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공백
"선생님."
"어, 성규 씨."
왼 손에 종이컵을 들고, 오른손은 하얀 의사 가운 주머니 안에 찔러 넣은 호원이 성규를 반갑게 맞이했다. 성규는 멀찍이서 부터 호원을 발견하곤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어느새 호원은 성규의 바로 옆에 다가와 성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앉아서 얘기하자. 호원의 말에 성규가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병원 안에서 얘기를 나눌 만한 마땅한 장소를 찾아 돌아다녔으나 대부분의 휴게실조차 환자들과 보호자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성규는 일층 로비의 의자에 앉아 손톱을 똑똑 물어뜯었다. 오늘 오후는 진료 없으니까 잠깐 나갔다 와도 될 거야. 나갔다 오자, 성규야. 말을 마친 호원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성규의 팔을 조심스레 붙잡고 병원을 나섰다.
병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조용한 카페에 자리를 잡은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고 앉았다. 호원은 턱을 괴고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는 성규는 빤히 쳐다보았다. 호원의 시선을 느낀 성규는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오른손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호원은 치즈케이크를 조각내어 입에 쏙 넣었다. 성규의 얼굴은 복잡해보였다. 무슨 말을 하려고하기에 저렇게 많은 고민을 하는지, 호원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성규는 다시 한 번 머그잔을 두 손으로 들고 커피를 홀짝였다. 호원의 시선이 성규의 일련의 행동에 가 머물렀다. 머그잔을 내려놓은 성규의 얄쌍한 손가락에 시선이 멈춘 찰나, 성규가 가방에서 하얀 종이를 꺼내 호원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뭐야?"
"보면 아실거에요."
종이는 두 장이었다. 하지만 두 장 모두 호원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호원은 몇 번이고 글자들을 다시 읽어 내려갔다. 눈앞이 아득해져오는 느낌이었다. 우현이 형이 우현에게 마지막으로 했다던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아마 우현의 형은 끝까지는 악역은 아니었던 모양새였다. 우현이 입이 닳도록 얘기했던, 어릴 적 소년이 자신에게 주었다던 그 쪽지. 우현이 처음으로 병원에 입원했던 날, 동생 몰래 가지고 왔던 그 쪽지. 삐뚤빼뚤한 글씨로 몇 마디 쓰여 있던 그 쪽지 내용을, 김성규가 알고 있다는 것은. 10년의 공백을 뛰어넘어 기억 속의 그 아이를 다시 만나러 온 소년이 틀림없을 것이다. 어린 아이의 10년은 짧은 시간이 아닌데. 호원은 무슨 말부터 꺼내야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두 번째 종이 때문이었다. 호원의 손에 잡힌 종이가 처참하게 구겨지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성규를 바라보니 그저 그는 빙그레 미소 짓고만 있었다. 하지만 눈가는 촉촉하게 눈물이 고인 것이, 묘하게 웃고있으면서도 우는 듯한 인상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성규의 귀쪽에 자리 잡은 보청기가 눈에 들어왔다. 속이 갑갑했다. 호원은 왼 손으로 가슴을 쳐댔다. 잃어버렸던 퍼즐 조각 하나를 이제야 찾은 느낌이었다. 남우현과 김성규. 그 둘의.
"부탁이 있어요. 선생님."
"뭔데."
"앞으로 저에 대해선, 무조건 비밀로 해주셔야 돼요."
특히 우현이한테는요. 성규의 말에 호원은 다급하게 성규의 손목을 붙잡았다. 손목을 비틀어 빼낸 성규가 자신의 손목을 어루만지며 계속 말을 이었다.
우현이가 나를 아직 기억하고 있어요. 그 사실 자체만으로 기뻤어요, 나는.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어릴 때의 날 만나고 싶다고 해서 날아갈 것 같았어요. 나만의 추억이 아니었으니까. 우리 둘이 함께 공유했던 소중한 추억이었으니까. 몇 번이나 죽고 싶었는데, 내가 남긴 쪽지가 보고 싶어서 꾹꾹 참았대요. 우습죠. 별 것 아닌 쪽지잖아요. 그런데 그게 10년을, 그 세월을, 버티게 해 준 거예요. 나도…. 버틸 수 있었어요. 선생님. 10년을요. 그 예뻤던 눈망울을 다시 보고 싶어서 견뎠어요. 10년을. 그리고 다시 만났어요. 성규의 얼굴에 한 줄기 미소가 스쳐지나갔다가 금세 사라졌다. 우현이 수술, 성공하면요. 저는….
차근차근 말을 하던 갑자기 성규가 입술을 깨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추억은 추억이어야 아름다운 거예요."
난 우현이에게 그런 존재여야 해요.
성규가 떠난 빈자리에는 차가운 바람만 휑하니 불었다. 혼자 남겨진 호원은 지친 듯, 의자 등받이에 몸을 털썩 기대었다. 신이란, 참 야속한 존재였다.
*
"맛있어?"
"맛있어."
우현은 성규가 깎아준 사과를 오물거리며 헤실헤실 웃어보였다. 너 요새 살 엄청 쪘어, 남우현. 성규가 우현의 배를 콕콕 찌르자, 우현은 몸을 요리조리 꺾으며 성규의 손길을 피하며 볼멘소리로 받아쳤다. 주는 대로 받아먹으니까 살이 찌지. 이렇게 되도록 맨날 먹인 게 누군데. 성규가 피식 웃으며 우현의 볼을 잡고 흔들어댔다.
"오늘은 뭐했어?"
"친구 만나고 왔어."
"친구?"
"네 후드티 골라준 애."
좀 공룡같이 생기기도 했고, 원숭이 같이 생기기도 했는데. 너 보고 싶다고 얼마나 떼를 쓰는지, 떼어놓고 오느라 고생 좀 했어. 성규가 우현의 손톱을 깎아주며 중얼거렸다. 잠자코 성규의 말을 듣고 있던 우현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입을 쭉 내밀었다. 우현의 입술을 발견한 성규는 손바닥으로 우현의 입술을 톡톡 쳐댔다.
"왜?"
"난 형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잖아."
그래도 뭐, 이제 천천히 알아 가면 되지. 우현은 저 혼자 결정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가 차다는 듯한 성규의 실없는 웃음소리가 들리자 우현은 저도 따라 웃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이나 의미 없는 박장대소를 하던 두 사람은 나란히 침대 위에 누워 손을 맞붙잡았다.
"나 수술 성공하면, 형 우리 집에 초대할게."
"영광인데."
"우리 백구도 소개시켜줄게."
아무나 소개 안 시켜주는 거야. 영광인 줄 알아. 우현이 성규의 볼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점점 낮아지는 것이 우현이 잠에 빠져들고 있는 것 같았다. 성규는 누군가가 병실 천장에 붙여놓은 야광 스티커를 바라보았다. 눈도 안 보이는 애한테 저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람. 어릴 적, 보청기를 끼기 전의 성규에게 노랫소리는 아무런 감흥 없는 금붕어 같은 입모양에 불과했듯이.
"우현아. 자?"
"으, 아니…."
"나무야, 바람이 불면-."
뜬금없이 성규가 노래를 시작했다. 우현이 잠에 빠져들 찰나, 들려온 노랫소리는 우현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우현은 손을 더듬어 성규의 가슴께에 손바닥을 올렸다.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성규의 몸이 느껴졌다. 꾸밈없는 노랫소리가 병실 안에 맴돌았다. 단순한 가사가 반복되는 노래는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김성규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우현은 조심스럽게 성규가 부르는 노래를 함께 따라 불렀다.
김성규는 봄바람 같았다.
"그 노래."
"응."
"나 부르는 것 같아. 옛날에 친구들이 나무라고 자주 불렀는데."
"그래?"
우현은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 우현의 손이 가슴에서 내려와 성규의 손을 꼭 붙잡았다.
"우현아."
"으응."
"너, 공주랑 병사 이야기 알아?"
"들어본 적 있어."
"넌 어떻게 생각해?"
병사 말이야. 하루만 더 기다렸으면 공주와 결혼을 했을 텐데. 성규의 말에 우현은 한참을 말없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겨우 한 마디를 툭 던졌다.
"모르겠어."
"생각해 봐. 곰곰이."
생각, 생각…. 머리를 감싸 쥐고 곰곰이 생각하던 우현은 어느새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이럴 때는 완전 애기라니까. 성규는 피식 웃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천장에 붙은 야광 별들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성규가 중얼거렸다.
"병사는 환상을 안고 간 거야."
자신이 공주를 기다린 것이 아닌, 공주가 자신을 기다렸다는 환상. 공주가 약속을 저버렸을 때의 고통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수술, 잘 하고 와. 우현아."
병실 문이 열리고, 다시 굳게 닫혔다.
*
나무야 바람이 불면 그 바람을 노래하렴.
나무야 바람이 불면 그 바람에 춤을 추렴.
바람 따라 꽃들도 피어나고 바람 따라 강물도 흘러가지.
나무야 바람이 불면 그 바람을 노래하렴.
*
"이제 안대 풀 거에요."
우현의 앞에는 어느새 귀국한 우현의 누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하얀 붕대가 칭칭 감긴 동생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모두가 긴장하고 있었다. 의사의 손이 조심스레 붕대를 풀어냈다. 꼭 감긴 우현의 눈이 보였다. 남우현 씨, 천천히 떠보세요. 눈, 떠보세요. 의사의 목소리가 들리자, 우현은 조심스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어때요, 우현 씨."
"누나…."
"우현아!"
10년 만에 다시 보는 세상은, 너무나 밝고 눈이 부셨다.
우현은 어색하게 거울 앞에 앉아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릴 적의 얼굴이 남아 있긴 하지만 영 어색했다. 생각보다 말끔한 모습에 놀라기도 했다. 깔끔하게 면도된 얼굴, 길지 않은 손톱. 눈이 보이지 않는 자신이 하기에는 힘든 일들. 이것은 전부 다 김성규가 해준 것이 분명했다. 수술 3일 전부터는 준비를 해야 한다며 성규를 볼 수 없었다. 예고하지 못한 헤어짐이었고, 수술이 끝난 후엔 분명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여태 성규 생각을 하지 않은 우현이었다. 왠지 모를 미안함에 우현은 자신의 손톱을 매만졌다. 마지막으로 본 날에 그런 말을 했지. 병사와 공주. 공주와 병사. 침대에 앉아 발을 달랑거리고 있는 우현에게 누나가 무언가를 건넸다.
"우현아, 이거."
"이게 뭔데?"
"너, 눈 다시 뜨면 이거 제일 보고 싶다고 했잖아."
낡고 오래된 종이 쪼가리. 그 쪽지를 보자마자 가슴이 쿵쿵 뛰었다. 우현은 떨리는 손으로 10년 만에 제 주인을 찾은 쪽지를 조심스레 펴 보았다. 글자를 훑어 내린 우현의 표정은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보였다. 쪽지는 우현의 손에서 미끄러져 병실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중요한 거라면서, 이렇게 버려도 돼? 우현의 누나가 툴툴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우현은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그제야 묘한 분위기를 느낀 우현의 누나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우현의 눈에선 눈물방울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누나."
"울면 안 돼. 무리 갈지도 몰라, 우현아."
"김성규."
"응?"
"어디 있어, 김성규?"
나 귀국하기 전까지만 너 봐주기로 돼 있던 거라, 성규 씨. 지금 없어. 우현의 누나는 적잖이 당황한 표정으로 손수건으로 우현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꾹꾹 눌러 닦아주었다.
"찾아야 돼…."
"무슨 소리야, 우현아."
"겨우…. 만났는데…."
우현은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
안녕 우연아
나는 김성규라고 해 난 열두 살이야
너 이름이 이게 맞는지 모르겠어
왜냐면 난 귀가 잘 들리지 않거든
보청기를 잃어버렸어
내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종이랑 연필 가져올게
여기서 기다릴게
아기다리고기다리던 |
쪽지 내용 드디어 공개 별 것 없죠? 내가 별 것 없다고 했잖아요 ㅎㅎ...나의 적 너의 적 우리들의 적 개강이 다가오는군요 껒여............................................ 여러분 집회 가요? 나 찾아봐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