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행복에게 10
10장. 너무 특별해서 조금도 특별하지 않은
- 1년 11개월 후
「오늘 날씨 알려드립니다. 오늘 저녁에 비 소식이 있으니 우산 꼭 챙기시기 바랍니다.」
“혹시 모르니까 우산 가져가야겠다.”
은주가 선반에서 작은 우산 하나를 집어 들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나갈 준비를 모두 마친 은주가 성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오빠, 도착했어요? 나는 준비 다 했는데.”
[나도 거의 다 왔어, 내 차 알지? 아파트 입구에 있을 테니까 한 15분 쯤 있다가 내 차로 와.]
“알았어. 얼른 와요. 보고 싶으니까.”
[나도 보고 싶다. 최대한 빨리 갈게.]
전화를 마친 은주가 마지막으로 거울을 한 번 보고는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각종 화장품이 든 파우치, 지갑, 이어폰 등으로 가득 찬 가방을 든 은주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현관문을 나섰다. 이윽고 문이 잠기는 소리를 끝으로 고요해진 집 식탁에는 분홍색 우산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은주가 성우의 차를 찾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파트 입구에 차를 세우고는 핸드폰을 보고 있던 성우에게 은주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오빠!”
“어, 왔어? 얼른 타. 춥다.”
성우의 차 조수석에 앉은 은주가 들뜬 목소리로 말한다.
“이 차 탈 때마다 느끼는 건데, 확실히 차가 있으니까 데이트하기 편한 것 같아. 나도 운전 배울까 봐요. 나중에 취직하고 나서도 차 있으면 엄청 편할 텐데.”
은주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성우가 말했다.
“그러게. 너 데리고 오늘처럼 드라이브 자주 가면 좋을 텐데 회사 때문에 못 그래서 미안해.”
“미안할 것까지야.”
은주가 웃으며 말했다.
성우의 차를 타고 한강 일대를 둘러보며 드라이브를 즐기다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함께 먹기로 했던 두 사람은 둘만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성우의 집으로 목적지를 바꾸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제 집인 마냥 편하게 소파에 앉아 TV를 튼 은주가 성우에게 물었다.
“요즘엔 회사에서 뭐 해요?”
부엌에서 은주가 마실 커피를 타고 있던 성우가 대답했다.
“별별 일을 다 하지. 이제 간신히 복사 셔틀은 벗어났는데, 부장님이 차장님한테, 차장님은 과장님한테, 과장님은 또 대리님한테 일을 자꾸 미뤄서 귀찮은 일은 죄다 내가 하고 있다고 보면 돼. 난 아직 사원 2년차니까. 오빠가 이러고 산다.”
성우의 하소연을 들은 은주가 중얼거렸다.
“회사가 진짜 힘들긴 힘들구나...”
용케 은주의 혼잣말을 알아들은 성우가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힘들지. 회사 들어가기만 하면 마냥 좋기만 할 줄 알았는데 마음 쓸 일만 늘어나고. 그래도 대학 다니면서 번 과외비랑 취직하고 받은 월급 모으니까 꽤 되더라. 아버지가 좀 보태주시긴 했지만 그래도 모은 돈으로 차도 사고 이것저것 할 수 있는 게 늘어나니까 금전적으로 여유가 생긴 게 느껴져서 뿌듯하기도 하고, 너한테 조금 더 떳떳한 남자친구가 된 것 같고 그러네.”
TV를 보다 말고 몸을 돌려 성우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은주가 잠시 고민하다 입을 떼었다.
“오빠, 오빠 돈 많이 벌어서 떳떳한 남자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는데, 그런 것 보다는 나한테 연락이나 좀 자주 해줬으면 좋겠어.”
은주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성우가 들고 있던 커피포트를 손에서 내려놓았다.
“응? 갑자기 무슨 말이야.”
그동안 쌓여왔던 서운함에 입이 삐쭉 튀어나온 은주가 말을 이어갔다.
“오빠 취직한 직후에는 자주 못 만나서 미안하다면서 사소한 것까지 다 말해주고 그랬는데, 요즘은 내 문자 확인하는 데도 몇 시간씩 걸리잖아. 아무리 바빠도 일하는 중에 내 문자 답장할 시간 정도는 있지 않아?”
성우와 함께한 지난 2년 동안 성우가 서서히 변해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음에도 겉으로는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던 은주가 그동안의 설움을 다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런 은주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성우의 언성이 덩달아 높아졌다.
“은주야, 오빠 이제 대학생 아니야. 나 이제 회사 취직했고, 상사들 눈치 보느라, 쌓여있는 업무 처리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내가 하루 종일 핸드폰 붙들고 네 연락 기다리길 바라는 건 너무 이기적인 것 같다는 생각 안 들어?”
“내가 언제 하루 종일 핸드폰만 붙들고 있으랬어? 거봐. 내가 왜 속상해 하는지도 모르잖아.”
“그럼 너 대체 왜 이러는 건데?”
자신의 말뜻조차 이해하지 못한 성우의 모습에 은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을 한 은주를 달래주기는커녕, 은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되묻는 성우의 모습에 은주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오빠... 내가 많은 거 바라는 거 아니잖아. 늦으면 늦는다, 회식이 있으면 회식이 있다 먼저 말해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 맨날 오빠 기다리다가 결국엔 연락도 내가 먼저, 보고 싶다는 말도 내가 먼저, 만나자는 약속도 항상 내가 먼저 하잖아. 요즘 들어 나만 오빠 좋아하고, 나만 오빠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은데, 이게 얼마나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지 오빠가 알아?”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은주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툭, 하고 떨어졌다. 그러고 보니 오늘 만나자는 이야기도 은주가 먼저 꺼냈다는 사실이 생각나 미안해진 성우가 목소리를 낮추고는 말했다.
“미안해 은주야. 앞으로 자주 연락하려고 노력할게. 노력은 하는데, 다시는 이런 일 생기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은 못 할 것 같아. 변명으로밖에 안 들리겠지만, 회사에 정착하기 전까지는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
끝까지 확신을 주지 않는 성우에 말에 더 이상 대화를 지속해야 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은주가 결국 입에 올려서는 안 될 말을 꺼내고 말았다.
“오빠가 나한테 그 정도도 신경 못 써줄 거면, 우리 그냥 그만 만나요. 나 여태 많이 참았어.”
더 이상 대꾸할 힘도 남아 있지 않은 성우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말했다.
“하... 나도 이제 모르겠다. 네가 나한테 뭘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왜 너랑 이런 문제로 계속 싸워야 하는지도 모르겠어. 그래, 그렇게 못 참겠으면 헤어져. 헤어지자고.”
숨 한 번 고르지 않고 토해내듯 말하는 성우의 모습에 은주는 더 이상 성우의 집에서, 성우의 얼굴을 마주보며 앉아 있을 자신이 없어졌다.
“알았어요. 오빠 마음 잘 알았으니까 내가 오빠 더 귀찮게 하기 전에 갈게. 그동안 고마웠어요.”
소파에 걸쳐두었던 외투와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난 은주가 마지막 한마디를 남긴 채 성우의 집 밖으로 걸어 나왔다.
정확히 일주일만을 남긴 채 2년을 다 채우지 못한 이들의 연애가 이렇게 끝이 났다. 너무 특별해서 평생 이별이라곤 없을 것 같던 두 사람의 끝은 조금도 특별하지 않았다.
11장. 익숙함의 부재
성우의 집에서 나온 은주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1층에 도착한 은주는 문 밖에 비가 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침에 봤던 일기예보를 떠올리며 가방을 뒤적거리던 은주는 뒤늦게 자신이 우산을 집에 두고 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평소 같았으면 다시 성우네 집에 들어가 가벼운 애교와 우산을 맞바꿔 나왔겠지만, 오늘은 은주의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은 은주는 가방을 머리 위에 올린 채 최대한 빠르게 버스 정류장으로 뛰어가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가방으로 간신히 머리를 가린 채 비를 피할 곳을 찾아 뛰던 것도 잠시, 구두를 신고 있던 은주가 비 때문에 미끄러워진 길에서 발목을 삐끗해 아파트 단지를 완전히 벗어나기도 전에 넘어지고 말았다.
“아이씨...”
짜증 섞인 목소리로 발목을 매만지던 은주의 볼에 차가운 빗물이 닿았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던 물이 바닥을 짚고 있던 은주의 손에 떨어졌다. 은주는 손등에 느껴지는 익숙하지 않은 따뜻함을 애써 모른 체 했다. 끝까지 잘 참아냈다고 생각했는데, 바닥에 주저앉아 차가운 비를 온 몸으로 맞고 있는 은주의 눈에는 어느새 따뜻한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빗물에 섞여 손등으로 떨어지는 자신의 눈물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게 된 은주는 발목을 다친 아픔도 잊은 채 소리 내어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런 은주의 등을 토닥이는 건 눈치 없는 소나기밖에는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은주는 누군가가 위에서 짓누르는 느낌에 쉽사리 이불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추운 겨울에 밖에서 한 시간이 넘도록 비를 맞았으니 감기에 걸리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켠 핸드폰에는 연락이 되지 않는 은주를 걱정하는 주변 사람들에게서 열 통이 넘는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물론, 그중 성우의 흔적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은주는 그제야 성우와의 이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 하는 생각에 은주의 눈이 또다시 눈물로 가득 찼다.
+ 죄송...해요...
결국... 헤어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