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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2일
나는 그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해왔다. 나의 어머니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른다.
오늘 그 아이를 봤을 때, 나는 내가 배우지 못했던 감정을 느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도서실.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책장과 책장 사이에 있는 빈 공간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모습.
나는 그 모습을 영원히 잊고 싶지 않았다.
내가 느꼈던 감정은 뭐였을까.
2011년 3월 7일
그 아이는 나랑 같은 반이었다.
조용히 책을 읽던 모습과는 달리, 밝은 웃음을 지으며 주변 친구들과 대화했다.
어제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2011년 3월 9일
그 아이를 도서실에서 다시 만났다.
평소에 보였던 모습과는 달리 차분하고 조용했다.
그가 읽고 있던 책은 내 일기장의 표지와 같았다. 그러니까 <어린 왕자>.
그 책을 좋아하냐고, 어린 왕자에 대해, 장미에 대해, 여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고 싶었다.
이 생각이 들었던 때부터 지금까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 아무래도 나, 이 아이랑 '우정'이라는 걸 나눠보고 싶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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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아이'가 그의 마지막 글에 쓰여진 사람이라는 것을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그는 '그 아이'에게 첫 눈에 반했지만, 그걸 깨닫지 못했으니까.
... 죽어가면서 깨달았던 걸까?
슬픔과, 왠지 모를 질투와, 그리고 호기심이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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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15일
내 소문은, 중학교때부터 이미 주변 학교에 쫙 깔려있었다.
그러니 아무도 내게 다가오지 않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그리고 나도 그게 힘들지 않았다. 슬프지도 않았고.
오히려 즐거웠다. 의미없는 이야기를 굳이 들을 필요가 없으니까.
하지만 혼자 먹는 것 만큼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이 없었고,
나를 '도와준답시고' 옆에 찾아와 앉는 애들을 맞이하는 것은 새학기의 통과의례와도 같았다.
'얘, 자기 혼자 밥 먹고 있는 거 안 싫어해.'
그렇지만 오늘은 달랐다.
억지로 끌려온 게 분명해보였던 그 아이는
내가 불쌍해서 옆에 앉아준다며 쫑알거리고 있던 친구의 입에다 쑤셔넣고는 말했다.
'니가 혼자 먹는 게 싫다고 해서 다른 사람까지 다 싫어하는 건 아냐.
불편하게 해서 미안해.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을 거야.'
그 아이는 그렇게 자기 친구 목덜미를 잡고는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나는 그 아이가 남긴 말을 계속해서 되뇌였다. 나를 이해해주는 첫 번째 사람이 남긴 첫 번째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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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의 감정은 어떨까.
그가 적어둔 '그 아이'의 말은 정성스럽게 꾹꾹 눌러쓰여져있었다.
펜으로 눌린 자국을 나도 모르게 손으로 만져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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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23일
지금까지 나의 MP3 플레이어는 시끄러운 노래들로 가득차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복잡한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또 다른 소음으로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단 한 곡뿐이다.
그 아이가 불렀던 노래.
교탁 앞에 서서는 나지막히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여전히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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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장에는 노래 가사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너의 말들을 웃어 넘기는 나의 마음을 너는 모르겠지
너의 모든 걸 좋아하지만 지금 나에겐 두려움이 앞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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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일어나."
".. 으음..."
"열두시 넘었거든? 일어나라고! 너 설마 밤새도록 읽은거야? 옷도 안 갈아입고?"
내 옆에 놓여있던 일기장을 덥석 가져가는 룸메를 보고서야 몸을 일으켰다.
"... 어."
그랬다.
멈출 수가 없었다고 하는 게 맞겠지.
"아주 절절한 사랑 납셨네. 괜히 읽어보라고 했나... 일어나서 얼른 밥먹어!"
룸메가 나가고, 나는 물끄러미 다시 내 옆에 놓인 일기장을 쳐다보았다.
그의 2011년은 온통 '그 아이'였다.
그러나, 단 한번도 먼저 말을 거는 일이 없었다. 그저 멀리서 지켜만 봤다는 내용뿐.
내가 과거로 가, 그에게 말을 걸어보라고 얘기해주고 싶은 심정이 들 정도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답답했다.
그가 왜 말을 걸지 못하는지 알았다.
평생을 이상한 사람 취급 받으면서 살았을 것이고,
'정상적'인 나에게도 새롭게 관계를 시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그에게는 어땠을까.
... 그리고 삶의 마지막까지, 그랬을 것이고.
복잡해지는 심경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 맞다."
어제 마지막 페이지를 채 읽지 못하고 잠들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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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9일
오늘은 첫 눈이 왔다.
사람들은 첫 눈을 마치 하늘이 내려준 선물인 것 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봤다.
사람들과 같은 감정으로 첫 눈을 볼 수 없었지만, ... 무엇이 내게 선물일지는 알고 있었다.
... 나는 나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다.
도서실안에는 새로 들여온 책이 가득 쌓여있었다. 책 너머로 그 아이가 보였다.
나는 그 아이에게, 이름을 물었다.
알고 있었지만... 나의 목소리로 물어보고 싶었고, 그 아이의 목소리로 듣고 싶었다.
"나는, 문태일이야. 너는?"
"... 정재현."
재현이가 나를 보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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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 어디가?"
"이거 돌려놓으려고. 다 읽었으니까."
"알았어. 너 그 다음 일기장이니 뭐니 하면서 옆집 사람 물건 또 가져오기만 해봐. 여기서 쫓아낼 줄 알아!"
거짓말이었다.
그 뒷 내용이, 너무나 궁금했다. 그의 용기가 그들의 관계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지 미치도록 궁금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헐레벌떡 뛰어나가 그의 집 앞에 섰다.
심호흡을 하고 조심스레 그의 집 문을 열었다.
"..."
그의 집 안에, 누군가 서있었다.
* 안녕하세요, 별빛이피면 입니다.
부족한 글을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글이 올라오는 주기를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짧은 공지(?)아닌 공지를 씁니다.
일주일정도를 간격으로 글이 올라올 예정이고, 사정에 따라 조금 일찍, 혹은 조금 늦게 올 수도 있어요.
그리고 다시 한번 언제나, 감사합니다!XD