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거기서 뭐하는 거냐?”
언 땅이 녹고 햇볕이 제 따스한 몸체를 만족하는 것 마냥 쏟아져 내릴 때의 일이었다. 헤진 옷에 단정치 못한 머리. 햇살 받아 탐스럽게도 피어오른 목련나무에 올라서 그 하얀 목련을 따고 있는 소년의 모습은 그의 옷차림과 같은 느낌을 풍겨냈다. 이웃 어른들이 보시면 뭐라 하실지, 안 봐도 눈에 선하기에 나는 그 나무 주위로 다가갔다.
“퍼뜩 내려와라. 어른들 보시면 어쩌려고.”
그러자 소년은 나를 돌아보더니 천진하게 웃어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 맑아서, 순수해서 잠시 그 쪽으로 다가간 이유를 착각할 뻔했다. 나는 소년의 신발 끝을 살짝 잡아 당겼다. 소년은 제 신발을 힐끔 쳐다보더니 웃옷에 가득 담아두었던 목련송이를 우수수 떨어뜨렸다. 보드라운 꽃잎이 내 얼굴을 스치고 땅에 닿자 소년은 작게 소리쳤다.
“잘 주워들어요. 이 집 주인 할아범 나오면 큰일 나니까.”
소년은 혹 떨어진 목련을 밟을까 조심스레 땅에 발을 디뎠다. 발이 땅에 완전히 닿자, 소년은 목련을 주워들어 조금 묻어난 흙을 털어냈다. 그리고 제 웃옷을 아래로 길게 빼더니 늘어난 옷 위로 다시금 목련을 담아냈다.
“왜 잘 피어있는 것들을 따는 거니?”
“할매가 내일 비가 올 거라던데.”
수많은 목련이 소년의 품에 안겼다. 소년은 아쉬운 듯이 나무를 바라보았다. 아직 나무에 달려 가벼운 바람을 맞이하는 목련은 소년의 눈길을 피하기에 바빠 보였다. 소년은 손가락 끝을 움직여 제 품에 안긴 꽃잎을 어루만졌다.
“냇가 갈 건데, 같이 갈래요?”
냇물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한 길을 따라 흘렀다. 소년은 물 위로 반사되는 빛에 잠시 인상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널찍한 바위 위에 목련송이들을 펼쳐놓았다. 그리고는 하나씩 집어 들어 물 위에 띄웠다.
탐스런 꽃송이 버티기 힘들어 지는 게냐
두드려 맞는 빗방울이 아파서 지는 게냐
어쩌다 난 생채기에 어이 그리 아파하는 것이며
한순간 번져버려 모든 것을 잃는 게냐
연약한 그대여 강길 따라 보내드리리
여릿한 그대여 흘러흘러 죽 아름다우라
“무슨 시이냐?”
제법 흥얼거리는 투로 읊조려대는 시구가 흥미로웠다. 소년은 내 쪽을 한번 돌아보더니 꽃잎을 타고 기어오르는 개미새끼에 입바람을 훅 뱉어냈다. 동그랗게 말아낸 입은 바람을 멈추고 웃음을 담아냈다.
“우리 어머니가 자주 부르는 건데, 무슨 뜻인지는 잘 몰라요. 엄니 말로는 막걸리가 다디달아질 때 알게 될 거라던데.”
소년의 말에 웃음이 튀어나왔다. 딱 보아도 풋내 나는 외모의 소년은 막걸리의 단맛을 모르기에 충분했다. 그 텁텁하고 쓰디쓴 걸. 소년은 미간을 좁히고는 자갈밭에 주저앉았다. 꼭 한모금의 막걸리가 혀를 타고 흐르는 듯, 소년은 얼굴로 쓴맛을 표현해냈다.
“저것 봐요.”
소년의 손끝을 따라 눈으로 좇다 펼쳐진 장관에 나는 작게 감탄했다. 좁게 난 냇물의 수면을 여유 있게 채운 목련. 그것들은 천천히 한길로 흐르고 있었다. 소년은 뿌듯한 얼굴로 내 쪽을 보았다.
“나는 한상혁이에요.”
참 어울리는 이름을 가진 소년, 그러니까 상혁이의 옆에 가서 앉았다. 슬쩍 보니 온점으로 끝난 말에 대답을 원하는 눈치였다. 나는 입을 열다가 할 말 없다는 듯 장난스레 다시 닫았다. 그러자 상혁은 마치 내가 몹쓸 것이라도 되는 마냥 얼굴을 찌푸리고는 아쉬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학연이야.”
잘 어울리네요. 상혁이 말했다. 그리고 흙 묻은 제 손을 털어내는 것으로는 성에 안 찼는지 본디 희었을 웃옷에 쓱 문질러 닦아냈다. 너 같은 동생이 있었음 좋겠구나. 무의식적인, 하지만 진심이 담긴 말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상혁은 꼭 형 같은 형이 있었음 좋겠다며 히죽이 웃었다.
이 동네에 처음인 나를 위해 상혁은 동네구경을 시켜주겠다며 나를 이끌었다. 우리들이 떠난 그 냇가엔, 목련 하나가 자갈에 걸려 흘러내려가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