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평생 동안 듣고 싶은 노래가 있다면
넌 그런 노래일 거야.
Murakami Haruki - 〈Norwegian wood> 중에서
여름 하면 뭐가 떠오르세요? 어떤 분들은 시원한 팥빙수를, 또 어떤 분들은 한여름 밤 캠프파이어를…….
거실에 누워 TV 속 마이크를 쥔 진행자의 나긋한 목소리에 취해 게슴츠레 눈을 깜빡였다. 아뇨, 저는 한강 치맥이요. 진리의 허니 콤보. 굴러다니는 리모컨으로 스테레오 음량을 키우자, 진행자의 농담에 까르륵거리는 방청객들의 웃음소리가 단단한 벽과 마찰했다.
- “소리 좀 줄이지?”
- “내 맘이야.”
- “내 집이야.”
- “우리 집이지.”
- “네가 관리비 한 푼이라도 낸 적 있어?”
엄마는 식탁 앞에서 해독 주스인지 과일즙인지 모를 초록색 괴물을 마시며 태클을 걸었다. 방학도 했겠다, 돈이라도 벌어오면 좀 좋니. 백발백중 저격에 반항적인 눈빛을 부려보지만, 주방 창문을 통과한 빛이 기어코 그녀의 후광이 되어 시야를 방해했다. 1라운드는 아쉽게도 김여주 패.
- “관리비 낸 적은 없어도 돈으로 환산하지 못할 사랑을 엄마한테 주고 있잖아.”
- “돈으로 바꿔 와. 그게 효도야.”
- “진짜 실몽이다.”
- “실몽?”
- “극단적인 실망스러움을 나타낼 때 쓰는 단어.”
- “딸, 그건 내가 할 소리 아니니?”
그녀의 아치형 눈썹이 사납다. 재정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대학생은 울분을 머금고 음량을 줄였다. 2라운드 역시 김여주 패. 포대기 이불로 몸을 돌돌 감싸고 소파 뒤로 얼굴을 숨겼다. 이목구비만 숨기면 다 되는 줄 아는 강아지와 다름없는 꼴이었다. 그녀는 2차 폭격을 시작했다.
- “방학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이러고 있어?
- “이제 삼 주 지났어.”
- “남들은 대외 활동이다 과외다 바쁘게 사는데, 거실에서 팔자 좋게 누워 있는 애벌레는 뭐니?”
- “보통의 존재.”
- “전공이 호텔이면 연회장 단기 알바라도 나갔다 오던지. 양심이 없니 너는.”
- “털 나서 안 보여.”
오후 두 시에 듣는 꾸지람은 역시 오후 두 시라서 듣기 싫다. 일어난 지 삼십 분도 채 되지 않은 애벌레가 꿈틀대며 거실을 누빈다. 그리고는 자연스레 에어컨 온도를 내리며 그 앞에서 인공 바람을 맞는다. 뼈까지 시원한 이 느낌, 놓치지 않을 거예요. 산발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소파에 엎어져 아까부터 휴대폰 문자만 확인하는 그녀의 눈치를 본다. 실은 정적이 싫어서다. 그래서 말을 건다. 언제나 내가 먼저.
- “엄마, 오늘 최고 기온 36도래.”
- “그래서?”
- “괜히 나갔다가 구운 계란 되면 어떡해?”
- “일 없는 애벌레보다 영양 많은 계란이 낫지 않을까?”
걘 건강에 쓸모라도 있잖아. 일을 마치고 새벽에 들어온 가장은 몇 달 만에 본 자식과의 반가운 조우보다, 무직자를 나무라는 것에 더 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어 승관이는 자격증 딴다고 학원까지 등록했다던데 같이 해보는 건 어떻냐, 호텔 경영이면 최소 어학이나 컴퓨터 자격증 정도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 정 일거리가 없다면 승관이네 귤 농장이라도 보내줄 테니 제발 좀 나가보라는 잔소리에 퍽 신경질이 났다.
- “여기서 갑자기 부승관은 왜 나와?”
- “열심히 사는 네 친구보고 정신 차리라구.”
- “엄마 때문에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어.”
- “어머, 내가 너한테 아직도 큰 존재야? 영광이네?”
그렇다. 좀처럼 두 발로 일어나지 않는 딸내미를 한심하게 쳐다보던 그녀는 엄마라면 꼭 거쳐야 할 엄친아 얘기, 그러니까 엄마 친구 아들인 부승관을 들먹였다. 늘 이런 식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공부해야지 다짐하면 전교에서 노는 승관이 옆에서 공부하라는 잔소리가, 양치해야지 마음먹으면 백옥 같은 치아를 가진 승관이 옆에서 양치하라는 잔소리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눈칫밥 얻어먹지 않으려면 알바라도 해야겠다는 의지를 단박에 꺾어 버리는 그녀였다. 엄친아, 부승관으로부터 말이다. 내 인생에 도움 한 푼 되지 않는 녀석은 그녀의 입에서 세상에 둘도 없는 바른 아이가 되어갔다.
- “승관이는 어렸을 때부터 똘똘해서 어른들이 얼마나 좋아했는지 아니?”
- “그럼 데려와서 키우던가.”
- “그래도 괜찮아?”
- “부승관이랑 나랑 무슨 상관인데 그러세요? 완전 생판 남남이거든요?”
- “남남은 무슨, 어차피 둘이 만날 거면서.”
- “그게 무슨 말이야?”
- “다들 사귀고 그렇게 결혼까지 가는 거지.”
그녀는 지금까지 친구로 지내는 너희가 용하다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예상치 못한 대답에 소파 팔걸이 위로 얹은 발바닥이 꼼지락거린다. 내가 승관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다는 것을 그녀에게 아직 말하지 못해 생긴 불안함이었다.
운명처럼 등장한 그의 이름은 이지훈, 고등학교 동창이며 대학 또한 동문 예정인, 올해 그녀가 만나야 할 가장 중요한 사람. 그의 특이 사항이 있다면, 매우 트렌디하게 잘 생겼다는 것과 의도치 않은 귀여움으로 종종 상대방을 씹덕사를 일으키지만, 정작 그 귀여움을 본인만 모른다는 것. 절대 콩깍지가 쓰인 주관적 관점이 아니라는 것이 설명의 포인트다. 오늘도 속으로만 침을 튀겨가며 연설하는 내가 못났다.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하고.
- “엄만 내가 남자친구 있는지 없는지도 관심도 없지?”
- “왜, 승관이 말고 누가 너 좋아한대?”
- “내가 어디서 구박받는 스타일은 아니잖아.”
- “뭐가 됐든 있으면 데려와 봐.”
- “진짜지?”
- “승관이한테 나중에 저녁 같이 먹자고 하고.”
- “또 부승관 얘기!”
- “사거리에 한식집 새로 생겼던데 리뷰 좋다더라.”
‘기승전 부승관’ 덕분에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성을 냈다. 순간, 균형을 잃어 엉덩방아를 찧고는 그대로 입술을 물었다. 아픔을 식히는 것이다. 그녀는 이러한 바보짓을 하루 이틀 본 사람이 아닌지라, 그저 안 됐다는 듯 한숨을 쉬며 등을 돌렸다. 이젠 엉덩이가 아파 울컥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 “남자 친구 얘기는 진작 말해주면 좀 좋니.”
- “…….”
- “넌 어렸을 때부터 중요한 얘기는 꼭 나중에 하더라.”
- “…….”
- “그런 건 네 아빠 안 닮아도 돼.”
엄마는 날 보며 가끔 집 나간 아빠를 떠올렸다. 제 발로 떠난 사람을 무엇 때문에 추억하느냐 물으면, 그녀는 다 자신의 잘못이라 뭉뚱그렸다. 가정을 지키고 싶은 남자와 일이 더 좋은 여자가 결혼하고부터 틀어진 인생이었다. 지친 남자는 결국 여자에게 이혼 서류를 건넸고, 여자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지장을 찍었다. 이런 중요한 얘기는 미리 좀 해달라는 사무적인 말과 함께.
남자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건 네 살배기인 나였다. 진절머리난 얼굴과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는 거라. 남자가 떠난 그 날 새벽, 소파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어 젖혔다. 집에 들어오면 항상 서재에서 일을 보던 그녀가, 그날은 내 옆에서 작은 조명만을 의지한 채 노트북을 두드렸다.
- “아빠 보고 싶어?”
- “그럴 틈도 없어.”
- “엄마는 왜 맨날 바빠?”
- “내가 가만히 있으면 돈은 누가 버니?”
지훈에 대해 부러 숨기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굳이, 아주 굳이 변명하자면, 늘 숨만 쉬며 일하는 그녀 때문이었다. 일과 일, 스케줄에서 스케줄로 끝나는 빡빡한 삶을 지향하는 그녀에게 어떤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서로 밥상을 마주했을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우리는 꽤 담담했고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 오늘도 그녀는 주방에서 초록색 괴물을, 난 멀찍이 떨어져 그녀를 본다.
- “저녁에 손님 오니까 어디 가지 말고 문 열어주고.”
- “나도 일 있거든.”
- “무슨 일?”
- “자기 전에 어떤 수면 양말 신을지 고민해야 해.”
- “그것보다 중요한 과외 올 거니까 집 청소는 알아서.”
그녀가 현관 앞에서 뒤집어진 오픈토를 집는다. 뜬금없는 과외 얘기에 엉거주춤 다가가 코를 훔쳤다. 얇은 눈썹을 추켜세운 그녀가 전신 거울 앞에서 머리를 정리하며 슬쩍 내 눈을 마주했다.
- “나이는 열아홉, 이제부터 네 학생이니까 관리 잘해. 들어 보니까 성적이 영 형편없더라.”
- “내 학생? 무슨 성적?”
- “수준 이하라고 너무 몰아붙이지 말고 엇나가지 않게 살살, 알지?”
- “도대체 뭘?”
- “영어 과외.”
- “……뭐를 해?”
- “입에 묻은 것 좀 때.”
검지로 입 주변을 둥글게 그린 그녀가 가벼운 손 인사 뒤로 모습을 감췄다. 삐리릭-, 굳게 닫힌 도어락을 응시한다. 시끄러운 TV 광고와 취사를 시작한 밥솥이 한데 엉켜 혼란을 일으킨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그녀는 내 학생이 온다고 했다. 내게 배움을 주러 오는 사람이 아니라 배움을 받고 싶은 사람이라고. 잠시만, 도대체 내가 왜? 갑자기? 과외를? 아니 이건 뭐?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머리를 쥐어 잡고 그대로 주저앉는다. 이제 막 취사를 끝낸 밥통이 짧은 알람을 낼 때, 그것은 저기 끝 어딘가 잠겨 있는 기억을 불러냈다. 한 달 전, 술김에 한 그녀와의 통화가 이 전쟁의 서막이었다.
- ‘딸, 그럼 과외 하는 거다? 나중에 술 먹어서 기억 안 난다고 무르기 없기?’
- ‘내가 A대의 실력을 보여준다. 기적의 외국어 1등급을 내가 어?’
- ‘오케이, 녹음 끝.’
- ‘누구든 데리고 와, 점수 싹 쓸게 해 줄게.’
……술 냄새나는 저 먼바다의 기억. 집에서 혼자 맥주 파티를 하고 있던 내게 속삭인 치밀하고도 은밀한 그녀의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 ‘동생 하나 얻었다 치고 잘 좀 가르쳐 줘. 성격이 삐뚤어진 것 빼고는 착한 애야.’
이런 대 모순적인 말을 그땐 왜 알아차리지 못했는가!
이건 1급 강제 노동 착취라고!
OH MY RAINBOW
;Caramel Drizzle
Chapter. 22 〈우리 지금 만나>
#35.
바야흐로 본격적인 여름이 도래했다. 7월의 초입이었으나 황금 같은 방학이 삼 주나 지난 셈이었다. 보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보게 되는 동기들의 SNS는 음식 사진만 올리는 내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스페인 배낭여행을 간 사람도 있었고 유명 호텔에 단기로 투입되어 자랑스러운 명찰을 찍어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새벽에 게임하다 출출하면 김치찌개 속 돼지고기를 주워 먹는 내 세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름대로 힐링을 하고 있다고 정신 승리라도 하고 싶다. 하지만 그럴수록 초라해진다. 바로 옆 동에 사는 부승관 마저 제 미래를 챙기고 있었기에.
녀석은 종강 후 덜컥 자격증반에 들어갔다. 아무 생각 없이 살던 녀석의 반란이었다. 때문에 엄마는 제 딸이 옆집 아들의 반만이라도 닮았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승관의 철저한 이중생활에 속고 있는 것이다. 금요일 밤마다 일등으로 클럽 도장을 찍는 전형적인 클러버, 절대 부럽지 않은 ‘부러버’인 것을 언젠가 낱낱이 파헤쳐 주리라.
아아, 이쯤 되면 나와야 할 주인공 한 명이 더 있다. 바로 이지훈. 그는 ‘건축 과제의 신’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고 심지어 이번 첫 방학부터 동기들과 모여 공모전에 당당히 이름까지 올렸다. 새내기임에도 불구하고 학교 작업실에서 살다시피 하는 그를 보며 선배들조차 혀를 내둘렀다. 새내기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오래 굴러 봄 직한 완벽주의자의 성향을 띠고 있다는 소문이 캠퍼스를 타고 내 귀까지 흘러들어왔다.
으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보통의 존재인 내가 겨우 총을 면하고 석민과 감격의 포옹을 하고 있을 때, 지훈은 모든 과목 성적의 맨 앞자리를 차지했다. 승관은 이지훈 등에 건전지 있나 한 번 살펴보라는 둥, 숨 쉬는 것도 충전식 아니냐며 의구심을 품었고, 호텔을 차린다면 무조건 지훈에게 맡기고 싶다며 엄지를 치켜드는 석민이 있었다. 그들이 표현은 서로 달랐지만, 그의 완벽함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는 건 공통된 사실이었다.
- “대단해 아무튼.”
거실에 누워 토닥토닥 문자를 남긴다. 답장을 기대하지 않는 습관적인 문자였다. 무언가에 꽂히면 만족할 때까지 다른 건 일절 쳐다보지 않는, 조금 고집스러운 성격을 알고 있으니 섣부른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다. 한창 공모전에 열을 올리고 있을 참이라 방해하고 싶지 않으나,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보고 싶은데 말이야.
초 강풍 모드로 에어컨을 돌린다. 노을 지는 저녁, 시간을 확인하니 내게 배움을 받고자 하는 학생이 올 타이밍이었다. 첫 만남이랍시고 집 안에 페브리즈도 뿌린 나를 칭찬한다. 소파에 앉아 칭찬의 박수로 자신감이 상승할 무렵, 오랫동안 기다린 초인종이 울렸다.
푸르스름한 인터폰 스크린에 비친 앳된 얼굴, 더운 날씨에 하얀 교복 셔츠를 팔랑거리며 작게 욕을 내뱉는 소년이 있었다. 스크린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큰 눈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 “봤으면 좀 열어요.”
- “…….”
- “설마 개 무시?”
우리 여사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동생 하나 얻었다 치고 잘 좀 가르쳐 줘. 성격이 삐뚤어진 것 빼고는 착한 애야’라고. 그리고 그 부름을 받은 노동 착취자는 이렇게 대답했지.
전 아무래도 과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대신, 승관이네 귤 농장에 꼭 취직하고 싶습니다. 제가 귤 하나는 진짜 기깔나게 따거든요? 아, 먹는 건 또 얼마나 잘 먹는지, 한 번에 귤 세 개도 넣…….
- “사람 짜증 나게 만드네.”
……무급도 괜찮습니다.
#36.
거실에 놓인 앉은뱅이 책상은 붉은색이다. 배움을 받들러 온 소년의 머리도 이와 동일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관리가 되지 않은 빛바랜 붉은 색에 드문드문 갈색이 섞여 있다. 반항기 있는 두 눈이 멍한 내 얼굴을 훑는다. 통성명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 찰나, 소년은 하복 셔츠 주머니에서 조그만 물체를 꺼냈다. 굳은살 배긴 손바닥에 ‘이 찬’, 노란색 아크릴 명찰이 있다.
- “이름 멋있다.”
- “알아요.”
-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우리 반에 너랑 이름 똑같은 친구 있었는데.”
- “그래서요?”
- “……응?”
- “보나 마나 그 사람도 잘생겼겠죠.”
말본새가 숨김없는 타입이었다. 왼쪽 귀에 채운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던 소년이 이번엔 먼저 말문을 틔웠다. 자신이 온 이유를 말이다. 평소 우리 여사님과 친분이 있던 소년의 부모님은 A대에 다닌다는 내 이야기를 듣고 몇 개월 전부터 여사님을 설득하려 애를 먹었다고 했다. 그나마 영어 점수는 두 자리라며 모든 것을 영어에 걸고 싶다는 부모의 사정을 듣고, 우리 여사님은 할 수 없이 부탁에 응했단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다.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땀이 난다.
- “학교에서 영어 시험 보면 보통 몇 점 맞아?”
- “12점?”
- “이번에 본 6월 모의는?”
- “졸려서 채점 안 했는데.”
- “성적표는 나왔잖아.”
- “확인 안 했어요.”
소년은 육안으로 보기에도 가벼워 보이는 책가방을 열어 흑백 시험지를 꺼냈다. 꾸깃한 가정 통신문 사이에 겹쳐진 6월 모의고사 문제지에서 고3 교실의 묵힌 냄새가 났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애증의 향수에 잔 소름이 돋는다. 휴대폰으로 6월 답안지를 비교해가며 채점을 대신했다. 반타작은커녕, 제 나이 숫자보다 못한 점수에 턱이 빠진다. 그럼에도 소년은 당당했다. 마치 남의 점수 보듯 관심 없는 저 얼굴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눈 감고 찍어도 이것보단 잘 맞겠다.”
- “눈 감고 해 본 적 없잖아요.”
- “말이 그렇다는 얘기지.”
- “팩트만 가지고 얘기해요.”
- “팩트가 뭔 줄은 알아?”
- “지금 누나가 말하는 것 빼고 전부요.”
말꼬리 잡는 게 여간 보통내기가 아니다. 왠지 조금 전부터 슬슬 냄새가 난다 했는데, 역시 고약한 삐뚤어짐의 냄새였다. 어느 각도에서 봐도 느껴지는 반항기에 쓸데없는 오기가 생긴다. 내 고질병이 또다시 발병한다는 신호였다.
- “방학 언제 해?”
- “왜요?”
- “수업 언제 할지 정해야지. 내일 문제집 목록 줄 테니까 서점에서…….”
- “그런 거 필요 없고 시간만 때워요.”
- “뭘 때워?”
- “놀자고요.”
- “어디 아파?”
- “누나는 꽁으로 돈 버니까 좋고, 난 그동안 자유라서 좋고.”
서로 윈윈하자는 거임, 오케이? 엄지와 검지로 제멋대로 동그라미를 만들더니 에어컨 앞으로 걸어가 텁텁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모난 곳이 많은 N각형의 환생이었다. 더불어 엑스 박스 게임 기계까지 찾는다. 좀 있으면 위(Wii)도 같이 하자 할 판이다. 높게 올라가는 혈압에 뒷목이 땡긴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무를 순 없다. 오기는 둘째 치고, 일반 과외비의 두 배는 물론, 추가 수당까지 넉넉히 챙겨주겠다는 제안을 쉽게 뿌리칠 수 없는 거라. 더군다나 과외는 내 방학이 끝나는 날까지, 단기 알바 치고는 이만한 자리 없다는 엄마의 문자에 갈대처럼 흔들린다. 에어컨 바람에 땀에 젖은 교복을 말리는 저 어린양을 구해줄 수 있을까, 결국 번 돈으로 영양제 맞으러 정한쌤을 보러 가야 하는 건 아닐까 고민한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지만.
- “잘 들어. 너랑 게임이나 하려고 이 황금 같은 시간에 집에 있는 거 아니니까 애초에 마음일랑 접어라.”
- “집순이잖아요.”
- “……뭐래?”
- “누나네 아줌마가 그랬는데. 집에서 안 나오는 애벌레 한 마리 산다고.”
집순이도 스케줄 있어요? 밖은 언제 나가요? 편의점 가는 것도 공식 스케줄로 치는 건가? 집순이를 극딜하는 질풍노도 열아홉에 입술을 깨문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볼까. 약간 미친 것 같은 이 과외를 말이야.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고 고뇌에 빠질 쯤, 느닷없는 초인종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어락을 풀어내는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느낌만 봐도 알 수 있다. 큰 바구니에 한라봉을 한 아름 실어온, 그 이름도 찬란한 부승관의 출연이었다.
- “진달래 마을 526동, 귀염둥이 부승관 님께서 입장하셨습니다.”
- “나잇값 언제 해?”
- “모두 일어나서 환영의 박…… 에? 뒤에 뭐냐?”
녀석은 한쪽 신발을 벗다 토끼 눈으로 내 뒤를 응시했다. 대박, 완전 뉴페이스! 낯선 고딩과의 만남에 설렘을 감추지 못하는 녀석이 손으로 입을 막았다. 김여주 동생 있었냐? 나도 모르는 출생의 비밀? 허점 가득한 추리력은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신고 온 슬리퍼를 현관에 던져 놓고 금세 내 옆에 자리를 잡은 녀석은 에어컨과 물아일체가 된 소년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 “이야, 아주 올망졸망하게 생겼구만?”
- “그쪽도요.”
- “진짜? 나 귀엽냐?”
- “먹어도 돼요?”
소년은 승관의 옆에 앉아 한라봉을 집어 들었다. 제집 안방 마냥 다리까지 쭉 피고는 두꺼운 껍질을 깐다. 한라봉을 한쪽 볼에 욱여넣고 맛을 음미하던 소년이 승관에게 말을 걸었다. 형도 A대 다녀요? 둘 다 그렇게 안 보이는데. 말로만 듣던 ‘일타이피’였다. 삽시간에 구겨진 승관의 표정이 무섭다. 그러나 불쑥 웃어 젖히는 녀석이다. 빛나는 두 광대가 우뚝 솟는다.
- “야, 너 진짜 웃긴다. 이름이 뭐냐?”
- “이 찬.”
- “나랑 친구 할래?”
- “형들이랑 친구 안 먹어요.”
- “왜?”
- “맨날 셔틀이나 시키지.”
- “난 담배 안 피워 인마.”
- “어디 담배뿐이겠어요.”
소년은 나머지 반쪽을 입에 물고 가방을 챙겼다. 어디 가냐는 물음에 턱 끝으로 창문 밖을 가리킨다. 엄마한테는 수업 잘했다고 문자 해주세요. 옆을 스치는 소년의 교복 바지에 베인 탁한 교실 냄새가 흩어진다. 승관은 지나가는 소년의 종아리를 툭 건드리며 인사를 건넸다.
- “찬, 또 보자.”
- “그럴 일 없어요.”
- “운명은 만드는 거야.”
- “절대적으로 피하고 싶은 운명이네요.”
반박을 좋아하는 소년이 꿉꿉한 바깥세상으로 사라진다. 둘만 남은 거실, 바닥에 대(大)자로 누워 으어어, 알 수 없는 괴음을 터트렸다. 한라봉 세 개로 서커스를 벌이던 승관은 그것들을 바구니에 던져 놓고 내 옆에 누워 팔짱을 꼈다. 야, 더우니까 붙지 마. 발로 다리를 밀어내며 꺼지라는 내 말에도 녀석은 홍홍 웃으며 거리를 좁혔다.
- “내 인생에서 나가 줘. 무료 탈퇴권 줄게.”
- “그렇다면 평생 재미없는 삶을 살게 될 테야.”
- “매일 누구랑 비교당하는 삶을 누가 알리오.”
- “알리오 올리오.”
- “개새야.”
- “근데 갑자기 웬 과외냐?”
- “아, 몰라.”
취중 계약과 함께 날아든 날라리 소년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녀석에게 한쪽 팔을 잡힌 채 입술을 쭉 내민다. 고민할 때 저리 하는 버릇을 잘 아는 승관이 눈을 도록 굴렸다. 무슨 생각 하냐? 나도 좀 끼워 주라, 어? 승관은 팔을 잡아당기며 캐물었고, 난 오늘 아침부터 일어난 일을 세세히 설명했다. 엄마는 널 모범생으로 아신다, 과외는 내가 받아야 할 듯싶은데 어쩌면 좋겠냐고.
- “말을 좀 막 하는 건 있어도 착한 애 같고 좋던데?”
- “착한 애는 무슨, 수업하지 말고 놀자면서 게임기를 찾더라니까? 이건 뭐, 처음부터 애한테 잡힌 꼴밖에 더 돼? 다음 생각하니까 앞이 안 보여.”
- “그래도 단기 알바한테 추가 수당까지 챙겨주는 곳 흔치 않다?”
- “그러니까 지금 거부를 못 하잖아.”
- “이런 개꿀 알바 은근 찾기 힘들어요.”
승관이 팔짱을 풀고 몸을 일으킨다. 바구니에 든 한라봉을 꺼내 껍질을 까 내 입에 한 움큼 넣는다. 제주의 향을 그대로 담은 그것이 입안을 헤엄쳤다. 더 이상 고민 말고 돈 벌어서 뭐 할지 생각이나 하라는 녀석의 조언에 풀린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근데, 너랑 되게 닮지 않았냐?”
- “누구?”
- “아까 그 고딩. 왜, 반항하는 게 꼭 네 학생 때 같구만.”
- “퍽이나 그러겠다. 내가 얼마나 성실히 살았는지 네가 더 잘 알 텐데?”
- “내 말은, 고슴도치 마냥 가시 세우고 씩씩거리는 게 닮았다고.”
- “……참나.”
- “이해해주지 않아도 된다고 큰소리 뻥뻥 쳤으면서, 사실은 누군가 이해해 주길 바랐잖아.”
그게 아마 이쥰이었나? 손가락 두 개를 세워 ‘2’를 만들더니, 이지훈 이름 석 자를 읊는다. 이지훈, 이지훈. 백마 탄 이지훈. 진정한 고슴도치를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얄미운 손가락 하나를 아작 깨문다. 상처 입은 손가락을 허벅지에 끼워 넣고 아픔을 호소하는 승관의 등을 가볍게 두드린다. 적당히 놀려라. 다음엔 팔뚝이니까.
- “아오! 진짜 넌 변한 게 하나도 없냐?”
- “있지, 더 완벽해진 내 미모라던가.”
-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 진심 쪽팔려.”
험상궂게 변하는 내 표정에, 승관은 묵직한 바구니를 들고 재빠르게 현관 앞에서 신발을 신었다. 한라봉은 두고 가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바구니를 가리켰다. 그러자 절친답게 녀석은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화답했다.
- “이지훈은 취향이 참 독특해.”
- “죽는다.”
- “내가 봐도 정말 참된 아이야. 걘 사람 마음만 보잖아.”
현관문이 부서져라 쳐 닫는 우정의 결정체가 날 미소 짓게 한다.
당장 도어락 비밀번호 바꿔야겠어.
#37.
며칠 후, 아침부터 반가운 연락이 왔다. 과외에 성실히 임하겠으나 보충은 절대 없음을 조건으로 내건 소년의 문자였다. 아무래도 첫 수업 이후 소년의 부모에게 했던 연락이 영향을 끼친 것 같았다. 찬이는 다 좋은데 자꾸 게임기를 찾는다고. 같이 게임까지 해야 하냐는 질문에 분명 부모는 화가 났을 것이다.
어쨌거나 성사된 과외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띤다. 당장 수능이 코 앞인 수험생을 놓고 싶은 마음은 없었을뿐더러, 나와 조금 닮았다는 승관의 말이 걸리기도 했으니. 조금 더 지켜보자 스스로 다짐한다. 방금 전 ‘ㅗ’를 보내 놓고 실수라고 웃는 소년을 정말 지켜봐야 하는 걸까. 갈대처럼 흔들리는 본능은 어쩔 수 없다.
휴대폰 화면에 승관의 인스타 아이디가 떴다. 인스타 스토리가 업로드 됐다는 매우 불필요한 알람이었다. 약 10초 전에 게시된 따끈하다 못해 뜨거운 사진의 주인공은, 무려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이지훈이었다.
건축과 이지훈 팝니다. 39,900원, 오늘만 특가! 승관은 작은 목소리로 이지훈 파격 세일을 알렸다. 제손에 붓을 끼워도 모를만큼 곤히 자고 있는 영상에 괜히 코끝이 시렸다. 매일 밤을 새는 불쌍한 청춘을 시작으로, 공모전에 고통받는 이지훈은 무조건 입상해야 한다, 오늘 야간 밑 작업은 밍구에게 맡겨 달라는 실시간 댓글도 달렸다. 승관은 하나하나 답글을 달며 소통을 시작했다. 누가 보면 건축과인 줄 알겠지만, 승관은 분명 기공이다. 심심하면 학교 작업실로 달려가 시키지도 않은 조력을 하는 돌연변이 기공 말이다.
- “불쌍하게 왜 저렇게 자고 있어…….”
죽은 듯 잠들어 있는 얼굴이 안쓰럽다. 테이블 위엔 레드 불 한 캔과 약상자, 거진 죽음의 조합이었다. 가히 건축은 ‘건강을 축내는 학과’의 줄임말인지도 모른다. 쌩쌩하게 버티던 그마저 저리 생기를 잃었으니까. 마트로 향하던 발걸음이 지하철로 향한다. 목적지는 이지훈이 있는 곳, 언제나 그랬듯 보고 싶어서.
*
지하철과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탔으며, 멀미약을 얼마나 들이부었는지 더부룩한 속이 쓰라린다. A대 근처 마트에서 음식 재료를 사 들고 급히 택시를 탔다. 지훈의 자취방에 먼저 들어갈 예정이었다. 언제든 들어오라며 받아 둔 임시 키와 도어락 비밀번호까지 아는 터라 급습은 굉장히 쉬웠다. 그를 닮은 깔끔한 원룸과 원탁에 놓인 액자가 날 반긴다. 소파에 앉아 승관에게 전화를 걸며 액자를 매만진다. 벚꽃놀이 갈 때 찍은 너와 나.
- “너 지금 이쥰 방이라고?”
- “지훈이 언제 끝난대?”
- “그야 모르지. 애들 거의 안 나가.”
- “너는 거기 왜 있어?”
- “자격증반 정기 휴일이라서 놀러 왔잖냐. 오늘 애들 야작 끝나고 술 먹는다고 그래서 따라붙었지.”
- “아무튼 지훈이 집으로 보내 봐. 나 왔다고 말하지 말고.”
- “뭐 떨어지는 건 없고?”
- “내 사랑?”
- “아 씨, 갑자기 빡쳐.”
이쥰 보러 멀미 참고 왔는데 너 때문에 멀미나. 승관은 말없이 분노하는 날 알아차리고는 웃음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런다고 내가 넘어갈 줄 아느냐. 녀석의 애교에도 코웃음 치며 휴대폰을 놓지 않는다. 친구를 위해 숨겼던 비밀을 꺼낼 때였다.
- “부, 저번에 소개팅할 때 동기한테 ‘휴면 옛체’라고 했잖아. 그거 막 뱉은 말이지?”
- “근데?”
- “걔가 그러는데, 넌 ‘구자라트어’처럼 생겼대. 걘 진심 같아. 좀 화났거든.”
- “그게 뭔데?”
- “네 엉덩이 더러워.”
- “뭐 인마?!”
- “끊는다. 안녕.”
이후 계속 울리는 승관의 연락을 무시한 채 재료 손질에 열중했다. 기운 차리려면 삼계탕이 좋겠다 싶어 평소 멀리하던 한약재도 사 왔다. 끓일 준비를 마치면 대충 초저녁이 되겠고 지훈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완벽한 계획이었다.
#38.
눅눅한 열대야의 밤, 침대 위에서 소년을 위한 커리큘럼을 만들던 나는 이불 위에 그대로 얼굴을 박았다.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그는 아직 오지 않는다. ‘구자라트어’를 검색해 본 것일까, 단단히 삐낀 듯한 승관은 연락을 해도 받지 않으니 난감했다. 혹시 승관이 지훈을 들고 튄 건 아닐까 생각한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이었다. 베란다 밖으로 붉은 택시 후미등이 보인다. 잠시 후, 문밖 기척에 맨발로 달려나갔다.
- “……쟤 뭐하니.”
인터폰으로 본 그는 어딘가 이상했다. 삐빅-, 삐빅. 도어락을 풀지 못하는 그가 문에 바짝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문이 열리지 않아 성이 났는지, 그는 곧 ‘열어주세요’라며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다. 분명 혀가 꼬였다. 취해 있는 것이다. 제집 비밀번호를 풀지 못해 문을 두드리는 자가 정녕 이지훈이 맞습니까. 술 취해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자가 정녕 제 남친이 맞습니까.
- “너 바닥에서 뭐 해?”
- “…….”
- “이지훈, 내 말 들려?”
조심스레 문을 열고 쪼그려 앉아 그를 마주한다. 내 물음에 그는 바닥에 앉아 고개를 꾸벅거렸다.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얼마나 들이부었는지 알콜냄새가 진동했다. 몸을 일으키려 두 손을 잡자, 차갑게 손을 쳐낸다. 만지지 말라고. 어눌한 발음에 헛웃음이 난다. 정신이 나가도 예민함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지훈다웠다.
- “만지지 마?”
- “김여주.”
- “…….”
- “여주만 돼.”
- “나잖아.”
그가 불쑥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보더니, 피식 웃으며 주머니를 뒤졌다. 갑자기 휴대폰으로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내 손에 들린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이지훈, 내 앞에 앉아 술기운에 어쩔 줄 모르는 내 남자친구다.
- “여보세요.”
- “어디야.”
- “네 앞에.”
- “야아, 진짜로…….”
한쪽으로 몸이 기울어지는 탓에 손으로 그의 팔을 잡는다. 그러자 이번엔 가만히 내 손을 살핀다. 본인과 똑같은 반지를 보고는 그제야 내가 환상이 아님을 깨닫는 듯싶었다. 놀란 눈으로 멍하니 바라보는 얼굴이 발그랗다. 지훈아, 너 치크 안 해도 되겠네.
- “아까 부승관이 집에 너 있다고 하길래 장난인 줄 알았는데…….”
- “그랬는데?”
- “내가 박수를 쳤어.”
- “……응?”
- “건강 박수.”
갑자기 일정한 리듬으로 손뼉을 친다. 요즘 혈액 순환에 관심이라도 가진 거니. 술주정치고는 너무 건강 쪽인데. 조금씩 커지는 손뼉 소리에 나도 모르게 그를 질질 끌어 거실에 버렸다. 진땀이 났다. 이 새벽에 취해버린 이지훈과 어쩔 줄 모르는 나와 주방을 지키는 삼계탕이라니.
- “아-, 해봐.”
- “이이-.”
- “치약을 뱉어야지 삼키면 어떡해.”
- “엉.”
화장실 문턱에 앉은 그의 눈이 감긴다. 내일 일어나자마자 부승관을 조져야겠다 마음을 먹는다. ‘구자르트어’에 대한 분풀이를 지훈에게 한 것이 틀림없었다. 안타까운 희생양의 얼굴까지 씻긴 후 침대에 몸을 눕혔다. 덥다고 자꾸만 티셔츠를 벗어대는 까닭에 난데없는 전투를 벌였다. 결국 상의를 탈의한 채 잠든 그를 이불로 돌돌 감쌌다. 잘 참았어 김여주, 넌 대단해.
- “이지훈.”
- “…….”
- “넌 잠이 오니.”
그가 팔을 잡아당겨 제 옆에 가둔다. 이불 속에 파묻힌 얼굴을 밖으로 쏙 내밀고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웃는다.
- “이제 자요.”
- “…….”
- “꿈이면 안 되는데…….”
예쁜 입술로 내 이름을 중얼거린다.
그러면 난 몰래 입을 맞추는 수밖에.
#39.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거실에 널브러진 문제집을 풀고 있는 지훈이었다. 소년을 위해 미리 풀어볼 겸 사둔 문제집이었는데, 그는 연필을 쥐고 답을 고심하고 있었다. 까치집을 짓고 학업에 열중하는 모습이란, 안경까지 꼈으니 영락없는 고등학생이었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뜨거웠는지 문제에 집중하던 그의 눈이 흘긋 나를 향한다. 벌건 얼굴로 멈칫거리다 이불 속에 불덩이를 숨겼다. 그러자 그가 다가와 다정한 아침 인사를 건넸다.
- “4번.”
- “…….뭐가?”
- “네가 별표 쳐 놓은 거, 정답 4번.”
- “그래, 고마워. 해설은 나중에 부탁해.”
뿌듯한 표정으로 주방을 향하는 저런 순진한 사람을 두고 난 뭘 기대했던 것인가. 큼큼거리며 구석에라도 숨을까 몸을 돌리자, 그는 곧 시리얼과 주스를 내밀며 아침을 권했다. 어제의 술주정을 만회라도 하고 싶은 건지 친히 아침까지 대령하는 모습이 석연치 않다. 붕뜬 뒷머리를 만지던 그가 먼저 말문을 튼다. 어젯밤 너무 취해버린 자신을 잊어달라고.
- “부승관이 자꾸 먹였어.”
- “이 놈의 시키를 그냥.”
- “술 게임 하는데 나만 걸리게 만들고.”
- “걱정 마. 내가 복수해 줄게.”
- “어제 진짜 힘들었어.”
그는 친구의 잘못을 이르는 아이처럼 하소연하다, 멀찌감치 쟁반을 놔두고 슬쩍 이불 안으로 몸을 들였다. 언제 왔어? 연락이라도 하지. 내 뺨에 키스를 남기고 지그시 눈을 감는다. 까치집을 정리하는 손길을 익숙하게 받아낸다. 김여주 빼고는 손대지 말라더니 정말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 “내일 뭐해.”
- “그냥 집.”
- “데이트할까.”
미열을 달고도 날 보며 웃는다. 이지훈, 너 때문에 항상 심장병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나를 좀 봐. 이대로 손잡고 땅끝 마을로 튀어 버릴까 못된 상상도 해. 섬마을 최연소 부부가 되어 볼까라는 엉큼한 상상까지.
- “그럼 오늘만 약 먹고 방에서 푹 자자. 계속 작업실에서 쪽잠 자면 몸 상해. 어젠 술까지 먹었잖아.”
- “안 아파.”
- “뭘 안 아파, 열 있는데.”
- “밥 먹으면 금방 나아. 삼계탕.”
- “언제 또 봤대.”
- “너 코 골 때.”
지금 보면 술 취했을 때가 더 낫기도 한 것 같은데 말야. 드르렁거리며 슬쩍 내 눈치를 보는 그다. 난 아프지 않게 코를 잡아 쥐고 장난을 걸었다. 그가 내 팔목을 움켜쥐고 힘을 준다. 자세를 바꿔 내 위로 올라타 콧잔등을 맞댄다. 이게 바로 키스의 타이밍…….
띵동-.
초인종 소리에 모든 것은 올 스탑. 인터폰을 확인하자 예상치 못한 손님에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문을 두드리는 손님의 성화에 그가 마지 못해 문을 연다.
- “누구니 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보러 온 그의 엄마였다.
Epilogue.
야작을 마치고 모인 건축 술자리에 승관이 신나게 병을 흔든다. 지훈은 승관의 술을 받아 목을 축였다. 서너 잔만 먹어도 얼굴이 새빨개지는 타입이라, 지훈에게 있어 술자리는 영 맞지 않는 자리였다. 대신 술자리 분위기를 좋아했다. 매번 가면을 쓰는 사람들도 술 앞에서는 솔직해지는 걸 알기에, 지훈은 그런 솔직함을 좋아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원체 타인과의 대화를 달갑게 생각치 않던 그가 여주를 만나고부터 생긴 첫 번째 변화였다. 승관은 지훈을 포함한 모든 사람과 잔을 부딪히며 흥을 냈다.
- “이쥰, 더 마셔.”
- “됐어. 그만.”
- “어차피 내일 쉬잖냐.”
- “취하면 집에 못 들어가.”
- “형아가 택시 태워 줄게. 못 믿냐?”
- “웃기지 마. 길 바닥에 버리지만 않으면 다행이게.”
승관은 가소롭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여주가 보고 싶다 술에 꼴은 지훈을 승관이 들쳐 업고 집까지 바래다 주지 않았는가.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지훈은 손사래치며 승관을 밀어냈다. 역시 인생은 이따구지. 승관은 지훈의 잔까지 연거푸 들이키다 갑자기 씩씩거렸다. 문득 여주의 폭탄 발언이 생각났음이라. 구자라트인지 구자철인지 하는 인도어처럼 생겼다고? 네 엉덩이 더러워? 이게 나라고? 승관은 오징어를 씹으며 지식인으로 얻은 ‘구자라트어’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 “야, 이거 뭐 같냐.”
- “네 엉덩이…… 더러워?”
- “내가 이거 같이 생겼냐?”
- “미친 소리 하지 말고 집에나 가.”
- “내가 이렇게 꼬불꼬불하게 생겼냐고!”
건축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잡아 자신이 이렇게 생겼냐며 캐묻는다. 승관은 크나큰 충격에 벗어나지 못해 구석에서 혼자 빨대로 소주를 빨았다. 그러다 갈 채비를 하는 지훈을 잡아 술을 권했다. 야, 진짜 딱 두 잔만 하고 가. 오늘 내가 너무 슬퍼서 그래. 승관은 밑부분만 채운 술잔을 지훈에게 건넸다. 하지만 술이 그렇지 않은가.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넉 잔이 되는 마법이라는 것을.
- “야야 이지훈.”
- “……아, 취하잖아.”
- “이거 레알 비밀인데, 지금 네 집에 김여주 있다.”
- “별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좀 하지 마.”
- “진짜야! 확인해 볼래? 어?”
승관이 벌떡 일어나 가게 문을 빠져나간다. 지훈의 동기들은 문 앞에 그대로 엎어진 승관을 들쳐 매고 작업실로 향했다. 아마 그곳에 재울 모양이었다. 지훈은 남아 있는 동기들에게 인사한 후 비틀거리며 택시를 잡았다. 후-, 깊은 숨을 뱉자 술 냄새가 진동한다. 지훈은 픽 웃으며 창문에 얼굴을 기댔다.
- “이래서 술 안 먹는다니까…….”
너무 보고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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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독자님들 안녕하세요. 리턴즈 2부가 이제 막 시작됐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