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무덤 04
벽지에 붉은 엑스 표시를 그었다. 이로써 7개의 엑스가 그려졌다. 원식이 펜을 던졌다. 고요한 방에서 소리를 내며 구르던 펜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바닥을 굴러다니던 펜이 호원의 손에 들려 주머니로 넣어졌다.
"치사하게 계속 이럴 거야?"
"당신이 제안을 받을 때까지 방해할 겁니다."
"안 하겠다잖아. 애초에 재상과 난 관계가 없다고!"
"…관계가 없다면 저희가 왜 원식 씨를 찾아왔겠습니까."
미친놈, 넥타이를 끌어 내리던 원식이 행동을 멈췄다. 호원의 시선이 현관을 향했다. 구겨져 버려진 자켓이 문 앞을 지켰다.
"당신의 신변을 건들진 않습니다."
"웃기는 소릴 하는군."
"대신 주변을 조심해야 할 겁니다."
주워든 자켓 안에서 택운의 사진을 꺼냈다. 호원이 싱긋 웃으며 사진의 먼지를 털었다.
"재촉하는 것이 제 스타일은 아닙니다만 이번엔 급한 일이라서 말이죠. 빨리 재상으로 오셨으면 합니다."
손목시계의 유리는 금이 가 숫자를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연신 시계를 노려보던 호원이 사진을 다시 자켓 안으로 넣었다.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던 원식이 마른세수를 했다. 갈색의 머리카락이 한 가닥 흘러내렸다. 친구분이 복제 인간 서비스를 신청하셨더군요. 원식의 눈이 빛났다. 설마 하는 위험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재상은 허투루 일을 하지 않습니다. 저희에게 이익이 없다면 착한 척할 필요가 없죠. …또 한 번 친구분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다면 잘 선택 하세요."
다리에 힘이 풀렸다.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린 원식이 고함을 질렀다. 수년이 지나도 재상이란 그림자는 원식을 놓을 줄 몰랐다. 겨우 속박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 원식은 다시 절망에 빠졌다. 철없던 제 어린 시절을 비난했다. 돈과 피에 눈이 멀어하지 말았어야 할 선택과 비참했던 결과까지. 바닥에 머리를 박고 이를 물었다.
"3일 뒤에 집 앞으로 가겠습니다."
녹물이 가득한 바닥이었다. 찝찝함이 몸과 옷에 묻어감에도 신경은 작게 뚫린 제 허리춤에 가 있었다. 아파, 택운의 입에서 쇳소리가 흘렀다. 창백한 얼굴이 홍빈의 어깨에 떨궈졌다. 여러 개의 구두소리가 지하실을 울렸다. 처음으로 홍빈의 눈물이 흘렀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몇 번이고 죽겠어요. 그게 제 운명이니까요.'
오랜만에 꾼 꿈은 달갑지 않았다. 닿았던 차가운 감촉이 생생히 느껴졌다. 꿈에서 깬 택운에겐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차게 식었던 제 팔이 제 온기를 찾아갔다. 보드란 이불을 끌어 얼굴을 덮었다. 알람이 울리지 않은 걸로 봐선 아직 새벽이었다.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발가락 끝으로 느껴지는 따끔한 햇볕은 착각이라 생각했다.
"2신데 더 잘 거예요?"
들려오는 말소리에 대꾸하지 않았다. 고통스러웠던, 하지만 누군가의 얼굴을 담을 수 있어 좋았던 꿈으로 다시 빠져들었다.
"우리 운이가 늦잠도 자고 별일이야."
"죄송해요…."
"알면 얼른 가서 일이나 해. 대신 저 남자는 떼 놓고."
택운이 제 옆에 서 있을 홍빈을 생각하며 주먹을 쥐었다. 이게 다 저 녀석 때문이야, 망할 놈. 제 알람을 마음대로 꺼버리지 않나, 시간이 늦도록 깨우지도 않고. 불같이 화를 내는 택운에게 홍빈은 그저 웃음소리를 들려줄 뿐이었다. 듣다 지친 택운이 오히려 홍빈은 죄가 없다는 자기 합리화를 하고 가게로 나왔다. 꽉 깨문 이를 따라 잇몸이 아려왔다. 속으로 화를 삭여봤자 제 손해였다. 택운은 곧 마음을 가다듬고 탈의실로 향했다.
"운아 남자 떼 놓으라니까!"
욕은 듣지 않아 다행이네. 그나마 택운 앞에선 유해지는 학연이었다. 다른 직원이 택운과 같았다면 욕설과 함께 내쫓김을 당했을 것이다. 택운이 한숨을 쉬곤 손을 저었다.
"나 혼자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깐 가."
"…."
"가."
"…."
"대답 좀 할래?"
반응이 없자 삭였던 화가 다시 올라왔다. 택운 본인은 모르지만 붉어진 얼굴을 하고서 발길질을 했다. 몇 번을 건드려도 우직하게 서 있기만 할 뿐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제야 불안감에 휩싸여 움직이던 발을 내렸다.
"운이 나이스 샷. 아마 재환 씨의 정강이를 찬 건 자기가 처음일 거야."
"네?"
보이지 않아 멍한 눈동자를 내려 봤다. 재환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흙이 뭍은 제 바지춤을 털었다. 그 옆으로 굳은 얼굴의 홍빈을 흘겼다. 저를 보고 떠는 폼이 아마 안면이 있는 듯싶어 인사를 건넸다. 힘줄이 가득한 재환의 손이 공중으로 떴다. 목적지를 예측할 수 없던 재환의 손이 홍빈의 머리에 내려앉았다. 가까이 다가간 재환이 홍빈의 귓가에 속삭였다.
"조만간 또 보겠네?"
입술이 멀어졌다. 눈을 아슬하게 가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굳은 홍빈의 어깨를 두드리고 두 사람을 스쳐 걸었다.
"홍빈아? 너 어딨어."
저를 친근하게 부르는 택운에 측은한 눈길을 보냈다. 정도 많고 착한 사람이었다. 한 번에 택운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정의할 순 없었다. 자신은 칩으로 생사가 결정되는 한낱 로봇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인간과 흡사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무엇도 담기지 않아 깨끗한 저 눈동자를 볼 때면 느끼는 두근거림도, 그 날 아침 느꼈던 울렁거림도 무엇인지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데리러 올게요."
다만 또다시 사라질 인간에 대한 연민은 확신했다. 홍빈이 거쳐온 여러 인간은 가슴에 응어리로 남았다. 택운도 그들과 같은 일을 당하면 그 응어리는 제어하지 못할 만큼 커질 것은 확신했다. 아쉬움이 가득한 인사를 건넸다. 알았어. 돌아온 건 짧은 한마디였다. 홍빈은 그것마저 좋다는 듯 웃었다. 옆에선 학연이 홍빈을 흥미롭게 살폈다. 삼각관곈가? 어머, 재밌겠는걸.
"청년, 자주 들려요. 잘생겨선 마음에 드네."
학연이 떠나려는 홍빈을 붙잡고 제 인상을 새겼다. 홍빈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곤 가게를 나왔다.
해가 저물었다. 겉옷을 걸친 홍빈이 신발을 구겨 신었다. 택운의 퇴근 시간에 맞춰 마중을 나가려 했다. 그것이 본인의 일이고 만들어진 이유였다.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찬바람이 들어옴과 동시에 날 선 눈빛과 마주했다.
"뭐야."
"아, 그쪽은 누구 신지."
"이 집 주인인데? 너 뭐하는 놈이야."
"…당신이 원식 씨? 아, 도둑 아니에요. 저 정택운 씨 …복제 인간 서비스 나온 복제 인간입니다."
단단한 주먹이 홍빈의 볼을 쳤다. 윽. 신음을 흘리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원식이 힘을 주어 발길질을 했다. 당황한 홍빈이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다시 주먹이 날라왔다.
"정택운한테 뭔 짓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