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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 21 [우리의 집으로]
포스트 게임과 단체 장기자랑 점수를 합산한 결과, 기대한 대로 우리 10조가 일등을 했다. 고급양주 한 병과 광어회 두 접시. 그리고 조 회식비까지. 가발때문에 흘린 땀과 화장때문에 간단히 샤워를 하고 9조와 10조가 함께 있는 방으로 향했다. 내가 들어서마자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 와. 도경수! 조용하고 얌전한 줄만 알았더니!”
“ 내 말이.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 먼저 올라간다고 진짜 대박이었어. 다 도경수가 누구냐고 묻더라. ”
쏟아지는 관심이 부담스러워 머쓱하게 웃으며 변백현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히고 앉았다. 김준면은 자리에 없었다. 이제 막 양주를 딸 모양인지 얼음통과 글라스가 놓여져있었고 이등을 한 9조의 치킨도 기름진 냄새를 풍기며 곳곳에 놓여있었다. 아마 9조와 10조 방의 안주가 제일 호화스러울 것 같다. 엠티 마지막 밤, 냉장고에는 첫째날보다 더 많은 양의 소맥이 들어있었고 모두들 잔뜩 마시고 죽을 작정임이 틀림없었다.
“ 오늘 마지막 날이니까 마시고 죽자! ”
제일 왕고학번인 희수 선배의 외침과 동시에 모두들 잔을 깨끗히 비웠다. 다들 첫째날보다 훨씬 더 친해져있었고 이름표를 굳이 달고 있지않아도 서로의 이름과 학번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조금 귀찮긴 했지만 나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변백현은 내가 자기만의 도경수였었는데 다른 사람들한테 뺏기는 것 같다며 질투를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내게 말을 걸어올때면 꼭 옆에 붙어서는 자기랑 제일 친하다며 자랑했다.
“ 제일 고생한 우리 경수! 한 잔 받아야지.”
“ 감사해요, 형.”
희수 선배가 글라스에 양주를 따라 내게 건넸다. 음료와 얼음이 적당히 섞인 양주는 보기만해도 시원하고 달콤해보였다. 양주를 홀짝 홀짝 들이키며 여유롭게 술자리를 즐겼다. 한참 술게임과 이야기를 번갈아가며 하고 있을때, 김준면이 들어왔다. 이미 집부방에서 술을 마시고 온 건지 얼굴이 약간 핑크빛이다. 사람들은 환호하며 자리를 좁혀 김준면을 앉혔다. 내 대각선 방향이다.
“ 진짜 최고였어요, 형! 특히 마지막에 그 키스 퍼포먼스! 진짜 하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니까요! 흐하하! ”
김종대는 희한한 웃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난 종이컵을 잘근잘근 깨물며 김준면을 쳐다봤다. 김준면은 별말없이 웃으며 내 눈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힐끗. 정말 가끔가다 마주치는 걸 제외하고는 김준면을 날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게 또 짜증났다. 김준면의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돌리면 김준면은 얼른 눈을 돌렸고 그러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 으으… 어지러워… ”
변백현은 벌써 취했는지 뜨끈해진 볼을 내 어깨에 부비적거리며 내게 앵겨왔다. 그 뜨끈한 볼을 잡아늘어트리며 변백현을 방에서 데리고 나왔다.
“ 뭐 별로 마신 것 같지도 않은게 제일 빨리 취하냐. 안에 여자애들도 있는데 안 쪽팔리냐? ”
“ 아니이… 내가 혼자 마신 것두 아니구… 주는데애… 줘서 마셨는데애…”
“ 알았어. 입 다물고 바람이나 쐬러가자.”
양주만 먹은 탓에 나도 약간 어지럽긴했었다. 무어라 중얼중얼거리고 나를 끌어안으며 우는척을 했다가 또 혼자 신나서 신발을 휙휙 벗더니 모래사장을 맨발로 뛰어다닌다. 미친 것 같다. 양손에 컨버스 신발을 든 채 미친놈처럼 모래사장위를 뛰놀던 변백현은 결국 대자로 철퍽 넘어졌다. 으앙! 일어서지 못하고 모래사장에 엎어진채 우는 시늉만 하는 변백현을 서둘러 일으켜세웠다. 변백현 옷에 잔뜩 묻은 모래를 짜증스럽게 툭툭 털어냈다.
“ 아, 백현아.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지랄일까? 가만히 있어. 모래 털어야 될 거 아냐.”
“ 흐흐… 난 다~ 알지롱. ”
“ 제발 곱게 좀 취해라. ”
“ 너 아까 진짜 키스했지? ”
“ …… ”
변백현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내 코 앞까지 다가왔다.
“ 끅, 준면이형한테 진짜 했잖아. 난 다 봤어! 난 다 봤지롱! 키스했대요! 키스했대요! ”
“ 거기서 좀 더 떠들면 입에 모래 넣을꺼야.”
“ 치이…”
삐친듯이 입을 내민 변백현은 쯧쯧 혀를 차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또 김준면이 몽글몽글 떠올랐다.
“ 맨날 쎈 척 하고.”
“ 미친. 내가 언제 쎈 척 했다고 지랄이야 ”
“ 방금도! ”
“ 꺼져. ”
“ 지금 방금도! ”
말을 말아야지. 오늘따라 변백현이 왜 이렇게 험하게 취했는지 모르겠다. 앞으론 절대로 양주를 먹이지말아야지.
“ 니 맘 몰라주는 준면이형때문에 속상하지? 그치? ”
“ 속상할 것도 없어. …이제 다 끝났잖아.”
“ 힝. 불쌍한 우리 도도! 이게 다 그 준면이형 때문이야! 준면이형만 아니었으…”
변백현은 원맨쇼를 하듯이 혼자 김준면에게 화를 내다가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입술을 안으로 말아물며 내 눈치를 봤다. 갑자기 왜 저러지싶다가, 문득 내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이 지나치게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느낌은 분명…김준면이다. 난 빠르게, 그러나 급해보이지않게끔 고개를 돌렸고 내 예상대로 잘생긴 김준면이 서있었다.
“ 변백현. 너 착한 줄만 알았더니 내 뒷담화도 하고…”
“ 아,아니에요. 그,그게…”
분명 장난기 다분한 말이었는데도 당황하며 손사래를 치던 변백현은 급하게 신발을 주워신더니 먼저 들어가보겠다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후다닥 달아났다. 두어번 발목을 접질린 것 같은데 멀리있는 방까지 한번도 멈추지않은채 내달린다. 그나저나 김준면은 왜 또 여기 있는거지.
“ …… ”
“ …… ”
우리 둘은 아무 말없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바다만 조용히 바라봤다. 모래사장엔 나와 김준면밖에 없었다. 코에 닿아오는 축축한 바다냄새도 좋았고 시원한 파도소리, 달빛에 반짝거리는 물결도 다 좋았다. 다만 내 옆에 아무말없이 서있는 김준면이 불편했다.
“ …먼저 들어갈게요.”
“ …저, 경수야.”
돌아서 가려는데 김준면이 내 손목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난 주먹을 한번 쥐었다펴고는 김준면의 손을 툭 치워냈다.
“ 할 말 있어요? ”
“ …경수야. ”
“ 아까 왜 진짜로 했냐고 따질 참이었어요? ”
그 말에 김준면이 인상을 팍 썼다. 인상을 써도 잘생겼다, 김준면은.
“ 이유가 뭐 별 거 있겠어요? 형 좋아서. 나 형 좋아서 한번 해본거에요. 어떻게 나오나 궁금하기도 하고. ”
“ …하아… ”
김준면은 한숨을 쉬며 머리칼을 한번 쓸어올렸다. 그게 또 지나치게 멋있어서 난 잠시 정신을 놓은 채 김준면의 눈을 멍하니 쳐다봤다. 양주는, 나도 먹지 말아야할 것 같다.
“ … 난 형이 왜 이러는지 이해가 안 가요. …형. 나 게이에요. 어제 변백현이랑 얘기하는거 다 들어서 알고 있었겠지만 자꾸 형이 까먹는 것 같아서 다시 한번 말해줄게요. 나 게이구요. 착하지도 않고 클럽 일도 나였어요. 대충 눈치 챘잖아요, 형도.”
“ 경수야. ”
“ 나 형 때문에 처음으로 별의 별 거지같은 감정 다 느껴보는 중이니까 더 이상 건들이지마요. 자꾸 잘 대해주지도 말구요. 혼자가 외롭다는거, 그리고 난 혼자라는거. 그거 다 형 때문에 뼈저리게 느끼는 중이니까 제발 더 건들지말라구요.”
“ …… ”
난 내가 어떤 표정인지 알지 못 한채 마음속에만 있던 말들이 우수수 쏟아지기시작했다.
“ 나 형만 보면 자꾸, 자꾸 외로워지니까 … 나 하나만 좋아하고 사랑해줄거아니면, 그렇게 못 해주고 맨날 좆같은 착한동생 따위로만 대할거면 더이상 오지마요, 나한테. ”
“ 경수야. 내 말 좀 들어봐.”
“ …짜증나고 분해서 죽을 것 같아요. 내가 필요로 하는 걸 형이 다 가지고 있어서.”
안 울려고 어금니를 꽉 물었는데도 눈물이 넘실넘실하더니 결국 흘러내렸다.
“ 형 갖고싶고 형이 나만 봤으면 좋겠고 모든 사람한테 잘해주는 김준면이 아니라 나한테만 잘해주는 김준면이었으면 하는데 형 그거 못 해주잖아요. 형은 신물나게 착해빠졌으니까. ”
“ 경수야…”
“ 내 이름 더 이상 부르지마요.”
아랫입술을 깨물며 양손으로 눈물을 휙 닦아냈다. 바다는 더 이상 아름답지않았다. 코에 닿아오는 축축한 냄새는 역겨웠고 시끄러운 파도소리, 눈 아프게 반짝이는 물결도 다 맘에 안 들었다. 눈물은 닦아도 닦아도 계속 흘러내렸고 난 고개를 숙이며 김준면에게서 도망치듯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뒤따라온 김준면이 날 다시 잡아세웠다.
“ 경수야, 잠깐만. ”
“ 진짜 내 말 못 알아들, ”
“ 도경수!! ”
김준면이 조금 아플정도로 날 거칠게 붙들어세웠다. 눈물때문에 번진 시야로 보이는 김준면은, 상당히 화가 나 있었다. 처음보는 이글거리는 눈빛과 화를 참으려는듯 씩씩거리는 숨까지. 난 순간 딸꾹질이 났다.
“ 넌, 왜 항상, 니 얘기만 하고 가는건데. ”
화난 김준면은 무서웠다. 변백현만큼. 난 아무 말도 못하고 잡힌 어깨가 아파서 아랫입술만 꾹 깨물었다. 그제서야 내 어깨를 놓아준 김준면은 나를 한번 봤다가 바다를 한번 봤다가 안절부절하며 머뭇거리더니 한숨을 쉬며 내 뒤통수를 당겨 끌어안았다.
“ 내가…그러니까 나,나도, 하아…”
김준면은 날 꼭 껴안은 채 계속 말을 더듬었다. 김준면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감이 왔고, 소름과 함께 전율이 일며 다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 나도, 경수를, 많이 좋아하고 있어. ”
*
{ 김준면의 이야기 }
신입생 환영회는 올때마다 전쟁터같다.
수저는 바닥에 나뒹굴고 곳곳에는 알수없는 액체가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더러운 건 질색이지만 그렇다고 인상을 구기며 인사를 할 순 없어서 애써 환히 웃으며 테이블 곳곳을 돌아다니며 인사를 했다. 그럴때마다 테이블에선 글라스에 가득 찬 소맥을 내밀었고 난 불평불만없이 그 소맥을 원샷했다. 끊어마셨다간 또 다시 가득찬 소맥잔을 받을게 분명했으니까. 그렇게 쓰린 속을 부여잡으며 이리저리 불려다니는데 문득 한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차분한 흑발에 새하얗고 조그마한 아이. 눈은 땡글땡글하고 입은 도톰했다. 잘생긴데다가 귀엽다. 그런 귀여운 아이가 덩치 큰 고학번 사이에 껴서 무심한 표정으로 주는 술들을 거침없이 받아마시는 모습은 이상하리만큼 내 눈길을 끌었다. 난 다른 테이블에 가면서도 계속 힐끗 그 아이를 쳐다봤다. 명찰에 써져있는 이름이, 그래. 13학번 도경수. 이름도 귀여웠다.
도경수, 도경수, 도경수…
나도 모르게 그 이름을 외우려는듯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
[ 야. S대 여대생이면 말 다 했지! ]
“ 미안. 관심없어.”
[ 세상에. 아아, 하느님! 김준면 고자게이설이 진짜 사실인가요? ]
“ 나 회의 들어가야해. 끊는다.”
다른과 친구에게서 온 전화를 끊고 집부실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김준면 고자설, 혹은 게이설. 당사자인 내가 들어도 그럴싸했다. 난 여자친구가 있던 적이 없었으니까. 그냥 남들이 흔히 말하던 모태솔로였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의아하게 생각하며 어디 문제있는거아니냐, 성취향이 혹시 그 쪽이 아니냐하며 물었고 난 그저 관심이 없을 뿐이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지만 순도 100% 사실이었다. 정말 연애라는 분야에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딱히 필요성도 못 느꼈다. 살아가다보면 언젠간 짝을 만나겠지. 그 언젠가가 좀 늦을수도 있을 뿐이다. 난 남들처럼 내 자신을 의아하게 생각하지않았다. 난 지극히 평범했다.
회의를 하려면 10층에 있는 집부실에 가야했다. 난 마주치는 후배마다 인사를 해주며 서둘러 엘리베이터 앞에 가 섰다. 엘리베이터는 방금 올라간 모양인지 내 앞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내 뒤로 계속 사람들이 와서 줄을 섰다. 이러다 벽으로 밀리면 어떡하지. 괜히 초조해서 시간만 자꾸 확인하는데 문득 거울같은 엘리베이터 문으로 내 뒤에 있던 남자아이의 차분한 흑발머리가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트레칭을 하는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 안녕하세요.”
“ 어, 안녕.”
경수. 이름까지 외운 그 애였다. 목소리가 나긋나긋하니 듣기 좋았다. 경수는 여전히 귀여우면서도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예상대로 난 벽쪽으로 밀렸고 사람들은 정원이 차기전까지 계속 들어왔다. 숨이 턱턱 막혔다. 내 앞에 바짝 서있는 경수에게선 독특한 향수냄새가 났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향기. 계속 맡고 싶게 만드는 향기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경수가 먼저 10층을 눌렀다. 같은 층을 가서 다행이다. 신입생 환영회때 대화를 못 나눠봐서 아쉬웠는데.
“ …… ”
경수는 좁은 모양인지 내 쪽으로 조금 더 붙었다. 경수의 등과 내 가슴팍이 닿았고 향수냄새는 더 짙게 내 몸에 배어들었다.
“ 선배님. 죄송해요. 많이 좁아서…”
“ 아,아냐. 죄송하긴. 좁으니까 어쩔 수 없지.”
착한 경수는 나에게 사과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괜찮다고는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불편했다. 그러니까… 자꾸 앞섶에 닿아오는 경수의 엉덩이가. 불편해서 움직일수록 경수의 몸과 더 닿았고 슬슬 아랫부분에 느낌이 오기 시작했다. 위험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이 착하고 순한 경수를 앞에 세워두고. 난 자책하며 어금니를 꽉 물고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안 돼. 뭐하는거야. 김준면 너 지금 뭘 느끼고 있는건데! 착한 경수는 아무것도 모른채 화일철만 만지며 목 스트레칭을 했다. 그러면서 경수의 엉덩이가 내 앞섶에 조금 더 닿아왔다.
“ …경수야. 자,잠시만. ”
결국 9층에서 경수 어깨에 손을 얹어 옆으로 조심스럽게 비켜세우고 사람들 사이를 얼른 비집고 나갔다. 바로 화장실에 달려가 칸막이 문을 닫고 다시 한번 심호흡을 했다. 조금 모양을 잡은 앞섶은 큰 죄책감을 들게 만들었다.
“ …뭐 하는 짓이야…”
난 스스로 자책하며 머리를 헤집었다.
*
집부실에서 회의를 끝마치고 바로 동아리방으로 향했다. 잠시도 쉴틈이 없었다. 가방에서 꺼낸 티슈로 땀을 닦아내며 동아리방으로 들어서자 일렬로 서있던 신입생이 꾸벅 허리를 숙이며 큰소리로 인사했다.
“ 안녕하십니까! ”
“ 어어. 그래. 미리 와있었네. 그리고 그렇게까지 인사 안 해도 돼. 앉아, 다들.”
5명의 신입생은 모두 눈이 똘망똘망하니 맘에 들었다. 한사람씩 얘기를 나누는데 마지막에 앉아있던 남자아이의 얼굴이 익숙했다.
“ 어, 너 어디서 많이 봤는데. ”
“ 경영정보학과 13학번 변백현이라고 합니다! 신입생 환영회때 소주들고 춤췄었는데… ”
“ 아! 백현이. 그래, 이제 기억이 난다. ”
춤춰보라고 장난삼아 시켰는데 거리낌없이 소주를 들고 일어나더니 이효리 흉내를 내며 춤을 춘 아이. 변백현. 착하고 싹싹하고 귀여워서 그 날 선배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한 녀석이었다.
“ 우리 학과에서 렛츠 들어오는애들 없었는데. 반갑다, 백현아.”
“ 어휴, 감사합니다. 진짜 형 얘기만 들었지, 이렇게 가까이에서 얘기할 기회가 올 줄이야…”
“ 에이. 편하게 생각해. 학교생활은 할 만해? ”
“ 네. 아직 얼마 안 되서 그런지 다 재밌고 다 신기해요.”
“ 친구들은 많이 사겼어? 어색할텐데.”
“ 그래도 전 조금 나아요. 고등학교 친구랑 같이 다니거든요. 걔도 우리 학과에요. 도경수라고,”
도경수라는 이름에 귀가 솔깃했다.
“ 경수? 너 경수랑 친해? ”
“ 네! 절친이에요. 고등학교때부터 지금까지 쭈욱. 근데 경수를 아세요?”
“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잠깐 봤었어.”
“ 아아… 아무튼 경수랑 시간표도 똑같아서 거의 맨날 붙어다녀요. 경수는 저 없으면 안되거든요. 흐허헝.”
난 백현이를 통해 경수와 조금 더 친해질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경수는 나에게 그저 귀여운 동생이었다.
*
그 날은 집부가 엠티 회의를 마치고 다같이 펌크로 뒷풀이를 간 날이었다. 룸을 잡고 모두들 행사를 기획하며 쌓인 스트레스를 술로 풀고 있었다. 술이 독하긴 했지만 주는 술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계속 받아먹다보니 눈알이 핑그르르 도는 것 같았다. 어느정도 자리가 정리되고 슬슬 하나 둘씩 집으로 갈 채비를 하고 있을때, 경수에게 카톡이 왔다.
- 형~ 뭐하세요?ㅎㅎ
귀여운 경수. 말도 귀엽게 한다. 내 핸드폰 글씨체가 둥글둥글한 탓인가.
- 나 집부술자리왔어.왜 경수야?
- 혹시 펌크아니에요?
- 어? 맞아! 어떻게알았어?
- 기분 전환할겸 혼자 놀러왔는데 여기 클럽아는형이 저희학과가 룸하나잡았다고 해서요. 혹시나해서 카톡해봤어요.
경수도 클럽에 오는구나. 난 경수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경수는 알면 알수록 착하고 귀여운 아이다. 내가 외동이라서 그런지, 경수같은 귀여운 남동생이 있었으면하는 생각이 요즘따라 자주 든다.
- 혼자 왔어?
- 네. 원래 자주 혼자와요.
- 잠깐 얼굴이라도 볼래?
- 그래도돼요? 집부임원들끼리 모인자리일텐데…
- 아냐. 여기 이제 끝나고 다들 집에 갈 준비하고 있어.
- 그럼 잠깐 만나요 형. 저 스테이지 쪽 테이블에 있어요.
- 그래. 애들 일단 다 보내고 갈게.
- 네 형.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집부들을 챙겨보낸 후, 스테이지쪽으로 걸어나왔다. 음악은 지나치게 커서 귀를 먹먹하게했다. 한시라도 이 곳을 나가고 싶었지만 경수를 만나고 갈 생각에 귀를 조금 틀어막고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경수는 아마 무대 근처에 있는 것 같았다. 몸을 흔들어대는 사람들사이를 조심스럽게 비집고 지나가며 경수를 찾았다. 분명 이 무대 근처라고 한 것 같은데 도무지 보이질 않았다. 그때 어떤 남자가 의도적으로 내 몸을 툭 밀었다. 클럽에서 시비가 붙는 경우가 많다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 뜬금없는 시비였다. 밀려서 어긋난 중심을 다시 잡기도 전에 반은 벗어재낀 여자 두 명이 나를 무대로 이끌었다. 정신이 없고 어안도 벙벙해서 뒤늦게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무대 위였다. 사람들의 환호성에 깜짝 놀라 무대에서 내려가려고 했지만 어느새 여자 댄서들이 내 눈을 가리고 손엔 수갑까지 채우고 있었다. 화가 나기보다는 지금 이 상황이 왜 이렇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난 경수를 잠깐 보려고 온건데. 앞도 안 보이고 귀는 먹먹하고. 이게 도대체 뭔일이지?
“ 저기요!! 잠시만요! ”
큰 소리로 불러봤지만 아무도 대답을 안했다. 아마 고막이 찢어질 정도로 큰 음악소리때문에 내 목소리가 묻힌 것 같았다. 뒤로 묶인 팔을 흔들어봤지만 수갑은 꼼짝도 안했다. 장난감 수갑인 줄 알았는데, 진짜 수갑인가.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을때 누군가가 안겨오더니 내 귓볼을 끈적하게 물었다. 윽! 나도 모르게 몸을 웅크리며 억눌린 신음이 나왔다. 처음 느껴보는 이질감이었다. 뜨끈하고 축축한 혀가 내 귀를 부드럽게 감아올렸다. 손이 묶여있는탓에 밀쳐낼 방법이 없어서 그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을때, 품에 안긴 사람에게서 익숙한 향기가 났다.
경수. 이건 분명 경수에게서 나던 독특한 향수냄새였다. 그리고 그걸 알아차렸을때부턴 자꾸 경수가 내 품에 안겨있는 불순한 상상이 들었다. 왜 하필 이 사람은 경수와 같은 향수를 써서 이런 불순한 상상을 하게 만드는 걸까. 경수는 그런 아이가 아닌데. 경수는 순수하고 착하고 귀여운 아이인데. 사람들의 환호성과 쿵쿵거리는 음악소리, 그리고 내 몸에 닿아오는 손길, 뜨거운 클럽 안의 온도에 좀 전에 먹은 술이 합쳐져 자꾸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한참의 손길이 끝나고 안대와 수갑이 풀렸을때, 난 몇 걸음 걷지못하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
“ 준면이형. ”
“ …으으…”
“ 일어나봐요.”
“ …… 어? ”
누군가 나를 흔드는 느낌에 눈을 뜨니 착한 경수가 나를 깨우고 있었다. 깜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 여,여기는…”
“ 제 자취방이요.”
“ 내 옷은?”
“ 어제 불편해하시길래 베란다에 걸어놨어요.”
“ 어어, 고맙다… 근데 경수야.”
난 물어볼까말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 너 어제 클럽에서, ”
“ …… ”
“ … 나 봤어? ”
제발 경수가 무대위에서 그런 흉측한 짓을 당한 나를 보지않았기를.
“ 네. 봤어요, 형”
“ 아아…. ”
망했다. 경수에게는 착하고 바른 모범적인 선배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이제 경수가 날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얼굴을 감싸며 한숨을 쉬자 경수는 걱정말라며 나를 위로했다. 역시 경수는 착하다.
“ 형. 원래 그 클럽 중간중간에 그런 이벤트 자주하고 그래요.”
“ 그럼 너 처음부터… 다 본 거야 ? ”
“ 아뇨. 처음엔 형인 거 몰랐어요. 그냥 누가 이벤트 대상자로 올라가나보다하고 다시 형 찾아서 돌아다녔는데 나중에 보니까 형이 무대 위에서 쓰러져있더라구요. 그리고 알았어요, 형인 거. ”
“ 그럼 어제 너 혼자 나 여기까지 옮긴거야? ”
“ 아는 친구랑 같이요. 너무 신경쓰지마요. 저도 자세히는 못 봤으니까 걱정마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
“ 그래주면 진짜 고맙고…”
“ 집에 먹을 게 없어서 저번에 백현이가 사왔던 죽 데웠어요. ”
“ 응. 고마워. ”
베란다에 곱게 걸려있던 내 와이셔츠를 껴입고 식탁에 앉았다. 경수의 자취방에 있는 모든 물건은 경수처럼 조그맣고 귀엽다. 식탁도, 수저도, 그릇들도 모두. 한참 대화를 하며 쓰린 속을 죽으로 달래는데 경수가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다.
“ 형 얼굴에 뭐 묻었어?”
“ 아뇨. 잘 생겨서요. ”
“ 에이, 무슨…”
평소에 많이 듣던 말이었지만 이상하게 경수가 그런 말을 하니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쑥쓰러웠다. 손사래를 치는데 어디서 익숙한 향수냄새가 났다.
“ 왜요? ”
“ 아냐. 그냥… 어제 향수 냄새가 옷에 밴 것 같아서.”
“ 그래요? 저도 향수 자주 뿌리는데. 맡아봐요. ”
경수는 입고있던 티의 소매를 내 콧가에 가져다댔다. 어제 클럽에서 났던 향기와 똑같은 향기였다. 물론 경수가 전에도 뿌리던 향수였지만 자꾸 그 향수를 맡을때마다 클럽일이 생각났다.
“ 어때요? 향 좋죠? ”
“ …어어.”
“ 표정은 아닌 것 같은데… 향 이상해요? ”
클럽일이 생각나서 잠시 인상을 찌푸린건데 경수는 자기에게서 나는 향이 이상해서 찌푸린 줄 오해했나보다.
“ 아냐. 좋네. 저 경수야. 형 집에 가봐야겠다. ”
과제도 있었고 일단 연락없이 외박을 한거였기때문에 서둘러 집에 가봐야했다. 내가 식탁에서 일어나자 경수는 내 가방과 핸드폰을 챙겨 내게 건넸다.
“ 다음에 또 와요, 형.”
“ 그래. 갈게, 경수야. 신세져서 미안하고.”
“ 괜찮아요. 언제든지 와도 돼요.”
“ 그래. 고마워. 얼마 안 남은 주말 잘 보내고 학교에서 보자.”
“ 아, 참. 형! ”
“ 왜? ”
“ 잠깐만요.”
책상 서랍을 열어서 무언갈 꺼낸 경수가 쪼르르 내게 다가오더니 밴드를 내밀었다.
“ 밴드는 왜? ”
“ 형 목덜미에 붙혀야할 것 같아서요.”
“ 나? ”
신발장에 붙어있던 거울로 목을 살폈다. 헉. 붉게 나있는 키스마크. 어제 클럽에서 그 사람이 남긴 모양이다. 지워질리가 없었지만 혹시나해서 싹싹 문질러봤다. 그런다고 지워질 흔적이 아닌데 말이다. 경수는 내 모습이 웃긴건지 살짝 웃더니 내게 안기듯이 바짝 다가왔다.
“ 붙히기 애매한 부분이네요. 제가 붙혀드릴게요.”
“ 어? ”
경수의 숨이 귓가에 와닿았다. 소름이 돋고 기분이 묘했다. 가슴에서 무언가가 꿈틀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경수는 착한 동생인데. 왜 이러는 걸까.
“ 됐다. 안 보여요, 형.”
“ …… ”
“ 왜요 형?”
경수가 순수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하아. 이렇게 착한 아이를 내가 설마?
“ …아냐. 아닐거야… ”
“ 네? 뭐가요? 형 이상해요. 더 쉬다 가셔야하는 거 아니에요? ”
“ 아니, 아냐. 아무것도 아냐. 형 갈게.”
“ 조심히 가요.”
서둘러 경수의 자취방을 빠져나왔다. 버스 시간이 촉박해서 터미널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숨이 가쁘고 목구멍이 찢어지는것처럼 따가웠지만 그래도 버스는 놓치지않아 다행이었다.
“ …하아…”
자꾸 하얗고 동글동글한 경수의 얼굴이 눈앞에서 둥둥 떠다녔다.
*
엠티 준비를 하는 동안, 난 정말 죽을 맛이었다. 어쩌다 경수와 커플댄스를 하게됐는데 하필 춤이 TV에서 나올때마다 야하다고 혀를 내둘렀던 트러블 메이커였다. 싫다고 내빼기엔 조장이었기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겠다고는 했지만, 경수와 그런 야한 춤을 춰야한다니 막막했다.
- 조금씩 더 더 더 갈수록 더 더 더 . 이젠 내 맘을 나도 어쩔 수 없어. 니가 나를 잊지 못하게 자꾸 니 앞에서 또, 니 맘 자꾸 내가 흔들어 벗어날 수 없도록. 니 입술을 또 훔치고 멀리 달아나버려...
오늘 경수는 기분이 좋지않았다. 다 멍청한 나 때문이다. 경수가 저녁에 같이 밥먹자고 얘기를 했는데 내가 아는 친구와 약속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사실은 신입생 여자애 두 명과 먼저 약속이 되어있는 거였지만 갑자기 무슨 약속이냐고 묻는 경수의 질문에 나도 모르게 그런 대답이 나와버렸다. 그리고 그 날 저녁에 닭갈비집에서 경수와 마주쳤고 경수는 내 옆에 있는 동기 여자애를 보고 내게 실망을 한 것 같았다. 아는 친구와 약속이 있다고 했으면서 경수의 동기와 밥을 먹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경수는 말이 없었고 전보다 조금 말투가 딱딱해져있었다. 난 경수의 춤동작을 따라가지못해 자꾸 실수를 했다.
“ 겨,경수야, 잠깐.”
“ … ”
경수는 노래소리때문에 안 들리는지 계속 몸을 움직였고 난 어쩔 수 없이 경수의 춤동작을 따라가야했다. 오늘따라 경수는 속이 파인 박스나시티를 입어서 고개를 숙이거나 웨이브를 할때마다 하얀 속살이 훤히 보였다. 최대한 그 쪽을 보지않으려고 애를 쓰며 춤을 추다보니 몸이 더 버벅거렸다. 노래가 끝나가고 마지막, 키스하는 동작. 내 목덜미를 쥔 경수가 그대로 입술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미리 하는 척만 하기로 얘기가 돼있는 상황이었지만 진짜로 하는 줄 알고 깜짝 놀라 경수의 팔을 나도 모르게 부여잡고 말았다. 진짜할것도 아닌데 왜 오버하고 있냐, 김준면…. 그나저나 이 향수냄새. 오늘따라 유난히 더 독하게 느껴진다. 자꾸 이 향수를 맡을 때마다 클럽일이 떠올랐다. 경수가 그냥 이 향수를 안 썼으면 했다.
“ 도경수, 그 향수 … 뿌리지마. 적어도 나랑 연습하는 날엔.”
“ …왜요? ”
내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거지? 나도 모르게 굳은 말투가 튀어나와버렸다. 경수는 날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 저번엔 좋다고 하셨잖아요. ”
“ …… ”
“ …… ”
“ …하아. 아냐. 미안. 형이 피곤해서 잠깐 예민해졌나보다. 형 먼저 가볼게. ”
난 경수의 고운 흑발을 한번 쓰다듬어주고 가방을 챙겨든 뒤 도망치듯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경수는 착한 동생인데. 왜 자꾸 불쑥불쑥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결국 난 저녁쯤에 다시 경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형]
“ 응. 경수야. 전화가능해? ”
[ 네. 무슨 일이세요?]
한참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 다른 건 아니구…. 아까 내가 피곤하단 이유로 조금 별나게 군 것 같아. 미안해, 경수야.”
[……]
경수는 말이 없었다.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굴어서 경수가 날 이상한 선배로 생각하고 있으면 어쩌지.
“ 아까 그렇게 끝나고 계속 미안했어, 너한테. ”
[ 형.]
“ 어? ”
[ …나한테 앞으로 잘 해주지마요.]
“ …경수야? ”
[ 잘 해줄거면 나한테만 잘해주던가해요. 형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웃어주고 잘 대해주는거 질투나서 죽을 것 같고 더 이상은 못 봐줄 것 같으니까… 시발.]
“ 경수, ”
무어라 더 물어보기전에 경수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경수의 말이 이해가질 않았다. 잘 해줄거면 자기한테만 잘해달라. 내가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잘 대해주는게 질투나고 죽을 것 같다. 더 이상은 못 봐주겠다…?
“ 이게 도대체…”
난 침대에 누워있던 몸을 일으키고 방을 서성거렸다. 화가 난걸까. 그러기엔 하는 말이 뭔가 이상했다. 질투가 난다고?
“ 질투…”
머리가 아팠다. 경수가 내 머릿속 사방을 온통 채우고 있었다. 경수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이상하리만큼 경수가 자꾸 아른거린다는 거였다. 그리고 경수는 한참이나 연락이 되질않았다. 내 카톡도 읽질 않았다. 다음날, 학교에 가서 백현이에게 슬쩍 물어봤지만 백현이도 알지 못했다. 백현이는 자취방에 가본다고 한 것 같은데 차마 주제넘게 나서며 경수의 자취방까지 따라갈 수는 없었다. 그 날 오후쯤에 기다리던 경수에게 연락이 왔다.
“ 하아, 경수야! ”
[ 죄송해요. 배터리가 고장나는 바람에 전화 못 봤어요. ]
“ 너 학교는 왜 안 나왔어? ”
[ …나갈 몸이 아니었어요.]
경수의 목소리는 축 가라앉아있었다. 걱정이 된다. 어디가 아픈건지. 얼마나 아픈건지. 난 교정에 멈춰서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 연락 갑자기 안 되서 형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연습도 안 나오고 내일까지 안 나왔으면 자취방 찾아가려고 했었어.”
[ 며칠전에 욕한 건 죄송해요. 술먹고 제정신이 아니었었나봐요.]
“ 술먹고 실수한번 할 수 있지. 형 괜찮으니까 너무 신경쓰지마. ”
[ …… ]
“ …경수야.”
[ 형. 저 끊을게요.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좀 자야겠어요.]
경수와 좀 더 대화를 하고 싶었지만 경수의 몸상태가 말이 아닌 것 같았다.
“ 그래. 내일은 꼭 나오고. 얼른 나아. ”
[ 죄송해요. ]
“ 죄송하긴. 그리고 이제 전화하면 바로바로 받아. 걱정되니까 ”
[ …왜 걱정돼요?]
어? 난 얼빠진 소리를 내며 되물었다.
[ 아니, 형한테 저는 뭐에요? ]
“…경수는 그야 당연히,”
난 잠시 생각했다. 경수는… 그래, 경수는 내게,
“ 착하고 귀여운 동생이지. ”
[ 형. 끊을게요. 내일 봐요.]
“ 그래. 내일 꼭 보자 ”
전화가 끊기고 아쉬움에 또 한번 한숨이 나왔다. 난 정말 경수를 착하고 귀여운 동생으로만 보고 있는 걸까. 귀여운 동생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면 설마…
“ …아냐. ”
아닐거라고 부정해봐도 자꾸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였다. 내가, 내가 경수를…좋아하는 걸까.
*
엠티가기 하루 전, 우리 10조의 연습은 훌륭하고 끝났고 종대와 백현이 말대로 일등은 거뜬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회식이 끝난 후, 경수가 괜찮다는데도 난 굳이 경수를 집까지 바래다준다고 따라나섰다. 그냥 경수를 혼자 보내기엔 마음이 불편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했다. 경수의 자취방으로 가는 길, 경수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 표정이 안 좋네. ”
“ 그냥 조금… 더워서요.”
경수는 작은 손을 들어 손부채질을 했다. 내겐 건네줄 물티슈가 없었다. 가방안에 넣어서 다닐 걸. 둘이 아무 말 없이 나란히 걷자니 여간 어색한 게 아니다. 경수는 아직도 몸이 아픈 모양인지 묵묵히 걷기만 했다. 난 조심히 손을 들어 경수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어줬다. 손이 찌릿찌릿했다.
“ 경수 요즘 이상하네.”
“ …… ”
“ 감정기복도 심한 것 같구… 무슨 고민이 분명히 있는 것 같은데.”
“ 아니에요. 그냥, 몸이 지쳐서 그런거에요.”
“ 그래? 으음… 형한테 할 말 같은 거 없어?”
자취방앞에 다다랐을때 난 잠시 멈춰서서 물었다.
“ 무슨… 할말이요?”
“ 너가 자꾸 형 눈 못 마주치고 피하는 것 같아서… 형이 뭐 잘못했나싶기도 하고.”
소심하게 쭈뼛거리며 말을 꺼냈다. 경수는 대답없이 내 눈만 빤히 쳐다봤다.
“ 형 잘못한 거 없어요. 요즘 좀 예민해서 그래요. 들어가볼게요.”
“ …그럼 내가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웃어주고 잘 대해주는거 질투나서 죽을 것 같다는 말은 무슨 뜻으로 한 거야 ? ”
“ …… ”
최대한 무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경수를 마주했다. 가까이에서 보는 경수는 여전히 착하고 귀엽고 순하게 생겼다. 경수는 사랑스럽다. 그래서 자꾸 눈길이 간다.
“ 아무 뜻 아니에요. 술취해서 헛소리한거니까 그냥 잊어요.”
“ …”
“ 그 말때문에 신경쓰였다면 죄송,”
한발짝 다가가 천천히 경수를 끌어안았다. 무슨 용기였는지 모르겠다. 그냥, 그냥 이러고 싶었다.
“ …경수야.”
“ …… ”
“ 이상하게 … 형은 계속 신경쓰인다, 너가.”
술을 많이 마신 탓인가. 아닌데. 그렇게 많이 안 마셨는데. 혼란스럽다. 경수의 마른 어깨를 잡고 똘망똘망하고 묘하게 깊은 경수의 두 눈을 지그시 쳐다봤다. 아,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무슨 짓을 하고 있는거지?
“ 아아, 형 술 괜히 마셨나보다, 미안. …얼른 기운차려, 경수야. 내가 경수를 진짜 동생으로 생각하고 아끼나봐. 너가 자꾸 신경쓰이는거보면.”
“ 아…”
나에게서 물러난 경수가 잠시 슬픈 표정을 짓더니 그대로 뒤돌아 뛰어들어갔다. 중간에 멈춰선 경수에게 손을 한번 흔들어주고 뒤돌아 갈길을 갔다. 마지막으로 봤던 경수의 표정이 자꾸 생각났다. 슬픈 듯 뭔가 서운한 표정. 왜 그랬을까. 그리고 그 후로 경수는 날 피했다. 내 착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날 의도적으로 피했다.
*
내 안의 혼란스러움은 엠티 첫째날 밤, 백현이와 경수의 대화를 듣고 난 후 모두 정리됐다. 난 한참전에 나간 백현이와 경수가 돌아오지않아 걱정되는 맘으로 방을 나왔다. 어디선가 들리는 백현이와 경수의 목소리를 따라왔다가 컨테이너 뒤쪽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우연찮게 듣게 됐다.
- 내가 그런 말 하지말랬지. 너 되게 괜찮아. 괜찮은 애야, 경수야. 그리고 준면이형 분명 너한테 마음있어.
백현이의 말에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 니 말만 굳게 믿고 김준면한테 고백했는데 니 예상이 틀린거였어. 내 말대로 김준면이 그냥 난 착한동생으로 생각하는 거였으면? 그땐 어떡해야하는데?
나한테 고백? 경수가… 나한테 고백을?
- 그,그땐 착한 동생으로 남으면…
- 그땐 착한동생으로도 못 남아. 그래서 내가 이렇게 병신처럼 김준면 곁만 맴도는 거야.
총알이 머리를 관통하고 지나간 것처럼 멍해졌다. 그리고 곧, 빠르게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경수가 나를 좋아한다. 경수가…나를… 좋아한다? 어? 경수가 나를 왜 좋아하지? 별 볼일없는 김준면을, 착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어디하나 모난 곳 없는 경수가 왜 좋아한다는 거지?
- 하아. 그만 얘기하자. 머리 깨질 것 같으니까. 난 그냥 자러간다.
대화가 끝나고 바스락바스락 자갈밟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갔다. 도망가기엔 늦었고 도망간다하더라도 꼴이 우스워졌다. 결국 컨테이너 뒤에서 나오는 경수와 그대로 마주쳤고 경수는 작게 욕을 했다.
“ 주,준면이형! 어,언제부터 여기 있었어요? ”
“ …아까부터…”
내 대답을 들은 경수가 내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처음부터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였는데. 나에게 꾸벅 인사를 한 백현이는 취침 숙소로 향하는 경수를 따라가려다가 머리를 벅벅 헤집으며 조원들이 있는 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혼자 남은 나는 기뻐하지도 그렇다고 좌절하지도 못한 채 한참을 멍하니 서있었다. 그리고 지금 상황을 입으로 중얼거려봤다.
“…경수가…나를 좋아한다…”
그리고 나도 경수를 좋아한다.
*
난 김준면의 품에 안겨서 엉엉 울었다. 김준면도 날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너무 다행이라서.
“ 나도 좋아한다고 말하려했는데 경수 너가 자꾸 피하는 바람에… 그리고 그만 울어. 머리 아프겠다. ”
김준면의 손길이 내 눈물을 닦아냈다. 쉽사리 울음을 그치지못하고 김준면 가슴팍에 안겨 울며 그동안의 외로움과 마음고생을 모두 털어냈다. 나나 김준면이나, 둘 다 너무 눈치없고 멍청해서 너무 먼 길로 돌고 돌아 만났다. 조금 진정이 된 후에 김준면의 목덜미를 끌어안으며 급히 키스를 했다. 깜짝 놀란 김준면이 뒤로 밀리며 마른 모래사장위로 엎어졌다. 난 김준면 위에 엎어진 채로 갈증을 해소하듯이 김준면 입술을 집어삼켰다. 김준면은 금세 숨이 찬 듯, 내 등을 다급히 토닥거렸다.
“ 겨,경수야. 하아, 나 숨, 숨 차. ”
“ …좋아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난 김준면 가슴에 이마를 기댄 채 계속 중얼거렸다. 사랑해, 사랑해. 내 등을 쓸어내려주는 김준면의 손길과 나지막하게 올라오는 술기운에 졸음이 밀려왔다. 이 와중에 잠이라니. 사랑한다는 말과 좋아한다는 말만 반복해서 중얼거리자 내 뒷통수를 꼭 끌어안은 김준면이 조용히 말했다.
나도 사랑해, 사랑해.
*
엠티 마지막 날. 다들 청소를 시작했다. 바닥을 쓸고 쓰레기를 내다버리고 빠트린 물건이 없나 여기저기 꼼꼼히 확인했다.
“ 아, 죽겠다아… ”
변백현은 거의 폐인에 가까웠다. 양주를 뭣 모르고 마셔대더니. 난 생수통을 건네며 쯧쯧 혀를 찼다.
“ 담부터 넌 양주 먹지마라. 아주 개짜증이니까. ”
“ …조용히 해. 나 자고 일어났는데 양말이랑 팬티 안에서 모래나왔다고… ”
“ 가지가지한다. 너 충전기 챙겨. 까먹지말고.”
“ 아, 깜빡할 뻔 했네. ”
벽에 꽂힌 충전기를 돌돌 말아 가방에 넣은 변백현이 조용히 내게 물었다.
“ 그… 어제 준면이형이랑 무슨 얘기했어…?”
“ …… ”
“ …뭐야. 왜 웃어. ”
이제 김준면을 생각하면 비실비실 웃음부터 나왔다. 참으려해도 너무 좋아서 주체할 수가 없다. 김준면은 이제 내 남자다. 더 이상 애태우지않아도 된다. 속앓이 안 해도 되고, 좋아하고 사랑한다고해도 되고, 키스해도 되고 안아도 된다.
“ 설마… ”
변백현의 눈이 점점 커졌다. 난 아무 말 없이 그저 웃어보였고 그때 방문이 열리고 김준면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 지금 10시 30분이고 11시에 버스 탈꺼야. 그 전에 단체 사진 찍을거니까 다들 짐챙겨서 마당으로 나와~ ”
말을 마친 김준면은 나가기 전에 나를 보며 살짝 웃어줬다.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변백현은 나와 김준면을 번갈아보더니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 우왁!! 거봐!! 내 말이 맞았지!? 그치?! 준면이형도 너한테 마음, 읍!”
“ 제발 닥쳐, 좀. ”
“ 아우웁! 아우우웁! ”
변백현 입을 틀어막았다. 다른 조원들이 무슨일이냐며 물었고 난 아무 일 아니라고 대답한 뒤 변백현과 함께 짐을 챙겨 마당으로 나왔다. 변백현은 계속 내 옆에서 쫑알쫑알거렸다.
“ 도도. 이제 내가 니 곁을 떠나줘야겠구나. 내가 웬만해선 눈물이 안 나는 사람인데 눈물이 나오네…. 출가외인이라고 이제 우린 남남인거야?”
“ 시끄러워. 그리고 니가 왜 내 곁을 떠나냐. 너만한 친구 없는데. ”
“ 허얼…도경수우…”
“ 아, 미친. 그딴 표정짓지마 제발.”
아랫입술을 내밀며 울 듯 말 듯 요상한 표정을 지은 변백현이 나를 끌어안으며 흑흑 우는 소리를 냈다.
“ 아이고오…이제 가면 언제 오나… 에헤라디야…”
“ 꺼져라. 양주 쉰 내나니까.”
“ 우리 빨리 가서 자리 잡자. 늦게 갔다간 사진에 좁쌀로 나오겠어. ”
내 손목을 잡고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으로 간 변백현이 뒷쪽에 서서 까치발을 바짝 들었다. 딱히 사진에 찍힐 욕심도 없고 귀찮아서 가만히 서있었는데 김준면이 밑으로 내 손을 깍지껴 잡으며 옆으로 다가왔다.
“ 웃어야 잘 나오지.”
사람들 몰래 김준면의 손을 좀 더 꼭 잡았다. 찍을게요! 펜션촌 주인아저씨가 카메라를 든 채 외쳤다. 활짝 웃으며 카메라를 향해 브이를 해보였다. 밑으로 마주 잡은 손이 따뜻했다.
“ 하나, 둘, 셋! ”
이제 집에 간다. 더 이상 외롭지않은 우리의 집으로.
*
다음
episode.22
[처음은 아니지만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