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백] 선결혼 후연애
W_웰츠
"도경수!"
5시쯤 교문 앞을 서성이던 백현이 운동장에서부터 보이는 경수의 실루엣에 두 팔을 들어 힘차게 인사하자
그런 백현의 모습이 또 한번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숙인채 걸음을 빨리한다.
"야, 변백현. 그렇게 티안내도 되거든?"
"반가우니까 그러지."
"반갑긴, 본지 얼마나 됐다고."
"일주일은 넘었거든."
티격태격대면서도 얼굴만 봐도 편해지는 기분에 백현은 싱글벙글이다. 근데 너는 고3이 왜 야자안해?
"공부는 수업시간에 하는걸로도 충분해."
"수업시간에라도 하면 다행이게?"
이게 진짜. 오늘따라 깐족거리는 백현의 말과 행동에 가볍게 팔을 목에 걸어 응징해버린다. 어느 누구 약속한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학교 밑으로 내려가는 두 발걸음이 가볍다. 한참을 내려와 번화가에 들어서자 백현은 기분이 이상했다.
학교 다녔을 적에야 친구들이랑 허구헌날 오던 길을 자퇴 이후로 처음오는지라 옛 기억과 함께 새로운 기분으로
이길 저길을 쏘다녔다. 야, 오랜만에 우리집 갈래?
"너희집?"
"응, 우리 엄마도 너 보고싶어하더라."
"그럼 가자!"
번화가를 지나쳐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있는 경수의 집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고등학교 들어오면서 전보다 뜨문뜨문
가기도했고 결정적으로 백현이 학교에 안나오기 시작하면서 아예 갈수도, 가지도 못했었다.
익숙한 듯 어색한 길을 걸으니 어리숙했던 경수의 모습이 생각나 웃어버리자 옆에서 교복바지 주머니에 손을 푹 넣고
걷던 경수가 뭘 쪼개냐며 핀잔을 준다.
"다녀왔습니다."
경수가 신발을 벗으며 다녀왔다는 말을 하자 돌아오는건 고요한 정적뿐이었다. 거실이며 부엌이며 방안을 확인해도
보이지 않는 엄마의 모습에 머리를 긁적이던 경수가 일단 자리에 앉으라며 백현을 거실 쇼파로 보냈다.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부엌으로 이동한 경수가 맛있는거나 먹자며 전단지를 한아름 들고왔다.
"뭐 먹을래?"
"난 치킨."
전단지를 탁자 위에 흩뿌리 듯 내려놓은 경수가 먼저 백현의 의견을 묻자 저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선 망설임도없이 휴대폰으로 치킨을 시키는 경수의 모습을 쳐다보던 백현이 입을 연다.
"나 치킨 안먹은지 진짜 오래된거같아."
"안사주냐?"
"그런건 아닌데 혼자먹기도 그렇다고 둘이먹기도 좀 그렇잖아."
"먹고 싶을 때마다 우리집와라."
든든하게 웃으며 말하는 경수가 고마울 따름이다. 치킨이 오기 전까지 텔레비전과 휴대폰을 병행하며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다 경수가 툭 던지듯 입을 연다.
"결혼하면 무슨 느낌이냐."
"느낌은 무슨..그냥 결혼이지."
"깨 쏟아지고 막 그래?"
"내가 여자도 아닌데 뭐가 예쁘다고 깨가 쏟아지겠어."
덤덤하다는 듯 말하는 백현이 조금 안쓰러워보인다. 그에 덧붙여 말하는 백현의 말에 한 번 더 안쓰럽다고 생각한 경수다.
그냥 형 하나 생긴기분이지 뭐. 안쓰러우면서도 화가 나는 기분에 리모콘을 쇼파 끄트머리로 던져버리니
백현이 그런 경수의 행동을 말린다. 같이 자긴 자냐? 아, 이건 좀 징그럽다. 키스는? 아니 손은 잡아봤냐?
궁금하기도하고 화가나기도하는 경수가 대답을 유도하는 질문은 아닌 질문을 해대자 어색하게 웃어버리는 백현이다.
"답답한건 너도 마찬가지다, 변백현아."
"아니거든."
아니긴. 또 한번 티격태격대는 둘 사이로 초인종이 울리자 급하게 지갑을 들고 현관문으로 이동한 경수가
탁자 위로 치킨을 내려놓는다. 고소한 치킨의 기름냄새가 온 집안에 퍼지자 참지못한 백현이 후다닥 치킨 포장을 뜯기
시작했다. 와, 진짜 맛있겠다.
"잘 먹을게, 경수씨."
"예예 그러세요, 다 드세요."
끝까지 장난치는 백현을 받아쳐주던 경수가 허겁지겁 먹는 백현의 모습을 쳐다보다 한 조각을 들어 입에 넣는다.
해가 떨어진지 한참 오래되고 배도 부르고, 편안도 하고. 잔뜩 늘어진 채로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영화를 보는데
급 자극적인 야한 장면이 나오자 더 깊은 집중력을 발휘해 쳐다보던 둘은 끝까지 말이 없었다.
야, 나 화장실 좀. 그러다 급하게 일어선 경수를 올려다 보던 백현이 아무런 표정없이 입을 연다.
"그냥 여기서 풀어, 뭘 화장실까지 가."
"니가 풀어줄꺼 아니면 조용히해라."
짖궃은 얼굴로 말을 남긴 채 화장실로 이동하는 경수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백현이 망설이듯 입술을 꾹 물었다.
언제부터 허락받았다고. 나즈막히 말을 내뱉은 백현의 목소리에 걸어가던 발걸음을 멈춘 경수가 뒤를 돌아서서 백현의
앞까지 한걸음에 걸어와 멈춰섰다. 그리고 늘어져있는 백현의 옆에 앉자 백현이 익숙했던 일도 오랜만인지라
뻘쭘하게 경수가 앉아있는 무릎 사이로 내려와 앉고서는 버클을 푸르고 손을 넣으려는 찰나에 경수가 그런 백현의 팔목을
살짝 잡아 행동을 저지했다.
"됐네요, 유부남한테 받을 생각은 없다."
화장실 갔다 올게. 큭큭거리며 웃는 경수가 백현의 머리칼을 헤집어 놓고서는 화장실로 이동한다. 화장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서야 백현은 그 자리에서 경수가 앉아있던 쇼파로 고개를 묻었다. 사실 말이야 아무렇지 않게 했지만
결혼이 뭐라고 양심에 찔려 자꾸 찬열의 얼굴이 생각났던 백현의 모습이 고스란히 경수에게 비춰진 듯해 찬열에게도, 경수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들 뿐이다.
"늦었네."
뒤늦게 장보고 들어오신 경수의 어머니를 뵙고서 푸짐한 밥상으로 인해 배를 빵빵히 채운 백현은 9시라는
제법 늦은 시간에 집에 들어오자 쇼파에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고있는 찬열이 보였다. 찬열의 퇴근시간보다 늦게 들어온
백현이 미안한 마음에 뒷 목을 긁적이다 가볍게 고개 인사를 하고서는 제 방으로 들어가자 그런 백현을
부른 찬열이 뉘였던 몸을 똑바로 앉는다.
"백현아, 방 같이 쓸래?"
"ㄴ,네?"
"걱정마, 널 어떻게 해보겠다는게 아니야."
방에 들어가다말고 부르는 찬열의 목소리에 겉옷만 내려놓고 거실로 나서자 들려오는 찬열의 말에
적잖게 놀란 백현의 표정에 여유가득한 미소로 말하는 찬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