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재환 Pride will have a fall
w.SILVIA
“으-”감은 눈 사이로 들어오는 밝은 빛에 저절로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밝은 빛에 적응이 안돼서 눈언저리에 팔을 올려 눈가에 그늘을 지게 했다. 그러다 문득 생생하게 생각나는 어제의 장면에 몸서리를 치며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어제의 그 남자는 없었고, 오히려 언제나 봐 왔던 풍경들에 어리둥절해 숨을 고르며 일어났다, 일어나고 생각해보니 어제 의식을 잃고 쓰러졌던 곳은 거실인데 이곳은 나의 방 안, 그리고 바닥과 계단을 굴렀던 몸은 언제 굴렀냐는 듯 상처하나 없었고, 교복도 복도에서 구른 것치고는 깔끔했다. 몸을 손으로 더듬어보고 목도 쓰다듬어봤다. 아무런 상처도 느낌도 없었고, 평소와 똑같은 몸 상태였다, 그저 평소와 다른게 있다면 내가 교복을 입고 있었던 것 정도? 내가 너무 피곤한 나머지 집에 돌아와 바로 자고 헛 꿈을 꾼 것이구나, 치부를 하며 침대 옆 좀 크게 자리 잡은 활짝 열려진 창문에 쾅 하고 닫으며 이 모든 이상한 꿈은 이 창문이 열려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이씨, 누가 열어놓은 거야.”
방 한 쪽 벽 칸에 붙여져있는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7시 23분」다행히 세수를 하고 집을 나서면 학교에 지각은 면하겠다는 생각에 머리를 털며 방문을 열어 화장실로 가려고 발을 내딛는데, 뭔가 묵직한 게 밟혔다. ‘..가방?’내 발에 밟힌 것은 다름 아닌 가방, 왜 여기에… 하며 머릿속에서 물음표를 띄고 있었을 때쯤, 뇌리에 스쳐간 꿈의 한 장면. 아.. 설마, 쓸데없는 두려움과 더불어 온몸에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밟힌 가방을 한 번 더 쎄게 짓밟고 가방을 건너가 거의 뛰다시피 거실 한켠에 배치된, 꿈속에 그 남자와 내가 마지막에 같이 있었던 식탁으로 다가갔다.
“..미친.”
〈KEN〉식탁 위, 흰 종이 정중앙에 정갈하게 필기체로 써진 한 단어가 보였다. 종이를 보자마자 불안한 기운이 들어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아냐, 이건 꿈이야. 형이 장난쳐 놓은 걸 거야. 근데 형이 갑자기 왜?’종이를 보고 한동안 거기서 멈춰 서 있었던 것 같다. 이내 정신이 들었을 때 그 종이를 있는 힘껏 꽉 쥐고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씩씩대다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아무런 기척이 없는 공간, ..기척이 없는 공간? ‘…어?’
“…형! 엄마!”
그제서야 눈치를 채고 급하게 다른 방과 모든 방문을 열어젖혔다. 모든 기구는 그대로지만 사람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거실에 놓여진 전화기를 들어서 전화를 하려고 하지만, 계속 신호음만 갈 뿐, 그 후에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없었다. 뒤를 돌아 구겨진 종이가 들어있는 쓰레기통을 노려보았다. 혹시나 그 녀석이 있을까 하고 소리도 치고 옷장도 다 뒤져보고 했지만 역시 이 집의 기척은 나 밖에 없었다.
“아냐, 내가 너무 예민한 걸 거야….”
그래, 부모님은 일이 너무 바빠서 못 오는 거고, 형들은 오늘 일찍 나갔을 거야. 애써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며 지금 너무 예민한 거라고 심신을 달랬다. 우두커니 방문 앞에 밟혀진 가방을 들어 한 쪽 어깨에 메고 종이가 들어있는 쓰레기통을 들고서는 현관문을 열어 밖으로 나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엘리베이터를 등지고 복도로 내려가 혹시, 정말로 만에 하나 내가 어제 굴렀던 흔적이라도 있을까, 하며 내려갔다. 하지만 내가 1층에 다다라서도 보이지 않는 어제의 그 침과 뒤 섞인 핏덩이는 찾아도 볼 수 없었다. 역시 내가 예민한 거구나. 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래도 기분이 뒤숭숭한 것은 사실이기에 쓰레기통을 통째로 아파트 안에 있는 쓰레기장 쪽으로 밀어 넣었다. 제발 이 이후로는 아무것도 없길 바라며.
“앞으로 지각하지 말아라.”
“네.. 죄송합니다.”
아침에 그 난리를 치고 학교로 들어오니 이미 아침 자습시간이 시작되어 있었고, 그 덕에 내 형편없는 생기부에 또 오점이 생겼다. 고개를 숙이고 일어나 자리로 가서 가방을 내려놓고 책상 안 서랍에 책을 꺼내어 들었다. 숙제도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 하면 빨리 끝나려나? 고개를 살짝 들어 주변을 살펴보니 얘들도 금방 시작한 듯 손이 분주했다. 아, 좀 분량 많은 것 같은데…, 책 표지에 수학이라고 적혀진 것을 꺼내고 그와 비교되도록 얇은 공책 하나를 또 그 위에 겹쳤다. 벌써부터 눈앞이 막막했다. 수학시간에 딴짓을 많이 해서 그런가, 펴기도 전에 막막했다. 숙제라며 책 가에 세모로 접혀진 것을 잡고 펴내니 꽤나 복잡하게 숫자들이 정렬되어 있었다. 한숨을 쉬고 문제를 읽고 풀어보려고 손을 드는데,‘..왜 이렇게 쉬워?’문제를 읽자마자 머릿속에서는 공식이, 손에 들린 펜은 보기 좋게 그 공식과 숫자들을 대입하여 풀이과정을 써 내려갔다.
“통과.”
다행히 1교시부터가 수학이 아닌지라 다 풀었지만 이번에 걸린 수학선생님은 숙제를 엄격히 본다는 선생님.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얘들과 비교를 해가며 틀린 것을 고치고 싶었지만, 다 풀고 나니 수학시간이라 엄두도 못 내고 그저 책상에 공책과 수학책을 펴놓고 마냥 기다렸다. 그리고 내 앞까지 다가오는 선생님에 목을 축이며 막상 왔을 때 벌이라도 받을까, 얘들 다 있는 곳 에서 창피하게 혼이 날까 생각을 하고 있는데 들려오는 소리는 이재환, 일어나. 가 아닌, 통과란 말. 그 말에 얼떨떨하게 있으니 선생님이 의심이 간다는 눈초리로 “..베낀 거 아니지?”라고 물어오셨다.
“안 베꼈는데..”
“알겠다.”
하며 회초리를 들고 유유히 나를 지나쳐간다, 내가 지금 내가 직접 풀어서 통과된 거야? 멍하게 있으니 곧이어 뒤에서 선생님의 격양된 소리가 들렸다. “넌 일어나.”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수학책과 공책을 번갈아 가면서 봤다. 친구것을 베끼지 않는 이상 일어나기만 했던 내가? 다시 공책을 펼쳐 내가 썼다고 해도 생각이 지금은 생각나지 않고 믿기지도 않는 풀이과정과 지운 흔적도 없이 깔끔하게 답만 적힌 수학책을 보다가 수학시간은 그렇게 지나갔다.‘이건 우연이야. 내가 졸면서도 들은 게 있을 수도 있는 거니까….’그렇게 애써 슬금슬금 덮쳐오는 불안에 머리를 흔들었다.
“이재환, 패스!”
“어? 어!”
점심시간 후의 체육시간이었다. 어제저녁을 거르고 오늘의 첫 끼니였다. 배가 고프지도 않고 그저 뒤숭숭한 기분에 많이 먹지는 않았지만 남자아이들은 축구라는 말에 진저리를 쳤다. 밥 먹고 난 다음인데, 내가 안 그래도 제일 못 하는 거…. 축구는 아웃이라는 개념이 없고 남녀 합반이기에 수도 별로 없어 나는 꼭 들어가야만 하는 경기였다. 여기저기서 들려올 친구들의 타박이 벌써부터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삐익!”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왔고, 남자아이들은 다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운동장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마지못해 뛰어다니기는 하는데, 오늘따라 뭔가, 얘들의 움직임이 둔하다고 해야 했을까, 다른 때 같았으면 계속 공의 뒤꽁무니나 따라다니고 있었을 텐데, 계속 내 발안으로 들어오는 공에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우리 팀에게 넘겨주기에 바빴다.
“이재환, 웬일이야?”
“어? 뭐가?”
“축구 연습 우리 몰래 하고 있냐? 오늘 잘하네.”
“혼자 하지 말고, 또 연습할 때 같이 하자, 그럼 실력이 더 빨리 늘 꺼 아냐.”하며 어깨를 두드리고 교실로 먼저 가는 친구들에 등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시선을 돌리니, 조금 멀리 떨어져 나를 보고 있던 건지 학연이와 눈이 마주쳤다. [오늘 짱이야]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웃으며 입모양으로 악센트를 주더니 엄지를 들어 보이고서는 교실로 들어가자는 듯, 학교를 향해서 검지로 가리킨다. 그리고서는 자기 곁의 친구들과 함께 가는 학연이를 바라보았다. …오늘 왜 이래? 우연에 우연이 거듭 될수록 마음이 무거워졌고, 학교로 가는 짧은 거리의 발걸음 또한 주체할 수 없이 무거웠다.
“이번 주에 시험 보기로 했지? 오늘 볼테니까 책상 다 띄어.”
선생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옆에서 탄성이 순식간에 쏟아져 나왔다. 그래도 선생님의 확고한 말투에 아이들은 투덜거리며 책상을 띄기 시작했다. 책상을 띄자마자 앞에서 뒤로 넘겨져오는 시험지에 다들 언제 그렇게 탄성을 질렀냐는 듯, 곧 조용해져서 연필 소리만 들리는 교실에 언제나 적응이 안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나도 곧 시험지를 봤다, 영어로 빼곡히 적혀져있는 객관식의 문제들. 오늘따라 뒤숭숭한 마음에 또 이것을 풀면은 또 이상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서, 그냥 앞서 보이는 숫자로 대충 찍고 엎드렸다. 설마, 이렇게 보지도 않고 찍었는데 점수가 잘 나오지는 않겠지. 내가 예민한 거라며 믿지는 않는다고는 했지만 은근히 거기에 집중을 하고 신경을 곤두세우는 내가 너무 웃겨서 헛웃음을 쳤다.
“이재환, 나와.”
시험지를 걷어 앞 번호의 아이들이 선생님께 불려나갔고,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어차피 내 불안한 기운을 떨치기 위해 찍은 것이라 성적은 당연히 볼품이 없을 텐데, 수행평가 겸 시험이라는 말을 뒤늦게 들으니 약간은 후회가 된다. 어차피 아닐 텐데… 요즘 세상에 그딴 게 어딨다고. 안 그래도 올려야 하는 성적에 문제와 보기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시작한 지 몇 분만에 찍고 엎드려 있던 점수도 깎아먹을 내 행동이 너무 후회가 되었다. 한숨을 내쉬고 교탁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어째 선생님의 표정이 미묘했다.
“요즘 공부하니?”
“..네?”
“시작한 지 별로 안 돼서 엎드리길래 포기한 줄 알았더니.”
선생님의 말이 끝마치자마자 내 두 손위로 올려지는 한 장의 얇은 종이가 내 손 위에서 팔랑거리며 내려앉았다. 빨간색으로 비가 내릴 줄 알았던 흰 종이 위에는 간간이 보이는 동그라미에 눈이 동그래졌다. 분명히 보이는 것만 찍었는데….“하면 잘 하잖아.”하며 웃는 선생님은 곧 얼굴을 돌려 다시 번호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 손에 들린 한 장의 종이를 꾸깃, 있는 힘껏 꾸겼다. 손에서 거칠게 구겨진 종이를 보다가 문득, 의식을 잃기 전 들리던 그 남자의 음성과 조롱하듯 웃던 표정이 생생하게 머리를 맴돌아 이를 꽉 물었다.
‘잘하게 해줄게, 모든 걸.’
수업 종이 치고 종례가 끝나자마자 가방을 들쳐메고서는 부리나케 반을 나와 집으로 달려나갔다. 아파트에 다다라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마저도 내게는 너무 답답해서 계단을 힘든지도 모르게 올라갔다, 그리고 보이는 현관문에 다가가서 조급하게 숫자를 눌렀고 그 덕에 계속 틀려 삑삑거리는 도어락에 신경질이나 도어락을 몇 번 쾅쾅 치고서는 드디어 제대로 쳐져서 열리는 현관문에 문을 또 거칠게 열어젖혔다. 또 컴컴한 거실이 나를 반겼고 아침에 갔었을 때와 똑같은 현관문 앞 쪽의 널브러진 신발 상태와 정도가 지나친 정적이 숨을 멎게 했다. 몇 초가 지나서야 숨을 그제서야 고르며 다시 거실로 들어가면서 천천히 살폈다. ‘뭔가라도, 바뀌었을 거야. 아니, 바뀌어야만 해….’하지만 거실의 반쯤을 들어와도 아침에 나갔을 때와 같은 상태였다. 철저히 나만의 흔적만 있는 것에 대충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는데.. 그래도 마지막의 반전이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주체할 수 없이 동공이 흔들렸다. 곧바로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았다. 그래도 애써 벽에 기대며 서있는데, 차마 거실을 둘러보느라 못 보았던 내 방문 쪽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집에 들어온 거 그렇게 티 내면서 들어와야겠어?”
“하….”
“시끄럽게.”
그 희미한 불빛에 놀라 문을 다시 한 번 거칠게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 앞에 보이는 것은 침대에서 책을 읽고 있는 그 남자였다. 가족들이라는 일말의 희망을 걸어보았지만 꿈이라 믿었던 나와 재수 없으리만큼 똑같은 남자가 있으니 저절로 굳혀지는 인상에 방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대로 계속 서있었다. 그렇게 계속 서있으니 그 남자는 날 힐끔 쳐다보더니 책을 소리 나게 덮고서는 그것을 침대 위로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서는 다시 또 그 재수 없는 미소를 띠며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거기에 내가 조금씩 뒷걸음을 치니 남자는 바람 빠지게 웃으며 자리에 멈춰 섰다.
“이러면 이웃에게 피해 가는 거 몰라?”
“…….”
“그리고 봤으면 인사부터 먼저 해야지, 애송아.”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버러지 같은 놈.”하며 날 우롱하면서 입을 비틀어 웃어 보였다, 한껏 조롱하는 태도에 화가 나고 이런 사태까지 오게 한 인물이 누구인데 이런 소리를 지껄이는거야? 되려 참고 있는 내가 너무 한심했다. 뒷걸음은 왜 친 건지, 이 와중에도 겁을 먹어 뒷걸음을 친 내 자신에 손이 떨렸다.“하긴,”그 남자는 날 흝어보다가 떨리는 손에 표정을 굳히고 그 시선 그대로 올라와 나를 보았다. “이제 부모도 없는데”라는 말을 하더니 아까까지의 표정은 어디에 갔었는지 금방 또 조롱하는 웃음으로 바뀌어서는 내게 물었다.“…뭐?”지금 내 귀가 잘 못 들은 거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 녀석에게 다시 한 번 되묻듯 말하니, 그 녀석은 표정 변화 없이 여전히 나를 조롱하는 태도로 당당히 말했다. “알면서 되묻긴.”
“이 새끼가!!”
그 녀석의 말에 순간 이성을 잃어 무섭다고 생각했던 그 녀석에게 머리에 핀셋이 빠진 것처럼 미친 듯이 달려들어 멱살을 잡아들었다.“가족들, 가족들 어디에 있어!!”점점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몸을 떨 정도로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 덕에 그 녀석이 입은 검은 셔츠는 점점 구겨졌고 그 녀석은 고개를 내려 구겨지는 셔츠를 보며 잠자코 있다가 시선을 그대로 올려 아까보다는 약간 무표정이 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오늘 어때?”표정과 비례된 듯 말투 역시 차분해져서 물었지만,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답답한 마음에 감정이 깊어져 손아귀에 잡힌 멱살을 격양되게 흔들었다.
“가족들 다 어디에 있냐고 이 미친 새끼야!!”
“…아니,”
“오늘 어떠냐고 씨발놈아.”말에 악센트를 주며 곧 표정은 차갑게 변하더니 자기 옷을 쥔 내 손아귀 위에 자기 손을 겹쳤다.“으, 악…”그리고 곧 그 녀석은 내 손을 꽉 잡았고 손이 뭉개지는 느낌에 목 막힌 비명을 지르며 그 녀석의 멱살을 놓았다. 내가 손을 놓자마자 그 녀석은 자신의 셔츠를 한 번 다시 툭툭 치며 정리를 하더니 어느새 몇 발자국이나 떨어져 손을 부여잡고 있는 날 보며 비웃었다.
“언제부터, 내가 너한테 질문을 하게 해줬는데?”
“…….”
“넌 내 질문에만 알아서 입을 놀리면 되는 거야 애송아.”
그래서, 오늘은 어땠다고? 표정 변화가 너무 극과 극을 달렸고 이제는 웃고 있는 낯짝에 비해 차가워진 목소리로 대답을 강요하는 말투에 소름이 끼쳐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그 남자는 기가 차다는 듯 바람 빠지게 웃어 보이며 무릎을 굽혀 내 얼굴 가까이로 다가왔다.
“..나한테,”
“…….”
“무슨 짓, 한거야….”
가까워지는 얼굴에 엉덩이로 바닥을 쓸며 계속 뒷걸음질을 쳤다. 어느새 다다른 등과 차가운 벽의 마찰이 온몸에 전율이 되듯 부르르 떨었다. 그런 모습을 그 남자는 계속 지켜보다가 겨우 내뱉은 내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말했지,”
“질문 안 받는다고.”언제 내 곁에 가까이 왔는지 얼굴 옆으로 스쳐 지나가 벽을 쾅 하며 치는 주먹에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떨어대었다. 그 남자의 차가운 눈빛에 저절로 시선을 떨궈 고개를 세차게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러자 나보다 약간은 높은 위치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아, 좋았다고?”하며 또 조롱하듯 바뀌어버리는 어투에 그건 또 맘에 안 들어서 입술을 꽉 물었다. 그러자 좀 비린듯한 피가 입술에서 입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소량의 피가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본 것인지 손으로 턱에 흘러내리는 피를 눌러서 닦아주었다.
“가족은 어딘가에 있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 자기 일이 아니라고 무신경한 말투에 아무 일이 아니란 듯 입을 놀리는 남자가 얄미워 또 손을 부들부들 거리게 쎄게 쥐었다. 곧 그 부들거리는 손은 그 남자의 손이 겹쳐져 쥐어지는 바람에 그 떨림은 미세하게 바뀌어버렸지만.“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그 남자가 꽉 쥔 손에서 점차 미세한 떨림이 멈추어가는 것에 따라서 그 남자의 손은 점점 힘을 빼었고, 그 손은 뭔가를 닦듯이 점점 내 손에서 떼어져나갔다. 그가 떠난 손이 있던 자리에는 방금 내 턱주가리에서 흘려지고 있던 피가 묻어져있었다.
“난 악마야. 뭔가를 주기 전에는 당연히 가져오는 걸 먼저 하는.”
“설마, 네게 아무런 대가 없이 뭔가를 해줬을 리가 없잖아.”너무 태연시 하는 그의 태도에 화가 나 또 그의 멱살을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내 뻗은 주먹은 끌리듯 그 녀석의 손바닥 안으로 들어갔고 그 손바닥은 점점 내 손을 옥죄어오기 시작했다.
“오늘 뭔가 좀 되니까 상황 파악 안되는 것 같은데.”
“…….”
“잠만 잘 쳐 자놓고 하루아침에 이렇게 좀 되니까 눈에 뵈 는게 없어?”
“…내가 언제 이런 걸 한다고 했..”
“입좀 그만 놀려.”
“….”
“오늘 좋았다고 했던 건 너야.”
우두둑, 그 남자의 손에 잡힌 주먹에서 뼈 소리가 묵직하게 들려왔다. 악! 짧고 굵은 외마디가 입에서 튀어나왔다.“애초부터 니가 내 몰골을 하고 애송이처럼 구니까 이러는 거 아니야”그 남자가 손을 놓자 내 손은 힘없이 바닥으로 떨궈졌다. 안에서 피가 터진 듯 손의 군데군데에 빨갛게 피부가 올라왔다. “나한테 절은 고사하고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부르르, 손에 힘이 들어가기라도 하면은 수전증이라도 걸린 것처럼 심하게 떨리는 손을 멍하게 쳐다보다가 위에서 톡 쏘아보는 그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주먹을 자신에게 내보였다는 것이 마음에 안 든 듯, 인상을 쓰고 있는 모습에 어깨가 떨렸다. “조금 더 지나면 주제 파악도 못 할 주제에. 그냥 넌 감사히 받고 나 있어.”하며 내 교복 와이셔츠의 가슴팍에 있는 작은 주머니에 어떤 종이를 쑤셔 넣었다. “그리고 내 이름은 켄이지, 미친 새끼가 아니야. 애송아”앞으로 또 그렇게 입을 함부로 놀리게 되면 이번에는 뼈가 부러졌나? 다음번에는 머리통이 깨지게 될 거다. 오싹하게 웃으며 그 남자의 형체는 먼지가 되어 점점 공기 중에서 흩어졌고, 달달 떨리는 부러진 쪽이 아닌 나머지 한 손으로 그 남자가 넣어놓은 가슴팍에 있는 주머니에 더듬더듬 종이를 찾아 펼쳐보았고 곧 보이는 낯익은 종이 위 단어에 종이를 떨쳤다.
* * * *
그 남자는 발끝부터 가루가 되어 공기 중으로 흩어졌고 얼굴까지 흩어지기 전에 마주 본 그 남자의 얼굴은 끝까지 기분 나쁜 미소가 서려있었다. 하지만 그 남자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웃음으로 넘어가거나 대들기에는 나는 너무 겁이 나있었고, 그것은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라는 어렴풋한 느낌에 완전히 그 남자의 형체가 사라져서도 한동안은 말을 잇지 못했다. 잇새에서 간간이 숨이 들어갔다 나왔고 바닥에 떨궈진 손과 어깨만이 떨렸다. 부러진 손이 아닌, 그나마 정상적인 손을 힘겹게 떨며 와이셔츠 가슴팍에 있는 주머니에 손가락을 집어넣어서 종이를 찾으려 휘저었다 곧 잡혀진 종이를 들어 올려 단정하게 접힌 종이를 한 손으로 서툴게 하지만 허겁지겁 폈다.
〈KEN〉오늘 구겨서 쓰레기통과 같이 버렸던 종이가 단정히 접힌 상태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 필체로 내 와이셔츠에서 나왔다. 잇새에서 간간이 들이마시던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어깨의 떨림은 잦아졌고 종이를 집은 손도 어깨의 떨림 못지않게 떨림의 정도가 심해졌다. 곧 답답해지는 가슴에 크게 인위적으로 숨을 내뱉고 들이마시기를 몇 번, 곧 그 종이의 모퉁이를 내 입가에 가져가 물고서는 손으로 찢기 시작했다.‘지이익, 지이익-’간결한 소리를 내며 잘게 찢어지는 종이가 바닥으로 떨어졌고, 곧 그 종이를 바닥에서 긁어모아 손으로 굳게 움켜쥐고서는 공기 중으로 뿌렸다. 눈앞에서 그 녀석의 흔적이 갈기갈기 찢겨진채 공기 중에서 흩어져 바닥으로 떨어지는 꼴을 보고 있자니 그것만으로도 약간은 속이 풀리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였고 곧 다 떨어진 종이에 다시 불안한 기운이 엄습해왔다. ‘설마, 이런 걸로 날 보복하지는 않겠지..’두려운 나머지 아까까지만 해도 약간은 올라가진 입꼬리에 경련이 일었다. 무릎을 세워 한쪽 손으로 무릎을 감싸 안아 고개를 묻었다. 그제서야 밀려오는 다른 한쪽 손의 고통과 갑작스럽게 찾아온 무거운 적막감에 가족들이 생각나 흐느꼈다.
“…엄마.. 형……”
해가 뜬 다음 날, 어쩐지 오늘 손이 얼얼하기만 하더니 병원으로 들어가 진료를 받으니 단순한 타박상이라고 나왔다. 그래도 붓기가 있어 얼음팩을 봉지에 담아주었고, 그 남자가 일부로 두고 갔었는지, 아니면 내가 못 봤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책상 위에 고이 있는 카드와 몇 장의 지폐들이 올려져 있었고 먹는 것에도 돈을 쓸 여유가 없었던 나는 가까스로 병원비를 낼 수 있었다. 병원에 나온 직후 집에 들러 얼음팩을 두고 학교 가방을 챙겨 바로 학교로 들어갔다.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집에서 쉬는 것도 적적한 공기에 더 머리 아파올까 봐 그나마 시끄러운 곳이 나을 거라는 생각에서 나온 선택이었다.
“오늘 안색이 안 좋네.”
“어,어?”
공부 쉬엄쉬엄해, 너 많이 피곤한 것 같아. 말없이 병원을 갔다 와 무단 지각이라며 무슨 말을 할 것처럼 보이더니 빨갛게 부어오른 내 한 쪽손을 보고서는 입을 굳게 닫더니 생기부에 또 줄 하나를 그냥 긋고서는 가보라는 듯 손짓을 해서 고개를 숙이고 일어나 그제서야 반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반으로 들어가서 내 책상을 찾아 크기에 비해 비교적 가벼운 가방을 걸어놓고 책상을 뒤지며 다음 교과서를 찾으려고 하는데 옆에서 어떤 말소리가 들려왔다. 나한테 하는 소리인가 하고 옆으로 돌아보니 별빛이가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별빛이가 먼저 말을 걸어준 것은 처음이기에 바보같이 말을 더듬고 얼떨떨하게 보고 있으니 별빛이가 곧 살포시 웃으며 ‘힘내’라는 말을 덧붙이고서는 나를 지나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서 좋아하는 여자애가 말을 걸어와도 길게 대화를 못 이끌고 바보같이 말을 더듬기만 한 내 자신이 너무 한심스러웠다. 하지만 무엇보다 제일 한심스러웠던 건 아직 가족을 그 악마 놈한테 되찾아 오지도 못 해서 어제까지만 해도 낙담을 했었는데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말 한번 걸어줬다고 조금이라도 기분이 붕, 뜬 것 같은 내 심경 변화였다.
“오늘 왜 이렇게 늦었어?”
“우리 몰래 또 축구 연습한 거 아냐?”
한숨을 푹 쉬고 자기 자리로 돌아간 별빛이를 보려 틀었던 몸을 다시 제대로 바르게 앉아서 교과서를 정리했다. 복잡하고 착잡한 마음에 교과서만 책상에 가지런히 모은답시고 계속 살짝씩 책상에 소리 나도록 내려치다가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감싸는 느낌에 혹 그 악마일까, 몸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뒤에서 장난 식인 말투의 두 명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어제 축구했을 때 어깨를 두들겨줬었던 홍빈과 원식이었다.
“이재환이 너냐?”
“내가 뭘? 그럴 수도 있지.”
“아, 됐고 재환아 점심시간에 나가서 축구 한 판 뛸래?”
옆 반이랑 내기를 했는데 수가 안 맞네. 저번에 너 잘하던 것 같아서… 괜찮지? 보조개 깊게 파이며 웃는 홍빈이를 보면서 멍을 때리다가 아무 말도 안 하는 나를 보며 홍빈이는 이상했던지 눈을 동그랗게 뜨다 때 마침 치는 수업종에 “하는 거지? 밥 우리랑 같이 먹고 같이 나가자. 수업 잘 들어.”하며 어깨를 또 축구했었을 때처럼 내 어깨를 몇 번 두들기고는 두 명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 못하는데….”
병원을 가느라 학교 중간부터 들어오기는 했었지만 그래도 벌써 점심시간이 되어버린 빠른 시간이 야속했다. 약속대로 홍빈이와 원식이가 내 자리로 오고 그 둘과 별로 친하지 않았던 나는 쭈뼛대며 그 둘을 따라나섰다. 한 발 앞서가는 그 둘의 뒤를 따라 급식실로 가면서 점심시간 후의 축구에 자신이 없어 어떻게 거절을 할까, 생각했다. 솔직히 그때는 나도 어떻게 했었는지 궁금할 정도로 아무런 생각이 없이 됐으니까. 다시 그렇게라도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급식실에 가서 식판을 받는 도중에도 고민은 계속됐다. 그 남자는 감사히 받으라고는 했지만 언제까지나 악마였고, 이변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어제 잘 했는데?”
“아니…, 어제는 운이 좀 따른 것 같아서.”
“운도 실력이야 임마!”
마주 보고 앉은 급식실에서 거절할 명목하에 입을 떼었지만 어제 잘했다며 운도 실력이라고 너무 기죽지 말라고 했다. 아, 이건 그냥 운이 아닌데…. 그래도 우물쭈물하고 있으니“너무 부담 갖지 마. 내기라고 해봤자 별거 없어 그리고 어차피 반끼리 내기를 한 거라서 다른 반 데리고 올 수도 없어.” 홍빈이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못해도 상관없어. 그냥 공이라도 쫓아가기만 해.”하며 한 쪽 보조개를 깊게 패이며 웃어 보였다. 결국 그렇게 점심시간 후 소화도 잘 안된 상태에서 운동장을 뛰게 되었다. 걱정을 해서 먹어서 그런지 벌써부터 속이 안 좋아지는 느낌에 많이 걱정이 되었고 그런 내 속 사정과는 상관없이 또 호루라기 소리는 힘차게 불려져서 그라운드를 뛰게 되었다. 처음에는 속이 더부룩해서 몸을 움직일 때마다 배가 아파왔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가면서 소화가 되었고 내 걱정과는 반대로 축구는 어제처럼 잘 되었다. 아니, 어제보다 더 잘 되었었다. 내가 골을 넣어 이기게 되었으니까.
“뭐야 못 한다더니!”
“..…이것도 운이 따라줘서,”
“또? 아무튼 운이든 뭐든 너 덕분에 이겼다, 잘했어!”
동점이고 시간도 별로 없는 상황에서 모두들 촉박해했었고 조급해했었다. 단순한 게임이지만 다들 열정적이라 내가 더욱더 여기서 짐이 되면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뛸 때마다 부은 손이 덜렁거려서 신경이 쓰였지만 열심히 공이라도 뒤를 쫓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그런지 어제 체육시간처럼 공이 내 발안으로 들어 오는 것은 물론이고 남들보다 더 앞서가는 뜀박질에 결국에는 상대팀의 골대에 골을 넣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어제보다 더 빨라진 움직임에 친구들은 물론 원식이와 홍빈이까지 내 주위를 둘러싸고 “역시 얘 아침에 축구 연습 하로 갔다 온 거 맞다니까” 농담을 하고 어깨를 두들기며 잘했다며 연신 칭찬을 했다. 저번까지만 해도 안 되는일 투성이였고 쓴소리만 들었던 게 엊그제인데 이틀 만에 이런 식으로 바뀌는 것에 적응이 안되고 한 편으로는 너무 기뻤다. 인간관계에서도 하자라며 연신 한숨을 쉬며 내가 뭘 잘 할 수 있으려나 걱정을 했는데 이렇게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칭찬을 받으니 손의 아픔도 느껴지질 않았다.
“축구 연습만 하지 말고 농구 연습도 해, 농구 연습 상대 내가 해줄게.”
“홍빈이 농구선수였어 웬만해서는 잘 도와줄걸.”
“다음번엔 축구 말고 농구하자. 콜?”
“아…,응”얼떨결에 홍빈이와의 두 번째 약속에 응하고 원식이와 홍빈이가 가는 뒷모습과 서서히 내 곁에서 멀어저가는 친구들을 쳐다보았다, 뒤에서 멍하니 있자 홍빈이가 내 쪽으로 뒤돌아보더니 “빨리 와, 다음 교시 시작한다.”하며 손 짓을 하기에 머뭇거리다 발걸음을 재촉해 홍빈이의 옆자리를 꿰차 학교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이런 대우를 받았다는 것이 너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기뻤다,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계속 가족들이 생각이 나 마음이 무거워져만 가서 머릿속은 복잡했다.
고2의 2학기 때의 시간은 굉장히 빠르게 지나갔다. 고3이 되고 있는 과정에서 선생님들은 수능을 매번 언급하며 학생들에게 압박을 주었고, 나도 어쩔 수 없었던 평범한 예비 수험생이었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어느덧 그 켄이라는 남자가 내게 가했던 손의 통증은 점점 완치가 되었고 그 남자는 더 이상 그 이후로 보이지 않았다. 매 번 반기는 거실을 뒤덮은 컴컴한 어둠이 적응이 안 가 주저앉아 흐느낀 것도 여러 번, 가족들이 없는 고아가 되었다는 생각에 운 것도 여러 번. 하지만 그동안 울면서 느낀 점은 내가 그렇게 울어도 아무것도 바로, 혹은 내일 아침에서라도 바뀌지는 않는다는 것. 점점 가족들이 없어서 생긴 외로움과 컴컴한 어둠의 정적에 익숙해졌다. 학교에서 내게 애정을 보이는 친구들과 선생님의 태도에 가족들의 빈자리를 대체해주는 것 같았고, 무엇보다도 그 남자가 내게 가족을 가져가고 남긴 하루마다 비이상적으로 늘어만 가는 능력에 희열을 느껴가고 있었다.
“재환아, 이거 먹어!”
제일 희열을 느끼는 것? 아마 그건 시간이 지나가면서 이제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손이 움직여서 이제는 성적이 전교 상위권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고, 운동치였던 내가 하루마다 내가 내 기록을 단축해내며 이제는 운동선수를 뛰어넘는 운동신경을 가져서 못 해본 것도 금방 프로급으로 배우는 것도 아니었고, 한 때는 꿈이었지만 초등학생 학예회수준이었던 노래가 그동안 학원을 다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발성도, 음악도 가수보다 더 가수다워진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제는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한 번 이라도 배우면 그다음 즉시 일사천리로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렇게 해서 날 존경심 가득한 바라보는 시선들, 그게 제일 희열감을 느끼게 해주었고, 그로 인해 나를 대하는 태도가 180도 달라진 친구들과 선생님에 저절로 어깨가 으쓱했다.
“이거 사람 먹으려고 가져온 거 맞아? 차라리 엿을 먹으라고 하지.”
물론 처음에는 이런 시선들과 태도들이 불편했고 한없이 부담스러웠다. 내가 가족들이랑 맞바꾼 것이라는 생각에 죄책감도 들었기도 해서 그런 시선과 태도는 오히려 날 더 마음을 무겁게 하는 요인들 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다들 열심히 하는 모습에 시험에서 백지를 낸다거나 경기를 뛰지 않는다는 등, 그런 건 할 수 없었다. 가족을 잃은 와중에 이런 시선과 태도조차 잃는 것이 무서워 노력을 하면 했지 일부로 하지 않으려고는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계속 더해가는 내게 보내지는 존경심 가득한 시선과 태도에 나는 숨이 막혀만 갔고, 숨이 막혀도 계속 막히게만 할 수밖에 없는 이런 악순환에 나는 지쳐만 갔다. 그래서 생각했다. ‘이렇게 된 거, 마음을 편하게 먹자.’고, 어차피 되돌아올 수 없는 가족이라면 놓는 것이 당연했고, 내게 주어진 이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게 맞는 거라고. 내게 오는 이런 시선과 태도는 내 힘들었던 앞 날의 보상이라며 애써 자기합리화하며 생각하니 조여왔던 숨통이 점점 풀리는 것 같았다. 점점 선생님들 사이에서 "갑자기 공부와 그 밖에 모든 것을 잘 하는 아이"로 퍼져나가니 반과 반사이에서 내 이름을 듣는 것은 시간문제였고, 그로 인해 나를 찾아오는 다른 반의 아이들도 많아지며 점점 내게 호감을 보이며 달라고도 하지 않는 선물을 준다거나 심지어 돈을 줄 테니 과외를 해달라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이라고 다 거절을 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받아지는 뇌물과 호의에 점점 마음은 변해만 갔다.
“…이재환 너 왜 이렇게 쓰레기 같아졌냐.”
사람들이 주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말을 들었다는 것이 부끄럽고 자존심이 상했는지 얼굴이 붉어지며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반에서 뛰쳐나갔다. 입맛을 버린 것 같아 인상을 쓰며 혀로 입술을 쓸어 입술을 닦았다. 너 먹던가 버리던가. 먹다 남은 음식 같지도 않은 음식을 준 그 여자애가 괘씸했다. 그래서 화풀이하듯 옆 책상에 앉아있는 아이에게 던지듯 넘겨주었고, 옆에 서서 그 모습을 계속 지켜본 홍빈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앙 다물었던 입술을 떼었다. 뭐 쓰레기? 기가 차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홍빈이를 쳐다보자 아까보다 더한 인상을 쓰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뭐야? 내가 뭘 어쨌다고. 어이가 없어서 의자 등받이에 손을 걸쳐 뒷문으로 뒤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빠져나가는 이홍빈을 멍하게 쳐다만 보았다. 김원식, 쟤 뭐냐? 하며 시선을 돌려 원식이를 쳐다보니 원식이도 이홍빈 못지않게 인상을 쓰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럼 넌 뭔데?”
허?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김원식의 내려보는 시선에 마음에 안 들고 또 톡 쏘는 말투에 저절로 인상을 찌푸렸다. 오늘따라 왜 이래? 얘네 뭐 잘 못 먹었어?
“…뭐?”
“넌 뭔데 남이 준 걸 그렇게 쓰레기 취급하냐고.”
“그럼 맛이 없는데 맛있다고 해?”
이번에는 김원식이 기가 차다는 듯이 바람 빠지게 웃어 보였다. 지금 누가 제일 어이가 없는데. 김원식의 태도에 기분이 나빠서 인상을 더욱더 찌푸렸다. 김원식은 그런 나를 보고 금방 표정을 굳히더니 “그래, 너 잘났네.”하며 내 미간에 검지손가락으로 두어 번 머리를 튕겼다.“잘난 얼굴에 미간 찌푸리지 마.”이게 무슨 취급인지, 나를 조롱하고 있다는 말투와 태도에 화가 나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멱살을 잡았다. 그래도 눈 깜짝하지 않는 태도에 더 열 받아 주먹을 들었지만 김원식이 멱살을 쥔 손을 내치는 속도가 더 빨랐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더니.”
나지막이 말하고서는 날 벌레보듯이 보는 시선에 이를 악물었고 김원식은 그런 나를 개의치 않아 하며 성킁성큼 뒷 문으로 나갔다. 순식간에 조용해지는 내 주변의 소리와 신경 쓰이게도 내 눈치를 보며 내 주변에서 한 발짝씩 떨어지는 발들을 보고 있자니 더욱더 이 상황이 열 받고 엿 같아서“눈치 보지 말고 할 일들이나 해, 씨발.”화를 내며 소리쳤고 아이들은 전보다 빨리 내 주변에서 멀어져만 갔다. 아직도 안 풀리는 열 받아서 답답한 마음에 뒷문으로 쿵쾅거리며 나갔고 나가자마자 반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림에 반을 한 번 쳐다보고 다시 앞을 보며 발을 디뎠다. …이게 뭐야 씨발, 존나 진 느낌이잖아. 열 받은 머리를 바람을 쐬며 식히려고 나왔지만 한 번 받은 열은 그렇게 쉽게 식혀지지 않았다, 남들 다 보는 그 자리에서 나를 그런 식으로 우롱을 한 이홍빈과 김원식이 재수가 없어 이빨을 드드득, 소리 나게 갈며 ‘그 면상에 주먹으로 쳤어야 했었는데…,’ 라는 생각만 계속하며 한 손에 쥐어진 담배를 물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화가 가라앉기는커녕 더욱더 그 상황에 반박도 못 했던 내 자신에 쪽팔리고 화가 나 발 밑에 담배꽁초들은 계속 생기기만 했다. 씨발, 씨발! 주위에 있는 굴러다니는 돌멩이라든가 나뭇가지를 그 녀석들이라 생각하며 걷어차고 으스려 밟았다.
결국 한 교시가 시작을 한 시간이었고 이런 상태로 잔소리를 받으면 화가 주체가 되지 않을 것 같아서 결국에는 쉬는 시간 때를 맞춰서 반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끄럽던 반은 내가 오자마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고 다들 내 눈치 보기에 바빴다. 내 자리보다 한참 뒤였던 홍빈과 원식의 자리를 지나치며 그 녀석들을 힐끔, 쳐다봤지만 아무렇지도 않아 하며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자기 할 일들을 하는 홍빈과 원식의 모습에 다시 한 번 열이 올라와 이를 갈았다. 그렇게 내 자리로 돌아와서 앉았더니 밖이 아니라 사방이 막힌 벽이라서 그런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담배 냄새에 인상을 쓰며 이럴 때면 매일 향수를 들이밀었던 여자애를 찾았다, 그리고 내 눈치를 보며 저 멀리 있는 여자애가 보였고 오라는 손짓을 하니 그 여자애가 머뭇거리다가 내 곁에 다가왔다.
“향수.”
“..어?”
“담배 냄새나니까 향수 좀 뿌려주라고.”
내가 이거 말고 널 왜 부르겠어? 말을 하자 그 여자애도 약간 얼굴이 붉어지며 알았다며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이내 향수를 가지고 내 자리로 되돌아왔다. 원래 눈치껏 알아서 잘 가지고 오다가 오늘 나 더 기분 잡치게 왜 그래. 향수를 뺏듯이 잡아채며 말하자 그 아이는 고개를 숙이며 미안하다고 하며 어깨를 떤다. 쯧, 하루가 재수 없으려니 별게 다 짜증 나네 혀를 차며 향수를 집어 든 손을 들어 향수를 뿌리려고 하는데 갑자기 내 손에 들린 향수가 어떤 손에 의해서 낚아채졌다.
“이거 가져가.”
“…?”
“..별빛?”
별빛이의 손에 들려있는 작은 향수병에 멍하니 바라보았다, 별빛이는 그 여자애에게 향수를 다시 쥐여주고서는 자리로 돌아가서 다음 교시 준비나 하라고 하며 돌려보냈다, 그리고 성킁성큼 별빛이는 내게 다가와서 자기 다른 한 손에 들린 향수를 내게 들이밀었다. “내꺼 써.” 갑자기 내게 호의를 베푸는 별빛이에 어안이 벙벙하기도 하고, 드디어 내게 관심이라도 생긴 건가 싶어 웃으며 별빛이의 향수병을 받으려 손을 뻗었다.
‘쨍그랑’
“…….”
손을 뻗어서 별빛이의 손 근처로 가자 별빛이의 손이 갑자기 손등을 보이며 향수를 바닥으로 보게 하더니 그대로 놓아서 떨어뜨렸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며 나와 별빛이의 그 짧은 거리에서는 향수병이 깨져서 유리조각이 여기저기로 흩어졌고 그 안에 들었던 액체도 여러 군데로 튀며 그렇게 많은 양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지 자락을 젖게 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상황 파악이 안돼서 그대로 얼어붙어 있자 앞에서 내가 그렇게 좋아했었던 카랑카랑하게 들리는 별빛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실수.”
“…….”
“미끄러졌다, 그래도 쓸래?”
비웃는듯하고 전보다 날이 세워진 목소리가 별빛이가 맞는지 의문이 갔었다. 내가 좋아했던 아이가 맞는지. 생각에 오류가 범해지자 떨리는 동공에 별빛이를 보는데 친하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밝게 웃고 있었는데, 같은 사람이 맞을까 할 정도로 차갑게 날 보는 시선에 마음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내가 너한테 뭐 잘못했어?”
한순간에 머쓱해진 손을 내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뭘 잘못했길래 나한테 이러냐고. 그리고 내 목소리에 비해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미끄러진 거야.”
“거짓말 치지 마.”
“미끄러진 거라고.”
그럼 내가 본건 뭔데!! 이제는 별빛이가 나에게 했던 행동을 보고 마음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아니라 열이 뻗쳐서 떨리는, 한껏 격양이 된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내 두 눈으로 네가 고의적으로 떨친 걸 봤는데 지금 거짓말이 나와? 뻔뻔하게도 거짓말을 치는 별빛이에 목소리에서 점점 몸으로. 온 몸이 부들부들 거리며 떨렸다.
“아 봤어? 그래, 미안.”
봤다며 윽박을 지르자 별빛이는 여전히 무표정인 얼굴로 나와는 다르게, 아주 뻔뻔하게 사과를 했다. 거짓말을 너무 티 나게 해서 사과를 받을 줄은 몰랐지만 사과를 받은 이 시점이 더욱더 기분을 불쾌하게 했다. 바람 빠지게 웃으며 미안? 별빛이의 말을 곱씹었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너 지금 나랑 장난해?”
“아니?”
“이게 지금 사과하는 사람의 태도냐고”
“..야, 이재환.”
날카롭게 울리는 내 이름을 불리는 별빛이의 목소리에 내가 되려 주춤했다. 넌 이런 태도라도 사과 한 적 있어? 하며 이 상황에 안 어울리는 말을 하기에 다시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 그게 무슨 상관…, 아니, 상관있어. 너한테 음식 준 애 내 친구 거든. …하?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그래, 이게 이유였네. 내가 니 친구한테 뭐라고 해서? 여자들의 우정은 눈물겹구나. 뭐 걔가 너한테 복수 좀 해달라고 하던? 아니면 뭐 사과를 내가 하게 해달라고 하던? 어이가 없어서 말투를 톡톡 쏘아대며 말을 하니 그동안 무표정이었던 별빛이의 얼굴에도 점점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걔 너 준다고 열심히 만들었다고 꼭두새벽부터.”
“내가 언제 만들어 달라고 한 적 있어?”
“넌 그렇게 노력을 했는데 한 번 쳐다봐 주는 게 어려워?”
하, 다시 또 기가 찬 웃음이 나왔다. 그럼 너는? 너도 남 말할 처지가 못 되는데. 내가 말을 하자 별빛이는 무슨 말이냐며 미간을 찌푸렸다.
“넌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노력한 줄 알아?”
“…….”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쳐다도 안 본건 너면서.”
너랑 친해지려고 별 수를 다 했다. 너가 유인물을 가져가라고 했을 때 내가 항상 첫 번째로 갔는데, 넌 알기는 해? 맨날 네가 이야기하고 있으면 어떻게 서든 맞장구를 쳤던 거 알고나 있냐고. ……. 넌 이것도 기억 못 해. 내가 얼마나 네 눈에 띄려고 알짱거렸는데…!! 말하다 보니 울컥, 그동안 답답했던 마음이 복받쳐 올랐다. 공부를 잘 하면 너가 날 쳐다봐줄까, 체육시간 때 득점은 바라지도 않고 열심히 뛰기라도 하면은 너가 날 봐줄까, 맨날 난 이런 생각하고 살았어. 운동신경도 지지리도 없고 공부도 못하고.. 그래도 노력은 맨날 했다. 넌 나 봤냐? 꽉 쥔 주먹만 사정없이 떨렸다. 내가 때리려고 했다고 생각했는지 어느새 나타난 차학연이 내 떨리는 손을 자기의 두 손으로 감쌌다. 넌 이 새끼랑 시시덕거리고 있느라 날 못 봤겠지.
“비켜, 씨발.”
내 주먹을 잡은 학연이의 손을 거칠게 내쳤다. 누굴 씨발, 좋아하는 여자애 치는 미친놈으로 보고 있는 거야. 별빛이를 쳐다보니 자기도 예상하지 못했는지 연신 흔들리는 동공에 한숨과 이 상황이 쪽팔리고 짜증이 났다. 이렇게 난 차였네. 어이가 없는 마음에 웃음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공부를 잘하고 운동을 잘 한다고 해도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아니, 쳐다는 봤네 이렇게 말도 하고. 고맙네 진짜 씨발. 책상에 걸려져있던 가방을 거칠게 빼들어서 성킁성큼 앞 문으로 빠져나가려고 했다, 이 교실에 더 이상 있으면 미칠 것 같아서. 하지만 뒤에서 들리는 별빛이의 울적해진 목소리에 발을 멈췄다.
“…너 왜 이렇게 쓰레기가 됐어..”
“…….”
웬만해선 심한 말을 안 하는 별빛이가 그런 상스러운 말을 입에 올렸다 는것이 충격이었지만 그것보다 더욱더 충격적이었던건, 내가 좋아하는 여자애는 나를 쓰레기로 인식하고 있다는 거. 그게 너무 충격적이라 머리를 쎄게 후두려맞은 듯한 기분에 웃음이 나오지가 않았지만, 억지로 뒤를 돌아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씨발, 몇 달전에 쓰레기통을 버렸거든.”
은근히 봐주는 사람들있어줘서 너무 고마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