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행복에게 08
8장. 같은 시작 다른 끝
“21번부터 24번까지 들어오세요.”
간만에 양복을 차려입은 성우가 크게 숨을 한 번 내쉬고는 면접실 안으로 들어간다.
“22번 지원자는... 성이 옹씨네요? 옹성우?”
“네. 홍씨 아니고 옹씨입니다.”
“음... 학벌도 괜찮고 스펙도 좋고... 근데 이력서를 보니까 특별히 눈여겨볼만한 점은 없네요?”
“네? 아...”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한 성우에게 면접관이 질문을 던졌다.
“혹시 내가 다른 지원자들보다 이거 하나는 확실하게 잘 한다 싶은 거 있어요?”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주변 사람들을 편하게 하는 능력은 뛰어난 것 같습니다.”
면접관이 성우의 대답에 미간을 한껏 찌푸리더니 언짢은 말투로 다시 물었다.
“아니, 그런 인성적인 거 말고. 업무 면에서 잘하는 거 없냐고요.”
성우는 쉽사리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복잡한 얼굴로 면접실에서 걸어 나오는 성우가 보인다.
“어떻게든 되겠지 뭐.”
면접을 보는 동안 꺼놓았던 핸드폰을 켜자마자 성우의 눈에 들어온 건 방금 전 도착한 은주의 메시지였다.
[성우씨 오늘 면접 날 맞죠? 면접 잘 봤어요?]
메시지를 확인한 성우의 얼굴에 어느새 어두운 그늘이 걷히고 환한 웃음꽃이 피어났다.
[열심히는 했는데 결과는 잘 모르겠어요. 이따 저녁에 시간 괜찮아요? 은주씨 보고 싶은데.]
[어제도 못 봤는데 오늘은 당연히 봐야죠. 어디서 볼까요?]
은주의 집 근처라고는 하지만 매번 자신의 학교 주변에서 데이트한 것이 마음에 걸렸던 성우는 재환이의 도움을 받아 강의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은주네 학교를 찾았다. 학교 선배 다예와 함께 정문을 걸어 나오던 은주가 성우를 발견하고는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성우씨! 어떻게 알고 왔어요?”
“다 방법이 있죠. 아, 안녕하세요. 은주씨 남자친구 옹성우라고 합니다.”
성우가 다예에게 허리까지 숙여가며 인사하자 은주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뭘 또 인사까지 해요. 언니, 언니는 입 좀 다물어요. 벌레 들어가겠어.”
“어? 어... 너 진짜 복 받았다. 성우씨라고 했나? 다음에 또 봬요.”
성우의 얼굴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 다예를 보고 있던 은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언니가 성우씨를 왜 또 봐. 가요, 성우씨.”
가자는 은주의 말을 들은 체 만 체 하던 성우가 다예에게 장난스럽게 물었다.
“다음에 은주씨 빼고 자리 한 번 마련할까요? 아직 제가 은주씨에 대해 너무 몰라서요.”
“저야 좋죠! 제 연락처 필요하세요?”
“두 사람 쿵짝 되게 잘 맞네. 그럼 둘이 놀아요. 난 갈게.”
“그래! 얼른 가.”
“에이, 은주씨 없이 무슨 재미로 놀아요.”
성우와 다예의 대답이 엇갈리자 다예가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성우씨 손잡고 얼른 가. 우리 은주 잘 부탁해요.”
“걱정 마세요.”
예고 없이 찾아온 성우 덕에 한껏 신이 난 은주가 학교 근처에 라멘 잘 하는 곳을 안다며 성우를 데리고 자주 가는 일식집으로 들어갔다.
“성우씨, 아까 그 언니한테 뭐라고 연락 왔는지 알아요?”
“뭐라고 왔는데요?”
“너무 잘생겨서 연예인인 줄 알았대요.”
“진짜요?”
성우가 쑥스러워하며 웃었다. 성우의 두 귀가 빨개졌다.
“성우씨 귀 엄청 빨개졌어요. 잘생겼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
“아...”
“하긴, 이렇게 잘생겼는데 처음 들어봤을 리가 없지. 성우씨도 본인이 잘생긴 거 알고 있죠?”
“약간?”
“얄미운데 뭐라 반박할 말이 없네. 아, 언니가 다른 말도 했는데 뭐라고 했는지 맞춰 봐요.”
“나야 모르죠. 얼른 알려줘요. 궁금하니까.”
은주가 살짝 뜸을 들이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가 호칭 좀 바꾸래요.”
“......”
“성우씨 귀 또 빨개졌어요!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아무 생각도 안했거든요. 은주씨 편한 대로 불러요. 난 다 좋으니까.”
“나중에 바꾸더라도 지금은 성우씨라고 부를래요. 아무 것도 아닌데 괜히 설레는 그런 게 있어요. 성우씨, 성우씨 하고 부르기만 해도.”
“그게 좋으면 그렇게 불러요.”
“아 맞다. 성우씨 오늘 면접은 어땠어요?”
“최선을 다 하긴 했는데, 잘 모르겠어요. 이쯤 되니까 날 써줄 회사가 있긴 한 건가 싶고.”
“당연히 있죠. 성우씨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요. 요즘 압박 면접 엄청 심하다고 들었는데 그렇진 않았어요? 막 일부러 기분 나쁘게 말하고 그런다던데.”
“엄청 편안한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다 이겨내야 할 부분이죠 뭐. 나한테만 그러는 것도 아니고, 그런 상황에서도 뽑힐 사람은 뽑히니까요.”
담담히 이야기를 이어가던 성우의 얼굴에 씁쓸함이 비쳤다. 자신이 입 밖으로 내뱉고 있는 말들이 왠지 모르게 낯설지 않았다.
- 3년 전
“오늘 면접 잘 봤어?”
“잘 모르겠어. 대학 들어오고 나서 처음 보는 면접이라 긴장을 너무 많이 했나 봐. 난 분위기가 그렇게 빡셀 줄 몰랐는데, 내가 한마디 할 때마다 면접관들이 죽일 듯이 달려들어서 준비해간 말도 다 못하고 나왔다니까. 별별 이상한 질문을 다 하더라.”
첫 회사 면접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성우가 승혜에게 투덜대며 말했다. 마치 괜찮다는 위로를 바라는 어린아이처럼.
“요즘 압박 면접 심하다고 하던데 진짜인가 보네. 그래도 다 감수해야지. 면접관들이 괜히 그러는 것도 아니고,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합격자는 생기잖아.”
“......”
“어떤 거 먹을래?”
“누나... 그냥 수고했다고 해주면 안 돼?”
메뉴판을 보며 별 생각 없이 말하던 승혜가 아차 싶었는지 뒤늦게 수습을 시도한다.
“아... 미안. 내가 너무 잔소리처럼 말했지? 나도 면접 보고 온 날 집에 가서 면접 어려웠다고 징징대면 엄마가 항상 저렇게 말했거든. 나도 모르게 엄마가 했던 말들이 튀어나와 버렸네.”
“아니야. 틀린 말도 아닌데 뭐.”
“다 네가 잘 됐으면 해서 그러지. 우리 성우 얼른 취직해서 누나 먹여 살려야 하는데.”
분위기를 바꿔보려던 승혜가 성우의 눈치를 살폈다. 성우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
“성우야, 방금 한 말 기분 나빴어? 내가 너 부담 주려는 게 아니라 그냥...”
성우가 승혜의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나도 알아. 누나가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는 거. 나는 가끔 누나가 나에 비해 너무 어른스럽다는 생각을 해.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해져.”
“무슨 말이야 성우야...”
성우가 작게 한숨을 쉬고는 하던 말을 이어갔다.
“누나는 분명 내 여자친구고 나는 누나 남자친군데, 누나가 이렇게 말할 때마다 날 그냥 철없는 남동생으로 보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돼. 그래서 너무 화가 나는데, 그 와중에 하는 말마다 다 맞는 말이라 뭐라 할 수도 없어. 이것도 다 내 문제라는 거 알아. 아는데, 누나랑 내가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속상해.”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승혜가 서서히 표정을 굳히더니 조금 화난 듯한 말투로 말을 시작한다.
“그럼 어떡해. 난 너보다 사회생활을 먼저 시작했고, 내가 겪은 어려움을 네가 겪지 않았으면 해서 말하는 건데. 위로부터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건 미안해. 근데 넌? 넌 내 입장 생각해 봤어? 내가 어떤 기분으로 그런 이야기를 했을지 이해 못한 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성우씨, 내 말 듣고 있어요?”
“...네? 네. 듣고 있었죠.”
“정말 듣고 있던 거 맞아요?”
“...미안해요.”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그냥... 내가 참 좋은 사람을 만났구나, 하는 생각?”
“갑자기 왜 이래요. 어쨌든 최선을 다했다니까 결과에 너무 연연해하지 말라고요. 아직 시간도 많고 기회도 많잖아요. 그리고 성우씨를 안 뽑으면 그 회사가 손해인 거죠. 안 그래요?”
성우를 보며 다 잘 될 거라는 듯 방긋 웃는 은주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성우가 말했다.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할 줄 아는 게 최고의 사랑이 아닐까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최고로 사랑해요 은주씨.”
“성우씨 말 하나는 최고로 잘하네요.”
은주와 성우가 서로를 보며 밝게 웃어 보였다. 창틈으로 둥근 보름달이 두 사람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 8시간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