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랑 어떻게 연애를 해요
01
우유 한바탕
" 매일 늦어, 매일 "
" 먹을 거 없으니까 냉장고 닫고 가서 우유나 좀 사 와. "
" 먹을 게 왜 없어, 무슨 우유 "
김재환, 10년 지기 친구 사이다. 초등학교 2학년, 우리 가족이 재환이네 윗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뭐라 할 거 없이 자연스레 오고 가다 우리 부모님과 재환이네 부모님께서 친해지셨고 나 역시 김재환과 친해져 지금까지 함께이다. 김재환은 아침이면 우리 집으로 와 냉장고나 식탁에 놓인 음식을 주섬주섬 먹으며 나를 기다린다. 매일 늦는다며 구시렁거리는 건 덤이다. 준비를 마치고 내가 가방을 메면 나와 김재환은 함께 집을 나서 학교로 간다. 학교에서도 우리는 함께이다. 쉬는 시간마다 김재환은 날 찾아와 매점을 가자는 둥, 교과서를 빌려달라는 둥 10분을 보내다 반으로 돌아간다. 점심시간에도 마찬가지다. 수업 마치는 종이 울리면 우리 반으로 곧장 날 찾아오고 또 함께 급식실로 향한다. 급식을 먹고 나서도 수업 전까지 김재환과 시간을 보내고 모든 수업이 끝나고 보충 수업을 들을 때도, 석식을 먹을 때도, 야간 자율 학습이 끝날 때까지 그냥 하루를 지겹도록 얘와 함께 한다.
" 우유가 우유지 무슨 우유야, 빨리 사와! "
* * *
아, 이건 또 무슨 … 날 놀리는 건가 아니면 신박한 결투 신청인가.
" ... "
" 왜, 사 오라는 거 사 왔잖아. "
" 재환아, 뭐 하자는 거야 냉장고에 큰 우유가 뻔히 있는데 이걸 왜 또 사와 학교 가기 전에 싸우자는 거야? "
" 무슨 우유냐고 물었는데 네가 확실히 말 안 했잖아! "
" 이 등신아, 너 아까 냉장고 열어봤잖아! 내가 있는 걸 또 사 오라고 하겠냐고! "
됐다, 됐어. 앞으로 내가 알아서 해야겠다. 이렇게 김재환은 내 자립심을 오늘도 한층 더 키워준다.
" 어휴, 그냥 매점 가서 사야겠다. 가자. "
" 우유는 왜? "
" 몰라도 돼. 아, 오늘 날씨 좋다! 학교 가기에 아까운 날씨다 그치 재환아 "
날씨가 좋아 기분이 한층 더 좋아져 어딘가 들뜬 얼굴로 옆을 봤더니 제기랄 … 저 혼자서 앞질러 가고 있다. 나 혼자 말하고 있었던 거다. 뻘쭘하고 좋다, 참.
* * *
" 좀 있다 봐. "
" 오냐, 이 누나 보려면 공부 열심히 하고 "
피식 웃으며 김재환은 내 이마 한 대를 찰지게 때리는 거다. 살짝 붉어진 이마를 한 채 반으로 들어왔다. 자리에 앉자마자 가방에서 포스트잇을 꺼냈다.
' 어제는 고마웠어. '
너무 딱딱한가, 뒤에 작게 웃는 이모티콘을 그렸다. 좀 이상한 거 같다. 다시 적어야겠다. 다시 포스트잇에다 고맙다는 말을 적고 밑에다 작은 그림을 그렸다. 아씨, 너무 푼수 같잖아. 벌써 5장이나 버렸다. 공부할 때도 이렇게 공들여 안 썼는데 … 다시 처음처럼 고맙다는 말과 이모티콘을 그렸다. 이번에는 글씨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딘가 삐둘삐뚤해 보인다.
' 어제는 고마웠어! 내가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내 도움 필요한 일 있으면 말해 :) '
휴우, 손가락 쥐나겠네. 초등학교 4학년 서예학원 다니던 때보다 더 열심히 적은 포스트잇을 우유에 붙여 책상 위에 올려뒀다. 괜스레 뿌듯해져 입과 광대가 실룩실룩 올라간다. 아침 자습 시간이 끝나고 종이 치자마자 우리 반으로 들어오는 김재환이다.
그러다 교탁 앞에서 멈춰 서서 어딘가 한참을 노려보고 있다. 아침부터 왜 저런대, 나는 교과서나 챙겨서 1교시 이동 수업이나 가련다. 사물함에서 교과서를 꺼내 교실 뒷문으로 가자 뒤따라 나오는 김재환이다.
" 야, 김여주 "
" 또 왜, 아침부터 뭐가 그렇게 또 심술이 나셨어요 "
" 아침부터 우유 타령하더니 매점에서 산 우유 황민현 줬냐! "
얘가 미쳤나, 내가 황민현에게 우유 줬다고 복도에서 광고를 한다, 광고를. 나는 김재환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입에서 나온 민현이의 이름에 놀라 김재환의 입을 냅다 손으로 틀어막았다. 내가 이렇게 놀라는 이유는 민현이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우유 준 게 뭐 크나큰 일이라고, 줄 수도 있지 싶겠지만 그냥 내가 민현이를 좋아하기 때문에 누군가 내 앞에서 민현이 이름을 꺼내기만 해도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놀란다. 민현이는 나뿐만 아니라 내 친구도, 내 친구의 친구도, 옆 학교 친구들도 좋아하는 만인의 짝사랑이다. 나는 그런 민현이를 좋아한다.
" 어머, 얘가 냉장고에서 상한 걸 꺼내 먹었나 입 좀 다물지그래 재환아 "
" 아주 정성이 넘치시던데, 포스트잇에 고맙다고 한 자 한 … "
" 그냥 어제 나 도와줘서 고마워서 그래서 준 거라고! 제발 입 좀 다물어 진짜! "
사실 민현이가 어제 수학 수행평가를 도와줘서 고마운 마음에 우유를 준 거다. 물론 좋아하는 마음에 준 것도 있다. 민현이는 모두에게 다정하고 잘 돕는 사람이다. 수학 수행평가로 선생님께서 내어주신 문제 풀이와 해석을 적어내는 거였는데 수학에 취약한 나는 수행평가를 낼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마지막 한 문제 때문에 애를 먹고 있었다. 수행평가 노트를 거두어 선생님께 내어야 했던 민현이는 내 노트를 가지러 내 자리에 와서는 애먹는 나를 보고서는 도와준 거다. 또, 노트에 이름을 적지 못해 나는 민현이에게 미안하다며 얼른 이름을 써 내겠다고 하자 민현이는 괜찮다며 자기가 써서 낼 테니 다음 수업을 준비하라고 다정하게 미소를 지어주는 거다. 아, 신이시여. 저 얼굴로 저렇게 웃어버리면 제 심장이 어떻게 감당을 하라고 … 민현이가 또 내 심장을 가볍게 조져버렸다. 민또조 … 잠시 어제 민현이의 다정한 미소가 떠올라 김재환과 실랑이를 벌이다 말고 황홀경에 빠졌다.
" 딱 그래라 진짜, 나한테는 안 고맙냐고 나한테 치킨을 받쳐도 모자랄 판인데 황민현은 그깟 수학 문제 하나 도와줬다고 … 야, 내 말 듣고 있냐 "
" 듣고 있어 이 새끼야, 다음에 하나 사주면 될 거 아냐 좀 있으면 종 친다 너네 반이나 가셔 "
김재환 이 귀여운 자식, 우유가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은 이리 심술이 났다. 아량 넓은 내가 특별히 초코 우유로 사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