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규는 검은 여우 족이었다. 중종이었던 성규의 집안은 세력이 매우 강했는데, 중종의 특성상 번식이 어려워 그 개체 수가 적었다. 성규에게 누나가 있다는 것 또한 아주 드문 케이스였다. 말했다시피 중종은 번식이 어려워 아이를 낳으면 외동인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성규의 누나인 성현은 시집을 가서 첫째 아이를 낳은 상태였다. 그런데 올해 또다시 아이를 임신한 것이 지금 성규를 괴롭게 하는 일의 원인이었다. 한국은 물론 아시아에서도 알아주는 성규의 집안의 대를 이어줄 아이가 두 명이나 태어나게 된 것은 집안의 경사인 동시에 하나의 걱정거리를 낳게 했다. 성규의 집안을 적대시하며 항상 날을 세우고 있던 중종 집안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집안의 어른들은 보다 안전하게 집안을 지키고 싶었다. 집안의 자존심을 지키며 또 다른 힘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우호관계의 중종 집안과 연을 맺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평소 교류를 하고 지내던 집안 중 가장 세력이 동등했던 곰족 중 그 중심에 있는 반달가슴곰과 연을 맺기로 결정이 되었다. 반달가슴곰의 집안으로 결정이 내려진 것이 중종이라는 것과 그 세력이 강한 것도 이유가 되었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자신들의 제안을 받아줄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반달가슴곰의 집안은 대대로 자식이 많은 집안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두준의 부모님 사이에서 아이 소식이 오랫동안 나오질 않아서 점점 아이가 태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집안의 어른들은 근심에 찬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기적처럼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고, 그 아이가 바로 두준이었다. 힘들게 본 아이인데다가 사내라는 이유로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게 되었다. 그런데 너무 오냐오냐 키워진 탓인지 아이는 지금은 모두가 혀를 내두르는 망나니가 되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철이 없고 힘을 뽐내기 좋아하며 대를 이을 장남이면서 집안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며 말이다. 그래서 결국 아이가 8살 때 태어난 쌍둥이 동생들은 인성, 지성을 완벽히 겸비한 똘똘한 도련님들로 자라게 된 것은 여담이다. 임신이 힘든 사내를 받으면서까지 다른 집안과 연을 맺고 싶어 하는 중종 집안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저 곰족네 집안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장가를 가야하지만 모두 꺼려했던 집안의 아이가 알아주는 가문의 자제와 연을 맺는다면 완벽한 이익만이 있는 장사였다. 나는 니가 참 마음에 든다. #02 W.서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떡해 사내놈을 받아." 명수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성규는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털레 털레 걷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떡해 나를 사내놈한테 보내." 그것도 곰족, 망나니. 울컥한 심정에 발 앞에 보이는 캔을 발로 찼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러가는 캔의 소리를 들으며 성규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깊어진 밤공기가 성규의 마음을 더욱 가라앉게 만들었다. 하, 짜증나.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고개를 숙인 성규는 갑자기 느껴지는 강한 기운에 퍼득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반류의 기운이었다. 보통 반류들은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살아간다. 그렇게 숨기고 사는 걸 억지로 알아내려고 하거나, 아는체하는 것은 아주 예의에 어긋난 일이었다. 하지만 아주 가끔, 아주 강한 반류들은 일부러 자신의 기운을 조금 흘리고 다닌다. 다른 반류들에게 자신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위협을 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하는 반류는 흔하지 않았다. 정말 자기를 뽐내기 좋아하는 개념 없는 반류가 아니라면 말이다. 성규는 어떤 무식한 반류가 자만심에 빠져 기운을 흘리고 다니는 것인지 한심하단 듯이 혀를 찼다. 자신이 평소 혐오하는 류는 무식하고, 지금 느껴지는 어느 반류처럼 근거 없는 자신감에 똘똘 뭉쳐있는 류였다. 성규는 그런 반류가 자신의 주위에도 있다는게 소름 끼친다고 연신 궁시렁거리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어디서 느껴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우선 그 곳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점점 그 반류의 기운이 더 가까이에서 느껴짐에 무심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 사이로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유독 자신의 눈에 뛰는 이유는 아마 꽤나 익숙한 얼굴이라서 그런 것일거다. 아침에 할아버지가 보여줬던 사진이 생각이 나며 덩달아 꿈속에서의 얼굴까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름이 윤…두준, 이었나? 잠시 멈춰 섰던 발걸음을 다급하게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저 거대한 불행덩어리!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걷는 것 같은데 어째선지 두준의 기운은 옅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점점 인적은 드물어졌고 마음이 급해진 성규는 눈에 들어온 골목으로 잽싸게 몸을 숨겼다. 한편, 두준도 성규를 알아본 상태였다. 자신에게 온다는 가문의 자제라며 얼마 전 아버지가 보여준 사진 한 장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이름이 김성규였나. "여우…,라고 했었던가?" 자신을 보더니 사색이 돼서 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야, 귀신이라도 본 것 마냥. 마침 할 것도 없이 돌아다니던중 시비라도 걸어볼까 싶어 두준은 성규를 따라갔다. 총총총 움직이는 발걸음이 재빨랐다. 그리고 그 뒤로 성큼성큼 두준의 발걸음이 성규를 따라가고 있었다. 5분 정도 걸었을까. 소리 없는 추격전이었다. 이렇게 쫓아가면 한 번쯤 돌아볼만한데. 생각한 순간 골목으로 사라진 성규를 보고 두준은 기운을 숨겼다. 성규가 자신이 조금 멀어졌다고 느끼게 말이다. 그리고 조용히 골목으로 들어가니 확실히 발걸음이 느려진 성규가 보였다. 신기하 단듯 이 눈을 동그랗게 뜬 두준은 작게 중얼거렸다. "여우 맞아? 눈치 더럽게 없네." ** 성규는 점점 옅어지다 결국 사라져버린 기운에 자신이 두준을 따돌렸다 생각했다.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기운도 느껴지질 않으니 완벽하게 떨어진 게 분명했다. 골목길이 꽤 길었다. 어우, 심장 떨려. 안도감이 서린 머릿속에 방금 마주쳤던 두준의 존재가 비집고 들어왔다. 생긴 건 엄청 말끔하더니 망나니라니. "그렇게 안 생겼는……헉!" 중얼거림은 갑자기 튀어나온 손길에 멈춰버렸다. 턱, 하고 성규의 어깨에 올라온 손이 성규의 몸을 뒤쪽으로 끌어당겼다. 깜짝 놀란 성규는 소리를 내지르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또 다른 손이 성규의 입을 막아버렸다. 정신없이 가해진 기습에 당황해버린 성규의 동그란 머리통 위로 검은색 귀가 뾰족하고 튀어나와버렸다. 헐, 씨발. 속으로 욕 짓거릴 내뱉으며 쫑긋거리는 귀를 얼른 집어넣으려던 성규는 귓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멈칫하고 말았다. "검은 여우네?" 자신이 반류임을 알고 있는 남자의 말에 성규는 잠시 사라졌던 반류의 느낌을 알아차렸다. 지금 자신의 등 뒤에 서있는 남자. 그가 두준이라는 것도 느껴졌다. 두준은 자신의 어깨를 붙잡고 입까지 막아버린 체 뒤에서 자신의 정체를 여유롭게 까발리고 있었다. 그 행동에 부글거리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말끔하게 생겨? 망나니같이 안 생겼어? 하! 속으로 자신이 한 생각을 북북, 지워버리렸다. 그리고 귀는 집어넣을 생각도 하지 못 하고 팔꿈치를 들어 뒤에 있던 두준의 명치에 세게 내리꽂았다. 윽! 정통으로 맞은 것인지 신음을 흘리며 배를 감싸 안는 두준의 곁에서 잽싸게 빠져나온 성규는 여전히 켁켁 거리며 명치를 감싸 안고 있는 두준의 앞에 양쪽 귀를 뾰족하게 세운 체 섰다. 불량스럽게 낀 팔짱을 더욱 단단히 하며 말했다. "무식함 곰 새끼가 감히 누구 몸에 손을 대는 거야?" 두준은 명치를 한 손으로 문지르며 성규를 쳐다보았다. 성규는 그런 두준에게 입술 사이로 뾰족한 송곳니를 내보이며 말했다. 뭘 봐, 눈 안 깔아? "넌 여우가 눈치가 그렇게 없냐?" 누가 쫓아오는지도 몰라. 말을 하면서도 맞은 명치가 아린 것인지 끙끙대던 두준은 고통스럽다는 듯이 허리를 더욱 숙였다. 계속 아파하는 두준의 모습에 성규는 살짝 주춤하고 말았다. 사납게 삐쭉 올라갔던 눈꼬리를 조금 내리며 성규는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별로 세게 안 때린 거 같은데. 그렇게 치명상으라도 입은 것처럼 하면 어떡해. 조금 미안해지는 마음에 성규는 머리를 살짝 긁적이며 말했다. "야, 야. 괜찮아?" 나 그렇게 세게 안 쳤는데. 소심하게 튀어나온 중얼거림과 성규는 두준에게 조금 다가갔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두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손을 뻗던 성규의 행동에 앓는 소리만 조금씩 내며 미동도 없던 두준이 확, 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뻗었던 성규의 손목을 붙잡고 몸을 똑바로 일으켰다. 언제 아픈 소리를 내었냐는 듯이 빙글 웃더니 당황해하는 성규를 그대로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우왓! 하며 이번엔 꼬리까지 튀어나와 버린 성규는 정신 차릴 틈도 없이 두준의 품에 안긴 꼴이 되고 말았다. 갑자기 끌어당겨져 두준의 쇄골 부근에 코를 박은 성규는 발끈하여 얼른 고개를 들었다. 아프잔…! 눈앞에 바로 보인 건 두준의 입술이었다. 빙글거리며 올라가는 한 쪽 입꼬리가 생생하게 보였다. 화들짝 놀라며 두준과 눈이 마주쳤다. 쌍꺼풀 없이 큰 눈은 장난기를 가득 머금은 체 성규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콱, 하고 꼬리를 세게 잡아오는 손길에 성규는 놀라며 퍼득거렸다. "아앗!" 깜짝 놀라 내지른 소리와 함께 뿅, 하고 수염 가닥이 튀어나왔다. 귀, 꼬리에 수염까지. 성규는 너무나도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하, 편하다고 집에서 꼬리며 귀며 내놓고 다니는 게 아니었어. 언제나 그런 자신을 향해 그러다 나중에 조절 못 한다며 잔소리하던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 미안해. 이제 말 잘 들을게. 속으로 온갖 생각에 후회와 반성을 거듭하던 성규는 자신의 꼬리를 잡고 낄낄 거리는 두준을 으르렁거리며 노려보았다. "놔, 안 놓냐? 좋은 말할 때 놔라." "그러게 꼬리는 왜 살랑대." 어유, 이것 봐라? 수염도 튀어나왔네? 말과 동시에 성규의 수염을 손가락으로 장난스레 툭 건들였다. 특유의 버릇인지 한 쪽 입꼬리만 빙글 올라가며 미소 짓는 두준을 씩씩대며 보던 성규는 별안간 두준을 향해 비열하게 미소 지었다. 그런 성규의 모습에 이상함을 느끼던 두준은 순간 명치에 박히는 성규의 주먹에 곧바로 허리를 숙여야 했다. 이번에는 무릎까지 꿇었다는 건 비밀이고. 성규는 컥컥 대는 두준을 괘씸하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더니 별안간 몸을 획 하고 돌렸다. 동시에 귀와 꼬리를 집어넣고 유유히 골목을 빠져나왔다. 첫 만남은 최악이었다. /// 집에 도착한 성규는 조용히 대문을 조금 열더니 빼꼼, 고개만 집어넣어 텅 빈 마당을 이리저리 살폈다. 다 자는 건가? 혹여나 조그마한 소리라도 날까 싶어 문을 양손으로 쥐어 잡고 살며시 밀어냈다. 마당으로 한 발자국 들어선 성규는 완전히 마당으로 들어와 몸을 뒤로 돌려 열었던 대문을 다시 조용히 닫았다. 탁, 하고 완전히 닫힌 대문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쉰 성규는 방으로 향했다. 깜깜한 마당을 핸드폰 플래시로 비추며 근근이 방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안심의 한숨을 내쉬며 들어온 방안은 성규를 다시 한 번 당황스럽게 했다. 오늘 왜 이렇게 놀라는 일이 많은 건지 모르겠다. "이, 이건 또 뭐야." 탈칵, 하고 불이 켜진 방안은 텅텅 비어있었다. 분명 아침까지는 있었던 침대와 책상 그리고 옷장까지. 잠은 자라는 듯이 덩그러니 깔려 있는 두툼한 솜 이불을 멍하니 바라보던 성규는 덜컥 드는 생각에 헐레벌떡 방을 뛰쳐나왔다. "엄마! 엄마, 엄마!" 마당을 가로질러 들어선 안채 역시 깜깜했다. 마음이 급해진 성규는 신고 있던 신발은 벗음과 동시에 저 멀리 내동댕이 친 체 얼른 마루로 기어올라 갔다. 드르륵! 세게 열어젖힌 미닫이문이 쾅, 하고 부딪혔다. 바로 옆에 있는 전등 스위치를 누르자 깜깜했던 방이 환해지며 갑작스러운 빛에 눈살을 찌푸리는 성규의 엄마가 눈에 들어왔다. 멀쩡하게 있는 엄마의 모습에 성규는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방안의 가구는 전부 없어지고 깜깜한 집안에 사람 한 명 없는 것 같이 조용해서 집에 부도가 났나 심장이 덜컹했던 성규는 괜스레 올라오는 안도감과 울컥함에 삐쭉 눈꼬리가 올라갔다. "뭐야! 깜짝 놀랐잖아! 내 방 왜 저런 거야?" 뭐가, 엄마는 다시 잠을 청하려는 것 인지 이불을 덮으며 무심히 말했다. 내 방! 내 침대, 내 옷 다 어디 갔냐고! "아, 네 시댁에 보냈다." "시대액?!" 뭔 소리야, 그게! 나 시댁 그딴 거 없어! 장난 치지마, 내놔! 떼를 쓰듯 소리를 지르는 성규를 보던 엄마는 성규를 향해 손 짓 했다. 이리 와 앉으라는 듯 손을 까딱이는 엄마를 본 성규는 씩씩거리는 숨을 내뱉으며 괜히 발걸음에 힘을 실었다. 쿵쿵 쿵, 몇 발자국 안되는 거리를 그렇게 걷고, 엄마의 앞에 '나 화났어요'라고 티를 내듯 양반다리를 하며 앉더니 가슴께에 팔짱을 끼며 말했다. "어디 있어? 내 옷! 내 침대!" "거 참, 우리 아들이 왜 이럴까 시댁에 보냈다니까." 근데 시댁이라 하니 웃긴다 얘. 정말 웃기다는 듯 호호 웃던 엄마는 울그락 푸르락 거리는 성규를 보지 못 했다. 연신 호호 거리는 엄마를 보던 성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정말 이게 무슨 일인지, 개같은 꿈을 꾸고, 정말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듣고 뛰쳐나간 밖에서는 영원히 만나고 싶지 않던 남자와 만나고, 그 남자에게 꼬리며 귀, 수염까지 보여지고! 24시간도 안되는 시간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과부하에 거릴 것 같은 머리를 벅벅 문지르며 성규는 소리쳤다. "왜 그랬어! 안 간다고 했잖아요!" "어머, 얘! 놀래라, 앉아." "지금 가만히 앉아 있게 생겼어?" 으아항, 망했어, 망했다고. 울상이 된 얼굴을 손바닥에 파묻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이게 뭐야, 내 인생…. 내 인생!!
더보기 |
성규 인생! 성규 인생!! 그리고 내 글과 인생도 ㅇㅅㅇ 망 ㅎ 망했다 ㅎ o〈-〈 내일 학교 가니까 빨리빨리 올리려고 하다 보니 ^5^! 감사합니다 ㅜ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