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이 나를 빼고 행복했다.
이 단순한 문장에서는 형용할 수 없는 지독한 외로움이 베어 나온다. 행복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고 상대적이기 때문에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리고 상식적으로 한 사람을 제외한 모두가 행복하다는 것이 가능할리는 없지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 그렇게 느꼈다는 것. 비참함, 괴로움, 허탈함. 무한한 우주에서 혼자 버려진 느낌. 부정적인 모든 것을 포함하는 감정의 중심.
사랑은 결코 로맨틱하지만은 않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어둠이 있으면 빛이 존재하듯 사랑도 결국은 추악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달콤하면 달콤할수록 더 어둡고 음습한 존재가……. 아마도 완벽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완벽하다면 ‘변하지’ 않을 테니까. 오로지 완벽한 신만이 항상 변함없을 뿐. 나는 책에 적힌 단어를 입안으로 읊조렸다. 불변수, 회생숫자.
“불변이라는 단어는 참 로맨틱해.”
“왜?”
노트북을 두드리며 리포트를 작성하던 지호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맑고 총명한 적갈색 눈동자는 언제나 봐도 아름답다.
“변하지 않는다는 것 말야. 그래서 사시사철 늘 푸른 소나무가 조선시대에는 찬미의 대상이었던 거지. 사람은 너무 쉽게 마음을 바꾸잖아. 지조가 없어.”
“변하는 게 무조건 나쁜 건 아니잖아.”
“그치만 세상에는 변하는 게 너무 많으니까… 몇 개쯤은 변하지 않았음 해서.”
나는 책에 얼굴을 박은 채 중얼거렸다. 도서관이라 그런지 몇 마디 하지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사방으로부터 따가운 눈총이 느껴진다. 나는 책 위로 눈만 쏙 빼놓은 채 지호를 쳐다봤다. 지호가 입모양으로 ‘조용히 해야겠다’라고 속삭였다. 나는 고개를 가만 끄덕였다.
도서관 데이트(나는 이것도 데이트라고 생각했다)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호와 나는 도로변에 있는 적당한 음식점에 들어갔다. 주문한 국수가 나오자 우리는 말없이 수저를 쥐고 음식을 먹었다. 불편하지 않은 침묵이었다. 점심과 저녁 사이의 애매한 시간대라 손님이라곤 지호와 나 둘뿐이어서 김치를 씹는 소리와 면발을 후르릅 들이키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아주 사소한 소음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냥, 그랬다. 지호와 함께하면 보잘 것 없는 일도 특별하게 다가오곤 했다.
“권아, 말보로 뜻이 뭔지 알아?”
“담배 말보로?”
“응, 그거.”
“말보로가 말보로지 무슨 뜻이 있어?”
“Man Always Remember Love Because Of Romance Over.”
“뭐?”
“남자는 흘러간 로맨스 때문에 항상 사랑을 기억한다, 의 약자.”
지호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국수 먹다 말고 뜬금없이 튀어나온 담배 얘기가 황당하면서도 그답지 않은 센티멘털함이 낯설고 자극적이었다. 나는 입안에 텁텁하게 남아있는 음식물을 목 뒤로 꿀꺽 삼키면서 지호를 마주봤다. 소음이 끊겼다. 침묵이 불편해졌다.
“권아.”
“…….”
“나랑 사귀자.”
2011년 04월 25일, 스무살의 우지호가 스무살의 김유권에게 고백했다.
[블락비/짘권] 카프리카 상수
w. 검백
……지호는 현재까지 통 틀어 내게 총 세 번의 고백을 했고 나는 세 번 모두를 거절했다. 그래도 지호는 상처받지 않았을 거다. 왜냐하면 세 번의 고백은 전부 뜬금없었고 갑작스러웠고 가벼운 어조에 너무나도 장난스러웠으니까.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왜 내가 지호를 거절했을까, 라는 물음으로 넘어갈 텐데 그 대답은 비교적 쉽다. 내가 겁쟁이였기 때문이었다. 지호의 사랑이 변할까봐 지레 겁먹고 고백해올 때마다 필사적으로 거절해온 것이었다. 한 편으로는 지호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또 한 편에 존재하는 겁쟁이 김유권이 지호를 밀어냈다. 지호와 사귀다가 헤어진다면 애인만을 잃는 게 아니었다. 친구로서, 동창생으로서, 인맥으로서 다 한줄기씩 뭉텅이로 잘려나가는 것이었다. 나는 잠깐의 유혹에 못 이겨, ‘쉽게 변해버릴 사랑’에 못 이겨 우지호를 잃고 싶지 않았다. 나는 우지호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했다. 지호가 여자친구와 헤어지면 생기는 잠깐의 공백기 동안 몸을 섞으면서 이런 사랑도 나쁘지 않다고 자기 위로를 되풀이했다. 그것이 비록 눈가리고 아웅하기에 지나지 않았어도.
“어어?”
“어!”
시간이 흐르고 흘러 바야흐로 대학교 4학년, 취업 공부로 서로 얼굴 볼 시간도 없을 만큼 바쁠 무렵에 우리는 길 한가운데서 마주쳤다. 같은 동네에 사니 이정도 우연쯤이야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닌데도 우리는 까무러치게 놀라고 말았다.
“우, 우지호 너 뭐야!”
“그건 내가 할 소린데.”
나는 입을 떡 벌리고 지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의 옷차림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똑같았던 것이다. 모자, 가방, 신발 심지어 양말까지……. 짜고 치더라도 이렇게까지는 할 수 없을 텐데 참으로 기가 막힌 우연의 일치였다. 본의 아닌 지호와의 커플룩에 당황스럽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기분이 들뜨기도 했다. 오랜만에 보는 지호의 얼굴이 좋았다. 가랑비에 옷이 다 젖어버리 듯 서서히 서로에게 물들어가는 우리가, 취향이 비슷해져가는 우리가 좋았다.
“요즘 살만 해?”
“무슨. 토익 점수 쌓느라 아주 죽을 고생이야. 지호 넌 어학연수 다녀왔었지? 실력 많이 늘었어?”
“Not bad.”
오, 발음이 제법인데. 내가 과장스럽게 팔꿈치로 지호의 옆구리를 찌르자 지호가 특유의 장난꾸러기 미소를 그렸다. 그 표정 하나에 온갖 시름이 녹는다는 걸 너는 과연 알고 있을까. 내가 반짝반짝 눈을 빛내자 지호의 얼굴이 서서히 변했다. 짙어지는 농색 눈동자에 심장이 둔탁하게 뛰었다. 공기의 흐름이 달라지고 꽃봉오리가 개화하듯 지호의 입술이 벙긋 열리는데… 폰이 울렸다. 시간이 깨졌다. 긴장이 풀리고 심장 부근이 싸늘하게 식어간다. 내게 할 말이 있어보였지만 지호는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먼저 받았다. 여보세요, 아 희주야. 응, 나 가는 중이야. 잠깐만 기다려. 어? 물론 보고 싶지. 뭐, 여기서 해달라고? 얘가 여기 지금 길거리야. 여자가 낯부끄러운 줄 몰라. 아 진짜, 나중에 해줄게. 나중에 해준다고. 끊어, 바보야.
“…여자 친구?”
“아, 어어. 최희주라고 너도 알지?”
“너랑 같이 해외로 연수 갔다던 후배?”
“응, 그 애.”
새삼, 상처 받는다. 상처 받을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그렇다. 나는 초조하게 입술을 씹다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어색한 톤으로 말을 꺼냈다.
“너 약속 있던 것 같은데 나도 얼른 가봐야 하고. 다음에 보자.”
“뭐가 그리 급해. 권아 이따가 연락할게. 조만간 만나서 술이나 한잔…….”
“알았어.”
단답으로 말을 자르고 뒤돌아서서 빠른 보폭으로 골목길로 빠졌다. 어떻게해서든 지호의 시야 밖으로, 그에게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벗어나야만 했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어대고 숨이 턱턱 막힌다. 머리가 어지럽고 시야가 일그러진다. 우지호와 내 사이가 겨우 이정도 밖에 안 된다는 것이 뼈저리게 실감이 났다. 내가 우지호와 사귀든, 사귀지 않든 결말은 정해져있었던 것이다.
세드엔딩.
그 사실을 2011년 4월 25일에 알았다면 조금은 덜 불행해졌을까. 나는 전봇대에 붙어있는 전단지를 떼어내 얼굴을 덮었다. 세상이 보이지 않았고 세상 역시 나를 보지 못했다. 나는 무언으로 마음껏 통곡해냈다. 묵직하게 내려앉은 가슴의 통증이 제발 가시길 빌며.
***
나는 선혜 누나를 싫어하는 게 결코 아니다. 오히려 많이 좋아하고 있다. 이 사람이라면 평생을 함께 해도 좋다고 여길 만큼. 결혼이 소꿉장난도 아니고 매사에 선택할 때 신중에 신중을 더하는 나로서는 한참만의 고심 끝에 나온 결론이었다. 포근한 울타리처럼 혹은 잔잔하게 일렁이는 호수처럼. 누나는 내게 그런 사람이었다. 낚싯줄처럼 얇지만 튼튼하고 끊어지지 않는 긴 끈같은 사람. 이를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면 나는 선혜 누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리라.
우지호는, 우지호는 싫어한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우지호가 싫다. 내게 상처를 주고, 장난스럽게 던진 고백에 몇날 밤을 지새우게 하고, 내 머릿속과 마음속에 허락도 없이 멋대로 방을 들인 녀석. 좋아하는 감정이 얼마나 더러울 수 있는지 그 끝을 보여준 녀석.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우지호와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래서 일찍이 시골이든 해외로든 도망가고 싶다. 칼날처럼 날카롭고 충치처럼 지독하고 불처럼 뜨거워 상처입히는. 우지호는 나에게 이런 존재였다. 이를 원망이라 할 수 있다면 나는 우지호를 원망한다고 말하리라.
그리고 내게 있어서 원망은 사랑보다 더 아름다웠다.
“유권아.”
지호는 나를 권이라고 불러주는데….
“유권아 뭐해? 눈 뜨고 자?”
지호는 내 눈빛만 봐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데…….
“김유권?”
“으, 응?”
“왜 그렇게 정신을 쏙 빼놓구 있어. 뭐가 더 예쁘냐니까.”
선혜 누나가 검은색 원피스와 하얀색 원피스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생각하는 척 대충 아무거나 가리켰다. 누나는 내 안목에 썩 만족하는 눈치는 아니었으나 떨떠름하게 응답하고 돌아갔다. 피곤해졌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불투명한 무언가가 자꾸만 나를 내리치는 것 같았다. 중력이 비이상적으로 증식해 나를 꽈악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대체 무엇을 기대한 걸까, 나는.
결혼 날짜가 하루가 다르게 다가오고 있는데도 왜 나는 우지호에게 얽매여 있는 걸까. 정작 지호는 아무렇지도 않아하는데, 왜 내가. 무의식중으로 선혜 누나와 지호를 비교선상에 두고 있었다. 분명히 지호에 대한 마음은 1년 전에 접었는데도 그만 둘 수가 없었다.
어제만 해도 그렇다. 알코올이 당겨 술을 마셨고 이성이 희미해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호네 집으로 갔다. 거기만이 꼭 내 마음의 고향처럼, 안식처처럼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침대에서 뒹굴었다. 다시 생각해도 진짜 미쳤다. 거기가 어디라고 간 거야. 나는 머리를 쥐어뜯다시피 잡아당기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건조한 눈으로 달력을 훑어 내렸다. 4월 25일. 나는 다시금 무언가에 홀린 듯 핸드폰을 꺼내 지호에게 빠르게 문자 메시지를 전송했다. 확인 버튼을 눌렀을 때 이미 나는 2011년으로 돌아간 채였다.
‘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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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이 된 연재 속도.... 최근 픽이 잘 안써지긴 했지만, 새학기이긴 하지만 모든 것을 감안하고도 정말 느리네요..ㅠㅠ 뎨동... 과제하다 말고 필이 와서 다다다 적었습니다! 원래 감정 묘사는 잘 안하는 편인데도 카프리카 상수는 유난히 감성적이네요..@_@ 덕분에 기가 쪽 빨리는 느낌입니다..
♡암호닉♡ 새우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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