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혁의 손에 이끌려 간 하키 경기장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빙상이 뿜어내는 한기는 사람들에게서 퍼져 나오는 열기로 인해 그럭저럭 견딜만한 수준이었다.
이동혁은 자신의 친구들이 일찌감치 좋은 자리를 맡아 놨다며 나를 이끌고 앞쪽으로 나아갔다. 친구들이 우리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학교의 마스코트가 그려진 작은 깃발을 팔락이는 존과 머리에 쓴 비니를 고쳐쓰던 마크는 내게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래도 며칠 함께 붙어 다녔다고 그 새 정이라도 들었는지 낯선 얼굴들 속 그나마 익숙한 얼굴들에게 나 또한 즐겁게 손을 흔들며 다가갔다.
"Hey, 여주, aren't you cold?" (여주 안녕, 안추워?)
"A little. But I think it's gonna be fine...How long does it take usually?"(조금. 괜찮을 거 같긴 한데...시합 얼마나 걸려?)
"About an hour." (한 시간 정도.)
조금 얇게 입고 온 내가 신경 쓰였는지 마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이동혁이 따뜻하게 입으라고 할 때 말 들을걸 그랬다. 두 팔을 손으로 쓸자 존이 자신이 하고 있던 목도리를 풀러 내게 건냈다.
"It's okay." (괜찮아.)
"Just take it. I'm fine."(그냥 가져가. 난 괜찮으니까.)
"...Thanks." (...고마워.)
목과 어깨를 싸매니 그나마 조금 나아져서 나는 다시 시선을 링크로 돌렸다.
곧 시작 한다. 이동혁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목도리를 코 끝까지 올렸다.
선수들이 나와 얼음 위를 천천히 달리며 몸을 풀기 시작했다.
그 중에 내가 아는 얼굴을 찾기 위해 열심히 눈을 굴렸다.
"아, 저기 있다. 저기."
이동혁의 손 끝을 따라가니 분명 내가 아는 나재민이 링크 위에 서 있었다.
헬멧에 가려져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등 뒤의 이름과 왠지 익숙한 체구가 그가 나재민임을 알리고 있었다.
심판의 호루라기 소리에 일렬로 모인 선수들은 페어플레이를 약속하는 악수를 나누고 멀어졌고, 모든 선수들은 코치의 사인에 맞춰 자리에 앉거나 링크 위로 올라갔다.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시작된 시합은 아주 격렬했다.
선수들은 모두 한번씩은 몸싸움을 하다가 얼음 위로 나가동그라졌고, 심판은 그런 그들에게 경고를 날리느라 바빴다.
그런 와중에 나재민은 날렵하게도 태클을 걸어오는 이들을 피해 퍽을 이리저리 몰아갔다.
우리 쪽의 함성 소리가 커졌다. 나재민이 첫 골을 넣은 순간에는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함성을 질러서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팀원들과 여유롭게 하이파이브를 하는 그 애를 눈으로 쫓다 양 옆에서 들리는 하이톤의 비명과 나재민의 이름에 고개를 돌리니 학교에서 본 적 있는 여자애들이 마구 손을 흔들고 있었다.
"봐, 나잼 인기 많다고 했잖아."
"...그러네."
이동혁의 뭔가 자랑스러운 듯 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방금 까지만 해도 들떴던 마음이 조금 가라 앉았다. 동시에 뭔지 모를 불쾌함도 넘실거리며 차올랐다.
링크 위의 나재민은 내가 모르는 모습을 하고 누구보다 멋지게 날고 있었다.
뭐, 알게 된 지 한달도 안된 애니까 당연히 내가 아는 모습보다는 모르는 모습이 더 많겠지만서도.
남들이 모르는 그 애의 모습을 알고 있으니, 남들도 다 아는 그 애의 모습을 더 알고 싶었다.
그래. 나는.
나재민의 모든 모습이, 알고 싶어졌다.
시합은 후반부로 갈 수록 눈에 띄게 격해졌다.
초반엔 심판의 눈에 안띄게 슬쩍슬쩍 행하던 반칙도 눈에 띄게 대담해졌고 더 잦아졌다.
그런 모든 반칙들을 요령있게 잘 피하던 나재민도 결국 몇 번 얼음 위로 세차게 넘어져야만 했다.
그래도 점수는 여전히 우리 팀의 우세였다. 시합 시간을 10분 남기고 링크 위에 긴장감이 흘렀다.
중간 피리어드를 쉬고 나온 나재민은 한 골을 더 넣으며 격차를 더 벌렸다.
9분, 8분, 7분, 6분...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상대 팀은 의욕을 잃은 듯 마구잡이로 스틱을 휘둘렀다.
"...어?!"
눈 깜짝할 새에 나재민이 쓰러졌다.
사람들의 입에서 걱정 섞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상대편이 휘두른 스틱에 맞은 나재민은 정강이를 감싸고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
"어떡해, 심하게 다쳤나봐"
"아 저 미친 새끼가!"
이동혁은 잔뜩 화를 내며 욕을 내뱉었다.
다른 사람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와중에 나재민은 같은 팀 선수들의 부축을 받으며 경기장에서 빠져 나왔다.
의료팀이 달라붙어 약을 뿌리고 붕대를 감았다. 코치가 심각하게 무어라 말 했지만 나재민은 그의 팔 언저리를 툭툭, 두드렸다.
생각보다 심각한 부상은 아닌지 시합은 재개 되었지만 곧 시간 종료로 끝이 났다.
선수들은 대기실로 들어가 버렸고, 사람들은 하나 둘 경기장을 빠져 나갔다.
"우린 나재민 보러 가자. 아 진짜 괜찮은건가 걔?"
이동혁은 걱정스레 중얼거리며 나를 이끌고 어디론가 향했다.
선수들의 락커룸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선수들이 하나 둘 씩 나오기 시작했다. 나재민은 거의 마지막 쯔음에 한 쪽 다리를 절룩이며 나타났다.
그 애는 자신에게 달라붙는 여자애들을 늘 있는 일이라는 듯 뿌리치며 걸어오다, 이동혁 옆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곤 안그래도 큰 눈을 더 동그랗게 떴다.
"누나!"
"어어..."
나재민이 세상에서 가장 밝은 웃음을 지으며 내게 다가오자 그 뒤에 서 있던 애들이 나를 눈짓하며 소곤 거리는게 다 보여서, 나는 멋쩍게 볼을 긁었다.
"어쩐 일이예요! 온다는 말도 없었는데,"
"내가 데리고 왔어. 야. 너 다리 괜찮냐?"
"맞아. 너 다리 괜찮아? 많이 다쳤어?"
"아아, 많이 안다쳤어요. 그냥 좀 부은거. 내일 병원 가보죠 뭐."
"...꼭 가. 혹시 큰일이면 어쩌려고."
"알았어요."
"...저기, 나는 안보이냐 이 나쁜 놈아?"
동혁이 세상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재민의 팔을 쿡쿡 찔렀지만 그 애는 그냥 나를 보며 웃을 뿐이었다.
이동혁 앞에서 나 좋아하는거 너무 티 내는거 아닌가. 먼저 비밀로 하자고 해놓고는 오만 티를 혼자 내고 있는 나재민에 헛웃음이 나왔다.
"잘 가요."
"어. 다리 조심하고."
"알았어요."
나재민의 집이 학교와 그리 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혼자 그 애를 부축하던 동혁이는 무겁다며 성질을 냈고 내가 돕겠다 하니 나재민이 거절했다.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이동혁은 잠시 화장실 좀 쓴다며 쏜살같이 그 안으로 튀어 들어갔고, 나재민은 나에게 미처 못 한 작별 인사를 건넸다.
"누나 오는 줄 알았으면 더 잘 하는건데..."
"아냐. 너 오늘 엄청 잘 했는데. 나 깜짝 놀랐어. 좀...멋있더라."
"나 멋있었어요? 진짜?"
"어."
그 말에 세상을 다 가진 것 처럼 웃는게 마치 대형견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쑥쓰러운 듯 뒷머리를 긁은 나재민이 나와 눈을 맞춰왔다.
"...재민아."
"네?"
"나 있잖아..."
"..."
"...아무래도 나도 니가 좋아진 것 같아."
기어들어가는 듯 한 내 목소리가 우리 둘 사이를 가득 메웠다.
아주 잠시 아무 말도 없던 나재민이 내게 다가왔다.
"...진짜요?"
"어."
"오늘 보고 반한건가? 하키 하는 모습에 반했어요?"
"...모르겠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빨리 보여줄걸 그랬네."
푸스스 웃으면서 내 손을 잡아오는 나재민이 귀여워 보였다면, 내가 미친걸까.
"그럼...우리 사귀는 거예요?"
"그렇지 않을까."
"아니면 아닌거고 맞으면 맞는거지. 그렇지 않을까는 뭐야."
그 말을 하면서도 입가엔 함박 웃음이 매달려 있어서, 결국 나도 함께 웃어버렸다.
"좋아해요."
"...어."
"나한테도 좋아한다고 해줘요."
"..."
"누나,"
"아. 나도 좋아해. 진짜."
눈을 들어 나재민과 눈을 마주쳤다.
끝없는 행복이 그 눈에서 흘러 나오고 있었다. 꿀 떨어지는 눈이란게 이런건가. 괜히 머쓱해져서 시선을 피했다.
"오늘보다 내일 좀 더 좋아할게요."
종알종알, 그 애의 입에서 달디 단 고백이 흘러 나왔다.
화장실에 간 이동혁이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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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도 초록글이라니!! (덩실덩실) 감사합니다, 독자님들!!
와아- 드디어 사귄다~~
제목만 연애하는 썰이었는데 드디어 진짜로 연애하는 썰이다~~
독자님들 답답하셨을텐데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