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행복에게 12
13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리를 마친 은주가 뚜껑이 닫히지 않을 만큼 가득 찬 상자를 들고 부엌으로 나왔다. 버리긴 버려야 하는데, 당장 어디에 두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 은주가 상자를 식탁 옆 바닥에 내려놓았다. 드디어 한숨을 돌리고 정장 대신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려 하는 찰나, 현관에서 초인종이 울렸다.
“올 사람 없는데... 엄만가? 엄마! 내일 온다며 왜 벌써 왔,”
초인종을 누른 사람이 엄마일 거라 확신한 은주가 현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엄마에게 왜 오늘 왔냐고 중얼대며 문을 연 은주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어...요...?”
말끔히 차려입은 정장, 손질을 하다 말았는지 차분히 내려앉은 머리,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 건지 안쓰러울 정도로 핼쑥해진 얼굴. 은주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성우였다. 성우의 얼굴을 보자마자 은주는 생각했다. 나 이 사람 못 잊었구나. 앞으로도 잊기는 글렀다, 하고.
“왜... 왔어요?”
“미안해... 네 심정 이해하지 못한 것도, 그날 널 그렇게 보낸 것도, 이렇게 말도 없이 불쑥 찾아온 것도... 전부 다 미안해.”
고개를 푹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성우의 모습에 눈물이 목 끝까지 차올라 단 한마디도 쉽게 뱉을 수 없었던 은주가 작게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입을 떼었다.
“들어와요, 우선.”
놀란 성우가 고개를 들어 은주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돼...?”
“그럼 계속 거기 서서 이야기하든가.”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 일부러 차갑게 말하는 은주의 모습에 다시 고개를 숙인 성우가 은주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왔다.
“뭐 마실 거 줄까요?”
부엌으로 들어온 은주가 성우에게 물었다.
“어? 아니, 괜찮아.”
두리번거리며 식탁 의자에 앉은 성우가 자신의 흔적으로 가득한 상자를 발견했다. 그 상자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은주의 눈치를 살피느라 그럴 여유가 없는 성우는 은주가 의자에 앉기만을 기다렸다. 괜찮다는 성우의 말에도 굳이 커피를 타 온 은주가 드디어 성우를 마주보고 앉으며 말했다.
“집에 카라멜 마끼아또가 없어서. 아메리카노도 괜찮죠?”
여전히 자신의 커피 취향까지 기억하고 있는 은주의 모습에 감동한 성우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당연히 괜찮지. 커피 안 줘도 되는데... 미안.”
“사람을 집에 들여놓고 아무것도 안 내놓기 그래서 주는 건데 뭐가 미안해. 오랜만이네요.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에요?”
은주가 물 밀들 밀려오는 감정을 꾹꾹 누른 채 물었다.
“아... 많이 놀랐지? 이렇게 찾아오는 것도 이기적인 행동이라는 거 알아. 그런데 안 오고는 버틸 수가 없었어. 2년을 함께 했으니 헤어지고 나서 힘든 게 당연한 거란 생각에 나도 견뎌보려고 나름 많이 노력했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어떻게 된 건지 점점 더 힘들더라.”
떨리는 목소리로 진심을 담아 말하는 성우의 모습에 은주는 울음이 터질 것 같아 차마 성우의 눈을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은주가 할 수 있는 건 성우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것밖에는 없었다.
“처음엔 좋았던 순간들만 계속 떠오르더라고. 우리 처음 만난 날, 네가 나한테 했던 고백, 첫 데이트, 뭐 이런 행복했던 순간들이 자꾸 생각나서 미치겠는 거야. 그러다 시간이 지나니까 이젠 우리가 싸우던 순간들까지 그리워지더라. 내 일상에서 사람 한 명 사라진 것뿐인데 그 빈자리가 너무 커서 멀쩡히 남아있는 일상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어. 매일 후회하고, 그때 내가 너를 붙잡았더라면 어땠을지 상상하고. 그게 내 하루의 전부였어. 오늘 회사 끝나고 차에 탔는데, 상상 속의 네가 자꾸만 나한테 말을 걸어서 도저히 네 집을 지나칠 수가 없더라.
많이 보고 싶었어 은주야.”
이별 후 힘들었던 건 은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은주는 성우의 말을 끝까지 들은 후에도 선뜻 다시 만나자는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다시 만난다 해도 같은 상황이 반복될 것이 뻔했고, 그런 상황 속에서 자신이 또다시 상처받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식탁에 놓인 커피 잔만 만지작거리던 은주가 고민 끝에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난 오빠 하나도 안 보고 싶었는데. 헤어지고 나서 나 되게 잘 지냈어. 이야기 끝났으면 그만 일어나요. 오늘 피곤해.”
성우가 끝까지 자신의 눈을 피한 채 의자에서 일어나 현관 쪽으로 걸어가려던 은주의 팔을 잡았다. 은주의 팔을 놓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난 성우가 은주의 눈높이를 맞추려 허리를 살짝 숙였다. 마지못해 성우를 보기 위해 고개를 든 은주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있었다. 자꾸만 흘러내리는 은주의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 넘긴 성우가 은주의 눈을 맞추며 물었다.
“정말로 나 안 보고 싶었어?”
제자리에 서서 울먹이던 은주는 성우의 품에 안기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제야 미소를 되찾은 성우가 자신의 품에 안겨 그칠 줄 모르고 우는 은주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너도 나 보고 싶었으면서.”
은주가 성우의 품에 안긴 채 흐느끼며 말했다.
“그걸 아는 사람이 뭐하다 이제 와?”
왜 두 달이나 지난 후에야 찾아왔냐는 은주의 물음에 성우는 은주를 토닥이던 것을 멈추었다. 은주가 울다 말고 성우를 올려다보았다. 성우가 미소를 거두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무서웠어. 나는 너 없이 이렇게 힘든데, 넌 벌써 날 다 잊었을까 봐. 그동안 내가 못 해준 게 너무 많아서 네가 나한테 지칠 대로 지쳤을까 봐.”
성우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피식 웃었다. 다시 목을 가다듬은 성우가 은주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그런데 아까 들어와서 보니까 그런 걱정이 싹 사라지더라. 문 앞에 서 있는 나를 확인한 네 표정, 계속 내 눈을 피하며 울음을 참는 네 모습, 그리고 그런 네 뒤로 보이는 저 상자 때문에.”
은주가 뒤를 돌아봤다. 아직 버리지 못한 갖가지 물건들을 잔뜩 쌓아놓고는 보고 싶지 않았다고 말하던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웃겨 보였을까 하는 마음에 은주의 얼굴이 빨개졌다.
“오늘 버리려고 했어. 진짜로. 다 버리고 오빠 잊으려고 했는데, 그 전에 와줘서 다행이야.”
은주가 웃으며 말했다. 말하고 나니 민망했는지 자신의 품에 다시 얼굴을 묻는 은주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성우가 은주를 꼭 안아주었다. 간신히 울음을 멈춘 은주에게 성우가 물었다.
“왜 나 안 보고 싶었다고 거짓말했어?”
은주가 착잡한 표정을 하고선 대답했다.
“나도 무서웠단 말이야. 오빠가 이렇게 찾아올까 봐. 찾아와서 다시 시작하자고 할까 봐.”
예상치 못한 은주의 대답에 놀란 성우가 물었다.
“우리 다시 만나기로 한 거... 아니야...?”
“맞아. 나 다시는 오빠 안 떠날 거야. 내가 무서웠다고 한 이유는...”
성우는 이야기를 하다 말고 잠시 뜸을 들이는 은주를 감히 재촉할 수 없었다.
“똑같은 상황이 반복될까 봐. 오빠가 나에게 소홀해지고, 그런 오빠 때문에 내가 상처받는 상황이 반복될까 봐 무서웠다고 한 거야. 지금도 무서운 건 마찬가지야. 우리가 다시 만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은주야 그건,”
은주가 무언가를 이야기하려던 성우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직 내 이야기 안 끝났어, 오빠. 나 지금도 엄청 두렵고 무서워. 무서운데, 오빠 때문에 상처받는 것보다 오빠 없는 삶을 사는 게 더 무서워. 오빠, 우리 처음으로 같이 봤던 영화 뭔지 기억나?”
“어떻게 기억을 못할 수 있겠어. 이터널 선샤인이잖아.”
“오, 기억하네? 나 오빠랑 헤어지고 나서 그 영화 수도 없이 돌려봤어. 영화에서 그러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해보는 게 사랑이라고. 상대방과 어떤 면에서 부딪히게 될지 다 알고 있지만 그런 것까지 품고 가는 게 사랑이라고. 오빠도 그때 그랬잖아.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지켜낼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랑을 했기 때문에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거라고.”
“그랬지. 너 어떻게 그런 것까지 다 기억하냐?”
이 정도쯤이야 기본이라는 듯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인 은주가 말을 이어갔다.
“오빠랑 나는 뭐가 다른데? 우리도 서로에게 완벽하지 않아. 그래서 가끔 오빠가 나를, 또 내가 오빠를 힘들게 할 거야. 그런데 그게 뭐? 그게 무서워서 깨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사랑 아니야?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내가 내린 결론은 이래. 먼 길 돌아왔으니까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싸울 때 싸우더라도 이별이라는 말은 절대 입에 올리지 말자. 오빠도 약속해, 그러겠다고.”
은주의 말이 끝나자 성우가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은주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 우리 손가락도 걸까?”
“좋아.”
“도장도 찍을래?”
“당연히 그래야지.”
“하는 김에 복사까지 하자.”
“짠. 이제 완벽하다.”
죽이 척척 맞는 두 사람은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는 약속을 한 후 서로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두 달 만에 재회한 두 사람은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역시나 은주가 바랐던 회사에 합격하게 된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신나서 한참을 떠들어대던 은주가 시계를 확인하고는 성우에게 말했다.
“오빠, 이제 가요. 내일 출근해야지.”
“내일 토요일이거든요.”
“아 맞다.”
“그리고 우리 두 달 만에 만났는데, 조금만 더 같이 있으면 안 돼?”
“음... 나도 막상 오빠 보내려니까 좀 아쉽네. 뭐 할래요? 영화 한 편 볼까?”
“영화 좋지! 뭐 보고 싶은 거 있어?”
“난 로맨스면 다 좋아. 아, 그거 볼까? 오빠가 제일 좋아하는 거?”
“노트북? 다운 받아 놓은 거 있어?”
“당연히 있지. 나도 노트북 여러 번 봤는데.”
“노트북은 또 언제 그렇게 봤대.”
“오빠의 취향이 곧 내 취향이 되어버렸으니까.”
컴퓨터를 가지러 방에 들어가려던 은주가 뒤돌아서서 성우를 보고는 싱긋 웃어 보였다. 소파에 앉아 있던 성우가 그새 능청스러워진 은주를 보며 못 말린다는 듯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웃었다.
+ 성우와 은주의 사전에 영원한 이별이란 없다!!
++ 독자님 한 분 한 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고맙습니다. 정말 많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