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백] 선결혼 후연애
W_웰츠
내 아내는 19살이다. 그리고 남자다.
내 남편은 날 너무 어리게만 보는 것 같다. 맞는 말이지만.
***
"경수야, 도경수!"
저 멀리서 단정한 교복 차림의 경수가 걸어오자 반가운 마음에 잔뜩 손을 올려 흔들어대자 그런 백현이 부끄러운건지
주위를 살짝 둘러본 경수가 빛의 속도로 손을 올려보이다 다시 교복바지 안으로 넣는다.
"오랜만이네."
"응, 학교자퇴한 후로 처음보는거니까."
"나쁜새끼."
"..왜 또 그래.."
"넌 내가 때리지않는거에 감사해라."
경수의 내심걱정스러운 얼굴을 읽은 백현이 헤실거리며 웃자 경수가 실없는 웃음보이지 말라며 백현의 어깨를 살짝 친다.
그리고는 백현의 정수리부터 신발 앞코까지 쭉 훑어내리자 백현이 눈을 깜빡인다. 왜 그렇게봐?
"신랑이라는 놈은 밥도 안주나봐."
"나 잘먹는데? 집안일을 해서 그런가.."
"궁전에 사냐? 얼마나 청소를 하길래 애가 헬쓱하다 못해 시체야. 이게 결혼이냐 가정부지."
제 일 마냥 화를 내는 경수가 고마워 빤히 쳐다보고있자 경수가 뭘 보냐며 축쳐진 눈꼬리를 큰 손으로 가려버린다. 그런거 아냐.
애써 경수의 화를 풀어주려 온갖 괜찮은 척 하는 백현의 모양새는 누가봐도 안괜찮아보였다. 몇살이랬지? 아저씨더만 완전.
"27살이었나, 28살이었나."
"도둑놈이야. 19살 미성년자랑 결혼을 하고 싶었대?"
"그 사람도 하고 싶어서 한거 아니야.."
"넌 하고싶었고?"
정곡을 찌르는 경수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러게.난 하고싶어서 한걸까 아님 어쩔 수 없이 한걸까.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그냥 결혼하라 했으니 했을 뿐이고, 같이 살라했으니 같이 살고있는 것 뿐인데
이제 막 일주일 알고지냈다고 말하기도 민망한, 한마디로 처음 본 사람과의 결혼 생활을 이제서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애써 모른척 하고 싶었다.
박찬열. 내 남편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나와 결혼한 상대정도로 치자. 남자와의 결혼이 아무렇지 않다 말할 정도의
그런 정신상태도, 그렇다고 그런 저능적이지도 않은 내가 남자와 결혼하게 된 이유는 단 하나, 빚.
세상이 그렇듯 가난은 죄가 아니라고 하지만 현실은 죄가 되고 그 죄는 평생이 된다. 지금 나와 같이.
나는 한마디로 진실된 사랑의 결실이 맺어진 결혼이 아닌 결혼이라는 포장지 안에 갇힌 인질인 셈이다. 박찬열의 아버지가
세우신 대기업에 몸 담그고 계신 백현의 아버지께서 서류의 사인 한번 잘못한 죄로 회사의 큰 타격을 주게 되었고,
그 어마어마한 빚을 갚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월급에 혹여나 도망이라도 갈까싶어 집이나 땅이 아닌 사람을 걸고
계약을 맺은 셈이다. 어리지만 싹싹하고 야무진 백현이 찬열의 아버지 눈에 좋게 보인 것도 한 몫했다.
"넌 아버지 원망안해? 미안한 소리지만 어떻게 보면 아버지가 널 팔아 넘긴거잖아."
"재미없는 학교생활보다는 재미있어, 결혼생활. 그 사람도."
"...좋아하냐?"
절레절레 고개를 단호히 저어버리는 백현의 어깨가 안쓰럽게 쳐져있다. 그런 백현의 모습이 딱해보여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벤치에 쭈그려 앉아있는 백현을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 누가 들으면 딱딱한 목소리지만 백현은 경수가
저를 많이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어디가게. 어디든지. 표정하나 그렇다고 목소리톤도 바꾸지 않는 경수는 무작정
백현의 팔목을 잡고 걸었다.
그들이 실컷 걸어서 도착한 곳은 백현이 다녔던 그리고 현재 경수가 다니고 있는 고등학교 밑 분식집이었다.
어리둥절하기도하고 반가운 마음에 백현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보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메뉴판도 보지않고 이곳에 있는
모든 메뉴를 달라고 읊어대는 경수의 입을 급하게 막았다. 미쳤어?
"왜."
"농담이지? 누가 다 먹으라고."
"너. 너가 다 먹으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경수의 말에 혀를 내둘렀다. 살 좀 찌워서 보내야겠어, 아무래도 너 집에서 밥 안주는 것 같아.
진심인지 농담인지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경수가 귀여워 백현이 소리내며 웃자 그런 백현이 마음에 안드는지 게슴츠레한 눈을 뜨고
쳐다본다.
"예뻐."
"응?"
"웃으니까 예쁘다고. 그러니까 웃어 좀."
그러고보니 경수를 만나고 부터 한번도 제대로 웃어준 적이 없었던 것 같아 내심 미안해지는 백현이다. 학교에서 제법 밝고
장난끼 많은 여느 남고생이었지만 지금의 백현은 상처받아 타락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그 밝고 귀여운 모습은 그대로지만.
한참을 조잘거리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서로하던 도중 둘이서 먹기에 한참이나 많아보이는 음식들이 줄줄이 나왔다. 진짜로
모든 메뉴가 다 나오는게 아닌가 싶어 백현은 걱정스러웠다.
그 때 주머니 안에서 진동이 연달아 울리기 시작했다. 떡볶이를 입에 넣으려다 말고 주머니를 뒤져 확인하니 찬열의 휴대폰이다.
아차. 아침에 찬열이 두고간 휴대폰을 혹시나해서 가지고 나왔는데 아마 찬열이 전화한 듯 싶다. 사무실 이라고 적혀있는 전화에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으니 역시나 찬열이 조금 다급한 목소리로 휴대폰 좀 가져다 줄 수 있냐며 부탁을 한다.
그의 말에 걱정말라며 회사로 곧장 가겠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왜? 지금 오래?
눈치껏 전화를 듣고있던 경수가 전화가 끊기자마자 백현에게 묻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미안해, 오랜만에 만났는데.
"아냐, 근데 회사가 어딘데?"
"택시타고 10분정도 가면 되."
"같이 가자."
그럼 다음에 보자. 라고 말하며 헤어질 준비를 하던 백현이 의외의 말에 눈을 똥그랗게 뜨고 경수를 쳐다보니 벌써 저만치 서서
계산하고 있었다. 돈 꾀나 많이 나왔을텐데. 겉옷을 챙기고 경수를 따라 나서자 미리 택시를 잡아 놓고 있었다.
중학교때나 고등학교때나 변함없이 저를 챙겨주는건 경수밖에 없었다. **기업이요.
차가 막혀 15분 조금 넘어 찬열의 회사 앞에 도착하자 때마침 회사에서 나오는 찬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막 택시비를 내고 있던
백현을 발견한 찬열이 옅은 미소를 띄우며 살짝 뛰며 걸어왔다.
"미안해. 내가 요즘 정신이 없나보다."
"아니에요. 여기 휴대폰."
"진짜 고마워 ...옆에는 친구?"
휴대폰을 건내받은 찬열이 그제서야 백현의 옆에 서있던 단정하지만 어딘가 살벌해보이는 경수를 발견했다. 사람 좋은 미소로
먼저 자기 소개를 한 찬열이 손을 내밀자 그 손을 마주잡고서는 경수 역시 자신을 소개했다. 백현이 잘 부탁드려요.
아무 대답없이 미소만 띄운 찬열이 다시 백현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 늦을 것 같긴한데, 외식할래?"
"외식이요?"
"응. 오늘 너한테 고마운 일도 있고, 싫으면 집에서 쉬어도 되."
"기다릴게요."
"일 마치고 전화할게, 예쁘게 준비하고 있어."
찬열의 다정스러운 말에 베시시 웃는 백현이 귀여운지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회사 안으로 들어간다.
좋냐? 갑자기 불쑥 들리는 경수의 목소리에 베시시 웃던 얼굴도 금세 풀어졌다. 응, 좋아.
경수의 좋냐는 질문이 찬열을 뜻하는 건지 외식을 뜻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기분좋은 백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