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평생 동안 듣고 싶은 노래가 있다면
넌 그런 노래일 거야.
Murakami Haruki - 〈Norwegian wood> 중에서
지훈아 뭐해? 수업 끝났어? 밥 먹을 거면 지금 만날까?
……처음엔 카톡이 고장 난 줄 알았다. 버전 업데이트를 하지 않아서 답장을 못 받는 걸까 하는 멍청한 생각도 했다. 더 나아가 그가 혹시 와이파이와 단절된 문명에 갇힌 건 아닌가 허무맹랑한 상상도 했다. 이건 다 사라지지 않는 숫자 ‘1’ 때문이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읽히지 않은 메시지에 퍽 자존심이 상했다. 동방 의자에 늘어져 빛에 반사된 미세 먼지의 윤곽을 확인한다. 지금의 난 이지훈에게 저 먼지만도 못한 존재였다. 돌아가는 회전의자에 머릿속도 같이 돈다.
빙글빙글. 벌을 받는 것 같았다. 짧게 말해 이지훈을 속인 벌. 광복절 특사 없는 무기징역수는 점점 미쳐가는 중이었다.
- “지금 이 순간!”
- “왕 먼지가 되어!”
- “마법처럼!”
- “변해버려!”
복도 에코 버프를 받은 석민의 우렁찬 목소리가 동방에 입성했다. 지금 이 순간! 마법처럼! 줄기차게 같은 구간만 반복하던 도돌이표는 전신 거울 앞에서 끝내주는 성량으로 한 편의 뮤지컬을 완성했다. 진로를 뮤지컬 쪽으로 바꾸는 게 어떻겠냐는 물음에, 석민은 바뀐 머리 스타일을 가리키며 활짝 웃었다. 진로고 뭐고 일단 관심을 가져 달라는 뜻이었다.
초콜릿으로 염색했는데 어때? 페레로로쉐 같어? 하얀 이를 훤히 보이고는 머리카락을 한 움큼 떼어내는 척 손가락을 둥글게 말아 옴뇸뇸-, 먹는 시늉을 한다. 안타깝게도 석민은 승관이와 붙어 다닌 부작용을 앓는 중이었다. 테이블에 엉덩이를 붙이고 데자와를 들이키던 석민이 돌연 손바닥을 맞부딪히며 동그랗게 눈을 떴다.
건축과 대자보 봤어? 세상 너무 무섭다. 우려 섞인 목소리에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남 일 같지 않은 그것은 현재 A대의 뜨거운 감자였다. 총장까지 눈에 불을 켤 정도였으니 남자의 결과는 알만했다. 승관의 말로는 퇴학과 퇴학, 둘 중 하나라 했다. 어떤 걸 선택하든 조진 인생이라는 건 변함 없다는 의미였다.
쓰레기통에 3점 슛을 시도한 석민은 이내 환호를 지르며 쓰레기통 앞까지 달려가 떨어진 음료 캔을 손수 집어넣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두 눈이 다시 먼지를 찾는다. 생각의 꼬리가 이지훈을 상기했음이라.
- ‘이미 지나간 일을 뭐 어쩌겠어.’
- ‘…….’
- ‘네가 가고 싶어서 간 것도 아니고.’
주말 내내 연락 두절이던 그를 만나러 아침부터 공학관을 서성였다. 예전부터 승관이 좋아하는 애가 있어서 도와주러 간 거야. 난 애들이랑 말 한마디도 안 했어. 물끄러미 쳐다보는 의미 모를 눈빛에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그렇게 변호를 했다.
……그렇다. 외박은 말도 꺼내지 못했다. ‘너랑 24시간 꼭 붙어 있고 싶어서 과팅이랑 외박권이랑 바꿨어. 그러니까 밤새서 괴롭혀줘’라는 시커먼 마음을 굳이 내보여야 하나 싶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러자 그는 지나간 일 따위 이러쿵저러쿵 들춰내면 무엇하겠느냐, 어쨌든 미필적 고의 아니냐는 말을 덧붙이며 변명쟁이를 보듬었다. 그러나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바로 이것.
- ‘나 신경 쓰지 마.’
- ‘…….’
- ‘진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그는 이상하리만큼 무덤덤했으나 고양이 솜방망이 사이즈로 묻어나오는 딱딱한 발음이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보통 연인의 관계라면 화를 내거나, 많이 화를 내거나, 또는 겁나 미치게 화를 내는 게 정상적인 반응이지 않은가. 그러나 그는 분노의 씨앗 따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무척이나 침착했다. 남 얘기하듯, 강 건너 불구경하는 사람들 중 한 명처럼. 하지만 느낄 수 있다. 이건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을.
- “지금 이 순간!”
- “을 없애 버리고 싶다.”
- “아까보다 나아졌지 않어?”
- “그래, 반음 올라간 게 더 좋네.”
- “……반음 내린 건데.”
불가사리 보컬은 마이크 역할을 다한 천하장사 소시지를 한입에 해치웠다. 또한 나 홀로 지키는 채팅창이 안쓰러웠는지, 입안 가득 소시지를 물고 위로인 듯 아닌 듯한 말투로 시비를 걸었다. 울지 말어. 연애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건 아니잖어. 어쩐지 꼭 승관이를 닮았다. 조만간 강제 이별을 시키리라 다짐한다.
- “어? 지훈 문자 왔다.”
- “……내 껀 읽지도 않았는데?”
- “저녁에 약속 있어서 오늘 술 못 마신다고.”
뺏다시피 든 휴대폰에 찍힌 ‘지훈’이라는 단어에 속이 꽈배기처럼 뒤틀렸다. 베스킨라빈스도 아니고 문자도 골라 먹는 재미가 있었단 말이냐. ‘안읽씹’에 서러운 뿔난 손가락이 석민의 옆구리를 찌른다.
지금 어디인지 물어봐. 내가 물어봤다고 하지 말고. 졸지에 아바타가 된 석민에게 코드를 입력한다. 그러자 얼추 지훈의 말투까지 따라 하며 답장을 읽어 내리는 석바타는 흘긋거리며 내 눈치를 봤다.
- “강의실인데 왜.”
- “끝나고 어디 갈 건지도 물어봐.”
- “비밀.”
- “세상에 비밀이 어딨어? 같이 간다고 해.”
용량 초과로 교신이 끊어진 석바타는 귀찮다는 듯 옆으로 엎어져 눈을 감았다. 설레는 약속이라서 싫대. 눈치 있게 빠져 주자. 아침 수업 덕분에 피로함을 느끼던 석민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아니 설레는 약속이 대체 뭔데. 내 문자보다 설레는 게 있긴 해? 서쿠, 네가 말해봐. 축 늘어진 어깨를 흔들어 석민의 잠을 깨우던 그때, 동방 문을 열고 각자 자리에 앉아 한마음 한뜻으로 토론회를 여는 학우들이 있었다. 설상가상이었다.
- “비트코인을 여전히 ‘투기’라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한 점은…….”
- “가상 화폐는 거래소에서 일정량을 초과하게 되면 국가 자체에서…….”
말도 어렵거니와 듣기도 힘든 이곳은 시사 토론 동아리. 무작위로 뭐든 해보자 싶어 가입한 동아리는 비트코인과 미래 금융 시장의 상관관계, 한국에 미치는 순기능과 역기능, 또한 현재 떠들썩한 정부 비리에 관한 주제가 핵심인 심오함의 결정체였다. 토론이 깊어 갈수록 그들과 동떨어져 가는 나는 점점 생각의 늪에 빠졌다.
- “현재 이 시점의 근원을 뭐라고 생각해? 여주부터.”
당연히 ‘김여주 과팅 사건’이 현 문제의 시발점이라고 생각해. 외박에 정신 줄 놨던 지난날의 과오를 잊고 싶어. 차라리 벌점 맞고 외박하지, 빌어먹을 과팅이랑 맞바꾸는 비겁한 짓은 하지 않을 거야. 이제 [레몬] 방향으로 창문도 안 열 거고 숨도 안 쉴 거거든.
- “여주야, 일 분 줄 테니까 의견 어필하면 돼.”
실은 내가 아침에 보자마자 일 분 가까이 빌었어요. 혼자 변명을 한 거지. 지훈아, 내 비록 하찮은 양심으로 널 속였지만 우리의 믿음은 그리 쉽게 깨지지 않을 거라 믿어. 나는 널 좋아해. 이건 만유인력의 법칙도 말릴 수 없어. 응? 불변의 법칙이라고? 그래, 아무튼 48시간 무수면으로 깨어 있어도 할 말 없는데, 그때 말 못 해서 미안해. 거짓말한 건 더 미안해. 네 말대로 이미 지나간 일이기는 한데…… 아, 지금 수업 가야 한다고?
- “……여주야?”
쪼로록-, 빨대 끝에서 운명을 다한 데자와가 정신을 깨운다. 석민은 가볍게 팔을 치며 소곤거렸다. 비트코인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건 아니잖어. 아무래도 주어만 바꿔 유행어를 만들 계획인 듯싶었다. 석민의 조력으로 대충 의견을 피력하는 그 순간에도 입과 머리가 따로 놀았다. 적어도 머릿속은 온통 이지훈뿐이라서.
- “여주, 오늘 파이팅.”
- “도대체 뭘.”
- “아자 아자 파이팅!”
- “석민아, 누나가 제때 약 먹으라고 했잖아.”
- “지금 이 순간!”
석민은 맥없이 동방을 나서는 내 어깨를 두드렸다. 지훈이 그렇게 만만한 상대는 아니잖어. 반대편 복도로 폴폴 사라지는 석민의 등딱지에 붙은 열린 가방이 인사한다. 노트 하나 없는 빈 가방을 대체 왜 매고 다니는지 의문이 들 때, 계단을 올라오던 ‘개’선배가 신나게 달려와 내 이름을 불렀다.
- “오우, 나의 김여주!”
- “……오 마이 젠장.”
이것은 운명이다, 여주 너와의 연결고리가 나였다는 터무니없는 운명 강조론으로 등을 떠밀었다. 장소는 과방, 자료 정리 파트너가 되어 줄 수 없겠냐는 귀찮은 부탁이었다.
지훈은 여전히 응답이 없었다.
OH MY RAINBOW
;Caramel Drizzle
Chapter. 19 〈넌 여자가 있는데>
25.
- ‘과제 때문에 바빠서 먼저 갈게.’
귀찮은 듯 머리를 쓸어내리며 건물 안으로 사라지는 그는 뭔가 느낌이 달랐다. 거리감, 허무감, 자괴……감? 과제 때문에 바쁘다는 말이 뭔가 돌려받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평소 같지만 평소 같지 않은 느낌을 큰 제스처로 승관에게 설명하자, 녀석은 이런 의구심을 품는 내게 혀를 찼다.
- ‘아니, 넘어가서 고맙다고 해도 모자랄 판에 의심하고 앉아 있냐.’
- ‘그게 좀 이상하다고. 막 기분이 오묘해. 왜 화를 안 내지? 이제 관심이 없어서?’
- ‘아주 소설을 쓰시지.’
- ‘이거 뭔가 오고 있어. 흑화의 기운이야.’
- ‘신 내렸냐? 흑화 같은 소리 하지 말고 필기나 내놔.’
교양 시간에 교양 없이 잠이나 자고 말이야. 불성실한 태도는 여전 하구만. 승관은 자신의 노트를 뺏다시피 가져가 맨 마지막 장에 낙서를 시작했다. 반듯한 글씨체가 알쏭달쏭한 문장을 남겼다.
올해 백제 예술상 신인상은 이지훈. 김여주 바보, 몽총이, 열이나 받아라 이 오리 발바닥 같은……. 승관은 뒤통수 마사지를 받고 나서야 경건히 수업에 임했다. ‘개’선배가 손을 흔들어 멍하니 회상하는 날 깨운다.
- “너도 대자보 봤어? 건축과 이번에 액땜 제대로 한다.”
- “그러게요…….”
- “기운 없어 보이네. 지훈이랑 싸웠어?”
‘개’선배가 동그리 안경에 호-, 입김을 분다. 여주야, 너 지금 똥 마려운 강아지 표정이다. A4 자료 뭉텅이를 대왕 집게로 집는, 비교적 여유로운 상대의 얼굴을 바라본다. 혹시 ‘개’선배가 속을 알 수 없는 이지훈을 조금이나마 해결해 줄 수 있는 열쇠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결국, 축제부터 과팅까지 구구절절 애처로운 사연을 읊었다. 선배의 양쪽 입꼬리가 슬슬 올라간다. 불길했다.
- “이지훈 걔는 원래 화를 잘 안 내.”
- “아아, 그럼 성격상 분노가 없는…….”
- “대신 머리를 쓰지.”
- “무슨 머리요?”
- “어떻게 하면 두 배로 엿 먹일 수 있을까.”
만약에 내가 이지훈 셔츠를 훔치잖아? 그럼 걘 내 옷장을 털어 버려. 아주 탈탈. 남김없이. 싹. 아주 무서운 놈이야. 웬만하면 같이 다니지 마. 나중에 너 남는 거 하나도 없다? 선배는 여름 초입 새에도 포기할 수 없는 비니를 꾹 눌러 쓰며 동그리 안경을 추켜 올렸다.
- “그럼 제가 과팅을 나갔으니까…….”
- “걘 과팅이 아니라 결혼 전제 맞선을 나가겠지.”
- “선배!”
- “싫으면 너도 맞불 작전으로 나가던가.”
쌍 맞선 죽인다 야. 얄미운 어깨춤으로 약을 올린다. 그러니까 선배의 말을 한 문장으로 축약하자면, 그는 당한 건 반드시 배로 갚아 주는 스타일이었다. 똑같이, 웃으면서, 다정하게, 안녕히.
- “아, 그리고 축제 때 이지훈 옆에 붙여 놓은 거 미안.”
- “뭐가요?”
- “그 여자애 있잖아. 네가 싫어하는 티 팍팍 내던 애.”
- “선배가 왜 미안해해요. 지훈이가 공연 구성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 “구성은 무슨. 부탁해서 억지로 끼워 넣은 건데.”
- “부탁이요?”
- “신환회 때 봤잖아. 내 여친도 건축인 거. 그 여자애가 이지훈이랑 노래하고 싶다고 지 선배 살살 꼬드겨서 나한테까지 옮겨붙은 거지.”
원래 거절하는 게 맞는데 여친이 걔 예뻐 해서 나야말로 어쩔 수가 없었다. ‘개’선배는 뒤늦게 미안하다며 사과를 전했다. 시험 당일도 아닌데 손바닥만한 엿을 먹은 것 같다. 진작 알았다면 처음부터 뒤통수 후려갈기고 시작하는 건데. 과방이 떠나갈 듯이 하하하 크게 소리쳐 웃자, 선배는 자신의 뺨을 때리며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 “대신 때려 드릴까요?”
- “응?”
- “아니에요.”
파일을 정리하며 현재 좌표를 묻는 승관의 문자에 ‘과방’이라는 두 단어를 남긴다. 잠시 후, 3/4박자 경쾌한 리듬으로 문을 박차고 들어온 승관이 젖은 이마를 닦아 냈다. 선배는 불가사리 면접 이후 처음이라는 말로 가볍게 인사를 건넸고, 승관은 반듯한 각진 인사로 대답했다. 녀석은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꽃받침까지 서슴없이 하더니 대낮부터 수줍은 고백을 했다.
- “오늘따라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더라.”
- “그거 병이야.”
- “너 때문에 걸린 상사병?”
- “아니. 너 혼자 걸린 해괴망측 병.”
- “후, 어째 좋아하는 척이 똥만큼도 안 되냐.”
승관은 높게 묶은 똥머리를 툭툭 밀어내며 심기를 건드렸다. 어우, 기름 봐. 땅 안 파도 되겠네. 내 티셔츠에 진득한 손가락을 비비는 녀석에게 선명한 잇자국을 남기자, 녀석은 손가락을 부여잡고 역정을 냈다. 역동적인 승관의 리액션을 신기하듯 쳐다보던 선배는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그것만 정리하고 먼저 가라.”
- “진짜요? 저 진짜 가요?”
- “부승관 너랑 놀고 싶어서 엉덩이 간지럽대.”
- “쟤 원래 잘 안 씻어요.”
선배는 불가사리는 언제든 열려 있으니 놀러 오라며 승관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문이 닫힐 때까지 90도를 유지하던 녀석이 곧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정확한 이유도 없이 타과 사무실에서 숨을 쉬는 자가 정녕 매일같이 바쁜 과대가 맞는지 묻자, 녀석은 그만둔 지 한참이라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역시 얽매인 자리는 무진장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 “그래서 목적이 뭐야?”
- “야, 친구가 보고 싶어서 올 수도 있지.”
- “이게 입만 열면 거짓부렁을.”
- “야하, 기막히게 전화가 왔습니다만.”
부르르 떠는 휴대폰 화면을 당당히 내 앞에 뻗는다. 승관은 이내 목소리를 가다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어, 나의 친구 민규냐. 어쩐 일이야. 언제 또 나의 친구 민규가 됐는지 알 수가 없다. 이런 친화력이면 총장 번호까지 털어가는 건 시간문제다. 구연동화의 한 장면을 그리는 듯 어색한 손동작을 그리던 녀석이 입을 막는다.
- “뭐어-? 오늘 이지훈이 아는 누나를 만난다고오-?”
- “…….”
- “그래에-? 딱 봐도 데이트 같다고오-?”
- “……뭐라고?”
- “그게 참말이야? 여주한테는 비밀로?”
- “이런 미친!”
회전의자가 철제 선반에 부딪힌다. 승관은 자리를 박차고 문을 여는 성난 곰의 뒷덜미를 잡았다. 김여주, 진정해. 여기 사회다. 별 같잖은 소리에 분노가 더욱 들끓는다. 승관의 휴대폰을 빼앗아 주어를 뺀 육하원칙을 읊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그러자 민규는 오붓하게 커피 한잔을 나눌 계획인 것 같다며 말을 더듬었다. 승관의 콧노래가 끊이질 않는다.
- “이지훈 지금 어딨는지 빨리 말해.”
- “강의실에 있긴 한데……. 아니, 너한테는 절대 절대 말하지 말라고…….”
- “아는 누나가 도대체 누군데? 너도 알아?”
- “야, 내가 그걸…….”
- “아니야! 됐어! 말하지 마!”
마구잡이로 종료 버튼을 누른다. 설마 했던 ‘개’선배의 말이 맞았다. 뭐든 두 배로 갚아 준다는 이지훈의 특기를. 승관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조곤조곤 시비를 텄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누나는 ‘교회 누나’ 다음으로 ‘아는 누나’라던데 이제 어떡하냐. 녀석은 말없이 짐을 챙기던 내 손을 잡는다.
가방은 내가 맡을 테니까 얼른 가서 이쥰 혼쭐 좀 내줘. 백팩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파이팅을 외치는 녀석은 현장 덮칠 때 본새 나게 벗으라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방법은 딱 하나다.
- “이거 말고 선글라스 하나 더 있지? 너 맨날 가방에 갖고 다니던 거.”
- “나들이용? 당빠 있지. 내가 이거 살려고 백화점 매장 싹 돌았잖냐.”
- “빨리 써.”
- “왜? 우리 놀러 가? 지금?”
- “응, 이지훈 잡으러.”
부승관 훈련병은 당장 공학관으로 집결합니다. 실시. 승관의 가방끈을 휘어잡고 과방을 나섰다. 뇌 피셜 김여주는 미쳤다며 가기 싫다 억지 부리는 녀석에게 은밀한 작전을 넣는다. 말이 작전이지 협박과 같았다.
이 시간부로 우리는 한 팀이다. 작전 실패하면 엉덩이 뻥뻥 차이는 거야. 두 손으로 제 엉덩이를 부여잡는 녀석과 함께 캠퍼스를 가로지른다. 질질 끌려와 공학관 옆문에서 노동 착취 정의를 읊던 승관이 타깃의 출현을 알렸다. 적응력 하나는 끝내주는 녀석이었다.
- “야야, 이지훈 나왔다.”
- “계단 내려오면 그때부터 움직이자.”
- “근데 친구야, 선글라스는 둘째 치고 머리에 보자기 꼭 써야 되냐?”
- “보호색 몰라?”
- “……시뻘건 색이 어떻게 보호색이여. 지구촌이 무슨 불바다냐?”
요즘 북한 첩자도 이러고는 안 다녀. 중얼중얼 사시사철 바쁜 승관의 입을 막고 숨을 고른다. 으으음! 으음! 녀석의 손가락이 타깃을 가리킨다.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시뻘건 보자기와 까만 선글라스를 두른 첩자들이 건물과 건물 사이를 넘나들며 뒤를 밟는다.
작전명은 ‘이지훈, 너를 쫓는 두 개의 그림자’.
브금은 아내의 유혹, ‘왜 너는 나를 만나서 어쩌고저쩌고’가 좋겠다.
26.
사거리 약국을 지나가는 반듯한 뒷모습을 따라 도둑 걸음을 걷는다. 승관은 조금 전부터 선글라스를 코끝에 걸친 채 바삐 문자질 중이었다. 눈이 네 개면 편해질까 싶어 데리고 온 놈이건만, 문자에 정신 팔려 앞을 내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흘겨보는 내 눈과 마주치자 급기야 숨기기까지 하는 녀석이 영 의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 “무슨 문자를 그렇게 해?”
- “다 너를 위해서.”
- “설마 애인 생긴 건 아니지?”
- “입으로 방귀를 뀌면 어떡해.”
- “변비 때문에 엉덩이가 막혔어.”
- “야, 난 지금 널 위한 희생정신으로 나온 거야.”
- “알았으니까 같이 미행 좀 하지?”
- “마더테레사를 잇는 부더테레사라고 들어는 보셨는지요?”
- “또 시작이다.”
- “헐, 이지훈 저거 뭐냐?”
- “뭐가? 어디?”
예민한 눈동자가 타깃을 쫓는다. 꽃집 앞에서 멈춘 그가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누군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민규의 말대로 상대는 여자, 그것도 반박할 수 없는 완벽한 여자였다. 그녀는 마치 오래된 연인을 만나는 듯 그를 끌어안았다. 승관은 선글라스를 벗어 감탄을 금치 못했다.
- “와, 이지훈이 드디어 바람을…….”
- “조용히 해라.”
- “이판사판 복수 판이라는 건가?”
몇 사람들의 의심스러운 눈길을 받으며 그들과 거리를 좁혔다. 길고 긴 포옹을 끝낸 그가 꽃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도 함께 가게로 모습을 감췄다. 아니 도대체 갑자기 꽃집은 왜 가는 거야. 질문의 시작은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 “선물이라도 주고 싶었나 보지.”
- “그 많고 많은 선물 중에 왜 하필이면 꽃이냐고.”
- “설마 첫사랑?”
- “……웃기고 있네.”
- “오랜만에 만난 첫사랑한테 꽃 정도는 줄 수 있는 거 아니냐?”
의미심장한 단어에 기어코 심술이 돋는다. 첫사랑이라 함은 시간이 갈수록 아련해 짐은 물론이고 미련 덩어리만 커지는 불필요한 존재 아닌가. ‘구’여친, ‘구’남친보다 신경 쓰이는 것이 바로 첫사랑이란 말이다. 승관의 그럴듯한 추측에 한숨이 땅으로 꺼진다. 큰 눈으로 잔망스러운 눈웃음을 짓는 녀석에게 괜한 화풀이를 했다.
- “웃어? 이 상황에 웃음이 나와?”
- “웃은 거 아니고 운 거다.”
- “실실 올라가는 거 뭔데?”
- “어제 술 너무 많이 먹어서 경련 왔어.”
억지로 입꼬리를 내려뜨리던 녀석이 선글라스를 고쳐 쓴다. 야, 저기 나왔다. 승관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긴다. 꽃집을 지나는 지훈의 손에는 장미 한 떨기. 어딘가로 문자를 보내며 그녀와 끊임 없는 대화를 주고 받았다. 그녀가 가벼운 스킨십으로 팔을 그러쥐자, 그는 피하는 기색도 없이 오히려 웃는 낯으로 상대를 대했다.
베베 꼬인 멘탈이 바스락거린다. 짜증이 솟구쳤고 분노가 이는 것 같기도 했다. 아침부터 찜찜했던 슬픈 예감이 들어맞는다. 내 변명도, 이후의 연락도 무참히 씹어대더니 결국 남는 건 장미와 이지훈, 그리고 예쁜 그녀였다. 뻘건 보자기를 벗어 열을 식히는 와중에도 승관의 문자질은 멈추질 않았다.
- “승관아, 내가 눈이 침침해서 그러는데…….”
- “와이.”
- “ 방금 이지훈 여자랑 어디 들어 간 거야?”
- “악세사리 가게 아니냐. 반지, 목걸이 이런 거 사는 곳.”
승관은 얼굴을 내밀어 지훈의 행적을 쫓다, 다시금 휴대폰에 집중했다. 한 대 얻어맞은 머리는 작동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대형 쥬얼리 샵 안에서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은 이지훈. 그리고 그의 옆자리는 내가 아닌 그녀였으니까.
26.
- “누나, 뭐 마셔요?”
- “바닐라 라떼.”
- “형이랑 똑같네.”
프랜차이즈 카페에 들어선 그들이 테이블을 차지했다. 멀찍이 자리를 꿰찬 승관이 눈을 도록-, 굴린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는 물음이었다. 그렇게 보자기가 싫다더니 실내에서까지 둘러쓰고 앉아 있는 녀석이다. 벗으라는 눈치에도 꿋꿋하게 선글라스까지 착용한 녀석 덕분에 지나가는 꼬마의 타깃이 됐다.
- “우와! 이 아조씨 진짜 웃겨!”
- “뭐 인마? 아저씨 아니거든?”
- “아조씨 도둑이에요?”
- “아저씨 아니라고!”
승관의 외침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우리에게 향한다. 맙소사, 그녀도 날 보고 있다. 승관의 뒤통수를 잡아 같이 고개를 숙인 채 꼬마에게 급박한 손짓을 보냈다. 선글라스를 벗어 선한 눈빛으로 이제 그만 가달라 부탁을 해도, 꼬마는 아예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승관을 유심히 살폈다. 테이블에 얼굴을 박은 승관을 따라 눈을 맞추던 꼬마가 말을 잇는다. 접선이라도 하는지 소곤거리는 배려가 돋보이는 아이였다. 정말 도둑인지 묻고 싶은 모양이었다.
- “아조씨 뭐 훔쳤어요?”
- “왜, 공범이라도 할래?”
- “곤버미가 뭐예요?”
- “너 하루에 동화책 몇 권 읽냐?”
- “아조씨 모자는 왜 빨개요?”
- “……보호색이야.”
가지고 싶으면 줄게. 대신 너는 꼭 좋은 친구 만나라. 승관에게 받은 시뻘건 보자기를 머리에 얹고 발장난을 하던 꼬마는 부모의 손에 잡혀 가게를 빠져나갈 때까지 ‘아조씨’를 연달아 부르며 승관의 청춘을 앗아갔다. 선글라스 너머 공허한 눈이 자아를 찾는다. 옘뱅할 인생. 역시나, 그냥 넘어갈 녀석이 아니다. 하지만 공공 장소에서 욕은 민폐이니 손에 들린 보자기로 허망한 얼굴을 가려 더 이상의 재앙을 막았다. 녀석의 퍼스널 컬러는 아마 이 색인 듯싶었다.
- “부럽다. 나도 꽃 주는 사람 있었으면 좋겠네.”
- “병원에서 제일 바쁜 사람 있잖아요.”
- “누구? 돌팔이?”
- “근데 생각보단 돌팔이 아니야.”
- “그나저나 여자 친구는?”
한동안 사적인 대화를 나누던 그들에게 쫑긋 귀를 세운다. 이지훈 주파수를 맞춰 안테나를 킬 시간이었다. 그녀의 질문에도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다. 뜸을 들일수록 궁금해 미치는 쪽은 나였다. 승관의 휴대폰이 때마침 진동을 탔고, 문자를 읽어 내리던 녀석이 코를 먹는다. 웃겨 죽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녀석은 애지중지하던 보자기와 선글라스를 벗고 당당히 자리에서 일어나 코를 벌름거리며 날 바라봤다.
- “누나, 여자 친구 보여줘요?”
- “다 왔대?”
- “응, 지금.”
- “어디?”
- “나와 빨리.”
순식간에 대각선 방향으로 몸을 튼 그가 손가락을 까딱거린다. 위치는 정확히 내 방향, 그의 시선은 흔들리는 내 동공과 접선 중, 벌렁거리는 심장에 테이블 밑으로 몸을 숨긴다. 맙소사 이건 아니다. 진짜 이건 아니야. 승관의 다리를 붙잡는 손이 애처롭다. 그러나 녀석은 보란 듯이 손을 내치고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작전 종료를 외쳤다.
- “이쥰이 너 오래.”
- “부승관, 너 미쳤어?”
- “네 남친이 빨리 오란다.”
- “미쳤냐고!”
무지막지한 힘에 질질 끌려가면서도 출구를 찾았다. 아차 싶으면 바로 도망갈 계획이었다. 승관은 선글라스를 벗기려 애를 썼고 난 뺏기지 않으려 버둥거렸다. 결과는 나보다 팔 길이가 긴 부승관 승, 놀란 그녀가 지훈을 보며 묻는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말했다. 반갑게 손을 내민 그녀가 활짝 웃는다. 승관은 뻣뻣이 굳은 내 팔을 잡고 악수를 도왔다.
- “아까 나랑 눈 마주쳤던……. 맞죠?”
- “…….”
- “이름 물어봐도 돼요?”
- “김…… 김여주요.”
- “선글라스 좋아하나 봐요. 나랑 똑같다.”
스스로가 바보 같다 느낀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소파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다소곳이 앉아 시선을 피했다. 지훈은 내 팔을 당겨 얼굴을 마주했다. 정한이 형 여자친구. 턱짓으로 그녀를 가리킨다. 비로소 ‘아는 누나’의 비밀이 풀렸다. 승관은 그녀 옆에 앉아 부끄럼 많은 악수를 청했다. 지훈은 턱을 괴고 어색해 죽을 것 같은 내게 말했다.
- “부승관 이석민이 항상 네 편이라고 생각하지 마.”
- “애 운다 울어.”
- “안 따라 오면 어쩌나 했는데 운이 좋았어.”
- “아까 나한테 같이 이지훈 잡으러 가자고 했을 때, 가기 싫다고 연기하는 거 좀 괜찮지 않았냐 여주야?”
- “신인상 네가 받아라 그냥.”
새침하게 두 뺨을 잡은 승관은 트로피가 옥천 버뮤다에 갇혀 생사를 모른다 울상을 짓는다. 인제 보니 연기의 신들이 다 모였다. 승관은 지훈이 내 연락을 받지 않은 것도, 석민을 시켜 불안함을 조성한 것도, 아는 누나를 만나러 간다는 정보를 흘린 것도 다 네 남친 짓이니, 여차 주먹 날리기를 하고 싶으면 이지훈 가슴에 꽂으라 당부했다. 그러자 그녀가 승관을 장난스레 흘기며 내 편을 들었다.
- “살다 보면 한두 번 나갈 수도 있지 다들 빡빡하게 왜 그래? 이제 백 년 인생인데 재미없이 살면 그것도 고통이다?”
- “생각도 윤정한이랑 아주 똑같아.”
- “여주 씨, 괜찮아요. 지훈이가 연애를 아직 몰라.”
- “……누나.”
- “화가 머리끝까지 나도 처음엔 꼭 괜찮은 척을 한다니까? 근데 그게 티가 나.”
- “내가 언제.”
- “윤정한도 그러던데 그거 집안 내력이니?”
이번엔 지훈이 물잔을 비우며 시선을 피했다. 그녀가 내 손을 잡고 굳건한 응원을 불어 넣는다. 지훈이가 복수한답시고 이런 일을 또 꾸민다면, 잊지 말고 꼭 본인에게 연락하라 번호까지 친절히 일렀다. 그땐 과팅 뿐만 아니라 미팅, 번개팅, 맞선까지 책임지겠다며 지훈의 목을 타게 했다.
든든한 지원군은 나중에 지훈이 빼고 밥 한번 같이 먹자 귀엣말을 건넸다. 어렸을 때 헤어진 친언니를 찾은 듯 애정이 폭발한다. 승관은 지훈에게 들킬까 고개를 돌려 몰래 어깨를 들썩였다.
- “데이트 잘 하고 나중에 또 보자.”
- “정한이 형 연락 왔어?”
- “요즘은 연락하면 적어도 반나절은 기다려야 해. 병원 일은 다 지가 하나 봐.”
- “그래서 그냥 가게?”
- “오늘은 너랑 여주 씨 보러 온 거니까.”
승관도 그녀를 따라 짐을 챙긴다. 차로 학교까지 데려다주겠다던 그녀의 제안을 넙죽 받아들린 녀석이 내게 두 손을 흔든다. 제 할 일을 끝낸 자의 여유로움이 부러웠다. 지훈은 소파에 머리를 기대 지그시 얼굴을 훑었다. 그를 따라 머리를 대고 앙증맞은 보조개와 인사를 나눈다. 야, 오랜만이다. 네 주인은 어째 날로 뻔뻔해져 가는지 모르겠는데 혹시 넌 아니. 볼을 콕콕 눌러 소심한 복수를 하자, 그는 내 손가락을 잡고 무는 척 입을 벌렸다.
- “아까 질투했지?”
- “그게 뭔데?”
- “네가 지금 하는 그거.”
- “내가 애도 아니고.”
- “난 했는데. 너 과팅 나갔을 때.”
그것도 엄청 많이. 그는 좀 더 가까이 다가와 바로 내 옆에 얼굴을 기댔다. 사실 질투라기보다는 승관이가 말한 ‘첫사랑’에 꽂혀 전전긍긍했다는 게 더 정확했다. 애꿎은 선글라스 다리를 접었다 폈다 반복한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그가 조용히 선전 포고를 했다. 전해지는 당찬 숨결에 본능은 침을 삼켰다.
- “다음에도 나갈 거면 같이 나가.”
- “농담이 너무 진지하다.”
- “대신 무조건 짝은 나야.”
- “……진심이구나.”
- “빨리 새끼 걸어.”
곧은 새끼손가락을 걸고 구두 계약을 진행하는 ‘갑’ 이지훈은 ‘을’ 김여주와 체결을 진행했다. 손바닥 사인까지 받아낸 그는 코팅까지 완벽하게 한 뒤 주머니에 넣는 척 연기를 했다. 승관이 노트에 끄적거리던 백상 예술제 신인상은 이를 보고 미리 예견한 말인 것 같았다. 이지훈 손바닥에서 놀아나는 날이 바로 오늘인 줄 알았더라면 적어도 레드 카펫은 깔아줬을 텐데 말이지.
답답한 듯 셔츠 단추를 풀던 그가 맞은편 자리에 앉아 허리를 곧게 세운다. 군더더기 없는 하얀 셔츠에 머리까지 만지고 나온 모양새다. 어디 소개팅에 나가냐는 장난에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제2차 충격은 여기서부터였다.
- “이제 하자.”
- “뭐를?”
- “소개팅.”
머리 위로 물음표 백만 개가 떠다닌다. 도통 뇌를 굴려봐도 무슨 속셈인지 알 수가 없다. 심지어 그는 태연하게 손을 내밀고 인사를 건넸다. 엉겁결에 손가락 끄트머리만 잡는 내가 웃겼는지, 그가 옅게 웃으며 입술을 뗐다.
- “안녕하세요. 이지훈이라고 합니다.”
덩달아 가슴이 뛰었다.
진짜 우리들만의 소개팅이었기에.
Epilogue.
- ‘소개팅을 하겠다고? 그것도 김여주랑?’
- ‘좀 새로울 것 같지 않아? 두근두근하고.’
- ‘두근두근 같은 소리 하네. 잘만 사귀는 여친이랑 소개팅이 웬 말?’
- ‘복수한다고 똑같이 하는 거 싫어. 피곤하고 귀찮고 관심도 없고.’
- ‘매일 보는 얼굴이랑 소개팅이라니. 그게 뭔 재미냐.’
- ‘되게 좋을 것 같은데. 서로 존댓말 하면서 취미 묻는 거.’
- ‘취향 진짜 독특하다. 과팅은 아예 잊어 버린 거? 넌 열 안 받냐?’
- ‘진짜 가고 싶어서 간 것도 아니잖아. 나랑 외박 좀 해보겠다고, 그래서 간 건데.’
- ‘야, 외박 그건 여주한테 절대 말하지 마. 알면 큰일 나. 너한테 절대 말 안 하겠다 어깨까지 걸었다고.’
- ‘뭘 그런 것까지 해. 귀엽게.’
- ‘귀엽고 자시고를 떠나서 그때 같이 있었던 우리 과 애들이 김여주 번호 좀 달라고 난리다 지금.’
- ‘알려줘.’
- ‘진짜냐? 진짜 알려줘?’
- ‘뒷자리 7471.’
- ‘미친, 네 꺼잖아.’
- ‘어, 내 꺼 뿌리라고.’
- ‘차단을 살벌하게 하네.’
- ‘박멸은 확실히.’
- ‘세스코에서 나오셨나 봐요.’
- ‘예, 김여주 전용이죠.’
- ‘야, 그래서 판 어떻게 짤 거?’
- ‘네가 여주한테 정보 좀 흘려. 누나 만나러 간다고.’
- “너 누나도 있었냐?”
- ‘사촌 형 여자친구. 안 본 지 꽤 돼서 이번 주에 만나기로 했어. 어렸을 때부터 본 사이라 거의 친누나지 뭐.’
- ‘그 특급 정보를 흘리는 내 목숨이 남아날 것 같냐.’
- ‘혼자 하기 정 그러면 김민규랑 입 맞추든가.’
- ‘얘는 부끄럽게 남자 새끼랑 입을 맞추래.’
- ‘미친놈아.’
- ‘이번 기회에 이쥰 네 연기 검증 좀 해봐야겠다. 형이 까짓 거 감독해 준다.’
- ‘근데 보통 소개팅 나가면 뭐부터 하냐.’
- ‘인사 븅신아.’
- ‘……닥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