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평생 동안 듣고 싶은 노래가 있다면
넌 그런 노래일 거야.
Murakami Haruki - <Norwegian wood> 중에서
놀이터에서 모래성을 쌓던 시절부터 대학 입학원서를 넣는 그 순간까지 교사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별 것 없는 인생을 바꾸고 싶다면 무조건 A대에 들어가면 된다. 그 대학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제자들의 미래를 생각한답시고 명문대만 들어가면 없던 기적도 생길 것처럼 부풀려 말하는 일이 교사들의 숨겨진 임무였을까 싶기도 하다.
그토록 바라던 대학교가 실은 자율 복장이 허락되는 고등학교 연장선이었다는 걸 귀띔이라도 해줬더라면, 한 과목 당 백 페이지가 넘는 시험 범위에 놀라지 말라 다독여줬더라면, 좀 더 나아가 각 잡힌 인생이든 망가진 인생이든 이제는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걸 역함수 대신 알려줬더라면 눈이라도 부릅뜨고 준비라도 했을 텐데. 이건 뭐 밀물 썰물에 휩쓸려 다니는 소라고둥보다 못한 인간이 되어버렸다. 입학, 개강, 동아리, 엠티, 벚꽃……. 모든 것이 현실의 눈을 가리는 달콤한 독 사과였다는 걸 왜 그땐 알지 못했는가.
4월의 꽃, 중간고사에 처참히 패배했다. 내게 있어 ‘서술형’이라 함은 언어 영역과 수리 영역에서 다뤘던 고작 두세 줄의 문장이 전부였고, 그 틀을 완벽하게 깬 대학 시험은 서술자의 멘탈도 같이 날렸다. 시험지에 공백이 왜 이리 많은 것이냐, 한 문제당 한 페이지를 잡아먹는 게 사실이더냐, 시험 범위에 없는 문제가 가장 배점이 높다는 게 실화더냐. 중간고사 마지막 시험 직후 단톡방은 절망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마치 일부러 짜기라도 한 듯 무릎 꿇는 이모티콘을 보내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옹기종이 아재 개그를 날리던 아이들은 벌써부터 재수강을 고민했다. 계절학기, 그건 가까운 내 미래이기도 했다.
본격적인 여름에 앞서 몇 가지 소식이 있다. 첫째, 자주 연락하는 버릇이 생겼다. 특히 술자리만 나가면 생존이 불분명한 날 걱정하는 지훈을 위해 부러 들여놓은 습관이었다. 새벽까지 잠을 청하지 못해 승관에게 쓸데없이 문자만 날리던 그가 이젠 잠자기 직전까지 나와 문자를 주고받는다. 아까 만났는데 또 보고 싶어. 내일은 보자마자 안아 주기 어때. 적당히 오른 취기는 사랑 고백하기에 딱 좋았다.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솔직함에 빠져 새벽을 밝힌 적도 있었다. 잠긴 목소리가 좋았고 이불을 뒤척이는 것마저 좋았다. 그냥 모든 것이 좋았다. 이지훈이 하는 그 어떤 것이든.
안타까운 두 번째 소식은 승관이 불가사리 모집에 당당히 탈락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발적인 포기였다. 당시 불가사리 최종 면접에 합격했으나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기공 새내기 과대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한 탓에 ‘인싸’ 중에서도 ‘핵 인싸’인 승관이 과반수 추천에 의해 과대가 되었고, 이것은 자연스레 불가사리를 포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쉽지 않냐는 물음에 승관은 되려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초딩 때도 못 해본 반장을 대학 와서 한다. 그럼 나 이제 ‘부’반장이냐. 근데 성(姓)이 이래서 반장 아닌 것 같지 않냐. 역시 실망할 틈을 주지 않는 답변이었다. 사서 고생한다는 과대 생활에 녀석이 살아남을지는 아직 미지수. 하지만 다행히도 과대로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며 최근 들어 교양 수업에 늦는 법이 없다. 덕분에 승관을 연모하다 잠시 사그라든 동기도 다시 불을 지폈다. 수업 시작 직전, 내게 몰래 쥐여 준 초콜릿이 그 증거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은 내 손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제 것이라 우기며 맛있게도 먹었다. 동기는 붉은 얼굴을 감쌌고 승관은 입을 오물거리며 아침에만 날카로운 턱선을 확인하기 바빴다.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건지. 뻔히 느껴지는 시선에도 얼굴 몰아주기 셀카를 찍자 달려드는 녀석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지훈 다음으로 속을 알 수 없는 생명체였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승관이 포기한 불가사리 보컬 자리는 다름 아닌 석민에게 돌아갔다. 알고 보니 석민은 최종 면접 후보자 중 한 명이었으며, 승관의 거절로 놓칠 뻔한 기회를 기적적으로 잡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술집 화장실에서 온기를 느끼며 벌건 얼굴로 환히 웃던 애가 무려 보컬이라니, 이미지 매치가 전혀 되지 않지만 어쨌거나 실력이 좋으니 예민한 ‘개’선배가 선뜻 발탁한 것 아니겠는가. 훗날 ‘개’선배가 말하길, 승관의 목소리는 ‘나 노래해요…….’ 아련함을 뿜어 대는 반면, 석민은 ‘나!!!! 노래한다!!!!’ 성량 폭발 직전이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아, 마지막 소식을 석민으로 장식한 이유는 별 뜻 없다. 현재 동일 인물이 사다리 위에서 현수막을 고정하며 새하얀 이를 내놓고 웃고 있기에 불현듯 생각난 것뿐이었다. 이윽고 지상에 발을 디딘 석민이 가볍게 손을 내고 내 옆에 쪼그려 앉는다. 여기 삐뚤어졌다. 삼십 분 전부터 열심히 붙이던 발바닥 스티커가 대화의 시작이었다.
- “기울기 너무 심하다.”
- “그럼 네가 붙여.”
- “김여주 미술 잘 못 하나 보네.”
- “너무 완벽하면 인간미가 없잖아.”
오후의 늦바람이 땀방울을 걷어낸다. 솜 뭉치 구름을 한가득 먹은 하늘에 늦봄이 잔뜩 껴 있다. 석민은 혹여 바람에 날아갈까 형형색색 스티커를 꾹꾹 누르며 뒷걸음질을 시작했다. 뒤뚱거리는 오리 두 마리, 약 마흔 번째 발바닥이 그 뒤를 따랐다.
- “아무리 봐도 저 발바닥 너무 동떨어져 있다.”
- “인간의 고단한 삶을 표현한 거야.”
- “손님들 딴 길로 다 새겠네!”
- “제발 오지 마. 지금도 힘들어.”
손님들을 걱정하는 오리 두 마리가 날개를 퍼덕거린다. 연달아 지은 부스 현수막도 오리들을 따라 우렁찬 소리를 냈다. 부스 앞으로 아이스박스를 나르는 학생들과 장비를 점검하는 사람들이 배경이 된다.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 속 2017년 ‘A 대학교’ 축제, 그 첫 번째 날이 밝았다. 그나저나 빨간색 발바닥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OH MY RAINBOW
;Caramel Drizzle
Chapter. 16 <축제1>
14.
밑도 끝도 없는 발바닥 노동에 지친 오리들이 잔디밭에 드러누워 땀을 식힌다. 서쿠, 발바닥 빨간색 좀. 어둑한 하늘에 멍을 때리던 석민이 동그란 안경을 벗고 눈가를 훔친다. 빨간색 그놈이 글쎄 빗길에 그만……. 끝을 듣지 않아도 될 헛소리였다. 머리보다 빠른 손이 석민의 입을 막는다. 필사적으로 부스 안으로 도망친 석민이 다시 돌아와 건넨 건 대학 생활의 필수 아이템, ‘핫식스’였다.
- “서빙은 체력인 거 알지?”
- “바쁘면 와서 돕고 좀 그래.”
- “당연하지. 열심히 노래 부르고 있을 게.”
- “무대 준비 잘해. 이따가 보러 간다.”
축제의 감초라 할 수 있는 콘서트 행사에 불가사리 공연이 빠질 수 없다. 석민은 무대 때문에 잠까지 설쳤다 흥분을 참지 못했다. 첫 축제, 첫 무대, 그리고 첫 곡까지 맡게 된 운 좋은 사나이였다. 부스 사이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석민만의 목 풀기가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차라리 요를레히를 부르지그래. 아직은 인기가 부담스러워. 김칫국 열 사발 마셨나 봐. 미안하지만 반절은 남겼어. 석민은 빠르게 손을 흔들며 자신의 트레이트 마크인 해바라기 미소를 남긴 채 유유히 퇴장했다.
고된 노동을 예상이라도 하는 건지 오늘따라 핫식스 맛이 달다. 꿀을 먹는 것 같아. 푸가 보고 싶네. 몇 시간 째 이어진 무급 노동에 정신을 잃어 갈 때, 부스 안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동기가 여유로운 손짓으로 소환을 시작했다. 여주야, 정신 바짝. 너만 믿는다. 전쟁 난 협곡에 소환된 것 같다. 정확하고 신속해야 한다는 서비스 정신 아래, 나를 포함한 알바생들은 식기 세팅은 물론 앞치마에 여분의 나무젓가락과 냅킨을 꽂아 완벽함을 더했다.
- “두 시간이나 더 남았는데 벌써?”
- “미리 해 두면 좋지.”
- “……교복에 앞치마가 웬 말이야.”
- “너무 잘 어울려.”
- “서빙 할 애들 이게 전부야? 너무 적지 않아?”
- “일당 백 하면 돼.”
동기는 교복 매무새를 정리하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예상하다시피 우리 과 주점의 컨셉은 ‘Back to school’, 말 그대로 스쿨 룩의 본보기를 보여준다며 축제 한 달 전부터 이를 갈았더랬다. 교복 컨셉에 꽂힌 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입어 보자는 매우 단순한 이유로부터 출발한 아이디어였다. 결국, 희생자 중 한 명이 되어 온종일 한숨을 뱉는 건 다름 아닌 나였다. 얇은 리본 끈, 하얀 셔츠, 남색 테니스 스커트, 그리고 옥스퍼드 신발까지. 승관의 말마따나 대학 와서 별 걸 다 해본다. 어색함이 돋아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나 변하는 건 시간뿐이었다.
콘서트 끝나고 꼭 와. 도망가면 안 돼. 동기는 오늘의 알바생들에게 연락 필수라는 조건을 내걸고 일시적인 방생을 허락했다. 콘서트 시작을 알리는 무대 조명이 반짝인다.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뛰어가는 도중 반가운 휴대폰이 울렸다. 하루 종일 연락 없던 이지훈이면 눈 딱 감고 예쁘게 받아 준다. 하지만 기대감은 쓸데없는 소꿉친구를 불렀다. 무대 입구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전화를 거는 승관이 내게 손을 흔든다. 야! 김여주! 반가운 듯 손가락질까지 일삼는 녀석이 토끼 뜀뛰기로 달려온다. 친구야, 제발 평범하게는 올 순 없는 거니.
- “와, 영국 사립 학교 다니시나?”
- “내가 옥스퍼드 출신이라.”
- “이 누추한 축제에 제가 귀한 분을 다 봅니다.”
나이 먹고 참 대단하십니다. 내게 두 볼을 잡히고도 절대 굴하지 않는 승관이 토끼 머리띠를 내민다. 써 주세요. 이 악물지 말고. 녀석은 화를 낼 겨를도 없이 머리띠를 씌우고는 곧장 연속 촬영을 박았다. 반쯤 눈이 감긴 컷이 대다수, 광대를 한껏 올린 승관이 눈을 찡긋거린다.
- “예쁜 누나, ‘첫 사랑니’ 춰 주세요.”
- “옥스퍼드 신발 강도가 얼마나 될까.”
- “네가 크리스탈이세요? 특별한 경험 럼 펌펌펌-.”
- “이게 진짜.”
한동안 휴화산을 자처하던 불구멍이 폭발했다. 도망가는 승관의 등을 쫓아 달리다 보니 어느새 무대 관객석 맨 앞줄에서 호흡을 가다듬고 곱슬거리는 뒤통수를 찾고 있었다. 승관은 내 등을 톡톡 두드리며 자칭 ‘어피치’처럼 미소를 띠었다. 자리 진짜 잘 잡았다. 김여주 눈 호강하겠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조용히 옆에 서는 승관의 뒷덜미를 잡는다. 그러자 곧바로 귓가에 비밀 정보를 흘리는 녀석이다.
- “오늘 이지훈 노래 부른다.”
- “……이지훈? 내가 아는 이지훈?”
- “너 데려오라고 신신당부했어. 아무튼 난 미션 완료했다.”
- “지금? 여기서 노래 한다고?”
- “오늘만 불가사리 객원 보컬이래.”
내가 다 떨린다. 후후 심호흡하는 승관을 따라 두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연락은 일부러 받지 않은 거지. 왜냐,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녀석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무대에 배경이 깔렸다. 미리 준비된 마이크, 베이스, 키보드, 그리고 드럼 앞에 차례대로 자리한 불가사리 멤버들 관객의 환호를 받는다. 잔뜩 긴장되어 보이는 석민이 콘서트의 시작을 알렸다. 무대 밑에서 마이크를 챙기던 ‘개’선배는 반가운 듯 내게 손을 흔들었고, 승관이 그 인사를 대신 화답했다.
서인국의 ‘봄 타나 봐’를 시작으로 데이브레이크의 ‘들었다 놨다’까지 연속으로 무대를 메운 석민의 목소리는 갈채를 받기 충분했다. 쉽게 말해 노래의 정석이었다. 무대를 진중하게 바라보던 승관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만큼은 아니지만 훌륭해. 혼자 부라보를 외치며 뒤늦은 박수를 친다. 녀석을 따라 얼떨결에 박수를 치다 무대 위로 올라오는 익숙한 얼굴에 그대로 멈칫하고 만다. 진짜 말도 안 돼. 진짜야. 진짜였어.
- “안녕하세요. 이지훈입니다.”
무대 중앙, 높은 의자에 앉아 기타를 잡고 마이크 높낮이를 조절한다. 사회자와 간단한 대화를 나누다 살짝 고개 숙이며 웃는 모습에 특히 여자 관객들은 앓는 소리를 냈다. 무슨 학과? 이름이 뭐라고? 오고 가는 대화 속 ‘건축학과 17학번 이지훈’이 돌림 노래가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잠시 무대에 나타난 ‘개’선배는 그를 영입하고 싶었으나 안타깝게 건축 동아리에 뺏기고 말았다며 한탄했고, 승관은 ‘이지훈’ 세 글자를 크게 외치며 방긋 웃었다.
- “……어, 왔네.”
- “야야, 너 본다.”
멍 때리는 바보를 가볍게 두드리는 손가락이 정신을 깨운다. 이윽고 마주친 시선에 부끄러워 고개를 돌렸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보는 얼굴인데, 안고 싶을 때 안을 수 있는 사람인데,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여의도 공원에서 마이크를 잡았을 때 빠르게 쿵쿵대던 심장이 이젠 세 배속 가까이 뛴다. 아아, 심장에 무리가 올 듯싶었다.
제가 부를 곡은 예전부터 계속 생각해 왔던 건데……. 곡 소개에 여념 없는 그를 눈에 담는다. 하얀 셔츠에 검은 슬랙스라니. 너무 완벽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야. 머리는 언제 또 저렇게 만졌대. 손가락이 더 분홍분홍 해. 벚꽃 누가 다 먹었어. 누구긴 지훈이가 다 먹었지. ‘이지훈 찬가’를 만들어 보라는 승관의 권유에 따라 멜로디를 써 내려 갔다. 그의 옆, 빈자리에 다소곳이 앉아 기타를 쥐는 손님을 보기 전까지 행복에 겨운 멜로디였는데.
- “……옆에 누구야.”
- “글쎄. 불가사리 다른 멤버 아니냐.”
- “…….”
- “듀엣 곡이라잖냐. 그래서 부른 거겠지.”
기분이 멍했다. 비슷한 스커트를 입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제 몸집보다 큰 기타에 자그만 손에 얹어 코드를 잡는다. 조명이 오로지 둘을 비춘다. 관객석에서 들리는 잘 어울린다는 거지 같은 말을 들어버리고 말았을 때, 뭔가 조금씩 잘못 되어간다는 걸 알았을 때, 자잘한 눈 맞춤이 듀엣에 기본이라 하지만 이건 너무…….
- “승관아.”
- “……야, 괜찮냐.”
- “결심했어.”
- “이 악물어도 돼.”
승관이 등을 다독인다. 그런 녀석의 손을 거둬내고 어깨를 폈다. 위로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관객보다 그의 옆모습에 시선을 두는 저 자그마한 존재를 거둬내야 할 타이밍이었다. 강렬한 촉이 왔다. 어쩌면 꽁꽁 숨겨 놨던 ‘이지훈 지키기 프로젝트’를 실행해야 할 순간이 오고 있는 걸지도.
15.
유명 아이돌 그룹까지 휩쓸고 간 콘서트가 성황리에 끝나고 운동장을 비추는 가로등이 축제의 시작을 알렸다. 부스 주변에는 술을 탐하는 재학생과 타 지역 학생들로 장사진을 만든 지 오래였다. 맥주 두 병이요. 아까 시켰는데 언제 나와요. 주문 좀 받아주세요. 석민과 땀 흘려 붙인 발바닥이 톡톡히 효과를 내는 중이었다. 운동장을 둥글게 감싼 주점들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그중 교복 컨셉은 인기가 하늘을 찌르다 못해 대기 줄마저 넘쳤다. 허리 펼 틈 없이 몰리는 주문과 주문 사이, 올해 첫 공연을 마친 불가사리들이 점령한 중앙 테이블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개’선배 옆에 나란히 붙어먹은 두 사람이 맘에 들지 않은 탓이었다.
이지훈, 너는 듀엣 길만 걸어. ‘개’선배가 칭찬이랍시고 망언을 뱉어냈다. 말없이 술잔만 건드리는 그와 옆에서 가볍게 팔과 팔을 부딪치며 아양을 떠는 여자애를 여간 눈꼴이 시려 볼 수가 없다. 모든 걸 다 내팽개치고 싶지만, 장사에 열을 올리는 동기들은 당연히 내 마음을 알아 줄 리 없었다.
여주야, 1번 테이블 메뉴판. 여주야, 5번 테이블 계란말이. 여주야, 2번 손님 계산. 여주야. 여주야. 사방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진절머리가 났다. 오늘 불린 이름이 거의 일 년 치나 다름없을 것이다. 서빙을 해야 하는데 자꾸만 그의 어깨에 기대려 애쓰는 자그마한 여자애가 걸린다. 쓰레기를 버리러 간다던 동기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결국 바빠지는 건 두 다리와 눈이었다.
- “언니, 물 한 잔만 주세요.”
- “……언니요?”
- “어머, 선배님 아니세요?”
그에게 치근덕대던 그녀가 동그란 눈으로 말한다. 어머, 미안. 일부러 그랬어. 그녀의 속마음은 딱 이거였다.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 깊은 취기가 온다. ‘개’선배는 얄밉게 웃으며 내 얼굴을 가리켰다. 김여주 한 방 먹었네. 가만히 있으면 반절이라도 가련만, 선배는 만땅인 맥주잔을 내밀며 술을 권했다. 마시면서 일해. 열 나겠다야. 참을 인을 세 번 그리면 보살이 된다 했는가. 오늘이 그 첫 번째 획을 긋는 날이었다.
잘 마시겠습니다. 보란 듯이 잔을 들어 그 자리에서 원 샷을 때린다. 꾸역꾸역 넘어가지 않는 술을 삼키려 부단히 노력했다. 한 잔 더를 외치는 망할 불가사리 무리 속에서 그가 인상을 찡그린다. 너 때문이야. 이지훈, 너 때문에 마신 거라고. 내게 물 잔을 건네는 그를 외면하고 술을 받는다. 기세를 몰아 다시금 잔을 쥔다. 그러나 그것을 가볍게 채간 손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그의 것이었다.
- “지 꺼라고 챙기는 거 봐라.”
- “얘 이제 그만 줘요.”
- “여주는 더 마시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 “넌 가서 할 일 해.”
자리에서 일어나 내 등을 떠민다. 이거 입고 있어. 그가 가디건을 벗어 내게 건넨다. 주섬주섬 받아 입으면서도 짜증이 풀리지 않는다. 입 모양으로 ‘주머니’라 발음하는 그를 따라 볼록 튀어나온 공간을 헤집자 츄파춥스가 나를 반겼다. 내가 이걸로 쉽게 풀어지는 사람이 아니야. 그래도 먹긴 할 거야. 달달한 사탕을 입안에 굴리며 이따금 그를 쏘아봤다. 멀찌감치 나와 눈을 맞추던 그가 알게 모르게 웃는다. 곱지 않은 시선으로 나와 그를 번갈아 보던 그녀가 술을 들이켰다. 목이 메말랐던 모양이었다. 심지어 그에게 손바닥을 내밀고 웃는다. 사탕을 달라는 뜻 같았는데, 다행히 그는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16.
불가사리에게 해산은 없다 외치던 ‘개’선배는 기숙사로 실려 나가는 첫 타자가 되었다. 한두 테이블씩 빠지는 야심한 시각, 주점을 정리하는 그 순간까지 꼿꼿이 자리를 지키던 석민과 지훈은 술에 만취된 그녀를 바라보며 서로 머리를 맞댔다. 그래도 같은 건축이니 이지훈 네가 데려다줘야 하는 것 아니냐 망발을 뱉던 석민이 슬쩍 내 눈치를 본다. 지훈은 시계를 확인하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주점 입구를 몇 차례나 확인했다. 저 멀리 들려오는 토끼 뜀뛰기, 자칭 A대의 귀염둥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 “내가 또 이렇게 이지훈의 뒷일을 하게 될 줄은 우리 집 일흔아홉 살 거북이도 몰랐겠죠.”
- “고마워. 술 살게.”
- “얘는 또 왜 이렇게 무거운 건지 알 수가 없죠.”
- “아까 얘 친구들이랑 통화 했어. 기숙사 앞에 있겠다고.”
승관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그녀를 업는다. 실눈으로 승관의 등을 밀쳐 내는 걸로 보아 반 절은 제정신임에 틀림없었다. 지훈 쪽으로 부러 기울이는 그녀를 흔들어 정신을 깨우는 승관이다. 야 인마! 이 각박한 세상 속에서 정신 차려! 조금은 거칠게 흔들었으니 아마 골이 아플 것이다. 억지로 실려 나가는 듯한 그녀에게 인사를 보냈다. 승관은 내일 꼭 해장술을 사라며 그와 새끼손가락을 엮었다. 낑낑대며 멀어지는 승관의 뒤를 석민이 따른다. 대낮이었던 운동장에도 어느새 고요함이 찾아왔다.
- “고생했어.”
- “고생은 무슨. 노래 부르느라 네가 더 힘들었지.”
- “……화났어?”
- “내가? 전혀 아닌데?”
불 꺼진 주점 앞에 은은한 가로등이 빛을 내린다. 느낌이 별론데. 내 얼굴을 유심히 관찰하던 그의 의심이 커진다. 밥솥 뚜껑을 열 듯 속을 훤히 보는 그에게 거짓말이 통하는 건 만무했다. 한 뼘 정도 큰 가디건 소매를 펄럭이며 옹알이를 시작했다.
듀엣을 하면 한다고 말이라도 해주던지. 한 소절 부르는데 눈은 또 왜 그렇게 마주치는 건데. 오해할까 봐 말해두는 건데, 이건 질투가 아니라 그냥 여자 친구로서 말만 하는 거야. 화가 났다거나 질투 그런 거 진짜 아니야. 내가 그 정도로 속 좁은 애는 아니거든.
길고도 긴 문장을 숨도 쉬지 않고 끝냈다. 무표정으로 말을 듣고 있던 그가 갑자기 입으로 바람을 터트렸다. 큰 손으로 눈을 가리고 어깨까지 들썩인다. 이미 날 너무 잘 아는 그였다.
- “공연 구성 때문에 범주형이 부탁한 거야.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 “알아. 이미 알고 있었어.”
- “질투 같다.”
- “다시 말하는데, 나는 전혀 관심 없는 성격이라…….”
반박을 미처 끝내지도 못했다. 그가 조심히 가디건을 벗겨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조심히’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그만큼 행동에 긴장감이 묻어난 당사자 때문이었다. 어깨를 벗어난 가디건이 아슬하게 걸린다. 그는 질투에 정신 팔려 잊고 있던 앞치마를 손수 정리하며 목과 허리에 감긴 끈을 풀어냈다. 이게 뭐라고 숨을 참는지 모르겠다. 마른침만 꿀꺽 삼키는 내가 바보 같아 괜히 코끝을 훔쳤다.
- “이거…… 이거 나도 할 수 있어.”
- “그냥 보이길래 해주고 싶어서.”
- “……그럼 오늘만.”
- “그럼 내일도.”
옷깃을 여미는 손길이 다정하다. 다정함에 껌뻑 죽는 건 또 어떻게 알아서는. 기숙사로 바래다주는 길 내내 말이 많아진 그가 공연 에피소드를 털어놓으며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무대 직전에 마이크가 나오지 않아 ‘개’선배가 공연팀에게 다부지게 화를 냈던 거, 몰래 연습하느라 전화 못 받아서 미안했던 거, 원래는 솔로 곡으로 공연을 채우려고 했던 거.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 “앞에서 너 봤는데 진짜 떨렸어.”
……
- “그래서 너만 보고 했잖아.”
공연 끝날 때까지 계속 너만 보고 있었어. 고백인지 모를 그 말이 새벽에도 둥둥 떠다녔다. 잠결에도 그를 생각하다 불쑥 튀어나온 혼잣말에, 그다음 날 룸메는 연예인이라도 나왔냐며 내 꿈을 추궁했다.
나도 너만 봤어. 계속.
그날 꿈에 지훈이가 나왔다.
다정해 죽을 것만 같은 그가.
Epilogue.
진짜 레알 백 퍼 진심인데 등에 천혜향 한 열 박스 있는 것 같다. 기숙사로 향하는 언덕을 오르며 승관이 볼멘소리를 냈다. 석민은 뒤에서 승관을 도와 달밤 운동길에 올랐다. 승관의 등에 업힌 자그만한 여자애가 들릴 듯 말 듯 욕을 뱉는다. 석민이 멀찌감치 거리를 두기 시작했을 때, 승관은 이때다 싶어 더 힘차게 걸음을 내디뎠다.
- “누나인지 동갑인지 모르겠지만 맨정신에는 반말이 좋으니까 그냥 들어.”
- “…….”
- “아까 예쁘장한 애 있지, 이지훈이랑 손잡고 있던 애.”
- “…….”
- “웬만하면 건들지 마. 말은 섞지도 말고. 이건 이지훈한테도 관심 꺼 달라는 얘기야.”
기숙사 현관 앞에서 가뿐히 발을 디딘 그녀가 석민의 팔에 걸린 제 가방을 낚아채 어깨에 걸었다. 신경 끄고 갈 길이나 가지? 갈색 생머리를 거칠게 뒤로 넘기며 뾰족한 눈으로 승관을 훑어본다. 구겨진 셔츠를 시원하게 털고 석민의 어깨를 잡아끈 승관이 웃으며 작별 인사를 건넨다. 석민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 “여친 있는 애 건들지 말고 나 같은 잘생긴 솔로를 물어.”
- “뭐?”
- “아…… 근데 너는 좀 내 스타일이 아니긴 하다.”
나 꼬시고 싶으면 취한 연기는 마스터 하고 와라. 승관이 능글맞게 손을 흔든다. 이미 2차를 약속한 그들은 학교를 벗어나 사거리로 향했다. 새벽바람에 으스스 몸을 떨던 석민이 귓불을 만지며 묻는다. 여주랑 친해? 걔 일에 되게 민감하네. 화려한 네온사인의 간판을 훑던 승관이 주머니에 손을 꽂는다.
- “지켜 주는 건 태어날 때부터 그랬어.”
- “…….”
- “이건 평생 내 몫.”
소주, 맥주, 막걸리, 칵테일. 취향에 따라 골라주세요. 보도블록을 색깔별로 골라 밟으며 석민에게 장난을 건다.
승관의 마음이 심란해지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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