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랑 어떻게 연애를 해요
02
존재가 영양제, 쥐여준 영양제
오전 수업이 끝나고 여전히 반쯤 토라진 얼굴로 나에게 걸어오는 김재환이다. 많이 서운했나 보네. 하기야 김재환은 매일 나랑 아옹다옹거려도 들어줄 수만 있다면 내 말은 다 들어주는 좋은 친구이고 그런 김재환에게 고마운 마음이 커 좀 더 다정하게 대하고자 해도 막상 김재환과 함께 있으면 다정한 말을 꺼내다가도 목구녕에서 탁 막히고 소름이 끼친다. 그래, 오늘은 극복하고 다정하게 대하는 거야.
" 우리 재, 재환이 왔… 어? "
" 어디 아프냐 말은 또 왜 이렇게 더듬어 "
" 아니 그냥 우리 재, 재환이… 하… 보니까 반가워서 그러지 뭐 "
우리 재, 재환이… 남의 재환이인가 보다. '우리'라는 단어 하나 붙였을 뿐인데 팔에 닭살 돋았다.
" 야, 너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냐? "
" 안 해 안 해 이 새끼야 "
" 왜 우리 재환이에서 이 새끼로 바뀐 거야 "
하, 들숨날숨, 급식실 올라오는 것도 숨찬다. 어쩌겠어, 밥을 먹어야 하는데… 오늘 급식 메뉴에는 내가 좋아하는 떡볶이가 있다. 누가 하얗고 기다란 떡에다 빨갛고 매콤 달콤한 양념을 넣는 기발한 생각을 한 걸까. 김재환은 본인 급식판에 있는 떡볶이를 내게 덜어준다. 내가 떡볶이에 환장하는 걸 잘 안다. 그래서 매번 떡볶이가 나오면 본인 걸 나에게 덜어주곤 한다.
" 떡볶이는 진짜 누가 만든 걸까, 뽀뽀 백만 번 해주고 싶어 너무 맛있잖아 "
" 뽀뽀 백만 번? 너 떡볶이 만든 사람 싫어해? 가혹 행위잖아 "
" 나 먼저 일어날게. "
" 아, 미안 미안 내가 잠깐 미쳤어 앉아 앉아 "
그래, 드디어 인정을 하는 구나.
" 잘 아네. 정신 바짝 차리자, 재환아 "
" 알았어 알았어. 맞다, 밥 다 먹고 음악실 가자 "
" 음악실은 왜? 열쇠 있어? "
" 나 하나 썼어. 너한테 들려주고 싶어서 선생님한테 허락 맡고 받아왔어. "
사실 김재환은 음악에 일가견이 있다. 중학생 때부터 가수라는 꿈을 꾸며 음악을 시작했고 보컬뿐만 아니라 작사, 작곡도 차근차근 배우고 끄적이곤 한다. 그리고 본인이 쓴 곡을 나에게 종종 들려준다.
" 이야, 김재환 이거 완전 작사 작곡 기계네 그새 또 썼냐 "
" 다 이 오빠 능력이다 "
* * *
" 잠시만 "
음악실 뒤편 여러 가지 악기가 놓인 곳에서 기타를 들고 와서 앉더니 만지작 만지작 튜닝을 한다. 이럴 때는 또 썩 멋있단 말이지.
" 이른 아침 눈을 떠보면 네 생각이 나 너를 생각해 온종일 너를 쳐다보면 예쁜 두 눈에 입 맞추는 상상을 해
내겐 시간이 너무나 빠른가 봐 24시간도 난 부족한가 봐 "
어디든 좋아 너만 내게 있으면 돼
이젠 내가 널 지켜줄게 I wanna feel you
널 처음 만났을 때부터 멈춰있던 내 마음은 뛰어
날 보던 네 눈빛 I wanna fall in love with you "
다른 건 몰라도 김재환 노래 실력만큼은 나무랄 데가 없다. 정말 잘 부른다. 오늘도 그렇다. 그런데 뭘까, 김재환의 노래를 듣고 나니 묘하게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거 같다. 김재환의 감미로운 목소리와 낯간지러운 가사 때문일까. 또 팔에 닭살이 돋았다.
" 인정, 근데 너 이 노래 내 앞에서 두 번 다시 부르지 마 부르기만 해 죽여버릴 거야 "
" 왜? 여주 네가 내 뮤즈인데, 너 말고 불러줄 사람 없어. "
" 뭔 즈, 뮤즈? 급식 먹은 거 올라오게 하지 마 징그러. 그 뭐냐 네 친구 다니엘 잡고 불러 "
" 다니엘은 내가 징그러워서 못 불러… "
음악실에서 나와 반으로 가기 위해 김재환과 복도를 걷는데 나 혼자만 어색한 걸까, 김재환은 아무렇지도 않다. 나는 또 왜 이리 어색해 하는 걸까, 자꾸만 아까 전 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는 김재환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나 왜 이래, 머리통을 손바닥으로 퍽 하고 두들겼다.
" 미쳤네, 미쳤어 "
" 야, 김여주 너 갑자기 왜 그래 얘 오늘 진짜 이상하네… "
" 닥쳐, 하나도 안 이상해! 나 들어간다 "
* * *
체육 시간, 우리 반은 김재환네 반과 체육 시간이 겹쳐 함께 체육 수업을 듣는다.
" 자, 오늘은 여기서 마친다 각자 하고 싶은 거 해! "
체육 선생님은 수업을 그리 길게 하지 않으신다. 수업 시간 50분 중 수업 시간은 15분이다. 남은 시간에는 늘 우리 반 대 김재환 네 반 이렇게 나뉘어 남자 애들은 축구 경기를 하고 여자 애들은 축구 경기를 구경한다. 나는 누구 편이냐고? 민현이 편이다. 우리 반 편 말고 민현이 편. 민현이는 축구도 잘한다. 정말이지 민현이는 못하는 게 없다. 아, 김재환도 축구라면 제법이다. 컨디션 좋은 날엔 필드 위를 날아다닌다. 됐고, 나는 민현이 편이다.
" 야, 민현이 봐. 축구 뛰는데 저렇게 잘생길 일이냐 "
" 인정, 저건 진짜 중계해야 돼. 학교 방송 뭐해 중계하자 중계 "
우리 반 여자 애들이 독심술이라도 쓴 줄 알았다. 어쩜 내 마음을 저렇게 술술 읊어버리는 걸까. 뭐 민현이라면 다들 저런 소리 하지 않고는 못 베기지.
" 김재환 쟤도 축구 잘하잖아 그리고 귀엽지 않냐 "
롸 … ? 내가 잘못 들었나. 황민현이라고 말한다는 걸 김재환이라고 잘못 말한 게 아닐까. 아닌데, 이름이 너무 다른데. 오늘 여러 번 소름 끼친다. 축구가 끝나고 여자 애들은 민현이가 스탠드로 오기만을 기다렸다 다들 오늘 정말 잘했다며 칭찬 일색이다. 나도 마음 같아서는 같이 껴서는 칭찬을 퍼부어 비행기라도 태워주고 싶지만 나는 소심 덩어리라 멀리서 덩그러니 보고만 있다. 괜히 또 기분이 가라앉는다.
" 야, 김여주 "
" 아 뭐! "
" 아, 놀랬잖아! 김여주 너 오늘 진짜 왜 그러냐 "
" 아냐 아냐, 재환아 힘들었지… 수돗가 가서 세수나 하고 와… "
* * *
석식을 먹고 반으로 들어왔다. 맙소사, 반에 민현이 밖에 없다. 민현이는 본인 자리에서 공부 중이다. 어쩌지… 나는 민현이를 좋아하고 그렇지만 전혀 친하지 않고 어색이 반을 휩쓸고 가기 딱 좋은데… 나 뭐라는 거야. 조용히 들어가면 내가 들어온 줄 모를 거야. 나는 슬리퍼 끄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살금살금 내 자리로 갔다.
" 어, 여주야 "
어떡해, 지금 민현이가 내 이름 부른 거야? 아니야. 민현이가 귀신을 볼 줄 알고 교실 안에 있는 여주라는 귀신을 부른 걸 수도 있어. 나 또 뭐라는 걸까… 심장이 지랄발광이다. 얼굴도 뜨거워지는 거 같다. 어쩌지,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또 어떻게 돌아보지?
" 어, 어, 왜 민현… 아… ? "
망했어. 이 주둥이가 마음대로 바이브레이션을 하는 바람에 염소 마냥 말을 하며 민현이를 돌아보았다.
" 지난번에 보니까 너 문학 노트 필기 되게 잘했더라. 나 좀 보여줄 수 있어? "
" 문학 노트 필기? 내, 내가? "
" 아, 일부러 보려고 해서 본 건 아니고 지난번에 점심시간에 수행평가 거두다 펼쳐둔 거 잠깐 봤어.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
전혀, 절대, 하나도 기분 나쁘지 않아. 상냥한 말투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내 노트를 보여달라고 하는데 감히 어떻게 안 보여주겠어… 민현이라면 육두문자가 남발하는 거친 말투와 살인을 예고하는 듯한 눈빛으로 보여달라고 해도 보여줄 거다.
" 아냐 아냐 기분 하나도 안 나빠! 근데 네가 나보다 필기 더 잘했을 거 같은데, 내 거 봐도 괜찮아? "
" 나 글씨체가 악필이라 내가 쓰고도 내 거 못 알아봐. 여주 네 거는 글씨체도 예쁘고 깔끔하게 핵심만 잘 정리했던데? "
황송하다. 다른 건 몰라도 국어 과목은 놓지 않겠다고, 성적은 놓은 성적 같겠지만 나름 열심히 필기한 보람이 있다. 열심히 필기한 내 손과 샤프에게 이 영광을 돌린다. 어서 민현이에게 보여주려고 책상 서랍을 뒤적거렸는데 이놈의 노트는 평소엔 잘만 책상 서랍에 붙어있더니 이럴 땐 또 어디 갔는지 없다. 민현이가 기다릴까 봐 괜히 마음이 급해진다.
" 천천히 보여줘도 돼. "
" 짠, 마음껏 봐. "
" 야, 김여주 "
아, 김재환 쟤는 왜 지금 우리 반에 온 거야. 한 달에 두 번을 대화를 나눌까 말까 한 민현이랑 마침 나름 같은 반 친구로서의 정이 오고 가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말이야. 민현이는 내게 노트를 건네받아 교실 앞문에 서서 날 보는 김재환이 신경 쓰였는지 눈길이 김재환에게로 옮겨진다. 친구란 놈이 타이밍도 참, 훼방꾼이 따로 없다.
" 여주야, 네 친구 왔는데 가봐. 노트 고마워. "
" 아니야, 뭘! 천천히 보고 돌려줘 "
" 아, 김여주 뭐 하냐고 "
* * *
밤 10시, 학교에서의 모든 일정이 끝났다. 고3 이거 정말 할 거 못된다. 무슨 한 달에 한 번 꼴로 시험이 있다. 과제라도 없으면 몰라. 내신에 수능 공부만 해도 할 게 산더미인데 수행 평가라며 과제는 과제대로 산더미이다. 신은 고3에게 시간을 32시간으로 늘려주시든, 몸을 하나 더 주시든 해야 한다. 김재환과 집으로 돌아오는 길, 너무 피곤해 말할 힘도 없어 반쯤 기울어진 얼굴과 축 처진 어깨를 하고서는 걷는다.
" 야, 김여주 "
" 뭐, 왜 "
" 너 그, 그 뭐냐 황민현이랑 친해? "
" 그랬으면 소원이 없겠다 "
" 아까 무슨 얘기했는데? "
" 별말 안 했어. 그냥 김재환 재수 없다는 말 정도 "
도다리냐, 두 눈으로 노려보며 대문을 여는 김재환이다. 그러다 피곤에 잔뜩 씐 얼굴을 한 나를 보더니 잠시만 기다려 보라며 집으로 들어간다. 피곤해 죽겠는데 뭘 기다리라는 거야. 좀 있다 손에 뭣 모를 영양제 통을 손에 쥐고 나온다. 그러더니 하루에 한 번 학교 가기 전 먹으라며 내 손에 쥐여주고 올라가라며 손짓한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죽진 않겠지, 김재환이 준 건데.
* * *
집에 있던 영양제를 들고 나와 여주를 준 재환이는… |
" 환아, 여기 있던 영양제 어디 갔어? " " 무, 무슨 영양제? "" 왜 있잖아, 엄마가 너 먹으라고 약국 가서 사온 영양제 말이야. " " 모, 모르겠는데 " " 어디 갔지 이게 발이 달렸나 " |
* * *
재환이가 여주에게 불러준 노래는 워너원고 두 번째 이야기 1화 중 재환이가 직접 작사, 작곡해 멤버들에게 들려준 팬송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