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행복에게 05
4장. 영화와 현실의 괴리 (2)
“그런 의미에서 성우씨,”
“...네?”
“아까 왜 그렇게 넋 나간 사람처럼 있었어요? 영화 끝나고 나서.”
“아...”
“하나 짐작 가는 이유가 있긴 한데, 물어봐도 돼요?”
“뭔데요?”
“전에 만났던 분 생각났죠?”
- 4년 전
[여보세요? 성우야.]
[응?]
[오늘 날씨도 별론데 그냥 우리 집에서 영화나 볼래?]
[그럴까? 나 지금 출발하면 누나 집까지 한 30분 정도 걸릴 것 같은데.]
[알았어. 그럼 내가 영화 골라놓고 있을게 얼른 와.]
[응. 금방 갈게.]
“누나! 나 왔어.”
“생각보다 빨리 왔네?”
“나오자마자 버스를 바로 잡아가지고.”
“아 그랬구나... 맞다. 영화 골랐는데 너 이거 본 적 있는지 봐봐.”
“이터널 선샤인? 이거 들어는 봤는데 아직 한 번도 안 봤어. 로맨스 영화인가?”
“응. 너 로맨스 별로 안 좋아하지? 싫으면 다른 거 봐도 돼.”
“...나 로맨스 좋아하는데.”
“그랬나?”
“이거 나도 보고 싶어. 빨리 보자.”
침대에 나란히 기대 누워 벽면에 펼쳐진 스크린을 통해 영화를 보는 승혜와 성우는 숨소리도 내지 않은 채 영화에 집중했다. 영화가 어느덧 후반부에 이르자 승혜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미세하게 떨리는 승혜의 몸에 놀란 성우가 승혜를 쳐다보았다.
“누나 괜찮아?”
승혜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영화가 절정에 달하자 승혜가 참았던 눈물을 전부 쏟아내고 말았다. 당황한 성우가 승혜를 꼭 끌어안고는 등을 토닥여주었다. 제대로 된 연애 경험이 없었던 성우는 승혜를 위로하면서도 끝내 승혜의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영화가 끝난 후 감정을 추스르고 영화 이야기를 나누던 승혜가 침대 위에서 성우를 마주 볼 수 있는 자세로 고쳐 앉더니 기대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우리가 헤어진다면 성우야,”
“누나, 그런 이야기 하지 말자 우리.”
“아니, 끝까지 들어봐. 우리가 헤어지고 나서 영화에서처럼 기억을 지울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너는 나에 대한 기억을 지울 거야?”
“음... 누나랑 헤어지는 상상조차 하기 싫어서 잘 모르겠는데.”
“야, 그래도 한 번 생각해봐. 나 궁금하단 말이야.”
“아마도... 지우지 않을까?”
승혜가 놀란 표정을 짓는다. 기억을 지우지 않고 자신을 오래 추억할 거라는 대답을 예상한 승혜가 성우에게 되묻는다.
“...왜? 왜 지울 것 같은데?”
“기억이 남아 있으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매 순간 누나랑 함께했던 추억들이 머릿속을 돌아다녀서 아무것도 못 하게 되면 어떡해. 지금 이런 이야기 나눴던 것도 막 떠오르고 할 거 아니야. 그렇게 되면 나 맨정신으로는 못 견딜 것 같은데.”
“못 산다 진짜.”
생각지 못한 성우의 답변에 수줍은 웃음을 보이던 승혜가 성우의 볼을 잡고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성우의 양쪽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숨 쉴 틈도 주지 않은 채 분위기를 이끌어가던 승혜가 잠시 입술을 떼었다. 승혜가 성우의 볼을 잡은 채 자신의 코끝을 성우의 코끝에 맞대고는 살짝 미소 지었다. 성우가 고개를 들어 승혜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사랑해요 누나.”
“내가 더 많이 사랑해.”
“뭐야, 말 안 해줄 거예요?”
성우의 귀에 다시 은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에 만났던 사람이 생각난 건 아니고, 그냥 그 사람이랑 같이 봤던 게 생각나서요.”
“그게 그거죠 뭐.”
“달라요.”
“네?”
“다르다고요.”
소개팅에 나와 인사를 건네던 그때의 차가운 표정을 다시 마주한 은주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표정은 좀 푸시고. 어떻게 다른데요? 난 잘 모르겠거든요.”
“그 사람이랑 영화를 봤던 날은 전부 기억나는데, 그 사람이 그립거나 하지는 않아요. 너무 아름다워서 슬프기까지 한 이 영화에 그 사람을 끼얹기 싫어.”
애써 담담하게 말하는 성우에게 은주가 물었다.
“엄청 안 좋게 헤어졌나 봐요.”
“바람나서 떠났어요. 그 사람이.”
“아...”
은주는 한동안 해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미안한 마음에 성우의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음식만 젓가락으로 톡톡 건드리고 있는 은주에게 성우가 말했다.
“아까 영화 처음 봤을 때랑 다시 봤을 때가 어떻게 다르냐고 물어봤었죠?”
“네? 아... 굳이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요.”
“그러려고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어요. 어차피 다 지난 일인데, 그냥 영화 감상평 이야기하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인가 싶고.”
성우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간다.
“처음 봤을 땐 솔직히 난해하다고 생각했어요. 과거와 현재를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정신없고, 기억을 지우고 싶다고 했다가 지우기 싫다고 했다가, 뭐 이런 영화가 다 있나 했죠. 그래도 마지막 장면은 좀 감동적이더라고요. ‘상대방의 단점이 보여도 다 안고 가는 게 연애다.’라는 교훈을 주는 아름다운 영화구나. 그게 끝이었어요. 아, 또 하나 느낀 점이 있다면 짐캐리가 정극 연기도 잘 한다는 것과 케이트 윈슬렛한테 파란 머리가 잘 어울린다는 것 정도?”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면서도 너무 무거워진 분위기가 계속 신경 쓰였던 은주가 괜히 의미 없는 말을 뱉었다.
“저도 아까 그 생각 했는데. 언젠가 파란 머리로 염색해볼까 봐요.”
“기대되는데요? 은주씨 파란 머리.”
“해봐서 이상하면 다시 검은색으로 덮어버리면 되죠 뭐. 그래서, 다시 보니까 느낌이 어떤데요?”
성우가 잠시 동안 할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는 말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