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 |
쾅쾅쾅!
막 샤워를 하고 나오는데 대문이 부서져라 울렸다. 나는 급하게 허리에 타월을 두르고 문을 열었다. 푸른 밤공기. 그리고 술 냄새가 확 풍겼다. “으으… 왜 이렇게 문을 안 여나 했어. 우리 지호 샤워 중이었구나?” 밤중에 웬일이야. 나는 혼잣말에 가까운 물음을 읊조리며 비틀거리는 김유권을 붙잡아 신발을 벗기고 집안으로 들였다. 어제 걸음발을 배운 사람처럼 김유권은 심하게 다리를 절었다. 그의 무릎 부분이 피로 흥건했다. 술 먹고 넘어졌구나. 나는 혀를 차며 늘어지는 유권을 소파에 앉혔다. 평소에는 말 수도 없고 딱 부러지는 놈인데 술만 먹으면 이렇게 꽐라가 된다. “기다려. 빨간약 가져올…….” “으응 지호야, 좋은 냄새나.”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던 손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났는지 유권이 나를 훽 잡아 당겼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의 머리는 이미 유권의 가슴팍에 푹 파묻혀 있었다. 유권이 날 껴안으며 덜 마른 머리카락에 볼을 비볐다. 갸르릉, 고양이 울음소리와 비슷한 것이 위에서 들렸다. 본의 아니게 유권의 심장박동이 느껴졌고 그래서 몸이 달았다. “놔줘.” “싫어.” 유권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가지마아 지호야, 여기 내 옆에 있어어. 애교 섞인 연약한 말에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떠난 건 너잖아.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갈게.” “진짜루?” “어.” “약속해.” 복사, 도장, 카피까지 하니 그제야 유권이 안심하며 팔을 푼다. 나는 애완동물에게 하듯 유권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방으로 들어갔다. 서랍을 열고 구급상자를 찾는데 팔꿈치로 선반에 두었던 청첩장을 건드려 떨어뜨리고 말았다. 잠깐 망설이다가 발치에 떨어진 그것을 주웠다. 새하얀 백상지, 실버색 리본. 신랑의 이름 칸에 쓰여 있는 김유권이란 성명에 목울대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쳤다. 괜히 봤어. 후회하며 청첩장을 쑤셔 박듯이 서랍에 넣어두고 구급상자를 꺼냈다. 답답해진 기분에 한숨을 뱉으며 거실로 나오자 유권이 소파에 엎드린 채 쿠션에 턱을 괴고 있었다. “지호야.” 나른하도록 섹시하게 접히는 눈매. 저 표정을 미치도록 사랑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유권의 바지를 걷으려다가 스키니진이라 포기하고 버클부터 풀기 시작했다. 유권이 몽롱한 눈길로 나의 동작을 훑어보는 바람에 손이 뻣뻣해질 만큼 힘이 들어갔다. 알몸이라면 서로 지겹게 본 사이이니 하등 부끄러울 게 없는데도 어쩔 수없이 얼굴에 열이 오른다. “덜렁거리긴. 조심 좀 해.” 면봉에 약을 묻혀 상처 부위를 살살 발라 주었다. 으… 유권이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아파? 유권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술을 먹었음에도 감정 표현에 솔직하지 않은 녀석이다. 나는 조심조심 약을 바르고 데일밴드를 붙였다. 피 묻은 바지는 아무래도 빨아 놓는 것이 좋겠지. “내 바지 줄 테니까 그거 입고 집에 가자.” “집…?” “데려다줄게.” “무슨 집…?” “너와… 선혜 씨가 사는 집.” 심장에 누가 칼을 찔러 놓는듯했다. 한심하지만 너무 아파서 눈물을 흘릴 뻔했다. 하,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걸. 회색빛으로 가슴에 싸하게 퍼지는 통증에 이를 악물고 뒤돌아섰다. 바지 가져올게. “지호.” 유권이 내 손을 잡았다. 너는 어쩜 그렇게 이기적이냐. 속으로 원망의 말을 되뇐 채 나는 유권의 손을 떼려고 했다. 이기적이란 말을, 감히 내가 내뱉을 입장은 아니면서도 막상 상황이 뒤바뀌자 그가 한없이 미웠다. 어차피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는데도. “자고 갈래.” “선혜 씨는 어떡하고.” 얄상한 유권의 손이 흐르듯이 내 허리를 감싸고 있는 타월에 향했다. “말해뒀어.” “이러는 거 범죄다.” “아직, 혼인 신고 안했는걸.” 타월이 떨어졌다. 동시에 나는 몸을 틀어 유권의 뒷목을 잡고 키스했다. 겨울바람에 건조해진 입술은 약간의 마찰로도 피가 흘렀다. 나는 흡혈귀처럼 유권의 피를 핥았다. 비릿한 쇠맛이, 이게 바로 우리의 현실이라고 넌지시 말해주는 듯해 가슴이 더 아파졌다. “미리 축하한다.” “응.” “잘 살아라, 김유권.” “그럼 이게 마지막으로 몸을 섞는 거야?” 마지막. 마지막이 이토록 아리고 슬픈 단어였나. 나는 차마 확답은 하지 못하고 아마, 라며 시선을 피한 채 두루뭉술 대답했다. 유권이 다정하게 눈꼬리를 휘며 내 콧잔등을 깨물었다. 심장이 빠르게 식어가고, 나는 김유권에게 거짓말을 했다. [블락비/짘권] 카프리카 상수 w.검백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간질간질한 감촉이 무거운 잠에 파묻혀있던 나의 영혼을 건져 올렸다. 맑은 햇빛이 하얀 침대보를 덥히고 방안을 은은하게 밝힌다. 달콤한 향기와, 따스한 옆자리와 이상적인 아침. 나는 눈을 굴려 내 몸에 올라탄 유권이 손가락 장난을 치는 것을 지켜보았다. 유권은 내가 깬지도 모르고 무언가를 꼼지락 꼼지락 열심히 쓰고 있었다. “6… 1… 7… 4?” “어, 깼네?” 쓰는 대로 따라 읽자 유권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햇살보다 밝은 미소였다. 나는 누워있는 채로 손을 들어 유권의 뺨을 감쌌다. 숙취는 괜찮아? 어제 술 많이 마셨던데.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유권이 장난스럽게 내 뺨을 꼬집었다. “바보. 허리가 더 아파.” 더 아프게 해줄 수 있는데. 벌떡 일어나 이번엔 내가 유권을 깔았다. 똘망똘망한 눈망울이 귀여워 그대로 입술에 쪽쪽 뽀뽀를 했다. 아하하 간지러, 지호야 그만해. 간드러지는 음색이 꼭 푸른 하늘을 닮았다. 유권의 목소리는 피리처럼 피아노처럼 플루트처럼 하나의 악기였다. 새벽별을 닮은 목소리는 오롯한 유권의 소유. 인어공주의 목소리가 바로 이랬을까. “가봐야 한단 말야.” 유권이 나를 밀어냈다. 옛날이었으면 싫다고 했겠지, 나 좋을 대로 행동했겠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억지로 웃으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아침은 먹어야지.” “생각 없어서.” “집까지 차 태워줄게.” “됐어. 너도 출근해야 하잖아.” 유권이 셔츠의 단추를 채우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답했다. 자꾸만 그를 잡으려 하는 내가 싫다. 나는 옷 입는 유권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며, 옛날의 나와 유권이 무슨 대화를 했는지 기억해내려 애썼다. 더 말을 나누고 싶은데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단어가 목을 넘지 못하고 턱턱 막힌다. 어색함. 이런 감정을 유권에게 느낄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강산이 바뀌는 10년의 세월도 잘 버텼던 우리의 관계가 점점 변하고 있었다. “권아.” 나는 유권을 늘 권아, 라고 불렀다. 유권은 현관에서 신발을 신다가 돌아봤다. 맑은 눈동자와 앙증맞은 코와 윤기 나는 입술. 나는 문득 그를 힘껏 끌어안고 싶었다. “선혜 씨한테 잘해줘. 내 안부도 전해주고.” 또다시 원치 않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온다. 유권은 싱겁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채 도어락을 열고 나가버렸다. 온기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엘리베이터 소리가 울리고 몇 분이나 지났는데도 나는 꼼짝도 못한 채 자리를 지키고 서있었다. 너무나 이상한 경험이었다. 또한 평생 적응할 수 없을 것 같은 아픔이었다. 중학교 입학식 때 김유권을 처음 만났다. 아마 유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우리는 옆자리에 앉았었다. 으레 성장기 남학생들이 그렇듯 유권 역시 미리 커질 몸을 대비해 헐렁한 교복을 입고 있었다. 엄지손가락까지 내려오는 마이 소매며 목둘레가 한참은 남는 셔츠까지. 본인의 치수에 비해 지나친 감이 있는 교복이 꼭 물려받은 아버지의 양복처럼 우스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힐끔힐끔 저를 보는 내 시선이 불편했던 건지 유권이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왜 그렇게 봐? 교복이 그게 뭐야. 형 옷 물려받았냐. 유권이 얼굴을 연분홍빛으로 붉혔다. 사내자식이 수줍어하는 모습은 더 우스꽝스러웠다. 내가 이사이로 피식 웃자 유권은 푹 고개를 숙이고는, 으으 엄마… 오버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ㅡ라며 울먹였다. 그리고 다음날, 유권은 세탁소에서 줄였는지 적당히 몸에 맞춰서 핏이 사는 교복을 입고 왔다.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유권이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의기양양해서 자신감이 넘치던 눈빛. 이상하게 그게 잊혀 지지 않는다. 본격적으로 친해진 건 같은 반이된 중학교 3학년부터지만, 나는 입학식부터 일방적으로 유권을 눈에 담아두고 있었다. 나와 유권을 말할 것 같으면 친구 이상으로 서로에게 비밀을 털어놓는 사이다. 부모님도 모르는 고민거리를 공유하고 장래희망에 대해 의논하고. 문책을 구하거나 무언가를 해결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일종의 의식이랄까. 마음속의 흉측한 면을 환히 내보이고 나면 우리는 비온 뒤 땅이 굳는 식으로 더 단단해지곤 했다. 우리의 결속력은 신이라도 깰 수 없을 것 같았다. 언젠가 친구들이 나와 유권을 보며 장난스럽게 ‘너희 둘 사귀냐?’ 라고 물은 적이 있었다. 정색하면서 미쳤냐고 반문하긴 했지만 나는 우리가 남들에게 그렇게 보인다는 것에 꽤 놀랐었다. 돌이켜보니… 나와 유권은 오해할 만큼 서로를 필요 이상으로 챙겨주긴 했었다. 밥을 먹다 입가에 소스가 묻으면 닦아주고 신발 끈이 풀리면 대신 묶어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던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남들이 보지 않는 장소에서 몰래 뽀뽀를 하거나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친구끼리 이러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고 정상이 아니란 것도 알고 있었지만 사춘기 시절의 치기로 넘겨짚었다. 그랬던 스킨십이 잠자리까지 발전하고 만 것이다. 발코니에 나와 담배를 물었다. 텁텁한 연기가 유령처럼 공기를 교란시켰다. 눈을 감으니 그동안 사귀었던 여자들의 얼굴이 둥둥 떠오른다. 미애, 지현, 선영, 현숙, 하람, 희주, 다솔, 나진…… 끝은 유권이었다. 김유권. 나는 발갛게 타오르는 담배 필터를 관조하며 침을 삼켰다. 속이 울렁거리면서 먹었던 저녁이 금방이라도 넘어올 것 같았다. 못 참겠어서 그대로 달려가 변기에 머리통을 숙였다. 우욱! 기다렸다는 듯 위액에 범벅이 된 음식찌꺼기가 소화되다 말고 통째로 뱉어졌다. 나는 뱃속에 있는 장기들을 모두 쏟아낼 것처럼 격렬하게 헛구역질 했다. 위가 쓰리고 목이 따갑다. 변기 물을 내리지 않은 채 타일 위로 벌러덩 나동그라졌다. 손에서 떨어진 담배꽁초는 아직도 타오르고 있었다. “제기랄.” 뺨이 축축하다 했더니 어느새 울고 있었나보다. 어처구니가 없어 비실비실 헛웃음이 나왔다. 서른 살 아저씨가 토하다 말고 화장실 바닥에 누워 질질 짜다니, 알려지면 모두 손가락질 할 거다. 술에 취한 것도 아닌 말짱한 정신으로 이 무슨 추태냐. 일어나려고 해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움직일 수 없었다. 차라리 이대로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가면 유권이 날 찾으러 와주지 않을까. 한심하고 유치한 생각이 머리에 가득 찼다. 나와 김유권이 친구도 애인도 아닌 어정쩡한 관계를 가지는 동안 서로에게 사귀는 사람이 없었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도리어 내 쪽에서 먼저 여자 친구가 생겼다. 유권은 놀란듯 했지만 담담하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여자친구가 있는 기간만큼은 우리는 철저히 친구 사이로 지냈다. 그러나 여친과 깨지고 솔로로 돌아가면 누가 먼저 말할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관계를 가졌다. 나, 깨졌어. 그렇게 말한 날에는 꼭 유권과 함께 잤었다. 두 자리 수에 다다르는 여친을 만든 이유가 차라리 깨지기 위해서는 아니었을까. 나는 둥글게 몸을 말고 눈을 감았다. 이대로 눈을 떴을 때, 중학교 입학식 날로 돌아갔으면 하는 실없는 망상을 품은 채. “김유권 결혼한다더라?” “어.” “아, 하긴. 김유권 덕후가 그걸 모를 리 없지. 쯧쯧 안 됐네, 우지호. 이제 너 김유권의 일 순위에서 밀려나겠구나.” 오랜만에 만난 동창과 술자리를 갖다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심기가 불편해져서 거칠게 소주잔을 내려놓았다. “뭔 소리야? 밀려 난다니.” “야 그렇잖아. 여우같은 마누라 두고 큼큼한 홀아비 냄새 풍기는 친구가 눈에 들어오겠냐, 상식적으로.” 기분이 몹시 더러웠다. 나에게 김유권은 그리고 김유권에게 나는 항상 일순위였다. 우리는 서로에게 첫번째였다. 첫번째여야만 했다. 결혼도, 무엇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다고 믿었다. 나무에서 땅으로 사과가 떨어지듯이 그건 너무도 당연해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조차 없는 진리였다. 나는 태연하게 삼겹살을 구우면서 말을 꺼냈다. “아무리 그래도 15년 우정이 사랑만 못하려고.” “당연하지! 사랑은 딱 하나뿐이잖냐. 우정은 친구마다 있으니 아무래도 희소성이 덜하지.” 암 그렇고말고! 자기가 말했으면서 좋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우와, 나 방금 좀 멋있지 않았어? 이거 완전 명언인데? 자화자찬에 빠진 동기 놈을 눈알이 빠져라 노려봤다. 화가 났다. 놈에게 화가 난 것보다 반박할 말이 없다는 상황에 화가 났다. 나는 벌떡 일어나 플라스틱 사각 의자를 걷어찼다. 동기가 당황해하며 씩씩거리는 나를 쳐다봤다. “그래. 넌 친구고 나발이고 여자한테 목매달고 살아! 비겁한 자식.” “왜 그래? 그런 뜻이 아니잖아.” “실망이다, 박경.” 돌아서서 가게를 뛰쳐나왔다. 야, 우지호! 야!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귀를 막고 그대로 달렸다. 스스로가 너무도 한심스럽고 부끄러워서 멈출 수가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동기의 말이 비수가 되어 심장을 너덜너덜하게 찢어발겼다. 울기 싫은데 울음이 나왔다. 쌩쌩 지나가는 자동차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나를 치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로수에 팔을 대고 헉헉 숨을 골랐다. 전정기관이 고장 났는지 세상이 방향을 잃고 어지럽게 빙글거린다. 삐빅 거리는 문자음에 주머니를 더듬어 핸드폰을 꺼냈다. 유권이 보낸 것이다. ‘495’ 뜻 모를 세 자리 숫자. 495에서, 나는 365일을 하고도 30일 전을 떠올렸다. 아마 그맘때였을 거다… 김유권이 전선혜를 만난 것이. 온 세상이 나만 빼고 행복했다.
|
中 |
온 세상이 나만 빼고 행복했다.
이 단순한 문장에서는 형용할 수 없는 지독한 외로움이 베어 나온다. 행복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고 상대적이기 때문에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리고 상식적으로 한 사람을 제외한 모두가 행복하다는 것이 가능할리는 없지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 그렇게 느꼈다는 것. 비참함, 괴로움, 허탈함. 무한한 우주에서 혼자 버려진 느낌. 부정적인 모든 것을 포함하는 감정의 중심.
사랑은 결코 로맨틱하지만은 않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어둠이 있으면 빛이 존재하듯 사랑도 결국은 추악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달콤하면 달콤할수록 더 어둡고 음습한 존재가……. 아마도 완벽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완벽하다면 ‘변하지’ 않을 테니까. 오로지 완벽한 신만이 항상 변함없을 뿐. 나는 책에 적힌 단어를 입안으로 읊조렸다. 불변수, 회생숫자.
“불변이라는 단어는 참 로맨틱해.” “왜?”
노트북을 두드리며 리포트를 작성하던 지호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맑고 총명한 적갈색 눈동자는 언제나 봐도 아름답다.
“변하지 않는다는 것 말야. 그래서 사시사철 늘 푸른 소나무가 조선시대에는 찬미의 대상이었던 거지. 사람은 너무 쉽게 마음을 바꾸잖아. 지조가 없어.” “변하는 게 무조건 나쁜 건 아니잖아.” “그치만 세상에는 변하는 게 너무 많으니까… 몇 개쯤은 변하지 않았음 해서.”
나는 책에 얼굴을 박은 채 중얼거렸다. 도서관이라 그런지 몇 마디 하지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사방으로부터 따가운 눈총이 느껴진다. 나는 책 위로 눈만 쏙 빼놓은 채 지호를 쳐다봤다. 지호가 입모양으로 ‘조용히 해야겠다’라고 속삭였다. 나는 고개를 가만 끄덕였다.
도서관 데이트(나는 이것도 데이트라고 생각했다)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호와 나는 도로변에 있는 적당한 음식점에 들어갔다. 주문한 국수가 나오자 우리는 말없이 수저를 쥐고 음식을 먹었다. 불편하지 않은 침묵이었다. 점심과 저녁 사이의 애매한 시간대라 손님이라곤 지호와 나 둘뿐이어서 김치를 씹는 소리와 면발을 후르릅 들이키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아주 사소한 소음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냥, 그랬다. 지호와 함께하면 보잘 것 없는 일도 특별하게 다가오곤 했다.
“권아, 말보로 뜻이 뭔지 알아?” “담배 말보로?” “응, 그거.” “말보로가 말보로지 무슨 뜻이 있어?” “Man Always Remember Love Because Of Romance Over.” “뭐?” “남자는 흘러간 로맨스 때문에 항상 사랑을 기억한다, 의 약자.”
지호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국수 먹다 말고 뜬금없이 튀어나온 담배 얘기가 황당하면서도 그답지 않은 센티멘털함이 낯설고 자극적이었다. 나는 입안에 텁텁하게 남아있는 음식물을 목 뒤로 꿀꺽 삼키면서 지호를 마주봤다. 소음이 끊겼다. 침묵이 불편해졌다.
“권아.” “…….” “나랑 사귀자.”
2011년 04월 25일, 스무살의 우지호가 스무살의 김유권에게 고백했다.
[블락비/짘권] 카프리카 상수 w. 검백
……지호는 현재까지 통 틀어 내게 총 세 번의 고백을 했고 나는 세 번 모두를 거절했다. 그래도 지호는 상처받지 않았을 거다. 왜냐하면 세 번의 고백은 전부 뜬금없었고 갑작스러웠고 가벼운 어조에 너무나도 장난스러웠으니까.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왜 내가 지호를 거절했을까, 라는 물음으로 넘어갈 텐데 그 대답은 비교적 쉽다. 내가 겁쟁이였기 때문이었다. 지호의 사랑이 변할까봐 지레 겁먹고 고백해올 때마다 필사적으로 거절해온 것이었다. 한 편으로는 지호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또 한 편에 존재하는 겁쟁이 김유권이 지호를 밀어냈다. 지호와 사귀다가 헤어진다면 애인만을 잃는 게 아니었다. 친구로서, 동창생으로서, 인맥으로서 다 한줄기씩 뭉텅이로 잘려나가는 것이었다. 나는 잠깐의 유혹에 못 이겨, ‘쉽게 변해버릴 사랑’에 못 이겨 우지호를 잃고 싶지 않았다. 나는 우지호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했다. 지호가 여자친구와 헤어지면 생기는 잠깐의 공백기 동안 몸을 섞으면서 이런 사랑도 나쁘지 않다고 자기 위로를 되풀이했다. 그것이 비록 눈가리고 아웅하기에 지나지 않았어도.
“어어?” “어!”
시간이 흐르고 흘러 바야흐로 대학교 4학년, 취업 공부로 서로 얼굴 볼 시간도 없을 만큼 바쁠 무렵에 우리는 길 한가운데서 마주쳤다. 같은 동네에 사니 이정도 우연쯤이야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닌데도 우리는 까무러치게 놀라고 말았다.
“우, 우지호 너 뭐야!” “그건 내가 할 소린데.”
나는 입을 떡 벌리고 지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의 옷차림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똑같았던 것이다. 모자, 가방, 신발 심지어 양말까지……. 짜고 치더라도 이렇게까지는 할 수 없을 텐데 참으로 기가 막힌 우연의 일치였다. 본의 아닌 지호와의 커플룩에 당황스럽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기분이 들뜨기도 했다. 오랜만에 보는 지호의 얼굴이 좋았다. 가랑비에 옷이 다 젖어버리 듯 서서히 서로에게 물들어가는 우리가, 취향이 비슷해져가는 우리가 좋았다.
“요즘 살만 해?” “무슨. 토익 점수 쌓느라 아주 죽을 고생이야. 지호 넌 어학연수 다녀왔었지? 실력 많이 늘었어?” “Not bad.”
오, 발음이 제법인데. 내가 과장스럽게 팔꿈치로 지호의 옆구리를 찌르자 지호가 특유의 장난꾸러기 미소를 그렸다. 그 표정 하나에 온갖 시름이 녹는다는 걸 너는 과연 알고 있을까. 내가 반짝반짝 눈을 빛내자 지호의 얼굴이 서서히 변했다. 짙어지는 농색 눈동자에 심장이 둔탁하게 뛰었다. 공기의 흐름이 달라지고 꽃봉오리가 개화하듯 지호의 입술이 벙긋 열리는데… 폰이 울렸다. 시간이 깨졌다. 긴장이 풀리고 심장 부근이 싸늘하게 식어간다. 내게 할 말이 있어보였지만 지호는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먼저 받았다. 여보세요, 아 희주야. 응, 나 가는 중이야. 잠깐만 기다려. 어? 물론 보고 싶지. 뭐, 여기서 해달라고? 얘가 여기 지금 길거리야. 여자가 낯부끄러운 줄 몰라. 아 진짜, 나중에 해줄게. 나중에 해준다고. 끊어, 바보야.
“…여자 친구?” “아, 어어. 최희주라고 너도 알지?” “너랑 같이 해외로 연수 갔다던 후배?” “응, 그 애.”
새삼, 상처 받는다. 상처 받을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그렇다. 나는 초조하게 입술을 씹다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어색한 톤으로 말을 꺼냈다.
“너 약속 있던 것 같은데 나도 얼른 가봐야 하고. 다음에 보자.” “뭐가 그리 급해. 권아 이따가 연락할게. 조만간 만나서 술이나 한잔…….” “알았어.”
단답으로 말을 자르고 뒤돌아서서 빠른 보폭으로 골목길로 빠졌다. 어떻게해서든 지호의 시야 밖으로, 그에게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벗어나야만 했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어대고 숨이 턱턱 막힌다. 머리가 어지럽고 시야가 일그러진다. 우지호와 내 사이가 겨우 이정도 밖에 안 된다는 것이 뼈저리게 실감이 났다. 내가 우지호와 사귀든, 사귀지 않든 결말은 정해져있었던 것이다.
세드엔딩.
그 사실을 2011년 4월 25일에 알았다면 조금은 덜 불행해졌을까. 나는 전봇대에 붙어있는 전단지를 떼어내 얼굴을 덮었다. 세상이 보이지 않았고 세상 역시 나를 보지 못했다. 나는 무언으로 마음껏 통곡해냈다. 묵직하게 내려앉은 가슴의 통증이 제발 가시길 빌며.
***
나는 선혜 누나를 싫어하는 게 결코 아니다. 오히려 많이 좋아하고 있다. 이 사람이라면 평생을 함께 해도 좋다고 여길 만큼. 결혼이 소꿉장난도 아니고 매사에 선택할 때 신중에 신중을 더하는 나로서는 한참만의 고심 끝에 나온 결론이었다. 포근한 울타리처럼 혹은 잔잔하게 일렁이는 호수처럼. 누나는 내게 그런 사람이었다. 낚싯줄처럼 얇지만 튼튼하고 끊어지지 않는 긴 끈같은 사람. 이를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면 나는 선혜 누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리라.
우지호는, 우지호는 싫어한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우지호가 싫다. 내게 상처를 주고, 장난스럽게 던진 고백에 몇날 밤을 지새우게 하고, 내 머릿속과 마음속에 허락도 없이 멋대로 방을 들인 녀석. 좋아하는 감정이 얼마나 더러울 수 있는지 그 끝을 보여준 녀석.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우지호와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래서 일찍이 시골이든 해외로든 도망가고 싶다. 칼날처럼 날카롭고 충치처럼 지독하고 불처럼 뜨거워 상처입히는. 우지호는 나에게 이런 존재였다. 이를 원망이라 할 수 있다면 나는 우지호를 원망한다고 말하리라.
그리고 내게 있어서 원망은 사랑보다 더 아름다웠다.
“유권아.”
지호는 나를 권이라고 불러주는데….
“유권아 뭐해? 눈 뜨고 자?”
지호는 내 눈빛만 봐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데…….
“김유권?” “으, 응?” “왜 그렇게 정신을 쏙 빼놓구 있어. 뭐가 더 예쁘냐니까.”
선혜 누나가 검은색 원피스와 하얀색 원피스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생각하는 척 대충 아무거나 가리켰다. 누나는 내 안목에 썩 만족하는 눈치는 아니었으나 떨떠름하게 응답하고 돌아갔다. 피곤해졌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불투명한 무언가가 자꾸만 나를 내리치는 것 같았다. 중력이 비이상적으로 증식해 나를 꽈악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대체 무엇을 기대한 걸까, 나는.
결혼 날짜가 하루가 다르게 다가오고 있는데도 왜 나는 우지호에게 얽매여 있는 걸까. 정작 지호는 아무렇지도 않아하는데, 왜 내가. 무의식중으로 선혜 누나와 지호를 비교선상에 두고 있었다. 분명히 지호에 대한 마음은 1년 전에 접었는데도 그만 둘 수가 없었다.
어제만 해도 그렇다. 알코올이 당겨 술을 마셨고 이성이 희미해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호네 집으로 갔다. 거기만이 꼭 내 마음의 고향처럼, 안식처처럼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침대에서 뒹굴었다. 다시 생각해도 진짜 미쳤다. 거기가 어디라고 간 거야. 나는 머리를 쥐어뜯다시피 잡아당기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건조한 눈으로 달력을 훑어 내렸다. 4월 25일. 나는 다시금 무언가에 홀린 듯 핸드폰을 꺼내 지호에게 빠르게 문자 메시지를 전송했다. 확인 버튼을 눌렀을 때 이미 나는 2011년으로 돌아간 채였다.
‘495’
|
下 |
아는 선배가 이사를 했는데 연구소 일이 바빠서 정리를 못했다고, 집이 쓰레기장이니 급히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면도를 제대로 하지 않아 거뭇거뭇 수염이 올라온 채로 셔츠를 꿰입었다. 회사 일을 제외한다면 실로 오랜만에 몸을 움직이는 것이었다. 유권과의 마지막 관계를 가진 날로부터 꼬박 보름이 흘렀다. 그리고 만사가 시시해졌다. 물에 술탄 듯, 술에 물탄 듯 모호한 하루하루의 연속이었다. 낮과 밤의 경계가 흐려졌다. 일초는 느렸는데 일분은 길었고 한 시간은 짧았다. 아무것도 안한 채 소파에 누워 하루를 보내는 날이 잦았다. 생각이 없어졌다. 채플린이 연기한 모던타임즈의 무채색 시대로 돌아가 기계의 한 부품으로 전락한 기분이었다. 나는 좀비처럼 눈을 뜨고 로봇처럼 다리를 움직여 선배네 집에 도착했다.
“안 더워?” “예?” “늦봄, 아니 초여름 날씨인데 왜 아직도 겨울옷을 껴입고 그래. 하여튼 우지호 괴짜인 건 알아준다니까. 너 처음 볼 때부터 애가 나사가 하나 풀린 게 이상하다 생각은 했었는데.”
삼십 분이나 걸어서 왔건만 보자마자 하는 말이 한심하다는 투의 잔소리라니. 선배는 코트를 입고 그 위에 꾸역꾸역 목도리까지 두른 내 옷차림에 질색했다. 벌써 날이 그렇게 풀렸나…… 나는 성의 없이 연기했다. 감기 기운이 있어서요, 으슬으슬 춥더라고요. 선배는 빈틈 많은 내 연기를 그대로 믿었다. 아, 그런 거였어? 정말이지 서른이 넘었는데도 순진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다.
“이쪽 오피스텔로 오신지 일주일도 넘지 않았어요?” “그렇지.” “근데 왜 짐이 반도 안 풀려 있어요.”
사람 사는 곳인지, 돼지우리인지, 물류 창고인지 목적이 애매한 곳이다. 나는 내 허리까지 쌓여있는 상자 더미를 지긋이 응시했다. 선배는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과장스럽게 웃으며 변명했다.
“야, 야, 야. 지호 너도 나 일 바쁜 거 잘 알잖아. 이번 신약 개발 때문에 잘 시간도 없었거든. 게다가 이모할머니 칠순 잔치도 겹치고, 이웃사촌 고순이 돌잔치에 새로 들어온 신입 결혼까지… 이번 주 내내 장난 아니었어.” “그래도 많이 더럽네요.” “좀, 그렇지?” “많이 그래요.”
오죽하면 신발 신고 집으로 들어왔겠어요.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선배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래서 내가 널 부른 거야. 선배가 팔을 걷어붙이고 힘차게 만세-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이거 차라리 알바생을 구하는 게 빠르겠는데요? 노가다 장난 아니겠다. 저 시급 받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우리 사이에 무슨. 내가 밥 한 끼 사줄게.” “태일 형… 적어도 세 끼는 사세요.” “쪼잔하긴.”
대충 우리 둘 사이의 합의가 이뤄지자 대대적인 집 청소가 시작됐다. 몇 년 전에 선배와 자취한 경험이 있어 선배의 생활 패턴대로 물건을 정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선배가 그다지 까다롭지 않은 성격이기도 했고. 문제는 그 양이 방대하다는 것이었다. 장롱에 순서대로 옷을 걸고, 서랍장에 자질구레한 잡동사니를 밀어 넣고, 선반에 접시를 차곡차곡 포갰다. 해도 해도 끝이 안 보였다. 그래도 몇 시간 내내 건장한 사내 둘이 요령 피우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이다보니 제법 살림살이 구색은 갖춰졌다.
“봉지에 모아둔 쓰레기 버리고 올게. 넌 저쪽 책꽂이에다가 책 꽂아줘.” “그냥 막 배열해도 괜찮아요?” “어. 그거 옛날에 보던 거라 상관없어.” “그럼 기증을 하든가 그래요, 쫌.” “허세지, 일종의.” “잘나셨다니까.” “나중에 또 볼 수도 있는 거잖아. 나 내려간다.”
제 몸만한 쓰레기봉투를 낑낑 대며 들고 가는 선배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다시 내 일거리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 한 가득이다, 한가득. 내 키보다 큰 책꽂이가 셋이었지만 과연 이 많은 책이 다 들어갈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권수가 어마어마했다. 사오백권은 되려나. 살짝은 암담한 기분으로 책을 정리했다. 가나다라 순으로 배열하거나 장르 별로 나누는 게 아니라 막 집어 넣다보니 은근히 금방 일이 끝난다. 선배가 오기 전에 벌써 거의 작업이 마무리 됐을 정도니까. 마지막 한권을 넣으려 했을 때, 핸드폰에서 문자 한 통이 왔다.
[9]
유권으로 부터였다. 요즘 들어 유권은 알 수 없는 숫자를 조합해 문자를 보내곤 했다. 유권이 원래 남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자만의 고유 언어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최근에 더 심해진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유권의 의중을 파헤치려 전전긍긍했는데 요즘은 그러려니 했다. 나는 대수롭잖게 액정을 끄려다가 내 어깨 위로 불쑥 튀어나온 선배 때문에 깜짝 소리를 질렀다.
“으악, 뭐에요 형!” “뭘 그렇게 유심히 보나 궁금해서.”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갑자기… 애 떨어지는 줄 알았네.” “자궁도 없는 놈이 애는.”
취미로 추리 소설을 읽는 선배는 원체 삶이 연구의 연장선이기에 곧장 내 문자에 흥미를 가졌다. 나는 내 친구가 요즘 통 이상한 숫자를 보낸다며 그동안 보냈던 문자 기록을 죽 보여주었다. 18, 495, 27, 6174, 81, 9. 일관성 없는 문자의 나열에 나는 그만 유권이 취중 문자를 보낸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 졌다.
“이거 카프리카 상수 아냐?”
카프리카 상수?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둥그렇게 뜨는 나를 향해 선배가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네가 들고 있는 책, 신비로운 수의 세계. 거기에 보면 아마 카프리카 상수에 대해서 설명 돼 있을걸. 궁금하면 한번 읽어봐.”
아프리카도 아니고 파프리카도 아니고 카프리카? 선배가 날 놀리려고 막 지어낸 소리가 아닐까 싶은데 선배의 얼굴엔 장난기가 보이지 않았다. 수학은 고삼 이후로 완전히 놓아버렸기 때문에 과연 이 책을 읽어야 할까 싶었지만.
유권을 이해할 수 있다면…….
나는 책을 든 손에 힘을 주며 한동안 포기했던 도전을 시작하기로 했다.
잠이 오지 않아서 뜬눈으로 날을 새웠다. 지긋지긋한 하루의 시작. 환기를 시키지 않아 공기에 이물질이 떠돌았다. 이불로 몸을 감싼 채 거실 창을 활짝 열었다. 안개가 녹은 불투명한 산소가 창살 사이를 투과해 내 피부를 찔렀다. 따끔따끔한 감촉에 머리 위까지 이불로 뒤집어썼다. 눈을 뜨고 있어도 깨어있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다. 돌고래처럼 뇌의 반쪽만 숙면에 잠긴듯 하다. 어슴푸레한 새벽의 기운은 낮도 밤도 아니어서 무섭기까지 했다. 나는 어기적어기적 소파로 올라와 랜턴을 켰다.
문득 콘솔 위에 방치된 책이 눈에 띄었다. 저번 주 태일 선배네 집 정리를 도와주면서 가져왔던 책인데 채 한 장도 읽지 못하고 덮어버렸다. 난독증이 있는 건 아닌데 이상하게 숫자만 보면 졸음이 밀려온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책에 손을 댔다. 딱딱한 하드 커버지의 겉면이 헤어져있었다. 유해진 모서리 부분을 만지작거리다가 책장을 넘겼다. 신비로운 수의 세계. 제목이 나오고 다음 페이지에는 목차가 주르륵 적혀있었다.
카프리카 수 ---------- 61p
불현듯 웃음을 터졌다. 61이면 육원, 유권이가 아니던가. 우연의 일치가 참 재미있다며 나는 다음 장으로 넘겼다. 정신이 점점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역시 숫자는 내 영역이 아니었다. 비전문가 독자를 고려한 쉬운 설명이었음에도 그랬다. 나는 한 페이지를 읽고 졸고, 한 줄 읽고 졸고, 한 단어 읽고 졸기를 반복했다. 61p 즈음에 왔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있는 정오였다. 맨 정신으로는 차마 페이지수를 넘길 수가 없어서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잔뜩 꺼내왔다. 춥지도 않은데 이불속에 기어들어가 술을 홀짝이며 글을 읽었다.
카프리카 수. ‘카프리카’ 라는 단어의 어원은 인도의 수학자 D.R.카프리카(Kaprekar)로부터 유래된다. 그는 펫말에 적힌 3025라는 수에서 두 자리씩 자른 30과 25를 더한 55를 제곱하면 3025가 되는 것을 보고 카프리카수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회생숫자 혹은 불변수라고도 불리는 카프리카 수의 시작인 것이다.
복잡한 증명과정이 있었지만 내 영역이 아니었음으로 나는 다음 문단으로 빠르게 눈을 돌렸다.
카프리카 상수. 카프리카 수와는 비슷하지만 다른 개념이 또 있었다. 임의의 n자리 수를 내림차순과 오름차순으로 정리하여 큰 수에서 작은 수를 빼는 과정을 반복하면 어떤 자연수라도 결국은 하나의 숫자로 귀결되는 데, 바로 이것이 카프리카 상수라고 했다. 나의 생일인 네 자리수 0914를 예로 들어보자.
9410-0149=9261 9621-1269=8352 8532-2358=6174
어떤 수이든 네 자리에서는 결국 ‘6174’가 나온다고 했다. ‘카프리카 상수’는 ‘카프리카 수’와 달리 아직 그 원리가 증명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더 신비로웠다. 불변하는 숫자. 죽어도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회생의 숫자. 카프리카 상수, 그 단어가 좌심방부터 우심실까지 깊게 찔렀다.
뒷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 빠르게 유권이 보냈던 수와 책에 예시로 들어있는 수를 비교했다. 18, 495, 27, 6174, 81, 9.
18, 27, 81은 카프리카 수고, 495, 6174, 9는 카프리카 상수였다.
어느새 들고 있던 맥주캔이 떨어져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도수가 낮은 맥주라지만 안주 없이 혼자서 계속 마시다보니 중심잡기가 어려웠다. 일어 선 채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식이 올라가는 시간은 두시였고 지금은 열두시 사십분. 한 시간 반이 걸리는 거리였지만 밟으면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나는 손을 떨며 신발을 접어신고 달려 나갔다.
[블락비/짘권] 카프리카 상수 w.검백
빈 거리에 주차를 한 뒤 세 칸씩 계단을 밟아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김유권 전선혜 축 결혼. 익숙한 이름이 적힌 화환을 발견했다. 정장차림에 세련되게 머리를 넘겨 빗은 사람을 사이에서 나 혼자 추레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방황했다. 그 탓에 모두들 나를 힐끔거렸지만 나는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쓸 만큼 제 정신이 아니었다. 1시 52분. 결혼식까지는 8분도 남지 않았다. 그때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직원을 보고 급하게 물었다.
“여기 신랑 대기실이 어딥니까?” “네, 네?” “어디냐고요!”
비명을 지르는 듯한 내 말투에 여직원이 움찔 몸을 떨었다. 떡진 머리에 충혈 된 눈, 면도도 하지 않은 턱이 심히 의심스러운 몰골이었으나 급한 내 마음을 눈치 챘는지 직원은 순순히 위치를 불었다.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기에 듣자마자 그 방향으로 나는 다시 뛰었다. 하객들이 너무 많아 엘리베이터를 탈 수 없어 비상구로 갔다. 정신없이 뛰다가 고꾸라질 뻔도 했고 최근 담배를 하도 피워댄 탓에 폐가 뻑뻑하게 아파왔다. 문을 여는 순간 분침은 57분을 가리켰다.
김유권이 백열등 아래에 새하얗게 앉아있었다.
까만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도 내 눈에 유권은 새하얬다. 숨 고를 틈도 없이 다가가 김유권의 팔을 낚아챘다. 유권의 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나를 말리려고 오는 순간 유권이 재빨리 말했다.
“괜찮아요, 제 친구니까. 무슨 일이야?”
침착한 목소리가 놀라웠다. 아마, 일생에 단 한번 뿐일 결혼식 앞에서 저토록 초연할 수 있다니. 꼭 자포자기한 사람 같잖아. 나는 이마를 찡그리다가 부탁했다.
“둘만 있는데서 얘기하고 싶었는데 그럴 시간이 없네.” “…잠깐만 다들 나가주실래요?”
유권은 눈치 빠르게 내 의중을 알아챘다. 사람들이 의심쩍은 눈길을 내게 던지다가 하릴없이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혔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나는 옆구리에 끼워 놓았던 책을 들어 테이블에 던지듯 올려놓았다.
“회생숫자.” “…….” “불멸수.” “…….” “카프리카 상수.” “…….”
유권은 대답이 없었지만 수그려진 그의 얼굴에 어쩐지 눈물이 맺혀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생각할 시간도 없어 일단 입부터 벌리고 말을 뱉었다.
“있잖아, 카프리카 상수는… 어떤 원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항상 같은 숫자로 돌아온대. 불변의 법칙처럼, 아무리 시간을 되돌리고 죽고 다시 태어나도 같은 답인 거야.”
가볍게 말하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너무 씁쓸하게 나왔다. 사람은 불확실한 것에서 공포를 느낀다. 애매한 존재, 애매한 마음, 애매한 감정. 알 수 없는 것에서 두려움을 본다.
“권아, 너도.”
만약 내가 너에게 확신을 주었더라면.
“나의 카프리카 상수일까.”
그래서 네가 나를 믿을 수 있었더라면.
“나는 그런 것 같은데.”
우리는 지금보다 더 행복했을까.
유권은 계속 묵묵부답이었다. 이제 나는 거짓말 할 기력 따위는 없었다. 그에게 다가가 턱에서부터 귀까지 소중하게 감싸 쥐고 얼굴을 들어올렸다. 유권은 울지 않았다. 그런데도 왜 우는 것 같아 보일까. 나는 쓰게 웃으며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말을 전했다.
“잘 살지 마.” “…….” “최대한 불행해져라, 김유권.” “왜…!”
유권의 눈동자가 떨렸다. 왜, 그걸, 지금, 말해줘? 유권이 물었다. 그동안 유권이 나에게 끊임없이 보내왔던 신호와 단서들. 왜 나는 너무도 늦어버린 지금에서야 깨달았을까. 아마 나란 인간은 그게 한계인가보다. 유권이 주먹을 쥐고 내 가슴팍을 두드렸다.
“나쁜 놈아! 그게 친구 결혼식에 와서 할 소리야?” “미안.” “처음부터, 처음부터 나빴어야지. 왜 착한 척 하다가 이제 와서야…!” “아야, 권아. 나 마음이 아프다.”
유권이 투닥투닥 두드리던 손을 멈췄다. 여기, 아프다구. 나는 유권이 때렸던 부근을 가리키며 속삭였다. 아파서 죽을 것만 같단 말이야.
그때 문이 열리고 밖에서 기다리던 하객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유권 씨! 늦었어요, 늦었어. 친구 분이랑은 이따가 얘기하세요. 지금 식 올라간단 말이에요. 유권은 사람들의 손길에 떠밀려 나와 멀어졌다. 나는 유권이 내 시야 밖으로 사라지기전 필사적으로 외쳤다.
“김유권! 오늘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하루가 돼라!”
사람들이 뭔 미친놈을 다보겠네, 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봐서 나는 그만 푸하하 웃고 말았다. 김유권은 내 말에 갑자기 뒤돌아서서 사람들을 밀치고 내게 다가왔다.
“엿 먹어, 새끼야!”
그리고는 힘차게 뛰어 내 입술에 저의 입술을 문댔다. 꺄아아아-! 어디선가 들려오는 비명소리를 음악연주 삼아 들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유권의 허리를 붙잡아 빙글빙글 돌면서 나는 볼썽사납게 울어버린다.
잘 가지마, 김유권.
完 |
완결이네요!!! 제가 중간 부분을 잘 못쓰나봐요..ㅜㅜ 처음이랑 끝은 비교적 쉽게 썼는데
중편에서 끙끙댔거든요... 여하간 또 하나의 단편을 매듭지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덧글 달아주는 분들 모두 짱짱걸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