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집네 할머니께서 말했던 비는 오늘 오지 않았다. 상혁은 아침부터 비가 오지 않는다며 마당을 한 바퀴 쭉 훑다가 내가 머문 방으로 갑작스레 들어왔다. 동네만 둘러보고 다시 떠날 예정이었던 나는 상혁의 바람으로, 혹은 내 자신의 바람대로 며칠 상혁네 빈 방에 머물기로 했다. 미적지근하게 찬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온 몸을 휘감았다. 무거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자 상혁은 필요 이상의 힘으로 이불을 걷어냈다.
“형, 비 안 와요. 오늘은 다른 곳 구경시켜 줄게요!”
농짙게 걸걸해진 목소리로 조금만, 조금만을 외쳤다. 상혁이의 투정이 들리고 밖에서는 혀를 내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쯧, 젊은 애가 골골대서는.”
속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상혁에게 씻을 수 있는 곳을 물었다. 긴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으로 비틀비틀 움직이자 상혁이 내 등을 받치고는 따라온다. 오랜만에 긴 잠을 잤더니 몸이 휴식에 익숙지 못함을 표현하는 듯하다. 이 집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썩 틀린 말이 아니다. 약 가지고 다니면서 챙겨 먹기는 귀찮은데.
“오늘은 어디 갈까요? 혹시 가고 싶은데 있어요?”
밤새 내 얼굴 위로 자리 잡은 먼지들을 찬물로 씻어 내고 나니 눈이 겨우 뜨인다. 벌려진 눈 사이로 수도꼭지 위에 팔을 받치고 팔 위로 턱을 괸 상혁이 보였다. 나가자고 나를 보채던 녀석이 머리에 까치집을 한껏 멋스럽게도 지어 놨다. 실없이 터지는 웃음에 양칫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따끔한 느낌에 눈시울이 붉어지는 게 느껴지는데 상혁이 그 놈은 뭐가 그리도 재미난 지 해사하게도 웃어 보인다. 햇빛 받아 곱게 핀 얼굴이 맑아서, 별 말은 하지 않았다만.
“어제 목련, 괜히 그랬나 봐요.”
목적지 없이 흙 길을 마냥 걸으며 뜬금없게도 뱉은 말이었다.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 집 영감님한테 혼꾸멍이라도 났나 싶어 최대한 걱정스럽게 상혁을 바라보았다. 상혁은 내 표정을 보더니 장난스럽게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한숨을 쉬는 듯이 입을 열었다.
“떨어져서 갈변하지 말라고 띄워 보내준 거라지만 나도 못 보는 거잖아요. 그것들.”
장난스런 표정과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담담하고 진지한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나를 힐끔 보는가 싶더니 말을 잇는다.
“흰 것이 검어져도, 길거리 더럽힌다고 남들이 싫어해도 내 옆에 둘걸. 내가 예뻐해 주면 되는데.”
“다음엔 안 그러면 되지.”
위로답지도 않은 말을 건넸다. 상혁은 제 팔에 힘을 주고는 그러네, 하며 살갑게 웃었다. 단단한 팔에 목이 조금 죄었지만 그 팔은 곧 물기 진 돌 위에 앉은 개구리를 잡으러 나섰다. 개구리, 싫은데. 표정으로 드러내면 녀석은 금방이라도 개구리를 내게로 던질 것이 분명하였다. 그 미끌미끌하고 기분 나쁜 것이 살갗에 닿는다면 얼마나 끔찍할까. 나는 상혁의 팔을 잡아끌었다. 우리 저기로 가자. 개구리는 그만 놓아 주고.
“혹시 역마라고 아느냐?”
어스름하게 길 위를 비추던 햇빛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 칠 때 쯤 갈 곳 잃은 우리는 다시 그 냇가에 자리 잡았다.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것은 아니었다. 동네를 벗어난 일이라면 단 한 가지도 모를 것 같은 네가, 혹시 이것을 알까.
“옛날엔 말이다. 역에 마패를 보여주면 말을 빌려주었어. 그 말은 그 때부터 달리는 거야. 그 어디로든지.”
평생? 상혁이 돌멩이를 쌓다 말고 물었다. 그 대답으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다음 역에 도착하면 새로운 관원을 기다렸다가 또 다른 어느 곳으로 향하지. 이것을 반복하는 거야. 상혁이 한 손으로 돌멩이 섬을 망가뜨리고는 그 자리에 덥석 누웠다.
“힘들겠네요. 지루하기도 할 것 같고. 아, 지루하지는 않으려나?”
응. 지루하진 않아. 자연스레 내 입에서 굴러 나온 말이었다. 난 말이고 달리는 것을 멈출 수 없다. 네 말대로 평생. 뒷말을 뱉지 못함의 이유는 나도 알 수 없었다. 지금은 그저 네 모습을 보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