작하고, 졸음을 쫓으려 머리를 흔들었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몸에 힘이 빠져 한 쪽으로 쏠린 시선은 책장을 향했고, 평소에는 눈에 띄지도 않던 한 앨범을 발견했다.
얼마나 방치했는지 먼지가 뿌옇게 앉아있었다. 손에 묻는 먼지들을 휴지로 한 번 닦아냈다.
졸업장과 함께 끼워져있는 이 앨범은 초등학교 졸업앨범이었다. 초등학교 졸업앨범이라면, 영원히 다시 보지 않았을 수도 있던건데. 쌓여있던 뿌연 먼지들도 이해가 갔다.
놓여진 앨범을 조심스레 펼쳤다. 낮익은 풍경과 얼굴들. 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기다 4년 전의 내 얼굴과 마주했다.단체사진에서의 자잘한 흉터들과 억지웃음. 옛날의
내가 안쓰러워보였다. 살짝 인상이 찌푸려진 얼굴이 다음 장을 넘어가자 보기좋게 구겨지고 말았다.
한상혁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4년 전의 나를 따돌리는 것을 주도했던 아이.
다른 아이들이 나에게 못된 짓을 하면 하교할 때 졸졸 따라와 옆에서 조잘거리며 나를 놀렸던 아이.
친구가 없어 혼자 다니던 나를 때때로 쫓아왔던 아이.
한상혁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여중을 간 뒤에도 몇 번씩 마주치던 얼굴이다. 한상혁을 발견하면 내가 바로 뒤돌아 도망쳤고, 다니는 길도 수도 없이 바꿨지만 꼭 한 번 씩은 내가 뒤돌아 도망쳤다.
앨범을 쿵 소리가 나게 소리내어 덮었고 생각에 빠졌다.
나에겐 운명에 관한 인연을 보는 능력이 있다. 솔직히 미친소리로 들릴 거 알지만,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왼쪽 새끼손가락에 실을 매달고 산다. 이 실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다. 그저 타인과의 인연을 나타내는 것으로 색깔과 길이로 두 사람의 운명이 나타난다.
가족이라면 평생을 같이 행복하게 지내면 된다. 악연이 나타나면 그 길이를 보고 그 때까지만 참아내면 된다. 우정이 나타나면 손을 꼭 잡고 놓치지 않으려 애쓰면 된다. 그래서 난 한상혁과 나의 인연에 대해 알아내려고 애를 썼다. 인연의 끝을 알면 그 때까지는 참을 수 있을 것 같아서. 하지만 우리의 인연은 친구? 악연? 우연? 전부 아니였다. 아니 모른다.
한상혁과 이어진 내 실은 하얀색이였다.
내 손에 이어진 실이 가끔 핏빛으로 변하곤 했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하얀색으로 남아있었다. 하얀색? 하얀색이 뜻하는 건 뭘까, 하얀색 실은 한 번도 보지 못해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길이도 알 수 없이 중간이 끊겨져있다.
내가 끊을 수도 없는 운명의 실.
이렇게 나는 불안함으로 가득찬 마음을 안고 인연을 알 수 없는 한상혁과 만날 개학날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