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행복에게 07
7장. 고백의 본질
성우와 은주가 소개팅에서 처음 만난 것도 어느덧 일주일 전 이야기가 되었다. 둘은 그 일주일을 일상에 치여 바쁘게 보내야 했지만 서로에게 연락을 하고 만날 약속을 잡는 일은 잊는 법이 없었다. 거의 매일을 함께한 둘은 일주일이 마무리되는 일요일 저녁을 포장마차에서 보내기로 했다. 처음엔 와인 바에 가자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대학생 신분에 돈도 없고 여유도 없는 두 사람은 결국 소소하게 포장마차 데이트를 즐기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한참 각자의 학교와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공통분모를 찾던 중 성우가 은주에게 질문을 던졌다.
“은주씨, 우리 소개팅으로 만난 거 맞죠?”
“네? 아마 그럴걸요? 뭐 그런 이상한 질문을 하세요.”
“아니, 그냥 소개팅이 뭘까 하고 궁금해져서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만 늘어놓는 성우에게 은주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사람 소개받아서 만나는 게 소개팅이죠 뭐. 성우씨도 재환 오빠한테 저 소개받아서 이렇게 만나고 있는 거잖아요.”
“그건 그렇죠. 근데 소개팅하면 나중에 다 사귀는 건가? 제가 소개팅은 처음이라... 보통 몇 번 정도 만나는 게 일반적이에요?”
“사실 저도 이번이 처음이거든요. 잘 모르겠는데...”
“아... 그렇구나.”
“그런데요 성우씨, 횟수가 꼭 중요한 걸까요?”
성우가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은주를 쳐다보았다. 은주가 말을 이어간다.
“잘 맞으면 계속 보는 거고 잘 안 맞으면 몇 번 보다 마는 거고 그런 거 아닌가.”
한 손으로 술잔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성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는 말이네요.”
취기가 돌아 얼굴이 분홍빛으로 물든 은주가 성우의 이름을 불렀다.
“성우씨.”
성우가 은주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동안 이야기를 나눠보니까 성우씨가 새로운 관계 맺는 걸 두려워하는 것 같아서 계속 망설였는데, 성우씨가 가지고 있는 그 두려움을 내가 없앨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겨서요.”
은주가 무슨 말을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는 성우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은주를 바라보았다.
“전에 제가 성우씨 가치를 알아봐 주는 사람 만났으면 좋겠다고 한 거 기억나죠?”
성우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주가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하던 말을 계속해 나갔다.
“그거 제가 하고 싶어요. 나 만나볼 생각 없어요?”
성우가 멍한 표정으로 은주를 바라보다 입을 떼었다.
“아... 미안해요. 이런 말은 남자가 먼저 해야 하는 건데. 내가 또 바보같이...”
자신이 먼저 용기를 내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만 늘어놓는 성우를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던 은주가 성우의 눈을 맞추기 위해 성우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성우씨, 나 봐봐요.”
미안함에 은주의 눈을 피하고 있던 성우가 고개를 들어 은주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은주가 말을 시작했다.
“거절한 것도 아닌데 미안할 건 또 뭐예요. 내가 봤을 때 성우씨는 성우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멋진 사람이에요. 허둥대고 어리숙한 모습 보여주는 건 대환영인데, 자신감 없고 기죽어있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운 은주의 모습에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진 성우가 입을 떼었다.
“나 원래 이렇게 자신감 없고 소심한 사람 아니거든요. 이상하게 은주씨만 보면 왜 이렇게 되는지 모르겠어요. 완벽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데 마음처럼 쉽지가 않네요.”
은주가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성우를 바라보며 말한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딨어요. 나 완벽한 남자 싫어해요. 사람이 가끔 허점도 보여야 인간적이지. 귀엽기도 하고. 뭐든 다 괜찮으니까 나랑 있을 땐 아무 걱정도 하지 말아요.”
아무 걱정 말라는 은주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성우는 비로소 아이같이 해맑은 미소를 되찾을 수 있었다. 자신이 모르는 은주의 시간들이 궁금해진 성우가 물었다.
“은주씨는 좋겠다.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은가 봐요. 어쩜 이렇게 사람 기분 좋게 하는 말만 쏙쏙 골라서 해요? 나이는 내가 더 많은데 말하는 거 보면 은주씨가 더 오래 산 것 같네.”
괜히 쑥스러워진 은주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피식 웃었다.
“근데 진짜 제가 인복은 좀 있는 것 같아요. 사람한테 상처받은 적도 별로 없고. 주변에서 받은 사랑이 너무 커서 항상 나도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는데 잘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어요. 아, 그렇다고 아까 제가 성우씨 기분 좋게 해주려고 아무 말이나 지어낸 건 절대 아니고, 그냥 꼭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를 한 거예요.”
술기운이 올라 상기된 얼굴로 조잘조잘 이야기를 늘어놓는 은주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고 있던 성우가 말했다.
“알고 있어요.”
기어코 저녁값은 본인이 내겠다고 우기던 성우가 계산을 마치고 나오자 뾰로통한 표정을 한 은주가 성우의 옷자락을 잡고선 투덜댔다.
“우리 만날 때마다 성우씨가 밥값 다 내서 오늘은 내가 사려고 했는데... 해 준 것도 없는데 매번 얻어먹기만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잖아요. 나 성우씨한테 부담 주긴 싫단 말이에요.”
그런 은주가 귀엽기만 한 성우가 허리를 숙여 은주의 눈을 맞추며 말한다.
“해 준 게 없긴 왜 없어요. 오늘 하루만 해도 은주씨가 해 준 게 얼마나 많은데.”
성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은주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나 성우씨한테 해 준 거 없는데요?”
“모르면 됐어요.”
성우가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렇게 식당 앞에 서서 계속 이야기를 나누다가는 집에 너무 늦게 도착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은주가 손목시계를 한 번 확인하고는 물었다.
“우리 집 안 가요?”
“은주씨네 집 가자고요?”
성우가 커다래진 눈으로 물었다. 은주는 자신의 말을 잘못 알아듣고는 화들짝 놀란 성우의 모습이 귀여워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요?”
“우리 집에 가자는 게 아니라, 성우씨랑 나랑 각자 집에 안 갈 거냐고요. 슬슬 출발해야죠.”
“아...”
성우가 민망했는지 빨개진 자신의 두 귀를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잠시 망설이던 성우가 용기를 내 말했다.
“은주씨 집 어디에요? 바래다줄게요.”
“금방 가는데... 그래도 사양은 안 할래요. 이쪽으로 쭉 가면 나와요.”
그래도 나름 연인이 되었는데, 용기를 낸 성우를 밀어내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은주가 앞장서서 걸었다. 예의도 예의지만, 성우와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었던 은주의 마음이 집 앞까지 바래다주겠다는 성우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게 만들었다.
보도블록 세 칸 정도의 간격을 두고 걷던 두 사람 사이에 싫지 않은 어색함이 맴돌았다. 마음속으로 밤공기가 차갑고, 어둠이 무섭고, 무엇보다 은주의 작고 하얀 손이 너무 예쁘다는 등의 핑계를 늘어놓던 성우가 은주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은주가 놀란 눈으로 성우를 올려다보았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나 이제 은주씨 남자친구잖아요.”
성우가 낮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은주는 빨개진 얼굴을 숨기려 잽싸게 고개를 돌렸지만 찰랑이는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수줍은 미소는 차마 숨길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은주의 집 앞에 도착했다. 포장마차와 은주의 집 사이의 거리가 짧다는 것이 유일한 이유는 아닌 것 같았다. 연애 첫날의 설렘을 가득 안고 도착한 이곳에는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한 쌍의 연인이 서로를 마주 보며 서 있었다. 조용한 분위기를 깨고 먼저 인사를 건넨 건 성우였다.
“추운데 얼른 들어가요. 오늘 나한테 해 준 말들 하나하나 다 고마웠어요. 내 가치를 알아봐 줄 사람, 그거 은주씨가 해주겠다는 말은 특히나 더요.”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했던 말이잖아요. 그 말을 내가 먼저 할 수 있어서 기뻐요.”
“죽기보다 나가기 싫었던 소개팅이었는데, 안 나갔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네요.”
“그러니까요. 나한테 엄청 못되게 굴긴 했지만 그래도 나와 줘서 고마워요 성우씨.”
은주가 장난스레 성우를 노려보며 말했다. 성우가 웃으며 답했다.
“그땐 정말 미안했어요. 그 이야기는 이제 하지 마요. 나 진짜 쪽팔리단 말이에요.”
“알았어요. 버스 끊기겠다. 얼른 가요.”
은주에게 손을 흔드는 성우를 바라보고 있던 은주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성우의 이름을 불렀다.
“성우씨,”
“네?”
은주가 성우에게 천천히 다가오더니 성우의 품에 폭 안겼다. 손을 흔들다 말고 돌처럼 굳어버린 성우에게 은주가 말했다.
“나 이제 성우씨 여자친구잖아요.”
코트에 얼굴을 묻은 채 웅얼거리며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 은주의 뒤통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성우가 허공에서 헤매던 손을 내려 은주의 머리를 감쌌다. 쌀쌀한 가을밤이었지만 두 사람을 에워싼 공기는 어느 때보다 따뜻하고 포근했다.
+ 부제 ‘고백의 본질’에서 제가 의도한 본질의 뜻은
‘서로의 아픔까지도 공감하고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우와 은주의 관계를 단순히 설렘을 나누는
가벼운 연인 사이로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 다음 화 연재 전에 암호닉 신청 공지를 하나 띄우려고 해요!
완결 이후 있을 메일링과 관련된 내용일 테니 공지사항도 빼놓지 말고 확인해 주세요:)
여러분이 있기에 제가 계속 글을 써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