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고 싶다.
난 이따금 이런 생각을 한다. 돌아가고 싶다고. 정해진 곳 없이 그저 막연히 하는 생각이다.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친구들과 놀러 갈 때도 집에서도. 어딘가를 그리워하고 돌아가길 원하지만, 해답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저 꽃피는 봄과 무더운 여름과 쓸쓸한 가을, 눈 덮인 겨울을 돌며 어디로도 가지 못한 채 시간을 맴도는 것이다. 무엇 하나 새롭지 않고 낯설지 않은 이곳에서.
"그럼 성운이는 하수 옆자리로 가자."
창밖을 보던 고개가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돌아갔다. 내 이름을 부른 건 담임선생님이었고 그 옆에는 처음 보는 남자애가 서 있었다. 까만 물을 몇 번이고 들인 머리와 그에 대조되는 희고 깨끗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도톰한 입술을 곡선으로 만들어 빙긋 웃어 보였다. 그 웃음에 나도 모르게 시선을 내렸고 이윽고 명찰을 바라보았다. '하성운' 동글동글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이름이 굵직하게 박아놓은 궁서체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그가 내 옆자리로 걸어온다. 가방끈을 가볍게 쥔 손 아래로는 적당한 굵기인 메탈시계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전등에 비추어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나는 나름대로 그를 신경 쓰고 있는 것을 보여주려 옆자리 의자를 뒤로 당겨주었다. '고마워.' 그는 아까 보였던 은은한 미소로 말했다. 가방을 옆에 걸어 정리하고 공책과 필통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제 위에 걸치고 있는 셔츠만큼 흰 피부가 사내의 것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응.' 그를 흉내 낼 수는 없었지만,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로 대답하려고 했다.
나도 곧장 서랍 안에 아무렇게 욱여넣은 교과서를 찾아 꺼냈다. 이윽고 지금 생각났다는 듯이 말하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참, 성운이가 아직 교과서를 못 받았으니까 오늘 하루만 같이 봐야 해-' 종일 불편하겠네. 나는 적당히 들릴 법한 크기로 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옆자리에 있는 성운이를 한 번 바라보니 멋쩍게 웃고 있었다. '미안, 오늘 하루만 부탁할게.' 아까도 생각 한거지만 목소리가 듣기 좋은 것 같다. 남자답게 굵직하진 않지만 듣기 편하고 익숙한 느낌이었다. 딱히 사과받을 상대도 아닌데 미안하다는 얘기를 듣자니 민망해 목덜미를 쓸며 말했다. '아니야. 네 잘못도 아니고.' 성운이는 내 대답에 금방 웃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이 시작하고 성운이는 내 쪽으로 조금 더 당겨서 앉았다. 향수를 뿌리나, 아니야 샴푸 냄새인가. 되도록 티를 내지 않고 냄새의 정체를 확인하려고 애썼다.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는, 하지만 맡아본 적이 있던 그런 향이었다. 도대체 뭔가 싶어 고개를 살짝 돌리는데 그대로 성운이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부드럽게 바라보는 눈빛과 비슷한 갈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니 몸이 굳는 기분이었다. 성운이는 그런 나와 쭉 눈을 마주쳤다. 피하지도 않고 그저 눈만 깜빡거리며. 익숙해. 나는 이 상황을 똑같이 겪었어. 근데 누구랑? 어디서?
'집-중.' 나와 눈을 마주치던 성운이는 입술을 작게 움직여 입 모양으로 집중하라고 말했다. 그 말에 굳은 몸이 말을 듣기 시작했고 나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뭐였지, 방금. 칠판은 보고 있었지만 귀에 들어오는 얘기는 거의 없었다. 귀는 듣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말이 지나가기 위한 길인 듯했다. 사각사각-. 종이에 무언가를 쓰는 소리가 들렸다. 성운이가 교과서 귀퉁이에 작게 글씨를 적고 있었다.
[방금 너무 쳐다봐서 민망했지, 미안.]
나는 선생님의 동태를 한 번 살피고 같이 샤프를 쥐어 그의 필담에 응했다. 생긴 거랑 다르게 글씨는 썩 잘 쓰는 편은 아니었지만 또박또박한 편이었다.
[아니야. 내가 먼저 봤는데]
그가 내 글을 읽고 있는 사이 나는 말 하나를 빠르게 덧붙였다.
[사실 너 향이 되게 좋아서 궁금했어. 향수 뿌려?]
덧붙인 내용까지 읽던 성운이는 손으로 괴고 있던 턱을 들어 살짝 웃었다. 그리고 나를 한 번 보더니 다시 귀퉁이에 적기 시작했다.
[그래? 따로 향수 쓰지는 않고 바디 로션 많이 바르는데 그 냄새인가 봐.]
성운이의 대답에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방금 나를 보고 웃었던 것처럼 미소를 지었다가 고개를 돌렸다. 창문을 넘어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고 길게 늘어뜨린 머리가 조금씩 날리는 것이 느껴졌다. 볼에 닿는 옆머리가 간질간질했다. 볼 뿐만 아니라 귀퉁이에 빼곡힌 대화도 역시 비슷한 느낌을 자아냈다. 큰 의미도 내용도 없는 대화에서 무언가 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돌아온 기분이었다. 정확히 어디인지도 왜 원하는 지도 몰랐던 곳으로.
수업이 끝나고 나는 바로 책상 위로 몸을 엎드렸다. 나무 책상의 차가운 촉감이 팔 전체에 닿아 기분이 좋았다. 성운이는 '잘봤어-' 라며 반쯤 걸친 교과서를 닫아 내게 건냈다. 그것을 받은 그대로 다시 서랍에 쑤셔넣었다. 모서리가 살짝 밖으로 나온 것 같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성운이도 몸을 한 번 쭉 피고 다시 팔을 책상 위로 올려두었다. 몸을 다시 일으켜 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어디서 전학을 온 건지, 집은 가까운지 등 전학생에게 묻기에는 무난하고 평범한 것이었다. 성운이는 지방에 있었고 가족 중에 장기요양을 받아야 하는 분이 계셔서 그분과 함께 서울로 올라온 것이라고 했다. 집은 학교 근처에 있는 아파트 단지에서 산다고 했다. 나는 그 근처 빌라에 살았기 때문에 동네주민으로서 반가움을 표했다.
우리학교는 동네에서 다니는 애들이 적고 거의 타지역에서 등하교를 했다. 그렇다보니 같은 방향으로 하교할 사람이 없어 교문 앞에서는 늘 혼자 집으로 향하고는 했다. 오늘 처음 본 사이라 조금 어색하기는 하지만 같이 집에 갈 사람이 생기는 건 좋았다. 괜히 들뜨는 기분에 신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앞으로 등하교 같이 할래? 내 친구들은 다 방향이 달라서 나 혼자 왔다갔다 했거든."
"그럴까?"
"응응. 그러자, 그러자."
'그래-' 성운이는 곧잘 웃어 보였다.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는 입술이 보기 좋았다. '예쁘다'라는 말이 그대로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지만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말했을 때 얼마나 민망해질지 아니까. 우리는 그런 도란도란한 대화를 쉬는 시간마다 조금씩 이어가며 말을 트고 있었다. 성운이랑 대화하는 건 좋았다. 편하고 내 말을 잘 들어주고 자기 얘기도 잘해주고. 나는 무엇에 그리 신이 났는지 그에게 계속 무언가를 말했고 물었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하굣길에서도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이든 끝이 있기 마련이고 우리는 갈라져야 하는 길에 다다랐다.
발걸음을 멈춘 성운이는 나를 한 번 돌아보았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그 웃는 얼굴로 말했다.
"오늘 고마웠어. 처음이라 어색할 뻔했는데 말도 계속 걸어주고."
"고맙긴, 내가 열심히 떠든 건데. 뭔가 네가 되게 편한 느낌이라서 계속 얘기하게 되더라고. 어디서 만난 적 있는 사람처.. 성운아?"
구구절절 말을 뱉던 입술이 다물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까지 말갛게 웃고 있던 성운이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황한 나는 그의 눈물을 닦아주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성운이는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빨갛게 물든 눈을 하고 내게 말했다. 사실 말했다기보다는 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다행이다.. 정말 조금이라도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성운이의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원래 아는 사이인데 내가 기억을 못 해서 이러는 건가? 근데 난 살면서 하성운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는데. 여전히 눈물을 닦아주지 못한 팔이 허공을 맴돌았다. 애가 울고 있으니 올리지도 내리지도 못하는 애매한 자세가 되었다. 성운이는 제 손으로 눈가를 벅벅 닦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내 뒷머리와 어깨에 손을 가져왔고 몸을 살짝 당겨 품에 안았다.
당황스러운 일의 연속으로 그대로 굳은 나는 '성운아...?' 하고 외마디로 그의 이름을 부를 뿐 별다르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젖어있는 그의 목소리는 '내일 봐.' 이 한마디를 남겼고 떨어져서 얼굴을 보였을 때는 울기 전에 말간 얼굴 그대로였다. 멍하니 서있는 내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는 먼저 발길을 돌린다. 한참을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고 서있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뭐지? 뭐였지 방금? 힘없이 움직이던 발은 점점 빨라지더니 어느새 뜀박질을 하고있었다. 귀끝이 달아올라 욱신거렸고 숨이 차올랐다.
평소에는 힘들다고 겨우겨우 올랐던 계단도 단숨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가만히 여유롭게 걸을 수 있는 기분이 아니었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시는 탓에 비어있는 집에 쿵쿵 발소리만 울려퍼졌다. 메고있던 가방을 집어던지고 거울 앞에 섰다. 얼굴 위로 무언가가 흐르는 느낌이 나서 본 거울 속 나는 아까 성운이와 마찬가지로 울고있었고 내가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을 인지하자 미친듯이 울기 시작했다. 무언가 잃어버린 것 같은 공허함과 동시에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그날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긴 꿈을 꾸었다. 처음봤지만 익숙했고 그립기까지한 얼굴을 그리는 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