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행복에게 06
5장. 세상에 좋은 이별은 있다
힘없는 손으로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에 들어온 은주가 신발을 벗자마자 가방을 바닥에 던져두고는 침대 위로 쓰러졌다.
“아... 모르겠다. 영화 괜히 보자고 했나.”
이불에 얼굴을 묻은 채 한참을 가만히 누워있던 여주가 주머니를 더듬어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다.
“뭘 했다고 벌써 열 시야... 시간 진짜 빨리 가네.”
영화가 끝나고 한참 동안 멍하게 있는 성우에게 괜히 말을 걸어서 잊고 싶었던 기억을 끄집어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내내 마음이 불편했던 은주는 집에 와서도 저녁에 성우가 했던 한마디를 쉽게 떨쳐낼 수 없었다.
“내가 했던 그 사랑은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었어요.”
“충격이 컸나 보네... 첫사랑이라더니.”
정신을 차리고 바른 자세로 침대에 걸터앉은 은주가 잠시 생각에 잠긴다. 쌀쌀했던 가을밤, 학생들이 각자의 자리에 앉아 과제를 하고 있는 대학교 도서관의 풍경이 은주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 2년 전
“누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이어폰을 뺀 은주가 과제를 하다 말고 준우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응?”
“나 할 말 있는데.”
조용한 도서관에서 준우의 목소리가 너무 잘 들리는 것 같아 주변의 눈치를 보던 은주는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며 ‘쉿’하는 소리를 냈다.
“치.”
살짝 토라진 준우의 모습을 귀엽다는 듯 쳐다보고 있던 은주가 하려던 말을 종이에 적으라는 신호로 책상 위에 놓여있던 이면지를 연필로 톡톡 두드렸다. 은주에게로 조금 더 가까이 붙어 앉은 준우가 연필을 잡고 종이에 글씨를 써 내려갔다.
[누나 무슨 고민 있어요?]
은주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준우의 글씨 옆에 또박또박 대답을 적었다.
[아니? 나 고민 있어 보여?]
준우가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머금고는 다시 연필을 잡았다.
[아니요. 나는 고민이 있는데 누나는 없나 해서요.]
준우의 글씨를 보고 있던 은주가 고개를 들어 준우와 눈을 맞추고는 입모양으로 말했다.
‘고민이 뭔데?’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고백해야 할지 생각 중이에요.]
자신의 고민을 적고 있는 준우의 오른손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글씨를 보기 위해 몸을 잔뜩 웅크려 책상에 붙어있다시피 앉아있던 은주의 몸에 힘이 풀렸다.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던 후배 준우가 다른 누군가에게 고백하고 있을 장면을 상상하니 눈앞이 캄캄해진 은주가 애꿎은 연필만 이리저리 괴롭히다가 종이에 글씨를 꾹꾹 눌러 적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면 되지 않을까? 좋아한다고. 나랑 사귀어보지 않겠냐고.]
[정말요? 그렇게 말하면 받아줄까요?]
[나라면 받아줄 것 같은데?]
준우가 티 없이 맑은 미소를 보이며 은주의 글씨 밑에 무언가를 적어가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를 더 이상 이어나가고 싶지 않은 은주가 눈을 살짝 감았다 뜨고는 준우가 쓴 글씨를 확인한다.
[좋아해요 누나. 나랑 만나보지 않을래요? 남자대 여자로.]
화들짝 놀라 준우를 쳐다보던 은주가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주변을 한 번 둘러본 준우가 은주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두 손을 천천히 잡아 내리더니 입모양으로 말했다.
‘먼저 말해줘서 고맙죠?’
뜻밖의 고백에 부끄러워진 은주가 준우의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 1년 8개월 전
“이것 봐. 나 또 뾰루지 났어.”
“누나는 뾰루지가 나도 예뻐요.”
“뭐가 예뻐. 안 그래도 안 예쁜데 뾰루지까지 나서 더 보기 싫어졌잖아.”
은주가 또 본인의 외모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자 준우가 은주의 어깨를 잡고는 묻는다.
“누나는 나에 대한 믿음이 그렇게 없어요?”
“아니? 너 완전 믿지.”
준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왜 누나 예쁘다는 말은 안 믿어요?”
“그건 내가 정말 안 예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미치겠네.”
준우가 머리를 한 번 손으로 쓸어 넘기고는 말을 이어간다.
“누나 정말 예뻐요. 나 누나한테 거짓말 안 하는 거 알잖아. 내 여자친구라서 예쁘다고 하는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예쁘니까 이러는 거예요. 우리 사귀는 거 학교에서는 비밀이라 말 못 하지만 다른 선배나 동기들이 누나 칭찬할 때마다 옆에서 얼마나 입이 근질근질한지 알아요? 왜 자꾸 누나 자신을 스스로 깎아내려요. 누나가 그럴 때마다 속상해 죽겠어. 내 여자친구가 얼마나 예쁜 사람인데. 얼굴도 예쁘고 마음도 예쁘고, 어디 하나 안 예쁜 구석이 없는 사람인데.”
은주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땅만 바라보고 있자 준우가 다시 은주의 이름을 불렀다.
“은주 누나. 처음 들었을 때부터 느낀 건데 누나는 이름까지 참 예쁜 것 같아요. 얼핏 들으면 우주 같기도 하고. 누나는 우주만큼이나 예쁜 별들을 가득 담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누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만큼 누나도 누나 자신을 사랑했으면 좋겠어요.”
“너는 어쩜 예쁜 말만 골라서 하냐.”
“예쁜 말만 골라서 하는 게 아니라, 누나같이 예쁜 사람이 앞에 있으니까 예쁜 말만 알아서 튀어나오는 거예요.”
준우를 보며 환한 미소를 지은 은주가 진심을 담아 준우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내 하루는 네 덕에 조금 더 행복해. 고마워 준우야.”
- 1년 2개월 전
“와, 우리 여기 연애 시작할 때쯤 오고 처음 오는 거지? 대박. 뭔가 반갑다.”
“누나.”
“응?”
은주를 부르는 준우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그러고 보니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른 날과 달리 눈도 조금 부어있는 것 같다.
“......”
“뭐야, 왜 불러놓고 대답이 없어.”
“누나...”
“뭔데 그래. 부탁할 거 있어? 말해봐.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면 최대한 도와줄게.”
“...우리 이제 그만할까요?”
은주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빨갛게 충혈된 준우의 눈을 마주한 은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누나가 잘못하긴 뭘 잘못해. 그냥 내가 누나한테 너무 부족한 사람인 것 같아서요. 누나는 벌써 취직자리 알아보느라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는데 난 대학에도 아직 적응 다 못한 것 같고, 이제 곧 군대도 가야 하는데 구질구질하게 기다려달라고 하면서 누나 앞길 막고 싶지 않아요.
누나 나보다 멋있고 잘난 사람 만나서 행복해져야지.”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난 너랑 있을 때 제일 행복해. 아무리 돈 많이 벌고 성공하면 뭐해, 네가 옆에 없는데. 싫어. 뭐 나를 위해서 헤어지는 거라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 나 오늘 그런 말 들으려고 너 만나러 온 거 아니야.”
“나 누나 만나러 오기 전에 누나가 어떤 말을 해도 흔들리지 말자고 다짐하고 왔어요. 그러니까 누나 계속 이래도 소용없어. 이미 마음 굳힌 거, 우리 남은 시간이라도 웃으면서 보내요. 힘들 거 아는데, 내가 눈치 없이 누나 옆에 계속 남아 있으면 그게 더 힘들 것 같아서 그래.”
끝까지 잡아보려 했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이별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은 준우의 모습에 은주도 이별을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었다. 두 사람은 오늘 집에 들어가기 전까지 서로에게 눈물을 보이지 말자는 약속을 한 후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어질 때까지 의미 없는 말들만 주고받았다.
준우가 은주를 집까지 데려다주는 내내 두 사람은 멀찍이 떨어진 채로 걸었다. 이미 이별의 공기가 둘 사이에 스며들어 두 사람은 서로에게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한참을 말없이 걷기만 하던 둘의 발걸음은 결국 은주의 아파트 단지 앞에서 멈추었다. 준우가 자신의 주머니 속에서 데워지고 있던 핫팩을 꺼내 은주의 손에 쥐어 주며 말했다.
“아까부터 누나 손 시려하는 것 같아서 신경 쓰였는데 내가 용기가 없어서 한 번을 못 불렀네. 그래도 누나 주려고 가져온 거니까 가지고 가요. 아직 따뜻할 거예요.”
손바닥 가득 느껴지는 온기에 은주가 끝까지 참아왔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은주의 눈물에 안절부절못하는 준우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함께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아 누나, 안 울기로 했잖아요. 내가 기억하는 누나의 마지막 모습이 우는 모습이면 내가 누나를 어떻게 잊어.”
우느라 눈가가 빨갛게 물들어버린 은주가 흐느끼며 말했다.
“너야말로 진짜... 나를 차버리겠다는 놈이... 마지막까지 물러 터져서는 이렇게 핫팩까지 쥐어 주면... 나보고 어떻게 잊으라는 거야 너를...”
은주를 꼭 껴안아 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준우는 울고 있는 은주를 다독여주는 대신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모진 말을 입 밖에 꺼냈다.
“...누나. 나 이 말 끝나면 속으로 셋 센 다음 돌아서 갈 거예요. 그러니까 누나도 얼른 들어가요. 내 생각도 하지 말고, 연락도 하지 말고, 학교에서 어쩌다 마주쳐도 모르는 척하기로 해요.
나 갈게요.”
정말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는 준우 뒤로 주저앉아버린 은주만 홀로 남겨져 있다.
6장. 과거의 사랑이 현재의 사랑에게
“생각해서 뭐 해. 벌써 일 년도 더 됐는데. 전역하고 나면 난 졸업하고 없을 테니까 이제 진짜 만날 일도 없겠네. 잘 됐지 뭐.”
지나간 인연을 짧게 추억한 은주는 그래도 나쁜 기억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자신이 준우로부터 받았던 사랑과 위로를 떠올렸다.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핸드폰을 집어 든 은주가 연락처에 저장된 성우의 번호를 누르고는 문자를 입력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성우씨 이야기 들려줘서 고마웠어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처가 큰 것 같아 마음이 안 좋더라고요. 소개팅 날 나한테 왜 그렇게 못되게 굴었는지 이해가 갈 것 같기도 하고ㅋㅋㅋㅋㅋㅋㅋㅋ
어쨌든 성우씨 잘못이 아니니까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대화하다 보니 성우씨 충분히 사랑받을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어요. 꼭 그 가치를 알아봐 주는 사람 만나길 바랄게요.]
내용을 다 써놓고도 보낼지 말지 고민하느라 핸드폰 속 글자들만 뚫어져라 쳐다보던 은주는 눈을 질끈 감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저 성우의 행복을 빌어주는 평범한 문자 내용이었는데 전송을 누르기까지 오래 망설였던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마지막 문장에서 언급된 ‘가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자신이었으면 좋겠다는 은주의 바람 때문이었을까.
같은 시각, 은주와 마찬가지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한 성우가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쳐둔 채 온 체중을 실어 소파에 풀썩 누웠다. 눈부신 조명 탓에 한쪽 팔로 눈을 가리고 있던 성우의 귓가에 문자가 왔음을 알리는 알림 소리가 들려왔다.
띠링-
소파 앞 테이블에 올려둔 핸드폰을 집어 문자를 확인한 성우가 잠긴 목소리로 중얼댄다.
“그런 사람을 자기가 해 줄 생각은 없는 건가.”
+ 서로에게 진심이었던 시간들마저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 최악의 이별을 겪은 성우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준 최고의 이별을 겪은 은주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변화하게 될지 지켜봐 주세요:)
++ 따뜻한 우리 독자님들 항상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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