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나 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은 알면서도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다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이상, <이런 시> 中 여기서 끝내는 게 맞을 것 같다. 나만 손을 놓으면 간단히 정리될 관계였으니까. 아니지, 끝낸다기보다 접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네. 애초에 시작한 적이 없었잖아, 그 선배와. 나 혼자 다가가고 나 혼자 떠나가고. 참 우스운 사람이었구나, 김여주. 짝사랑이라는 말은 나와 꽤 거리가 먼 단어였다. 자존심이 센 탓에, 누군가를 먼저 좋아한다는 걸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고, 딱히 눈에 들어오는 사람도 없었으므로. 나는 참 단단하고 냉정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그냥 내가 내 자신을 잘 몰랐던 거지 뭐. 내가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빠지게 될 줄도 몰랐던 거고. 이름이 옹성우라고 했다. 대충 봐도 큰 키에 작은 얼굴, 그 얼굴 속에 다 들어가 있는 것도 모자라 서로 강하게 자기주장을 펼치고 있는 이목구비. 우리나라에서 저렇게 입체적으로 생긴 사람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솔직히 눈길이 가는 외모이긴 했다. 내가 기억하는 선배의 첫인상은 ‘여자들깨나 울리고 다녔겠네.’ 싶은 정도? 그러고는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 선배와 처음으로 말을 섞어 본 건 선배를 처음 만난 신입생 OT 이후로도 석 달쯤이나 지난 전공수업에서였다. 그 전까지는 간단한 인사만 주고받았을 뿐, 딱히 말을 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으니까. 문제는 조별과제였다. 또 혼자서 모든 걸 떠맡았냐고? 아니. 성우 선배가 조장을 자처한 덕에 다행히 역할 분담은 고르게 이루어졌다. 혼자 모든 발표를 떠안았을 때와는 다르게 생겨버린 낯선 여유 때문이었을까. 과제를 할 시간이 줄어드니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여유가 생기자 자연스레 성우 선배에게로 관심이 쏠렸고, 관심이 쏠리기 시작하니 어느새 마음까지 다 쏟아낸 후였다. 그렇게 선배를 향한 내 지독한 짝사랑이 시작되었다. 운이 좋았던 건지 나빴던 건지 성우 선배와 친해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선배 자체가 워낙 붙임성 좋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조별과제를 하면서 이것저것 묻고 답하며 연락할 시간이 늘어났으니까. 아직 사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을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라 묻지 못했지만 들려오는 말에 따르면 선배는 3년 가까이 만난 연상 여자친구와 몇 달 전 헤어졌다고 했다. 그 여자가 바람이 나서 떠났다나 뭐라나. ‘어떻게 성우 선배를 두고 바람을 필 수 있지?’하고 생각하다가 굴러가는 낙엽 소리에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내 마음이 선배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모두에게 친절한 그 선배의 호의에 혼자 착각하다가 상처받기 싫었으니까. 한 반년쯤 지나니 나도 모르게 선배의 하루를 상상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었다. 전공수업을 들을 땐 항상 강의실 뒤쪽 책상에 앉아 선배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선배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일쑤였고, 수업이 끝난 후엔 지금쯤 선배는 무얼 하고 있을지를 궁금해했다. 일 년쯤 지나니 선배를 좋아하는 내 자신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고, ‘누군가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있어 행복의 이유가 될 수 있구나’하는 사실에 감사함까지 느끼게 되었다. 맛있는 걸 먹을 땐 선배가 가장 먼저 떠올랐고, 그건 재미있는 걸 볼 때나 기쁜 일이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세상의 짝사랑 노래는 전부 나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덤. 선배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서 내 마음을 헤집어 놓고 있었다. 한 번 용기를 내 고백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친구들의 말에도 선뜻 고백할 시도조차 하지 않은 건 단순히 거절당할 것이 무서워서만은 아니었다. 선배와 점점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옹성우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가면서, 선배는 지금 누구와도 연애를 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확신이 든 탓이었다. 사실 이 말도 결국엔 고백할 용기가 없어 내뱉는 비루한 변명일지 모르겠지만 선배가 여자친구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런 선배의 마음을 알면서도 괜히 내 마음을 다 꺼내 보이며 선배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지금처럼 편한 후배로 선배의 곁에 오래오래 남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선배를 좋아한 지 2년이 조금 넘은 어느 날, 우연히 이상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선배한테 두 살 어린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에이, 설마. 내가 선배를 아는데. 처음에는 그냥 소문이겠거니 싶었다. 분명 지금은 연애할 마음이 없다고 한 선배가 아니었던가. 2년 동안의 짝사랑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는 건가 싶어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 전화는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선택이 되어 버렸다. “선배, 난데요.” “어, 여주야 무슨 일이야?” 그날따라 괜히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선배의 목소리에 안심한 나는 곧 그 소문이 거짓일 거라고 확신했다. 선배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내 마음이 만들어낸 착각이었다는 것을 진작에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아까 이상한 소문을 들어서요. 제 동기가 그러는데 선배한테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거예요. 아니죠? 나한테만 해도 지금은 연애할 생각 없다고 몇 번이나 얘기했는데. 그죠?” 섣불리 선배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단정 짓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 벌써 소문이 거기까지 퍼졌어?” “...네?” “그렇게 됐어. 연애할 생각 없었던 건 맞는데, 정말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니 나도 모르게 그냥 무너지게 되더라. 네가 맨날 이러다 나 독거노인으로 늙어가면 어떻게 하냐고 걱정해줬는데 미리 말 못 해줘서 미안.” 선배의 말이 끝나자마자 물 밀듯 밀려드는 후회. 전화하지 말걸. 물어보지 말걸. 선배에게 나는 그냥 알고 지내는 후배 중 한 명이었을 텐데 혼자 들떠서 선배에 대해 다 아는 듯 떠들어대지 말걸. 이왕 이렇게 된 마당에 끝까지 선배에게 내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목구멍 끝까지 차오르는 눈물을 애써 삼켜냈다. “아... 정말 잘 됐네요. 조금만 더 오래 혼자로 지내다간 선배한테 홀아비 냄새날 뻔했는데.” 선배의 여자친구라는 사람은 어떤 여자인지, 생긴 건 어떻고 성격은 또 어떤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난 사람이며 사귄 지는 얼마나 됐는지. 물어보고 싶은 건 산더미였지만 난 그중 단 하나도 물어볼 수 없었다. 선배의 입을 통해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말을 직접 들어버린 이상 나에게 그걸 물을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아버렸기 때문에. 바닥을 치다 못해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내 자존심이 아직 조금 남아 있긴 했는지 저 아래에서 꿈틀대는 것이 느껴졌다. 차마 선배의 행복을 빌어 주겠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결국은 이렇게 내가 아닌 다른 여자를 만날 거였으면서 나에게는 그토록 혼자가 편하다고 말해온 까닭이 대체 뭐야? 나와 거리를 두기 위한 선배의 작전이었을까? 내가 선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지도 몰라. 아니다. 선배가 나를 가지고 놀았을 만큼 영악한 사람은 아니었을 거야. 어쨌든 친한 후배로서의 나를 챙겨준 선배는 순수하고 가식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수없이 많은 혼잣말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나름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을 먼저 말해주지 않은 선배에게 괘씸한 생각도 들었고, 그렇게 연애는 하기 싫다고 말하던 선배의 벽을 무너뜨린 여자에게 참을 수 없는 질투심이 느껴지기도 했다. 선배와의 전화를 마치고 나서 거의 두 시간을 울고 나서야 간신히 마음을 진정할 수 있었다. 가만히 앉아 찬찬히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오랜 고민 끝에 내려진 나의 결론은 선배와 선배 여자친구에 대한 미움도, 계속해서 흐르는 내 눈물도 죄다 나 자신에게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고백 한 번 해보지 않은 건 나의 선택이었고, 선배의 벽을 허물지 못한 것 또한 내 능력의 한계였으므로. 그 누구도 탓할 수 없고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책상 위에 던져져 있던 핸드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건넬 자신은 없어서 선배의 연락처를 입력한 후 조심스레 핸드폰 자판을 두드렸다.[아까 축하한다는 말을 못 한 것 같아서.축하해요, 진심으로. 그 여자친구분이랑 오래오래 예쁘게 만났으면 좋겠어요.] 나름 담담한 척한다고 하긴 했는데, 아무리 봐도 사심 가득해 보이는 문자잖아. 결국 글자를 한 자 한 자 지우고는 손가락을 다시 액정 위에 올려놓았다.[진짜 축하해요 선배. 여자친구분이랑 행복하세요!] 문자 하나 보내는 데 이렇게 오래 고민하는 건 또 처음인 것 같네.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눈을 질끈 감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머지않아 선배에게서 답장이 왔다.[고마워ㅋㅋㅋㅋㅋㅋㅋㅋ 너도 얼른 좋은 사람 만나서 연애 좀 해!] 하여간 저 장난기가 문제라니까.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기 위한 적당한 정도의 장난기. 어쩌면 내가 선배에게 반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저 장난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선배는 마지막까지 장난 가득한 문자로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툭 치기라도 하면 바로 뱉어낼 듯 입술 사이에 머금고 있던 한 마디. ‘아직 선배에 대한 마음을 접기에도 바쁜데 내가 어떻게 얼른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나요.’ 이 문자를 끝으로 내 2년간의 길고 지독했던 짝사랑도 끝이 났다. 문자를 계속 보고 있으니 타들어가는 내 마음도 모르고 신나서 답장을 보냈을 선배가 떠올라 괜스레 웃음이 났다. 짝사랑을 끝내겠다고 마음먹은 이 순간에도 선배를 떠올리는 내 모습이 우스워서 그냥 크게 웃어버렸다. 더 이상의 미련은 없었다. 그저 선배가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나의 행복에게' 의 번외 격으로성우를 짝사랑하고 있던 후배의 시각에서 쓴 글인데단독으로 제목을 붙여도 상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제가 좋아하는 시를 인용해 제목을 지었습니다:)++ '나의 행복에게' 10화는 금요일쯤 올리도록 할게요!항상 읽어 주시는 독자님들 고맙고 사랑합니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나 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은 알면서도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다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 이상, <이런 시> 中
여기서 끝내는 게 맞을 것 같다. 나만 손을 놓으면 간단히 정리될 관계였으니까. 아니지, 끝낸다기보다 접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네. 애초에 시작한 적이 없었잖아, 그 선배와. 나 혼자 다가가고 나 혼자 떠나가고. 참 우스운 사람이었구나, 김여주.
짝사랑이라는 말은 나와 꽤 거리가 먼 단어였다. 자존심이 센 탓에, 누군가를 먼저 좋아한다는 걸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고, 딱히 눈에 들어오는 사람도 없었으므로. 나는 참 단단하고 냉정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그냥 내가 내 자신을 잘 몰랐던 거지 뭐. 내가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빠지게 될 줄도 몰랐던 거고.
이름이 옹성우라고 했다. 대충 봐도 큰 키에 작은 얼굴, 그 얼굴 속에 다 들어가 있는 것도 모자라 서로 강하게 자기주장을 펼치고 있는 이목구비. 우리나라에서 저렇게 입체적으로 생긴 사람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솔직히 눈길이 가는 외모이긴 했다. 내가 기억하는 선배의 첫인상은 ‘여자들깨나 울리고 다녔겠네.’ 싶은 정도? 그러고는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 선배와 처음으로 말을 섞어 본 건 선배를 처음 만난 신입생 OT 이후로도 석 달쯤이나 지난 전공수업에서였다. 그 전까지는 간단한 인사만 주고받았을 뿐, 딱히 말을 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으니까. 문제는 조별과제였다. 또 혼자서 모든 걸 떠맡았냐고? 아니. 성우 선배가 조장을 자처한 덕에 다행히 역할 분담은 고르게 이루어졌다. 혼자 모든 발표를 떠안았을 때와는 다르게 생겨버린 낯선 여유 때문이었을까. 과제를 할 시간이 줄어드니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여유가 생기자 자연스레 성우 선배에게로 관심이 쏠렸고, 관심이 쏠리기 시작하니 어느새 마음까지 다 쏟아낸 후였다. 그렇게 선배를 향한 내 지독한 짝사랑이 시작되었다.
운이 좋았던 건지 나빴던 건지 성우 선배와 친해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선배 자체가 워낙 붙임성 좋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조별과제를 하면서 이것저것 묻고 답하며 연락할 시간이 늘어났으니까. 아직 사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을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라 묻지 못했지만 들려오는 말에 따르면 선배는 3년 가까이 만난 연상 여자친구와 몇 달 전 헤어졌다고 했다. 그 여자가 바람이 나서 떠났다나 뭐라나. ‘어떻게 성우 선배를 두고 바람을 필 수 있지?’하고 생각하다가 굴러가는 낙엽 소리에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내 마음이 선배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모두에게 친절한 그 선배의 호의에 혼자 착각하다가 상처받기 싫었으니까.
한 반년쯤 지나니 나도 모르게 선배의 하루를 상상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었다. 전공수업을 들을 땐 항상 강의실 뒤쪽 책상에 앉아 선배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선배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일쑤였고, 수업이 끝난 후엔 지금쯤 선배는 무얼 하고 있을지를 궁금해했다. 일 년쯤 지나니 선배를 좋아하는 내 자신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고, ‘누군가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있어 행복의 이유가 될 수 있구나’하는 사실에 감사함까지 느끼게 되었다. 맛있는 걸 먹을 땐 선배가 가장 먼저 떠올랐고, 그건 재미있는 걸 볼 때나 기쁜 일이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세상의 짝사랑 노래는 전부 나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덤. 선배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서 내 마음을 헤집어 놓고 있었다.
한 번 용기를 내 고백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친구들의 말에도 선뜻 고백할 시도조차 하지 않은 건 단순히 거절당할 것이 무서워서만은 아니었다. 선배와 점점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옹성우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가면서, 선배는 지금 누구와도 연애를 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확신이 든 탓이었다. 사실 이 말도 결국엔 고백할 용기가 없어 내뱉는 비루한 변명일지 모르겠지만 선배가 여자친구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런 선배의 마음을 알면서도 괜히 내 마음을 다 꺼내 보이며 선배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지금처럼 편한 후배로 선배의 곁에 오래오래 남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선배를 좋아한 지 2년이 조금 넘은 어느 날, 우연히 이상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선배한테 두 살 어린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에이, 설마. 내가 선배를 아는데. 처음에는 그냥 소문이겠거니 싶었다. 분명 지금은 연애할 마음이 없다고 한 선배가 아니었던가. 2년 동안의 짝사랑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는 건가 싶어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 전화는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선택이 되어 버렸다.
“선배, 난데요.”
“어, 여주야 무슨 일이야?”
그날따라 괜히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선배의 목소리에 안심한 나는 곧 그 소문이 거짓일 거라고 확신했다. 선배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내 마음이 만들어낸 착각이었다는 것을 진작에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아까 이상한 소문을 들어서요. 제 동기가 그러는데 선배한테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거예요. 아니죠? 나한테만 해도 지금은 연애할 생각 없다고 몇 번이나 얘기했는데. 그죠?”
섣불리 선배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단정 짓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 벌써 소문이 거기까지 퍼졌어?”
“...네?”
“그렇게 됐어. 연애할 생각 없었던 건 맞는데, 정말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니 나도 모르게 그냥 무너지게 되더라. 네가 맨날 이러다 나 독거노인으로 늙어가면 어떻게 하냐고 걱정해줬는데 미리 말 못 해줘서 미안.”
선배의 말이 끝나자마자 물 밀듯 밀려드는 후회. 전화하지 말걸. 물어보지 말걸. 선배에게 나는 그냥 알고 지내는 후배 중 한 명이었을 텐데 혼자 들떠서 선배에 대해 다 아는 듯 떠들어대지 말걸. 이왕 이렇게 된 마당에 끝까지 선배에게 내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목구멍 끝까지 차오르는 눈물을 애써 삼켜냈다.
“아... 정말 잘 됐네요. 조금만 더 오래 혼자로 지내다간 선배한테 홀아비 냄새날 뻔했는데.”
선배의 여자친구라는 사람은 어떤 여자인지, 생긴 건 어떻고 성격은 또 어떤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난 사람이며 사귄 지는 얼마나 됐는지. 물어보고 싶은 건 산더미였지만 난 그중 단 하나도 물어볼 수 없었다. 선배의 입을 통해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말을 직접 들어버린 이상 나에게 그걸 물을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아버렸기 때문에. 바닥을 치다 못해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내 자존심이 아직 조금 남아 있긴 했는지 저 아래에서 꿈틀대는 것이 느껴졌다. 차마 선배의 행복을 빌어 주겠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결국은 이렇게 내가 아닌 다른 여자를 만날 거였으면서 나에게는 그토록 혼자가 편하다고 말해온 까닭이 대체 뭐야? 나와 거리를 두기 위한 선배의 작전이었을까? 내가 선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지도 몰라. 아니다. 선배가 나를 가지고 놀았을 만큼 영악한 사람은 아니었을 거야. 어쨌든 친한 후배로서의 나를 챙겨준 선배는 순수하고 가식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수없이 많은 혼잣말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나름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을 먼저 말해주지 않은 선배에게 괘씸한 생각도 들었고, 그렇게 연애는 하기 싫다고 말하던 선배의 벽을 무너뜨린 여자에게 참을 수 없는 질투심이 느껴지기도 했다. 선배와의 전화를 마치고 나서 거의 두 시간을 울고 나서야 간신히 마음을 진정할 수 있었다. 가만히 앉아 찬찬히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오랜 고민 끝에 내려진 나의 결론은 선배와 선배 여자친구에 대한 미움도, 계속해서 흐르는 내 눈물도 죄다 나 자신에게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고백 한 번 해보지 않은 건 나의 선택이었고, 선배의 벽을 허물지 못한 것 또한 내 능력의 한계였으므로. 그 누구도 탓할 수 없고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책상 위에 던져져 있던 핸드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건넬 자신은 없어서 선배의 연락처를 입력한 후 조심스레 핸드폰 자판을 두드렸다.
[아까 축하한다는 말을 못 한 것 같아서.축하해요, 진심으로. 그 여자친구분이랑 오래오래 예쁘게 만났으면 좋겠어요.]
나름 담담한 척한다고 하긴 했는데, 아무리 봐도 사심 가득해 보이는 문자잖아. 결국 글자를 한 자 한 자 지우고는 손가락을 다시 액정 위에 올려놓았다.
[진짜 축하해요 선배. 여자친구분이랑 행복하세요!]
문자 하나 보내는 데 이렇게 오래 고민하는 건 또 처음인 것 같네.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눈을 질끈 감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머지않아 선배에게서 답장이 왔다.
[고마워ㅋㅋㅋㅋㅋㅋㅋㅋ 너도 얼른 좋은 사람 만나서 연애 좀 해!]
하여간 저 장난기가 문제라니까.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기 위한 적당한 정도의 장난기. 어쩌면 내가 선배에게 반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저 장난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선배는 마지막까지 장난 가득한 문자로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툭 치기라도 하면 바로 뱉어낼 듯 입술 사이에 머금고 있던 한 마디. ‘아직 선배에 대한 마음을 접기에도 바쁜데 내가 어떻게 얼른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나요.’
이 문자를 끝으로 내 2년간의 길고 지독했던 짝사랑도 끝이 났다. 문자를 계속 보고 있으니 타들어가는 내 마음도 모르고 신나서 답장을 보냈을 선배가 떠올라 괜스레 웃음이 났다. 짝사랑을 끝내겠다고 마음먹은 이 순간에도 선배를 떠올리는 내 모습이 우스워서 그냥 크게 웃어버렸다. 더 이상의 미련은 없었다. 그저 선배가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 '나의 행복에게' 의 번외 격으로성우를 짝사랑하고 있던 후배의 시각에서 쓴 글인데단독으로 제목을 붙여도 상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제가 좋아하는 시를 인용해 제목을 지었습니다:)
++ '나의 행복에게' 10화는 금요일쯤 올리도록 할게요!항상 읽어 주시는 독자님들 고맙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