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백] 선결혼 후연애
W_웰츠
결혼한지 일주일 째.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건 어느정도 일까.
***
"아버지는 무슨 생각으로 저 어린애를.."
찬열이 자기 전에 굳게 닫힌 방 문안에서 친구로 보이는 사람과 통화하는 내용을 본의 아니게 듣고 말았다.
그닥 충격을 받지도 그렇다고 심하게 상처를 받지도 않았다. 어디까지나 맞는 말이니까. 지난 밤 찬열이 저에게 제법 진지하게
말한 이후로 어느 기대도, 어느 감정도 만들으려하지 않고 있는 백현이다. 그저 찬열에 대한 마음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일 뿐이지
남녀간의 깊은 사랑의 감정도 그렇다고 친구들끼리와의 진한 우정의 감정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오해하면 내 손해니까.
통화가 길어지는 듯 해 들고 있던 과일 접시를 다시 부엌으로 가져왔다. 삐뚤빼뚤 깎인 못난 사과를 줘서 창피당하느니
차라리 주지않는 편이 낫다 생각한 백현이 그 중 제일 못생겨보이는 사과 조각 하나를 집어들어 한 입 베었다.
아무래도 남자는 여성스러운 여자에게 끌리는 편이니까 투박한 이 사과가 그닥 반갑지 않을거라 생각했다.
백현이 이토록 찬열을 신경쓰는 이유는 사랑받고 싶어서가 아닌 버려지는 것이 무섭기 때문이었다.
[내일은 뭐해?]
침대에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고 있던 백현이 이젠 누군지 알 것 같은 진동소리에 자연스럽게 답장을 보낸다.
도경수와 알고지낸지는 벌써 6년째가 다되어 간다. 우리도 그닥 평범한 친구사이라고 말하기는 좀 애매했던 과거가 있던 터라
아직도 그를 보면 마냥 보기 편하고, 허물없는 친구라고 하기는 불편했다. 사귀었냐고하면 절대 아니다.
그럴뻔 했냐고 물어도 그 역시 절대 아니다. 우리를 말할 수 있는 정의는 단순히 사춘기 어린 남학생들의 욕정을 풀어주었던
사이. 딱 이 정도가 적당했다. 서로라고 하기엔 좀 애매하지만.
중학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갈 때쯤 제일 친하게 붙어먹은 친구라곤 오직 도경수밖에 없었던 백현은 매일같이
경수의 집 혹은 백현의 집에서 하루를 보내는게 일상이었다. 여느 남학생들처럼 같이 야한 동영상을 보기도 했었고, 경수의
여자친구 이야기도 했었다. 오로지 관심사는 여자인 듯이. 어느 한 날 같이 야한 동영상을 보던 중 옆에 앉아있던 경수가
백현의 손을 꼭 쥐어 오던 때부터 그들의 관계는 시작되었다. 대부분 백현이 경수를 풀어주곤 했는데 단지 그 뿐이었다.
손이나 입에서 끝냈지 그 이상의 어떤 행위도, 감정을 나누는 듯한 키스와 포옹 역시 해당되지 않았다.
오죽하면 경수가 백현에게 너는 고자냐며 놀리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저 웃어넘겨버리는 백현이었다.
"다녀오세요."
"응 일찍 올게."
강아지마냥 축 쳐져있는 가느다란 머릿결이 흩날리는 백현을 뒤로하고 문을 나선 찬열이 잔상으로 남아있는 백현의
모습을 한번 더 떠올렸다. 귀여운 놈.
차가 주차되어있는 곳에 내려가 시동을 걸자 차안의 차가운 공기가 몸 속 안으로 들어오는 듯 했다. 서둘러 히터를 틀고
익숙한 길로 운전을 했다. 오늘은 서류만 잘 확인해서 사인만 하면 평소보다 일찍 끝날 것 같은 예감에 창문 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테이크아웃 전문 디저트카페들을 유심히 살폈다. 남자애들도 단거 좋아하나?
"팀장님, 회장님께서 부르셨습니다."
회사에 도착해 자신의 명패가 반듯이 세워져있는 팀장실로 들어가니 담당 비서가 곧이어 들어와 짧은 전달사항을 한다.
알겠다는 표시로 간단히 고개를 끄덕인 찬열이 미간을 찌푸리며 팀장실을 나섰다. 엘레베이터로 향하는 중에도
많은 직원들이 찬열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지나갔고, 공과 사의 구별이 확실한 찬열은 사람 좋은 미소로 한명 한명
인사를 받아주었다.
똑똑. 회장님 박 팀장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아버지가 계시는 곳에 도착하니 앞을 지키던 여비서가 아버지에게 저의 존재를
알리고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저 왔습니다, 아버지. 막 계약서를 확인하던 찬열의 아버지는 능숙하게 쇼파에 앉는 찬열을 보고서
쇼파로 자리를 이동했다. 결혼 생활은 좀 어떠냐.
"그게 보자마자 아들에게 할 소리세요?"
"그럼 내가 널 뭐때문에 불렀을꺼라 생각하고 왔는지 모르겠구나."
백현과의 결혼 생활에 관한 질문을 안할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던건 아니지만 결혼을 하고나서 처음 보는 아들에게
무작정 결혼 이야기부터 하는 아버지가 조금 미웠다. 아시면서 뭘 물어보세요. 결혼 하기 전부터 완강히 거부하던 찬열이
못내 걱정스러웠던건 사실이지만 제 말하나에 꿈뻑하던 아들임을 알기에 별 걱정은 없었다.
"어려운건 알지만 좀 신경써줘라."
"남이 들으면 저 감옥행인건 아시죠?"
"어쩔 수 없잖니."
"인질이나 마찬가지인 애를 왜 그렇게 제가 신경써줘야하는건데요."
찬열의 결혼 소식은 그의 친구 몇명과 양가 집안 식구들빼고는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다기 보다 아무에게나
알리지 않았다가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인질과도 마찬가지인 백현을 이렇게도 신경써서 챙겨야하는 이유를
도대체 모르겠는 찬열은 그저 답답할 뿐이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의 태도도.
욱하는 성격이 아님에도 욱하는 마음에 모진말만 내뱉은 찬열이 아버지에게 짧게 인사를하고 회장실의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아버지의 말이 틀린건 아니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팀장실에 들어와 쌓인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한 찬열이
책상위에 올려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어,백현아. 뭐 먹고싶은거 있어?"
짧게 통화를 마친 찬열이 서둘러 수트 자켓을 챙겼다. 생각보다 더 빨리 끝난 업무에 서둘러 회사를 나섰다.
아무거나 다 괜찮다고 말한 백현의 대답에 오는 길에 봐뒀던 베이커리집에 들어가 무작정 남자애들이 좋아할 만한거로
싹 다 담아달라고 말하니 두 손 가득 아기자기한 포장지가 들렸다. 여자애들도 아니고 이런 아기자기한 베이커리 따위에
감동받을거라 생각하진 않지만 백현이 뭘 좋아하는지 모르게 일단은 사고보자싶었던 찬열이다.
탈칵-. 비밀번호를 열고 집에 들어서니 집 안이 조용했다. 백현아? 조용히 부르니 쇼파에 누워서 불편한 자세로
자고있는 백현이 보였다. 텔레비전이 혼자 음소거가 된 채로 떠들고 있었다. 사온 디저트를 거실 탁자 위에 올려두고는
찬열 역시 쇼파 위로 앉았다. 옆에서 팔이 불편하게 구부러져 누워있는 백현이 걱정되 조심히 그를 들어올리니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백현의 편안한 얼굴이 보였다. 이렇게 자세히 보는건 처음이었던 그의 얼굴에 잠시 감상아닌
감상을 하다 그의 방 안으로 들어가 침대위에 백현을 눕혔다.
"으응.."
"이제 깼어?"
"어?"
누워서 기지개를 피던 백현이 갑자기 들리는 찬열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책상에서
회사 업무를 하고있는 찬열이 보였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니 저가 찬열의 침대 위에 누워서
잠을 잤다는 것을 알았다. 눈을 꿈뻑이며 그를 쳐다보니 찬열이 키득거리며 웃는다.
"너 누가 내 침대에서 자래."
"아, 죄송해요. 저도 몰랐어요."
"안되겠네."
"청소하다 잠들었나봐요. 죄송해요."
분명히 청소하고 있지 않았는데 왜 이곳에 누워있는지 알 수 없는 백현이 일단은 사과를 했다. 그러자 진지하게
사과하는 백현이 웃겨서 들고있던 펜을 놓고서는 잔뜩 웃어버린다.
"귀여워."
"일부로 그런게 아닌데.."
"알아, 내가 눕혀놨어. 그리고 이게 뭐 사과할 일인가."
"..."
"결혼한 사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